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커닝엄: 비잔틴 제국의 신앙


비잔틴 제국의 신앙 - 10점
메리 커닝엄 지음, 이종인 옮김/예경


1장 그리스도교를 신봉한 로마제국(330-843) 

2장 동서교회의 분리(843-1453) 

3장 교회와 국가 

4장 공동체를 위한 봉사 

5장 은둔자의 이상 

6장 성스러운 장소, 성스러운 사람들 

7장 지상에 세운 하느님의 왕국 

8장 교회와 7차례의 일반 공의회 

9장 신앙과 세계관 

10장 신앙의 표현으로서의 예술 

11장 유산 


참고자료 

연대기/ 참고문헌/ 찾아보기/ 그림 출처 


옮긴이의 말





머리말

팔레스타인에서 처음으로 연약한 뿌리를 내렸던 그리스도교는 서서히 지경을 넓히더니 마침내 로마제국에 이르러서는 제국의 전 영토 및 그 너머에서 지배적인 영향력을 가진 종교로 성장했다. 당시의 초대교회는 단일한 공동체를 이루어 구성원 전체가 하나의 신조, 하나의 성사뿐만 아니라 모든 주교들을 포함하는 하나의 조직망을 공유했다. 초기의 통일된 교회를 바탕으로 그리스도교 전통의 양대 주류인 로마 가톨릭 교회와 동장정교회가 생겨났다. 가톨릭 교회는 주로 서유럽에 터를 잡았으며 정교회는 오늘날 '비잔틴'이라고 부르는 제국엥서 힘을 키웠다. 비잔틴 제국의 수도는 콘스탄티노플이었으며 지금의 터기 이스탄불이다. 이러한 그리스도교의 두 갈래가 교회사의 천 년 동안은 공식적으로 결합되어 있었음을 깊이 명심할 필요가 있다.

교회가 동방 및 서방교회로 분리된 것은 1054년의 일이다. 하지만 훨씬 전부터 라틴어를 쓰는 그리스도교인들과 그리스어를 쓰는 그리스도교인들 사이에 분열이 싹트고 있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교회분열 이후에도 그리스도교 전체에는 통일성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동서교회가 내세우는 교리, 예배방식, 십자가와 성서 같은 경배의 대상들은 본질적으로 동일했다. 물론 음악적 전승, 계율, 교리의 체계화 등에서 사소한 차이가 있기는 했다. 가령 동방교회는 성상숭배에 열심이었던 반면에 서방교회는 대성당과 수도원을 장식하는 종교예술은 후원했으나 성상숭배를 낯설어 했다. 두교회 사이에 갈등이 불거진 가장 큰 원인은 권위에 관한 문제였다. 로미교황들은 점차 자신들이 그리스도교 교회의 최고 권위를 대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편 동방교회의 주교들과 총대주교들은 5대 교구제를 신봉했다. 이는 로마, 콘스탄티노플, 알렉사드리아, 안티오크, 예루살렘의 5대 교구로 이루어진 고대의 교회정치체제를 이르는 것이다. 동방의 주교들은 교황이 주교들 중엥서 가장 으뜸임을 인정했지만 그에게 교회의 전권을 넘기고 싶어 하지는 않았다. 

이 책은 330년에서 1453년까지의 비잔틴 교회(동방정교회)의 역사를 다룬다. 비잔틴 시대를 구분하는 연대에 대하여는 논의가 분분하다. 특히 동로마제국의 시점에 관해서는 어러 설이 난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콘스탄티누스가 소아시아의 콘스탄티노플에 신수도를 건립한 것을 신생 그리스도교 제국의 출발로 삼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1453년 이 도시가 오스만 투르크족에 함락됨으로써 실제로 비잔틴 제국의 오래되고 변화무쌍했던 역사는 막을 내렸다. 본서의 제목은 <비잔틴 제국의 신악>은 어떻게 보면 정확한 것이 아니다. 비잔틴에는 각 시대에 따라 그리스도교 이외의 여러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살았기 때문이다. 이들 가운데에는 유대교인들, 사마리아 지방의 독특한 시앙을 지녔던 사마리아인들, 이른바 '정통 신앙'에서 벗어난 '이단들', 제국 초기의 이교도들까지 있었다. 4세기 말에 이르자 정교회가 제국의 지배적인 신앙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시민들 대부분의 일상생활과 태도를 형성하는데 그치지 않고, 정부와 공식적인 교회에 속속들이 스며들었다. 뒤의 몇몇 장들에서 비잔틴 제국이 이룩한  그리스도교 문명의 여러 측면들을, 교회와 국가의 밀접한 관계, 교조와 세계관의 연관 등을 중심으로 살펴볼 것이다.

전통적으로 비잔틴 제국은 보수적이고 억압적인 사회로 생각되어 왔다. 제국의 성직자들, 정치가들은 하나같이 그리스도교의 틀 안에서 과거의 고전시대를 지향하는 데에 열중했으며 고전 시대의 사회가 성취한 문화, 법률, 가치관 등을 보존하려고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18세기의 에드워드 기번을 위시하여 역사학자들은 이 사회가 전통주의에 빠져 있었을 뿐만 아니라 부패한 데다 창조정신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실로 이런 견해가 오류임을 여러 측면에서 알수 있다. 문헌들과 유물 및 유적을 자세히 살펴보면 비잔틴 제국에서는 1,100여 년이 흐르는 동안 창조적인 발상과 종교 사상들이 번성하고 발전했다. 또한 이런 사상들 대부분에서 제국의 뿌리 깊은 그리스도교적 관점, 다시 말하자면 우주만물의 창조와 인간의 역사에 신이 내재하고 개입한다는 당대인들의 생각을 감지할 수 있다. 정교회는 그리스, 로마의 고전문명으로부터 수단과 사상을 빌어 신앙을 한결같이 혁신적이고 성공적으로 표현해 냈다.

게다가 동로마제국의 주민들은 시기를 막론하고 다수의 여러 민족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콘스탄티노플과 여타의 몇몇 도시들의 지배계층을 차지했던 엘리트들은 전체 인구 중에서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아마도 비잔틴인들의 90퍼센트는 시골에 사는 농부들로 대부분 문맹자였을 것이다. 제국의 배성들 모두가 그리스어를 쓰지도 않았다. 단지 몇 개의 언어로만 예를 들어도 변방에는 아르메니아어, 슬라브어, 시리아어, 아라비아어 등을 사용하는 공동체가 있었다. 따라서 이책에서 서술하고자 하는 비잔틴 시대와 문화는 그리스도교 역사상 도저히 명확하게 규정할 수 없는 시기이다. 그러나 잔존하는 문헌들과 유물들에 근거하여 볼 때 비잔틴의 정통신앙이 신자들에게 통일되고 포괄적인 세계관을 안겨준 것 또한 명백한 사실이다. 이 세계관의 바탕을 이룬 것은 삼위일체의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었다. 그리하여 성서에 들어있는 계시와 수차례의 일반 공의회를 통하여 삼위일체의 하느님에 대한 정의가 내려졌다. 이와 같은 기본적인 교리 말고도 비잔틴인들의 문화적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에 이바지한 것들이 있었다. 교회에 참석하고 금식을 행하여 축제일을 기념하는 등의 종교적 행위의 실천뿐만 아니라 성모 마리아와 성인들과 성상 내지 성 유물 따위의 성스런 상징물들을 숭배하는 의식이 그것이다.






306-337 콘스탄티누스 1세(대제), 324년부터 단독 황제.

312 콘스타티누스의 환상과 이탈리아 밀리우스 다리의 승전.

325 니케아 종교회의(1차 일반 공의회). 이 회외는 아리우스 교설을 공식적으로 부정하고 성자는 본질상 성부와 동일하다고 결의했다.

330 콘스탄티노플이 '새로운 로마'로 등장.

3327 콘스탄티누스 1세의 세례와 죽음.

381 2차 일반 공의회: 콘스탄티노플 종교회의. 이 회의에서 아리우스 교설을 이단으로 다시 부정하고 성령의 신성을 확인했다. 콘스탄티노플이 로마 다음으로 중요한 교구로 선포됨.

431 3차 일반 공의회: 에페소스 종교회의. 성모 마리아에 대하여 테오토코스(신의 어머니)라는 칭호를 승인함.

450-451 4차 일반 공의회: 칼케돈 종교회의. 이 회의에서 그리스도의 '두 개의 본성'을 확인함. 일부 주교들, 특히 동부 지역의 총대주교구 출신의 주교들은 이 교리에 반대함. 이에 따라 교회 내의 큰 분열을 초래됨.

527-565 비잔틴 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의 통치.

537 콘스탄티노플의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의 헌당.

553 5차 일반 공의회가 콘스탄티노플에서 개최됨. 단성론파 교회들을 화해시키려고 노력함.

614 페르시아가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트(구로마 영토)를 정복함. 성 십자가를 페르시아의 수도 크테스폰으로 가져감.

622 마호메트가 메카를 떠나 메디나로 감(히즈라)

622-627 비잔틴의 헤라클레이오스 황제가 페르시아에 대하여 전쟁을 벌임.

626 페르시아와 아바르가 연합하여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하여 공격했으나 실패함. 비잔틴 사람들은 이 승리를 신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 덕으로 신이 내려주었다고 생각했음.

626-628 비잔틴이 페르시아를 물리침.

630 성 십자가를 페르시아로부터 예루살렘으로 환호하는 가운데 회수해 옴.

634-646 이슬람인들이 시리아, 팔레스타인,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등을 정복함.

638 헤라클레이오스 황제와 세르기오 일반 총대주교가 단성론파와 칼게톤파를 화해시키기 위한 칙령 '엑테시스'를 공표함.

655 교황 마르티누스 1세와 비잔티의 신학자 함회승 막시무스가 '단의론'(그리스도의 '단일 의지')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반역의 죄를 쓰고 추방되었으며 얼마후 둘 다 사망함.

680-681 콘스탄티노플에서 열린 6차 일반 공의회에서 단의론을 공식으로 부정함.

717-718 이슬람인들이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함. 전 장군이었던 레오 3세가 권력을 장악함.

730 총대주교 게르마노스가 사임함. 이것은 이른바 '성상파괴운동'이라는 성상을 반대하는 정책을 황제가 시행했기 때문이었음.

741-775 성상파괴자인 콘스탄티누스 5세의 통치. 성상옹호자들에 대하여 좀더 적극적인 박해가 시작됨. 수도사들과 수도원들이 특히 박해를 받음.

754 성상파괴주의자들이 주축이 된 히에레이아(Hiereia) 종교회의에서 성상파괴운동을 공식적으로 포고함.

787 니케아에서 열린 7차 일반 공의회는 성상파괴운동을 종결시킴. 정교회의 예배에서 성상의 사용과 숭배가 허용됨.

800 교황이 사를마뉴를 서방의 로마황제로 성 베드로 성당에서 대관함. 비잔틴 사람들을 그를 로마황제로 인정하지 않음.

811-813 불가리아, 발칸에서 비잔틴에 승리함. 니케포로스 황제가 패배하여 전사함.

815 레오 5세가 성상파괴운동을 재개함.

843 정통신앙의 승리. 성상파괴운동을 두 번재로 종결시킴. 성상들을 교회로 다시 들여옴. 정통 그리스도교의 교리들을 열거한 문서 '시노다콘'을 공식적으로 공표함.

863 비잔틴의 선교사 키릴로스와 메토디오스 형제가 모라비아인들을 정통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키는 일에 착수함. 그들은 복음서와 다른 종교서적을 슬라브어로 번역하여 가지고 갔음.

864 불가리아의 칸(군주) 보리스가 세례를 받음.

900년대 초기 시메온 차르의 통치 아래 불가리아가 번창함.

922 불가리아와 평화조약을 체결.

954 키예프(루스) 공국의 여군주 올가가 세례를 받음.

963 이후 비잔틴이 동부 지역을 원정함. 아라비아인들로부터 영토를 수복함.

988 러시아의 군주 블라디미르가 정통 그리스도교로 개종함. 그는 러시아 전역에 새 종교를 들여옴.

990-1019 바실리우스 2세('불가리아인 학살자')가 불가리아의 위협을 물리침. 불가리아는 다시 비잔틴 제국으로 편임됨. 다뉴브 강을 새 경계로 삼음.

1015 러시아의 군주들 보리스와 글래프가 그들의 형인 스비아토폴크에게 죽음을 당함. 러시아 교회는 형의 공격에 대한 이들의 비폭력적인 대응을 높이 사서 '수난을 받은 자들'로 추앙함.

1054 교황이 지도하는 서방교회와 동방교회(콘스탄티노플, 알렉사드리아, 안티오크, 예루살렘 등의 총대주교들의 지도를 받음) 사이에 공식적으로 대분열이 일어남.

1071 중앙 아나톨리아를 셀주크 투르크인들이 지배하기 시작함. 노르만족이 남부 이탈리아로 이주함.

1081-1085 노르만족이 발칸 반도의 서부 지역 속주들을 침략함.

1095 1차 십자군 원정 시작.

1098-1099 예루살렘을 탈환함. 라틴 제후국들과 예루살렘 왕국이 팔레스타인과 시리아에 건립됨.

1146-1148 2차 십자군 원정.

1186 불가리아의 반역. 비잔틴 군대를 패퇴시킨 후 2차 불가리아 제국을 건립.

1187 3차 십자군 원정 종료. 아라비아인들이 살라딘의 통치 아래 예루살렘을 다시 빼앗음.

1203-1204 4차 십자군 원정. 라틴인들이 콘스탄티노플을 약탈함.

1204-1261 라틴 제국이 전 비잔틴의 영토 대부분을 지배함. 독립적인 그리스 국가들은 니케아, 에피로스, 트레비존드에 존속했음.

1261 라틴인들로부터 콘스탄티노플을 탈환함. 미카엘 8세가 황제가 되었지만 대립 황제의 지지자들로부터 반대를 받았음. 권력투쟁으로 말미암아 초래된 교회 내부의 분열은 전직 총대주교인 아르세니오스가 죽은 뒤에야 치유되었음.

1274 2차 리옹 종교회의. 동서교회의 재결합을 합의. 그러나 비잔틴 정교회 그리스도교인들은 이 합의를 반대함.

1280-1337 오스만 투르크인들이 소아시아에서 비잔틴의 영토로 남아 있던 지역을 점령.

1341 콘스탄티노플에서 열린 종교회의에서 전통주의자인 칼라브리아의 바를람 수도사가 헤시카즘주의자인 성 그레고리우스 팔라마스의 교설에 대한 이견을 검토함. 팔라마스의 교리가 지지를 받음.

1331-13355 세르비아 제국이 슈테판두산 황제의 통치 아래에서 절정기를 누림.

1347 흑사병이 콘스탄티노플에 번짐. 지방의 종교회의가 1341년 종교회의 결정사항들을 재확인함.

1365 오스만 투르크인들이 아드리아노플을 점령하여 수도로 삼음.

1389 코소보 전투. 세르비아 제국의 종말과 오스만 투르크족의 발칸 반도 진출.

1393 불가리아 제국의 종말. 투르크인들이 발칸 반도 북부 지역으로 깊숙히 진출한 결과임.

1397-1402 오스만 술탄 바에지드 1시가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함. 투르크계 몽골의 지도자인 티무르가 앙카라 전투(1402)에서 투르크인들에게 승리하자 바에지드는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1430 오스만 투르크가 데살로니카를 점령함.

1438-1439 비잔틴 황제 요한 8세가 참석한 페라라/피렌체 종교회의에서 투르크인들에 대항하기 위한 군사원조를 조건으로 하여 동서교회의 재결합을 다시 의결함.

1444 헝가리와 폴라드의 블라디슬라프가 지휘하는 헝가리와 서방의 십자군이 바르나 전투에서 패배함.

1451 메메드 2세가 오스만 투르크의 술탄이 됨.

1453 콘스탄티노플이 오스판 투르크의 메메드 2세에게 함락됨. 마지막 비잔틴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는 전투에서 죽음. 오스만 투르크는 새로운 총대주교에 게나디오스 2세를 임명하고 그리스 정교회의 존속을 허용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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