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에르케고르: 죽음에 이르는 병


죽음에 이르는 병 - 10점
쇠얀 키에르케고어 지음, 임춘갑 옮김/치우



1. <죽음에 이르는 병은 절망이다

2. 절망이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것 

3. 이병 (절망)의 보편성 

4. 이병 (절망)의 형태들 

5. <절망은 죄다> 

6. 절망은 죄다 

7. 죄의 계속




서문

서론

제1부 죽음에 이르는 병은 절망이다

제1장 절망이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것

A. 절망은 정신에 있어서의 병, 자기에 있어서의 병으로 거기에는 세가지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절망하고 있으면서 자기를 가지고 있음을 의식하고 있지 못하는 경우(비본래적인 절망),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기를 욕망하지 않는 경우.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기를 욕망하는 경우

B. 절망의 가능성과 현실성

C.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제2장 이 병(절망)의 보편성


제3장 이 병(절망)의 여러 형태

A. 절망이 의식되어지고 있는지의 여부를 문제로 삼지 아니한 채 고찰된 경우의 절망. 따라서 여기서는 통합의 계기만을 문제로 삼는다. 

a. 유한성과 무한성의 규정하에서 고찰된 절망

α .무한성의 절망은 유한성의 결핍에 있다.

ß. 유한성의 절망은 무한성의 결핍에 있다.

b. 가능성과 필연성의 규정하에서 고찰된 절망 

α 가능성의 절망은 필연성의 결핍에 있다.

ß. 필연성의 절망은 가능성의 결핍에 있다.

B. 의식의 규정하에서 고찰된 절망

a. 자신이 절망이라고 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절망. 바꿔 말하면 자신이 자기를, 그것도 영원한 자기를 갖고 있음을 알지 못하고 있는 절망인 무지 

b. 자신이 절망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있는 절망. 따라서 여기서는 사람이 자기를 - 어떤 영원한 것을 - 갖고 있음을 의식하고 있으며, 그 경우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기를 욕구하지 않거나, 혹은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기를 욕구하는 것 중의 어느 하나이다.

α.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려고 욕구하지 않는 경우, 즉 취약함의 절망     

ß.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려고 욕구하는 절망 - 반항 


제2부 절망은 죄다

제1장 절망은 죄다

A. 자기의식의 여러 단계(신 앞에라는 규정)

부론: 죄의 정의에는 분노의 가능성도 내포되어 있다는 것 - 분노에 대한 일반적 주의 

B.  죄에 대한 소크라테스적 정의

C. 죄는 소극적인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것

A의 부론: 죄는 어떤 의미에 있어서 극히 진귀한 것이 아닐까? - 도덕


제 2장 죄의 계속

A. 자신의 죄에 대하여 절망하는 죄

B. 죄의 용서에 대하여 절망하는 죄 - 분노

C. 기독교를 적극적으로 폐기하고, 그것을 허위라고 설명하는 죄



서문

이 논술의 형식은 많은 사람에게 기이하다고 생각되리라. 이것은 교화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엄밀하고, 엄밀하게 학문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교화적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으리라. 후자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의가 없으나, 전자에 관해서 나는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다. 만약 이 논술이 너무 엄밀하여 교화적일 수 없다면, 그것은 나의 생각으로는 실패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 논술이 모든 사람에게 교화적일 수는 없으리라. 왜냐하면 이 논슬은 전제를 구비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 그것은 교화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기독교적으로 일컬으면, 즉 모든 것이 교화를 위하여 봉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결코 교화적이일 수 없는 학문성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비기독교적이다. 기독교적인 것의 모든 서술은 의사의 임상 강의와 비슷해야만 한다. 의학에 정통한 자만이 이 강의를 이해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환자의 병상 곁에서 행해져야 함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것과 같다. 인생에 대한  기독교적인 것의 관계는 - 인생으로부터 학문적으로 눈을 멀리하는 것과는 반대로 - 바꿔 말하면 기독교적인 것의 윤리적인 측면은 바로 교화적인 것이다.  

이 서술법은 비록 다른 점에서 매우 엄밀하다 하더라도, 질적으로는 그 냉담한 학문성과 전혀 다르다. 그와 같은 학문의 초연한 영웅주의는 기독적인 견해로서는 전혀 영웅주의가 아닐 뿐더러, 도리어 비인간적인 단순한 호기심의 일종에 불과하다. 

기독교적인 영웅주의 - 그것은 다분히 다주 드물게 나타나는 것이지만 - 란 인간이 감히 자기 자신이 되려고 하는 것, 즉 단독의 인간이 특정한 단독의 인간이 되려고 하는 것이다. 외로이 신 앞에서, 이 거대한 노력으로 또 이 거대한 책임을 걸머지려는 인간이 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순결한' 인간을 형편없는 바보로 취급하거나 세계사의 진전에 대하여 경탄의 흉내를 내는 것은, 결코 기독교적인 영웅주의가 아니다. 기독교적인 인식은, 그 형식에 다른 면에서 아무리 엄밀하더라도 모두 관심되어진 것이 아니고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 관심되어진 것이 교화적인 것이다. 

관심되어진 것이란 인생, 즉 인간적인 현실에 대한 관계이며 따라서 기독교적으로는 엄숙(Ernst)이라는 것이다. 냉담한 지식의 초연성은 -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 어떤 고차적인 엄숙을 뜻하지 않으며 -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 익살과 허영을 의미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엄숙함이라는 것은 또한 교화적인 것이다.

따라서 이 작은 저서는 어떤 의미로는 신학교의 1학년도 쓸수 있는 것이긴 하나, 다른 의미로는 대학 교수라도 쓸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난 이 논문이 보는 바와 같은 체계를 갖고 있음은 여러 가지로 심사숙고한 후에 취해진 것이며, 그것은 또한 심리학적으로도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세상에는 격식뿐인 스타일도 있으나 너무 격식에 얽매이면 결국 그것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 알수 없게 되며, 또한 거기에 너무 익숙하게 되면 곧 무의미한 것이 되기 쉽다. 그러나 이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군소리이긴 하나, 다만 한가지 덧붙이고 싶다. 표제가 말하고 있듯이, 절망은 이 저서 전체를 통하여 병으로서 이해되어지고 있지, 약으로 이해되어지고 있지 않음을 나는 특히 강조하고자 한다. 즉 절망은 그만큼 변증법적이다. 똑같이 기독교적 용어로서는, 죽음이라는 것도 최대의 정신적인 비참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러나 죽는 것 안에, 즉 서서히 죽어가는 것 안에 바로 구원이 존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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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정신이다. 정신이란 무엇인가? 정신이란 자기이다. 자기란 무엇인가? 자기란 자기 자신에 대한 하나의 관계이다. 바꿔말하면 관계가 자기 자신에게 관계한다고 하는 관계의 내부에 있는 자기를 뜻한다. 따라서 자기란, 관계를 뜻하지 않고, 관계가 그 자신에게 관계되는 것을 뜻한다. 인간은 무한성과 유한성의, 시간적인 것과 영원적인 것의, 자유와 필연의 종합이다. 요컨대 인간은 한 종합이다. 종합이란 양자 사이의 관계이다. 이 방법으로 고찰한다면, 인간은 아직 자기는 아니다. 양자 사이의 관계에 있ㅇ서는 관계 그 자체가 소극적인 통일로서의 제삼사를 뜻한다. 양자는 관계에 대해서, 또는 관계에 대한 관계 안에서 서로 관계하고 있다. 이와 같이 영혼의 규정에 있어서는 영혼과 육체와의 관계도 한 관계다. 그와 반대로 자기 자신에게 관계하게 되면, 이 관계는 적극적인 제삼자가 되며 이것이 바로 자기인 것이다.


73 지금 여기에 지하 일층, 이층으로 되어 있는 집 한 채가 있고 또 각 층의 거주자들 사이에는 신분의 차이가 있으며, 이 신분의 차이에 따라서 살 수 있도록 설비되어 있다고 하자. 그리고 인간이라는 것을 그런 집에 비교해 본다면, 대부분의 인간은 자기 집이면서도 일, 이층이 아니라 오히려 지하실에 살려고 하는 실로 슬프고도 우스꽝스러운 사실이 눈에 띄게 된다. 인간은 누구나 정신이어야 할 소질을 자고 만들어진 심신의 종합이다. 이것이 인간이라는 가옥의 구조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지하실에서 사는 것을, 즉 감성의 규정 안에서 사는 것을 즐기고 있다. 그것도 다만 지하실에서 즐겨 살려고 할 뿐만 아니라, 누군가가 그에게 이층이 비어 있어서 자유로이 사용할 수 있으니 이층으로 옮기는 것이 어떻겠냐, 또 자기 자신의 집에 살고 있으니까 하는 등의 이야기라도 듣게 되면 화를 낼 정도로 그는 지하실에 사는 것을 즐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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