율리우스 푸치크: 교수대의 비망록


교수대의 비망록 - 10점
율리우스 푸치크 지음, 김태경 옮김/여름언덕



율리우스 푸치크와의 대화 / 파블로 네루다 

푸치크 부인의 서문 

서 문 


제1장 검거 24시간 

제2장 죽음 앞에서 

제3장 267감방 

제4장 ‘400호실’ 

제5장 인간과 나무 인형(1) 

제6장 1942년의 계엄령 

제7장 인간과 나무 인형(2) 

제8장 역사의 마지막 증언 


부록 옥중 서간 

옮긴이의 글 율리우스 푸치크, 그리고 인간의 길

 

 



41 죽음이여, 그대가 찾아오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지금까지 나는 그대아 서로 알게 되는 것은 아주 멋 뒷날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유로운 인간으로서 살아가며, 많이 일하고, 많이 사랑하고, 많이 노래하고 그리고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리라고 생각했따. 겨우 제구실을 할 나이가 되었고 아직 많은 힘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럴 힘이 없다. 내 힘은 다해가고 있다.

나는 삶을 사랑했고 그 아름다움을 위해 투쟁했다. 사람들이여, 나는 당신들을 사랑한다. 그리고 당신들이 나의 사라에 응답해 줄때 행복했다. 당신들이 나를 이해하지 못했을 때 괴로웠다. 내가 상처를 입힌 사람은 누구라도 나를 용서해달라. 내가 기쁘게 해주었던 사람들은 나를 잊어달라. 슬픔이 내 이름에 뒤따르는 일이 결코 없도록. 이것이 아버지, 어머니, 누이들, 그리고 나의 구스티나, 동지들, 내가 사랑했고 나를 사랑한 모든 사람들에게 남기는 유언이다. 눈물이 슬픔의 찌꺼기를 씻어준다고 생각된다면 잠시 울어도 좋다. 그러나 나를 가련하다고 생각하지는 말아주기 바란다. 나는 기쁨을 위해 살고 기쁨을 위해 죽어가는 것이다.

 

42 메이데이! 이 아침에 우리들은 이미 일어나 시가 주변에서 깃발을 준비했다. 모스크바의 거리에는 벌써 메이데이 퍼레이드를 위해 선두 대열이 행진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수백만의 사람들이 자유를 위한 마지막 투쟁을 벌이고 있고 수천의 사람들이 이 투쟁에서 쓰러지고 있다. 나는 그 중의 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 한사람이라는 것, 마지막 투쟁에서 전사의 한 사람이라는 것이 아름답다.

그러나 죽음은 아름답지 않다. 숨이 막힌다. 숨을 쉴 수가 없다. 목에서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이런 상태는 동료 죄수들의 잠을 깨울 것이다. 물을 조금 마셔 목을 축인다면...

그러나 주전자의 물은 이미 모두 마셔버렸다. 불과 여섯 걸음 떨어진 감방 귀퉁이에 있는 수세식 변기 안에는 물이 가득하다. 거기까지 갈 힘이 아직 나에게 남아 있을까.

 

72 그 후 나는 거의 매일 '400호실'을 드나들게 되었다. 매일같이 새로운 사실을 상세히 알게 되었다. 그것은 비극적이고 무서웠다. 여기 한 남자가 있다. 일찍이 그는 기개가 있었고 스페인 전선에서 싸울 때에는 탄환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겼으며, 그 후 프랑스 강제수용소에서 가혹한 체험을 했을 때에도 기가 꺾이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게슈타포가 들고 있는 등나무 채찍을 보고 파랑헤 질려 자신을 구하고 싶은 욕심에서 배반한 것이다. 몇 차례 맞는 것만으로도 꺾여버리는 그의 용기는 얼마나 깊이가 없었던가. 가의 신념과 마찬가지로 용기도 이처럼 깊이가 없었던가. 같은 사상을 가진 동료들에게 둘러싸인 집단 속에 있을 때 그는 강했다. 그런데 이제 가혹하게 추궁해오는 적에게 둘러싸여 외톨이가 되자 그는 가지고 있는 힘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모든 것을 잃었다. 자신만을 생각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자신을 구하고 싶은 욕심에서 동료들을 희생시켰다. 결국 겁에 질려 배반했던 것이다.

 

82 이 시대에 살아남은 당신들에게 나는 한 가지 부탁하려 한다. 좋은 사람들은 물론, 나쁜 사람들까지도 잊지 말기를 바란다. 자신들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당신들을 위해서 싸우다 쓰러져간 사람들에 관한 증언을 모두 모아두기 바란다. 언젠가 오늘은 과거가 되며 위대한 시대와 역사를 창조했던 이름 없는 영웅들의 일을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름 없는 영웅들은 없었다는 사실을 알아두기 바란다. 그들 역시 제각기 이름이나 얼굴, 바람, 희망을 가진 인간이었다는 사실, 따라서 그들 가운데 최후의 사람이 가졌떤 고통 역시 이름을 남긴 최초의 사람이 맛보았떤 고통보다 작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두기 바란다. 그들 모두가 언제나 당신들이 알고 있는 사람, 피를 나눈 사람, 당신 자신들처럼 가까운 사람이었기를 갈망했다고 생각한다.

 

118 인생은 짧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그 인생의 하루하루가 빨리, 좀 더 빨리, 더 없이 빨리 지나가기를 무척 바란다. 당신의 수명을 시시각각 단축시키는 돌아오지 않는 시간, 붙잡고 싶은 시간이 여기에서는 아군이다. 얼마나 기묘한가!

내일은 어제가 되었다. 모레는 오늘이 되고 또 지나간다.

멜빵은 아직 맞은편 감방문 옆에 걸려있다.

 

147 "혹시...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은 것은 없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쓰고 싶은 것은? 물론 현재를 위해서가 아니라 미래를 위해서, 당신이 어떻게 해서 여기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누가 당신을 배신했는지,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했는지... 당신이 알고 있는 것이 당신과 함께 사라져버리지 않도록..."

글을 쓰고 싶지 않느냐고? 너무도 열망해 마지않는 내 바람을 그가 딱 알아맞췄다. 그는 곧 종이와 연필을 가지고 왔다. 나는 그것들을 어떤 검사를 받더라도 발각되지 않도록 정성들여 숨겼다.

그러나 나는 그것들에 감히 손을 댈 수 없었다.

너무나도 달콤한 이야기라서 믿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 이 암흑의 건물 속에서 검거된지 몇 주 후, 고함치거나 두들겨 패기만 하는 무리들과 같은 제복 속에서 내가 자취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일이 없도록 뒤에 나타날 사람들을 위해서 할 말을 전하고, 끝내 살아남은 사람들과 하다못해 잠깐 동안이라도 이야기할 수 있도록 나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쳐오는 사람, 친구를 찾아낼 수 있다니 너무나도 달콤한 이야기가 아닌가.

 

163 1943년 6월 9일

내 감방 앞에는 멜빵이 걸려 있다. 바로 내 허리띠였다. 그것은 이송을 의미한다. 밤사이에 나는 재판과 그 밖의 것을 위해 독일 본국으로 연행된다. 내 생애 한 조각에서 시간은 마지막 한 입을 탐하려 하고 있다. 판크라츠에서의 11일은 놀라울 정도로 빨리 지나갔다. 앞으로 며칠이나 남은 것일까? 그 나날들을 나는 어디에서 보내게 될까? 그리고 그것들은 어떤 날들일까?

그러나 그런 날들에 무엇을 쓸 기회는 이제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이것이 마지막 증언일 것이다. 아마 내가 최후의 살아 있는 증인이 될 그런 역사의 한 단편이다.

 

174 우리는 언제나 죽음을 계산에 넣고 있었다. 그리고 알고 있었다. 게슈타포의 손아귀에 떨어지면 마지막이라는 것을, 우리는 여기서도 그 사실에 근거를 두고 행동한 것이다.

내 연극도 끝나려 하고 있다. 연극의 대단원을 미리 쓸 수는 없다. 나로서는 그것이 어떨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미 연극이 아니다. 생활이다.

그리고 진실한 생활에는 관객이 없다.

종막이 오른다.

사람들이여, 나는 그대들을 사랑했다.

부디 늘 깨어 있기를!

1943년 6월 9일

율리우스 푸치크

 

203 인간은 하잘것없는 연약한 존재이기도 한 반면 눈 감기 전까지 자기의 의지로 무엇에도 굴하지 않고 나아가는 대단한 존재이기도 하다. 불타는 정열로 앞으로 나아가기도 하고 후회하고 실수하고 반성하며 또 나아가는 것. 역사 속에서 항상 자신을 객관화하고 인류로서의 타인에 대한 동질성을 확인하고 차이를 인정하는 것, 푸치크의 마지막 말처럼 "항상 깨어 있기를." 어떤 신념도 맹신하지 말고 '우군이기에 옳은 것이 아니라 옳기에 우군'임을 잊지 마시기를.

2012년 5월

김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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