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우스 B.잰슨: 현대 일본을 찾아서 1


현대 일본을 찾아서 1 - 10점
마리우스 B. 잰슨 지음, 김우영.강인황.허형주.이정 옮김/이산



1장 세키가하라 전투 

2장 도쿠가와 국가 

3장 대외관계 

4장 신분집단 

5장 도시화와 교통 

6장 서민문화의 발전 

7장 교육. 사상. 종교 

8장 변화. 저항. 개혁 

9장 개국 

10장 막부의 멸망 

11장 메이지 혁명 




65 도쿠가와 시대 혹은 에도 시대 일본 정치체제의 성격은 언제나 활발한 논의의 대상이 되어왔다. 18세기 일본의 학자들은 중국의 국가제도의 특징에 대해 조예가 깊었고, 일본의 그것이 중국과는 매우 다르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하고 었다. 중국에서 정치체제는 '봉건'에서 중앙집권화된 제국으로 발전했다. 일본인들은 이런 중국의 정치체제를 표현하는 한자단어를 이해하기 위해 봉건제(封建制)와, 군현(郡懸)을 기본으로 한 중앙집권제를 구별지었다. 도쿠가와 시대 후기에 서민을 대상으로 한 기본적인 지식 개요서조차 중국은 봉건제에서 출발해 군현제로 나아간 반면, 일본은 그 흐름이 반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7세기에 일본에 도입된 중국식 제도는 천황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 정부를 탄생시켰으나 그 이후 무사통치로 인해 봉건제가 수립되었다.

훗날 19세기에 서양의 역사서술에 익수해지자 일본사를 세계사에 끼워 맞추려는 시도가 발빠르게 이루어졌다. 그런 연유로 수많은 역사서술이 나왔는데, 일부는 도쿠가와 쇼군이 서구의 봉건군주와 비슷한 성격의 '왕권'을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의 동조자들은 의례를 거행할 뿐 정치권력은 없었던 천황의 지위를 교황의 그것과 비교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했다. 도쿠가와 시대에도 이런 견해의 전례를 찾아볼 수 있다. 에도를 여행했던 네덜란드 사절단은 대개 쇼군을 '황제'(emperor)라 불렀으며, 1853년 미국이 페리를 일본에 파견하기 위해 준비한 문서에서 쇼군을 '황제'라고 지칭하고 있다. 18세기 초 쇼균의 유관 아라이 하쿠세키는 쇼군을 일본 '국왕'이라고 부름으로써 이것을 제도화하려 했으나, 그의 시도는 그가 실각하면서 좌절되었다.

문제는 도쿠가와 시대의 일본이 평화가 정착되고 관료화되긴 했으나, 결코 실질적으로 통일되지 못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비록 쇼군의 호의에 의존하고 있긴 했지만, 다이묘의 영지는 자치의 주요 요소인 행정·군사·재정 조직을 갖추고 있었다. 에드윈 O.라이샤워의 '중앙집권적 봉권제'(centralized feudalism)라는 용어는 이런 모순을 요약하고, 그것이 갖는 문제점을 규정하고 있다. 일본은 완전히 중앙집권화된 적도 그렇다고 봉건화된 적도 없었다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의 역사학자들은 도쿠가와 체제를 중앙의 쇼군(막부)과 지방의 다이묘(번)이라는 이중 구조를 가진 '막번(幕繁)국가'라고 분석함으로써 본질적으로 라이샤워와 같은 입장을 취했다. 여기에 한 가지 특징을 더 덧붙이자면, 최근 공산주의적 권위주의의 붕괴는 외관상 폐쇄된 체제 내부에서 비정부적 공간이 확대될 수 있는 가능성에 관심을 갖게 만들었는데, 이것은 중앙의 쇼군 통치가 가졌던 한계가 '시민사회'라는 표제 하에 근세 일본을 고찰해 볼 수 있게 하는 충붕한 요인이 되는지를 검토하게 만들었다. 중앙과 주변부 양쪽 모두가 서로에게 가졌던 한계들로 인해 간극이 생겼고, 바로 그 간극 사이에서 참여적이면서 동시에 제한적인 정부를 위한 전제조건들이 근대의 변화를 예견했거나 또는 촉진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문제들을 염두에 두고 에도 체제를 고찰한다면 흥미로울테지만, 우선은 에도 체제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상당한 변용을 거쳤다는 점을 먼저 확실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이에야쓰가 대격동의 세키가하라 전투와 오사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시작된 도쿠가와 시대의 첫 세기에는 이에야쓰와 그의 후계자들이 그의 동료들 사이에서 가장 강력하고 걸출한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그들 주위에는 경쟁자들이 있었고, 그 동맹군의 지도자가 아무리 패권적 지위를 차지한 것처럼 보였다 하더라도 그들의 승리는 곧 동맹군의 승리였다. 이런 상황이었지만 초기 쇼군들은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경쟁자들을 고분고분하게 만들고, 상을 주고, 벌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한 세기가 지나서 대부분의 봉건영주들이 세대를 거듭하며 기반을 잡아가자 쇼군의 영향력은 다소 약해졌으며, 다이묘의 영지 보유권도 비교적 안정되었다. 정치제도는 더 강력한 중앙집권적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았던 반면 경제적 통합은 그런 방향으로 나아갔다. 평화, 상업, 원할한 교통·통신에 대한 요구는 점점 더 빈번하게 정치적 경계를 넘나드는 물결을 창조했다. 갈등이 수그러지자, 쇼군은 가신들을 소집해 규율을 잡아야 할 필요성을 점점 덜 느끼게 되었다.


76 다이묘 재배치도(1664). 막후 직할령·친번·후다이다이묘령은 비옥한 간토 평양허 건서아 평야 그리고 교통의 요지를 차지하고 있다. 반면 도자이다이묘령은 규모는 크지만, 주변부에 자리하고 있다. 이런 형세는 이후 2세기 동안 지속된다.





* 책을 읽다가 위키에서 찾아본 단어 

세이이타이쇼군(征夷大將軍, 일본어: 征夷大将軍 せいいたいしょうぐん)은 일본의 영외관 장군직 중 하나이다. 줄여서 쇼군(将軍), 구보(公方), 다이주쇼군(大樹将軍), 다이주, 다이주 공, 고쇼(御所) 등으로 불렸다. 나라 시대, 헤이안 시대에는 동쪽 지역에 에미시 정벌을 위해 파견된 장군의 명칭이었는데, 가마쿠라 시대에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가 일본 천황으로부터 이 직책을 임명받으면서 막부의 수장이자 동국 무사단의 동량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고, 이 직책은 무가 동량 가문이 대를 이어 계승하는 경향이 생겼다. 형식적으로는 일본 천황에 의해 임명된 신하이지만, 이미 조정을 통제하고 무가를 거느리는 일본의 실질적 통치자를 의미하는 직책이 되었으며, 외국에서는 세이이타이쇼군을 국왕으로 간주하는 것이 통상적이었다. 에도 시대까지 최고 권력자의 직책으로 존재하였으나, 메이지 유신 이후 폐지되었다.


에도(일본어: 江戸, えど)는 도쿄의 옛 이름으로, 에도 성을 중심으로 한 지역을 말한다. 에도 막부가 일본을 지배하던 1603년부터 1868년까지 막부의 중심지였다. 이 기간에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이자 우키요의 개념으로 대표되는 활기찬 도시 문화의 장소가 되었다.


(일본어: 藩, はん)은, 일본의 역사에서, 제후가 다스리는 영지를 가리키는 말로, 일본에서는 1만석 이상의 소출을 내는 영토를 보유한 봉건영주인 다이묘가 지배한 영역과 그 지배기구를 가리키는 역사용어로 사용된다.


막부(幕府)는 중국에서 왕을 대신하는 지휘관의 편 진지를 가리키는 말이며, 이 뜻에서 대장군의 진영, 나아가 무관의 임시 정청으로 그 의미가 파생되었다. 일본에서는 바쿠후라고 하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세이이타이쇼군(征夷大将軍, 정이대장군(오랑캐를 정벌하는 대장군), 나중에 쇼군(장군))이 되면서 세이이타이쇼군의 원정시의 본진을 가리키던 말이던 것이, 전시의 사령부가 전후에도 정치적 기관으로 존재하게 되면서 실질적으로 무가 정권의 정청을 말하게 되었다. 이후 역사상 일본에서는 가마쿠라 막부, 무로마치 막부, 에도 막부가 존재해 왔다. 하지만 사실 '막부'라는 말이 무가 정권 자체를 가리키게 된 것은 에도 시대 중기 이후의 일로, 유학자들이 창안한 용례이다.


조카마치(일본어: 城下町)는 일본에서 센고쿠 시대 이래로 영주의 거점인 성을 중심으로 형성된 도시로, 성의 방위시설이자 행정도시, 상업도시의 역할을 하였다. '성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지만, 에도 시대 이후에는 성이 아닌 행정시설인 진야를 중심으로 생겨나기도 하였다.


다이묘(일본어: 大名, だいみょう대명[*])는 10세기에서 19세기에 걸쳐 일본 각 지방의 영토를 가지고 권력을 누렸던 영주를 말한다. 에도 시대에는 주로 1만 석 이상의 영지를 막부로부터 부여받은 무사를 지칭하였다.


고쿠진(일본어: 国人, こくじん)은 일본 가마쿠라 시대의 지토 층에서 시작하여, 난보쿠초 시대에서 무로마치 시대에 걸쳐서 각 구니의 개발을 추진한 무사층을 일컫는 말이다. 아울러 부를 경우에는 구니슈(国衆), 고쿠진슈(国人衆)라고 한다.


세키가하라 전투(일본어: 関ヶ原の戦い 세키가하라노 다타카이[*])는 1600년 음력 9월 15일(10월 21일) 일본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에 일어난 유명한 전투이다.전투의 본질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그 권좌를 두고 벌어진 도쿠가와 이에야스파와 이시다 미쓰나리파의 다툼이었고, 일본 전국의 다이묘가 두 세력으로 나뉘어 싸운 결과 도쿠가와 측이 승리했다. 대규모 전투였음에도 단 하루 만에 승패가 결정되어 군사적으로는 큰 의미가 없지만, 전투로 이어지는 과정과 전후 처리 과정과 연관된 정치적 의미는 매우 크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사실상 확고부동한 패자(覇者)의 자리에 올라 에도 막부를 세우는 발판을 다지게 되었다. 또한 이 전투를 끝으로 일본의 센고쿠 시대가 사실상 막을 내렸다고 할 수 있다.


이에모토(いえもと,家元)는 기예(技藝)의 세계에서, 한 유파의 정통(正統)을 잇는 집. 또는 그 주인. 종가(宗家).


고쿠다카(こくだか, 石高)는 일본에서 고쿠(石,こ)라는 단위를 이용하여 토지의 생산성을 나타낸 수치를 말한다. 이에 의거하여 토지에 대한 과세가 이루어졌고, 여기에서 파생되어 다이묘와 하타모토의 영지 면적을 나타내는 말이 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과 에도 막부의 시기에 토지 조사가 이루어지면서, 각 토지와 전답, 가옥 부지의 생산성을 조사하기 위해 그 가치가 쌀로 몇 석인지 수량화하여 나타내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고쿠다카이다. 이후 무사가 영지에서 받게 되는 수입이나 봉록도 이 고쿠다카를 이용하여 그 양을 나타내었다. 1고쿠(石,こ)는 어른 한 사람이 1년 동안 먹을 수 있는 쌀의 양에 상당하며, 따라서 고쿠다카에 따라 영주가 동원하는 군사력에 대한 추산도 이루어질 수 있었다. 고쿠다카에 따라 영주가 동원하는 군사력은 시대나 농사 방법에 따라 다르지만 통상 100석당 1~2명의 병력을 차출할 수 있다고 추산된다. 이러한 표현은 메이지 시대에 지조개정이 이루어지면서 쓰이지 않게 되었다.


하타모토(はたもと,旗本)는 일본 에도 시대의 쇼군 가문 직속의 가신단 중에서 고쿠다카(石高)가 1만 석 미만이면서, 의식 등에서 쇼군이 출석하였을 때 참석하여 알현이 가능한 가격(家格)을 가진 이들을 가리킨다. 원래는 주군의 군기를 지키는 무사단을 가리키는 말이다.


조닌(町人)은 일본 에도 시대(도쿠가와 시대)의 경제 번영을 토대로 17세기에 등장하여 빠르게 성장한 사회 계층이다. 도시에 거주했으며 대부분 상인과 수공업자들이었다. 무사로부터 신분적 차별을 받는 아래 계층이었으나 부를 축적하면서 그 위신을 높이고 일본의 사회, 경제, 문화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막부의 봉건체제가 무너지면서 차츰 쇠퇴했다.   


로닌(浪人 / 牢人, ろうにん, 낭인)은 일본 역사에서 유랑하는 사람 또는 무사를 가리키는 말이다.

로닌(浪人)은 고대 일본에서는 호적에 등록된 본적지에서 떠나 타국을 유랑하는 사람을 의미하여 후로(浮浪)라고 불리기도 했다. 신분과는 관계 없이 어떤 사람이라도 될 수 있었다.

이에 대하여 로닌(牢人)은 주군의 가문을 잃거나 떠나게 되어 봉록을 잃게 된 사람을 말한다. 로시(浪士, 낭사)라고 부르기도 하며, 일본 역사상 무로마치 시대부터 에도 시대에 걸쳐 주종 관계를 갖는 부시(武士)와 사무라이(侍)에만 해당하는 좁은 의미의 신분어였다. 에도 시대가 되어 전란이 잦아들고 가이에키 등으로 다이묘들의 실각이 잇따르자 각지를 유랑하는 로닌이 급증하였다. 이 때문에 에도 시대 중기부터는 점차 유랑하는 로닌(牢人)도 로닌(浪人)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가부키(歌舞伎,かぶき)는 일본의 전통 공연 예술이다. 모든 출연자는 남성이며, 노(能)와 달리 여성역을 맡은 배우는 여성적 발성을 한다. 전용 극장인 가부키자(歌舞伎座)에서 공연된다

가부키란 말은 '머리를 기울이며 맘대로 춤을 추기'란 의미를 가진 '가부쿠'(カブク, 傾く)란 단어에서 유래되었다. 이상한 동작이나 복장을 '가부키'라고 하고, 그런 동작및 복장을 하는 인물을 '가부키모노'라고 불렀다. 歌舞伎란 단어는 후대에 한자를 갖다 붙인 것이다.


잇키(一揆, いっき)는 일본에서 이치미도신(一味同心, いちみどうしん)이라고 하는 일체화된 연대정신을 공유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집단과 그 집단의 무장봉기를 말한다. 또한, 공동 목적의 달성을 위해 개별적 존재로서의 사회적 관계를 지양하고, 일체화를 위한 계약·맹세를 통해 공동체로서 움직인다. 이 공동체는 지역적·계층적·계급적으로 결성되며, 현실이나 일상에서 통상적인 수단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결성된 초현실적·비일상적 조직이다. 잇키는 특정한 역사적 상황이 아니고서는 항상적인 조직체였던 것은 아니며, 현대적인 의미로는 조직체보다는 운동 내지 운동체에 가까운 성격을 가지고 있다.


난학(蘭學, らんがく, 란가쿠)은 에도 시대 네덜란드를 통해서 들어온 유럽의 학문, 기술, 문화 등을 통칭해서 이르는 말이다. 쇄국 이전에는 나카사키를 통해 유입된 서양학문은 남만학(南蠻學) 또는 만학(蠻學)이라고 하며, 막부 말기 네덜란드 이외 서양 국가의 학문을 양학(洋學)이라 하여 난학과 구별하기도 하나, 넓은 의미에서 난학,만학,양학 모두를 통틀어서 양학이라고 하기도 한다.


신사(神社, じんじゃ, 진자)는 일본의 신토신앙에 근거해 만들어진 종교 시설 이다. 전쟁 전에는 이른바 '국가 신토'를 단지 신사라고 불렀다.

신사의 기원은 이와쿠라(磐座)나 신이 거주하는 장소인, 금족지(禁足地, 예를 들어 '신이 머무는 산') 등에서 행해진 제사 시에 임시로 세운 히모로기(神籬)같은 제단이며, 원래부터 설치되어 있던 것은 아니었다. 원형은 오키나와 현의 우타키(御嶽)같은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도 고대부터 존속된 신사에는 신사의 본체가 있고 본전(本殿)이 없는 신사도 있으며, 이와쿠라나 금족지의 산과 섬에는 가장 가까운 곳에 배전(拜殿)만 있는 곳도 있다(참고:오오미야 신사, 이소노카미 신궁, 무나카타 대사). 신사에 신전이 설치되게 되는 과정에는 불교사원의 영향도 있다고 여겨진다. 신사에는 언제나 신이 있다고 여겨지게 된 것은 신전이 지어지고 난 뒤라고 한다.


마쓰리(祭り まつり)는 말은 '제사를 지내다'의 명사형으로, 원래는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을 말하며 그 의식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이 의미로의 '마쓰리'는 현재에도 지진제,기원제의 형대로 남아있다.

일본 신화에 나오는 아마노이와토(天岩戸 あまのいわと)의 앞에서 하는 제사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초기의 마쓰리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비밀스러운 장소에서 이뤄지는 경우도 있었다. 오늘날에도 중심이 되는 의식을 한정된 사람들 끼리만 모여서 하는 마쓰리도 일부 남아있다.

현재 일반적인 의미로써의 마쓰리는 신사나 절을 주체 혹은 무대로 하는 경우가 많다. 의식에서는 풍작, 풍어, 사업번창, 무사고, 무병장수, 가내안전 등을 빈다. 또는 이것들의 성취를 감사하며 지내는 것도 있고, 다섯 가지 명절등 연중행사가 발전되기를 기원하기 위한 것이나 위인을 기리기 위해서 행하는 것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이런 목적에 따라서 개최 시기나 행사의 내용이 아주 다양하고 같은 목적, 같은 신에 대한 마쓰리이더라도 취향이나 전통에 따라, 지방이나 지역에 따라 크게 차이 나는 경우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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