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 인문학 | 03 플라톤의 향연


향연 - 10점
플라톤 지음, 강철웅 옮김/이제이북스


2012년 CBS 라디오에서 진행하였던 강유원 선생님의 '라디오 인문학' 강의를 녹음파일을 듣고 정리한다.
팟캐스트 주소: https://itunes.apple.com/kr/podcast/jumal-nyuseusyo-bagmyeong/id576954501




2013-02-02 14회 플라톤의 "향연" 1

<향연>이 앞서 읽은 책들과 공통점이라고 한다면 드라마라는 점. 흔히 대화편이라 하는데 대화형식으로 쓰여졌기 때문.

당시의 비극작품과 똑같은 형식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대화형식을 가지고 있다. 그럼 점에서는 드라마로 볼 수 있고, 대화 중간에 설명들이 나오는데 오이디푸스 왕처럼 설명을 유심히 보면 대화가 펼쳐지는 맥락을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면 <파이드로스>를 보면 강가에서 얘기하는 장면, 갑자기 왜 강가로 가는가, 또 <국가>에서 피레우스 항구로 내려갔다 이런 얘기부터 시작하는 점들, 무대 장면 설정부터 나온다. 드라마로 봐야 텍스트가 가지고 있는 뜻을 잡아챌 수 있다.

요즘 일반 사람들이 이해할 때 '철학책' 그러면 머릿속에 생각하는 바가 있는데 그런 형식에 분류되지는 않는다. 그냥 우리 생각의 깊이를 더해주는 책, 사색의 깊이를 더해주는 책으로 이해하는 게 좋다. 특정 영역으로 분류하는 게 어려운 책이다.


<향연>을 읽기로 한 까닭이 이유.

플라톤과 소포클레스는 동시대 사람. 소로클레스가 서기전 497-406년, 그가 노년에 들어섰을 무렵이라고 할 수 있는 427년에 플라톤이 태어나서 347년에 죽었고, 이 두사람 중간에 희랍의 내전에 관한 역사책인 펠로폰네소스 전쟁사가 있다.

<오이디푸스왕>,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향연> 이 셋을 한번에 묶어서 읽어야 한다. 투키디네스는 서기전 465-400년.

오늘날의 분류로 굳이 보자면 소포클레스의 문학, 투키디데스의 역사, 플라톤의 철학, 문사철, 인문학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문사철의 책을 쓴 셈. 원조가 된다고 할 수 있고, 모두 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얼킨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사람을 동시에 읽어야 당대 희랍세계에 대한 총체적 이해에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이 첫째 이유이다. 그들이 살아온 시대를 함께 읽어야 한다.

둘째 이유는 플라톤이 이 대화편을 일종의 드라마로 썼다고 한다면 재미있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시인을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거치게 일반화하여 플라톤이 문학을 싫어했다는 경향이 있는데 그런 것까지는 아니고, 어쨌든 그런 주장을 편 사람이 이 대화편, 굉장히 재미있는 문학작품처럼 읽힐수있는 대화편을 썼다는 것이, 시인이라고 하면 호메로스 같은 사람을 말하는데 그들의 힘을 인정한게 아닌가하는 의구심이 있다.

대화편을 쓴 것이 당시의 가장 탁월한 저작 형식이라할수있는 비극 드라마의형식을 빌려온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다.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도 의식적으로 아이퀼로스의 드라마를 형식적으로 모방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오이디푸스왕>,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향연> 모두 비극 드라마라는 형식에서 조망되는 셈. 향연을 읽을 때도 이 점을 고려하는 것이 좋다. 이게 두번째 이유, 형식적인 이유가 두번째.


플라톤은 전쟁의 시대를 살았던 사람이고, 소크라테스의 제자이다. 그의 <국가>를 거론하면서 '민주정의 반대자'로 지목하면서 전체주의나 독재들의 말을 그에게 가져다 붙이나 꼭 그런것만은 아니다. 민주주의의 반대자라고 하면 하나의 당파성의 입장에 선 것인데 그렇게 말하기 어려운 지점들이 있다. 우리가 민주주의 국가에 살고 있다고 해도 모든 사람들이 민주주의에 투철하지 않고, 또 투철하다고 해서 훌륭한 사람이 아니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들을 플라톤이 통찰한 바 잇다. 오늘날의 이념을 잣대로 삼아서 판단할 수 없는 영역이 거기에 있다.


한가지 알고 읽으면 유용한 것이 설정한 것이긴 하지만 대화가 이루진 시기가 언제인지를 짐작할 수 있는 단서들을 담고 있다. 

두가지를 생각해야 한다. 저작시기도 있고 작품안의 시기도 있다. 이 두가지의 차이점을 항상 봐야 한다.

<국가>가 서기전 380~370년 씌여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작품속에서 대화가 일어나는 시기는 서기전 411년 쯤 된다. 펠로폰네소스전쟁 시기. 읽는 독자들은 그 사이 시간 간격이 있고, 그 사이에 무슨일이 일어난지를 알고 있다. 민주파와 소크라테스파가 속한 파가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을 했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도 독배를 마시고 죽었다. 읽는 사람들은 예전에 이렇게 사이좋게 지냈었구나 그 뒤에 전쟁이 끝나고 서로 원수지간이 되었구나를 알고 있었던 셈.


<향연>도 마찬가지. 작품속의 연대는 서기전 404년인데 바로 그때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끝난 시기. 그런데 404년에 있었던 대화가 무엇에 관한 대화냐면 그때부터 10여년 전인 416년의 대화에 관한 것. 그런데 향연이 씌여진게 385년. 왜 중요한가하면 향연에 등장하는 주요인물 중에 하나가 알키비아데스인데, 그 사람이 죽은 해가 404년. 그런데 알키비아데스가 펠로폰네소스 시기에, 다시말해서 본래의 알키비아데스가 대화에 가담했던 416년부터 404년 사이에 굉장히 배신행위를 했다. 독자는 일종의 코러스로 볼 수 있다. 비극 드라마에서 코러스는 사태에 개입하기도 하면서도 동시에 사태에서 떨어져 있는, 즉 개입과 관조라고 하는 전혀 상반된, 반대되는 역할을 동시에 한다. 플라톤의 대화편을 읽는 독자가 비극 드라마의 코러스하고 같이 같은 위치에 있다. 독자는 자연스럽게 사태를 전반적으로 조망하면서 관조하는 입장에서 사태를 보게 된다.


철학적 사색을 하는 것, 독일어로 philosophieren (필로조피렌) , '철학함', '철학한다'는 뜻.

눈앞에 사태들이 펼쳐져 있는데 그것들에 깊숙히 개입해서 파악하기도 하고, 또는 한발 물러나 보기도 하고, 개입과 관조를 되풀이 하다보면 보편적인 입장에 올라서는 것. 그렇게 하려면 어떤 한 명의 철학자에 몰입하기보다는 모든 철학자들을 등장인물로 삼고 있는, 모든 철학자들을 대상으로 삼아서 그 사람들을 하나의 서술 속에서 꾀어보는 것이 철학사인데 철학이론들 각각에다가 자기자신을 개입시켜서 읽으면서 동시에 다른 철학자들의 연관 관계속에서 철학자를 읽는 것, 이런 것이 바로 철학공부라고 할 수 있다.


플라톤은 사태를 생생하게 전해주면서도, 자연스럽게 독자들에게 이 사태 전체를 파악하는 보편적인 입장을 얻을 수 있는 일종의 형식적인 장치를 마련했다. 이것이 대화편이 가지고 있는 위력. 플라톤이 '민주정의 반대자' 이런 말을 쉽게 말할 수 없다고 말하는게 <국가>에서 보면 플라톤은 민주정도 귀족정도 겪어본 사람. 그 두 폐해가 정파가 싸움을 해서 피비린내나는 항쟁들을 했던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기에 자연스럽게 독자들에게도 이 둘다 한계가 있는 것들이다를 알려주기 위해서 <국가>를 썼다. 사실 현재 우리도 '냉소적인 보편성' 입장에 올라와서있는 하지만 좀 적극적으로 생각해보면 정치적인 사태들도 개입과 관조를 통해서 이해할 수 있다.


<<향연>>의 저술 연대는 서기전 385-380년으로 추정된다. 독자는 <<향연>>에 등장하는 대화를 20여 년 후에 읽는 셈이다. 이때 독자는 이미 지나간 사건들을 담담하게 바라보는 입장이 아니었을까? 일종의 무상함을 느끼면서.


여기서 독자는 비극 작품의 코러스와 같은 위치에 있는 것이라는 해석도 가능할 것이다. <<오이디푸스 왕>>에서 코러스는 드라마의 등장인물과 대화를 하기도 하고,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알려주기도 하며, 드라마에서 다루어지지 않은 지나간 일을 설명하기도 한다. 다른 한편으로 코로스는 관객의 입장에서 사태를 관조하기도 하며 마지막에는 드라마 전체의 메시지를 전해준다. 한마디로 코로스는 ‘개입과 관조’라고 하는 전혀 상반된 두 가지 역할을 한다. 그러니 플라톤의 대화편을 읽는 독자가 드라마의 코러스와 같은 위치에 있다고 하면, 독자는 대화를 추체험하면서 자연스럽게 사태를 전반적으로 조망하면서 관조하는 것이다.


철학은 바로 그러한 것이다. 사람들이 ‘철학공부한다’고 하면 어떤 철학자의 학설을 연구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철학이론을 만드는 것만을 생각하는데, 사실은 하나 더 있다. 어쩌면 이것이 더 중요할 것이다. 그것은 바로 ‘철학함’(philosophieren)이다. 이는 눈 앞에 펼쳐진 사태들에 대한 ‘개입과 관조’를 통해 보편적 입장으로 올라서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철학자들을 대상으로 삼아, 즉 철학자들을 드라마의 등장인물로 여기고, 그들의 철학이론 각각에 자신을 개입시켜 읽으면서 동시에 다른 이들과의 연관 속에서 그 이론들을 관조해야 할 뿐만 아니라 여기서 더 나아가 그렇게 얻은 보편적 입장에 서서 현재 눈 앞에 벌어지고 있는 사태들을 통찰해야 한다. 이처럼 철학공부는 철학자 각각에 대한 공부와 철학사 공부로 이루어진 것이다.

http://frostpathway.wordpress.com/2013/01/30/164/



2013-02-09 15회 플라톤의 "향연" 2

플라톤의 사상이 전반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언제 어디서나 변함없이 좋은 것, 인간은 이것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 그게 좀 어려우면 당대의 법이라도 잘 지키자는 것이 플라톤의 생각.


- "정신화한다"

어떤 눈 앞에 보이는 사태들을 고도로 추상해서 자신의 정신 속에 집어 넣어서 그것을 정신적인 산물로서 이해하고, 자기의 정신으로서 완전 자각하는 태도, 이를 정신화 한다라고 함. 정신화의 최종산물이 철학.

향연에서도 단계별로 정신화에 이르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 서사부분

처음에 향연이라고 하는 드라마, 이야기 전체를 하는 아폴로도로스가 등장. 서기전 404년으로 설정된 시간이 아폴로도로스가 등장하는 시기. 그래서 아폴로도로스가 동료에게 10여년 전에 일어난 사건, 즉 서기전 416년경 비극경연에서 우승한 아가톤의 집에서 벌어진 향연에 관하여 들려주는 것. 

향연이란 symposion , 술마시고 떠들서하게 즐겁게 노는 것을 뜻한다.

아가톤이 좋음이라는 뜻. 좋음에 관한 이야기를 좋음이라는 뜻을 사람의 집에서 하는 것.

그 이야기를 이미 글라우콘에게 들려준 적이 있다고 하면서 두명의 동료에게 들려준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자신이 직접 참석했던 것이 아니라 아리스토데모스에게 들었다고 함. 복잡한 구조.


정리하자면..

1. 서기전 416년경 아가톤의 집에서 향연이 있었다.

2. 그 자리에 참석했던 아리스토데모스가 거기에서 있었던 일을 아폴로도로스에게 이야기를 했었다.

3. 아폴로도로스는 그렇게 전해들은 이야기를 글라우콘에게 이야기 한 적이 있다.

4. 아폴로도로스는 서기 404년에 두 사람에게 다시 또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것, 그 이야기가 향연.


- 향연의 첫문장을 보면 아폴로도로스는

172a 나는 자네들이 묻고 있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할 준비가 꽤 되어 있다고 생각하네.

>> 최소한 두 번째이니까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하는 것. '연습'을 안 거친 상태가 아니다. 중요한 단어가 연습. 희랍어로 멜레테(melete)

남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려면 적어도 연습을 해야 하는 것. 연습이라는 단어가 주제를 암시하는 단어이다. 향연의 주제가 사랑에 관한 이야기, 에로스과 지적인 깨달음. 이게다 연습이 필요하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 무대설정

아폴로도로스가 팔레론에 있는 집에서 시내로 '올라가는 중'에 뒤에서 두 사람이 불러서 함께 걸어가면서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무대설정이 되어 있다. 

대화편에서 '올라간다'는 말이 나오면, 고급스러운 진리에 관한 이야기가 앞으로 펼쳐지겠구나, 저급한 단계에서 고급의 정신화의 과정을 거쳐 올라간다는 이야기가 있겠구나를 암시한다고 보면 된다.

간단해 보이기는 하는데 중요한 대목이고, '올라간다', '내려간다' 나오면 이야기가 어떤 식으로 가는지를 알려주는 중요한 대목이다.

<국가>에서 피레우스 항구로 '내려갔다'는 것으로 이야기로 시작. 맨 나중에 우리의 영혼은 참다운 영혼이 되면 윗길로 간다는 말이 나온다. 내려갔다가 올라가는 것이 있다.


- 고전 텍스트를 읽을 때 읽기의 어려움

저자가 고유하게 만들어내는 술어 만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사는 오늘날의 세계와는 많이 떨어진 옛날 이야기,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당대 그 당시 사람들은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것, 당연하게 여기던 것을 우리가 알아차리기 어렵다. 일종의 '관행 묶음'

읽으면서 우리의 사색을 깊이를 더해주고, 책을 읽다가 뭔가 의아하다 싶으면 이것이 당대 '관행 묶음' 인가 아니면 저자가 고유하게 삽인한 것인가 그렇다면 왜 집어 넣었을 까 이런 걸 생각해 봐야한다. 





2013-02-16 16회 플라톤의 "향연" 3

지난주에 향연의 서사에 해당하는 부분을 읽었다.

소크라테스가 처음 등장할 때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지를 유심히 봐야한다.


174a3 그는 소크라테스 선생님이 목욕도 하고 신발도 신은채 (이건 그 분이 좀처럼 하시지 않던 일이지.) 자기와 맞닥뜨리게 되었다고 말했네.  그래서 그 분께 이렇게 멋쟁이가 되셔서 어딜 가시냐고 물었다고 하네.


여기서 '멋쟁이' 라는 표현에 주목을 해야한다.

소크라테스는 좀처럼 멋있게 하고 다니지 않는다고 말하는데, 희랍어로 칼로스(kalos), 영어번역본에는become so beatiful,  아름다운 이라는 뜻이다. 영혼과 육체 모두 쓸 수 있는 말. 아름다운 영혼, 몸매가 아름답다. 공정한,고귀하다는 의미로도 쓰인다. 

이 단어를 소크라테스를 가리키는 형용사로 쓴 것은 이 대화편에서 소크라테스가 그런 사람으로 나올 것임을 짐작하게 해주고, 또 이 주제 역시 그런 겉모습의 아름다움과 정신의 아름다움, 즉 고귀함을 암시하고 있다고 하겠다. 어떤 사람은 겉모습의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어떤 사람을 정신의 아름다움, 고귀함을 추구하고 있다.


아리스토데모스가 초대받지 않은 연회에 간다

아리스토데모스는 자신이 보잘 것 없는 자로서 초대받지 않은 채 지혜로운 사람의 잔치에 가게된것 같다고 걱정하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훌륭한자들은 훌륭자들의 잔치에 자진해서 간다고하며, 연회에 함께 가자고 권유한다. 소크라테스는 아가톤을 가리킬 때 멋있는자, 훌륭한 자라고 하지만 지혜로운 자라고 하지는 않는다. 실제로 아가톤이 지혜로운 사람인지는 나중에 알게 될 것.



아리스토데모스는 소크라테스의 인도를 받고자 한다. 자신이 보잘 것 없는 자라고 인정했으니 이제는 선생님의 인도를 받는것이다. 극 중 알키비아데스도 소크라테스의 인도를 받고자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사실 알키비아데스를 인정하지 않는다.


소크라테스는 함께 간다고 해놓고 뭔가 골똘히 생각하면서 뒤쳐져서 아리스토데모스는 연회에 혼자 가게 되고, 아가톤은 '초청하려고 했는데 만날 수가 없더군' 라고 하면서 맞이한다. 아리스토데모스는 우스운 처지에 놓이게 됨.


소크라테스는 왜 뒤쳐졌을까?

1. 연회에서 무슨 말을 할지 궁리를 하고 있었다. 개연성이 높은 추축. 

2. 길에서 생각에 잠겨있느라 연회참석이 늦어지니 자연스럽게 말석에 앉게 된다. 아가톤은 연회의 주인이니 가장자리. 자연스럽게 연설을 가장 마지막에 하는 것. 설정을 그렇게 한 것이 아닐까 추측할 수 있다. 175a를 보면 아가톤이 아리스토데모스에게 에뤽스마코스 옆자리에 앉게라는 일종의 자리배정을 하고 있다. 자리배정을 염두고 해고 천천히 오는 것이다. 


아가톤은 소크라테스에게 접촉을 통하여 지혜를 전달하고 싶어하고 있다.

175d 이리로 제 옆에 앉으시지요, 소크라테스 선생님, 선생님과 접촉함으로 해서 문전에서 선생님께 떠오른 그 지혜를 저도 누릴 수 있게 말입니다.

참 좋을 것이네, 아가톤. 지혜가 우리가 서로 접촉할 때 우리 가운데 더 가득한 자에게서 더 빈 자에게로 흐르게 되는 그런 거라면 말일세. 

바로 그 지혜가 젊은 자네에게서 그토록 맹렬하게 빛을 발하여 밝게 빛나게 되었지. 엊그제 3만이 넘는 희랍 사람들이 증인이 된 가운데 말일세.

도가 지나치십시다. 소크라테스 선생님.

>> 3만명이라는 숫자는 서기전 4세기전 초반의 아테나이 남성 시민의 숫자가 대체로 그러했다고 자기들이 쓴 것.

>> 아가톤이 비극 경연에서 우승을 했으니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인증을 받았다고 해도 될 것이고 소크라테스가 이점을 지적한 것. 그런데 과연 지혜로운 사람의 참다운 척도인가 이것에 대해서는 따져물을 필요가 있다는 여운을 남기고 있다. 

>> '도가 지나치십시다'의 희랍어로 휘브리스 hybris가 쓰였다.

아가톤이 소크라테스에게 당신은 오만한 사람이야 라고 말하는것.

멋쟁이 이후 두번째로 나오는게 오만한 사람이라는 규정. 오만하다는 것이 완전히 부정적인것은 아니다. 오만하다는 게 자신감이 넘쳐흐른다는 뜻도 된다. 이 규정이 여러가지 뜻을 함축하고 있다는 것을 유념. 


175e 디오뉘소스를 재판관으로 삼아 시비를 가리기로 하고 지금은 무엇보다도 만찬에 집중하시지요.

>> 디오뉘소스는 술,음주가무의 신. 곧바로 이어지는 순서가 음주가무다. 

아가톤이 디오뉘소스 신을 기리는 축제의 일환으로 행해진 비극경연에서 우승을 했으니 디오니소스가 재판관으로 된다면 나는 자신이 있다는 의미도 있다. 

>> '디오뉘소스를 재판관으로 삼아'가 의미하는 것은

1. 비극 경연에서 자신이 우승했으니 한수 먹고 들어가는 것

2. 술 많이 마시는 것으로 승부를 가려보자. 하지만 마지막에 보면 소크라테느느 혼자 깨어있다. 즉, 그렇다면 디오뉘소스도 소크라 에게 손을 들어줄 수 밖에 없는 상황.

3. 말의 향연도 있으니 이야기를 누가 더 조리있게 잘하는가.


곧 이어지는 부분이 디오뉘소스를 재판관으로 하는 향연이 시작된다.




2013-02-23 17회 플라톤의 "향연" 4

향연이 벌어지면서 대화하는 인물

파이드로스, 파우사니아스, 에뤽시마코스, 아리스토파네스, 아가톤, 소크라테스 그리고 알키비아데스


파이드로스부터 이야기를 시작. 본격적인 본론이라 할 수 있다.

알키비아데스는 끝날 무렵에 '갑자기' 나타난다. 갑자기 단어가 나타할 때마다 결정적인 전환이 일어나는 중요한 포인트.

알키비아데스의 이야기는 애탄가 같은 느낌을 준다. 이들 7명이 이야기를 나누면서 막간 사건이 중간에 한번씩 들어간다.


파이드로스와 파우사니아스가 이야기하고 첫번 째 막간이 있는데 아리스토파네스가 딸꾹질을 한다. 

어쩔 수 없이 에뤽시마코스가 이야기 한다. 이제 2째 막간에서 웃음에 대한 공방. 아리스토파네스가 이야기 함. 

두번째 막간에서 웃음에 대한 공방이 나오는 이유는 아리스토파네스가 희극 작가라는 것을 하나의 예고하는 것

아리스토파네스 이야기가 끝나고 나면 3째 막간. 그 다음이 아가톤. 이야기 끝에 4째 막간.

그리고 나서 소크라테스가 이야기가 시작된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 에로스에 관해서 디오티마라는 여성에게 들었다는 것을 전해 주겠다고 함. 있는 그대로 놓고 보면 소크라테스는 한마디도 안한 것. 알키비아데스가 '갑자기' 등장하면서 5번째 막간이 시작.

그 당시 플라톤의 독자들은 이야기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누군지 알고있다을 염두할 것.


* 파이드로스

파이드로스의 주장. 생각이 짧다.

1. 에로스는 가장 오래된 신이다. 

2. 에로스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의 원인이다.

파이드로스의 이야기를 가장 앞에서 배치한 것은 가장 일반적인 상식이기 때문.

대체로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여러 견해를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 가장 철없는 생각


오래된 것이니까 좋은것이다 말할 때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아름다움을 부추겨왔기 때문에 좋은것이라고 말한다.

다시말해 에로스 효과 때문에 좋은 것이 많이 생기고 사람들이 좋은 것을 추구하기 때문에 좋은것이다라고 말한다. 


178d 추한 것들에 대해서는 수치심을, 아름다운 것들에 대해서는 열망을 갖는 것을 말하네. 이런 것들 없이는 국가든 개인이든 크고 아름다운 일들을 이루어 낼 수 없거든. 

>> 에로스가 수치심과 명예심을 의미함을 말하는 것. 명예에 대한 사랑, 이런 것들이 에로스가 원인이 되는 것이고 그래서 가장 좋은 것이다.

파이드로스가 말한 에로스라고 하는 것이 죽음까지도 극복하는 것이라 해도 진정으로 언제어디에서나 좋은 것일 수 없다. 

소크라테스는 내 것이라서 좋은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을 내 것으로 해야 한다고 말했다. 





2013-03-02 18회 플라톤의 "향연" 5

* 파우사니아스

파우사니아스의 얘기를 들어보도록 하자

180c 파이드로스가 대강 이런 이야기를 했고 파이드로스 뒤로 다른 몇몇 이야기들이 있었다고, 그런데 자기는 뚜렷이 기억나는 게 별로 없다고 그는 말했네.

>> 아리스토데모스가 파이드로스와 파우사니아스 사이에 몇몇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었는데 말한 사람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

'대강'이란 말이 들어간 것이 살짝 파이드로스의 평가가 들어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파우사니아스는 파이드로스보다는 체계적으로 에로스에 대해 이야기한다.

무작정 에로스를 찬양할 것이 아니라 질적으로 나누어 본다. 나눈 다음에 어떤 종류의 에로스를 찬양해야 하는지 먼저 말하는 게 옳다고 주장,

그의 구분에 따르면 에로스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천상의 에로스, 범속의 에로스.


181a 아름다고 올바르게 행해지면 아름다운 것이 되고 올바르지 않게 행해지면 추한 것이 된다는 말이네.

>> 에로스의 기준. 에로스라고 하는 것은 그것을 행하는 사람, 올바르게 행하면 천상의 에로스, 범속한 에로스는 닥치는 대로 무엇이든지 한다. 


183a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돈을 받기를 바라면서, 혹은 관직이나 다른 영향력있는 자리를 얻기를 바라면서, 사랑하는 자들이 소년 애인들에게 하는 바로 그런 일들을 하려 한다고 해 보세. 그럴 때 친구들 만이 아니라 적들까지도 그가 이런 행동을 하지 못하게 막을 것이네. 적들은 아첨하면서 자유인답지 못하게 구는 것을 비난할 것이고, 친구들은 그를 훈계하면서 그의 그런 일들에 대해 수치스러워할 거네. 

>> '사랑하는 자들이 소년 애인들에게 하는 바로' 는 남자와 남자사이의 사랑.


파우사니아스가 말하는 질적인 구별은 사회적인 관습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도 든다. 주변사람들이나 그사람들이 속한 사회의 일반적인 기준에 따르는 것.

우리가 파우사니아스의 기준에 따라서 질적으로 고상한 에로스, 천상의 에로스를 추구하려면 사회의 규범(노모스) 에 맞춰서 그런 에로스를 발휘해야 하는 것. 그런데 이 규범이라는 게 어떤 사람이 속해 있는 사회에 따라 다르니까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이어서 첫번재 막간이 있다.

원래 앉아 있는 순서가 파우사니아스 다음이 아리스토파네스 인데 딸꾹질로 인해 순서가 바뀐다.


딸꾹질에 대한 해석. 

1. 이야기 순서가 자연스럽게 바뀌는 것.

아리스토파네스 이야기가 에뤽시마코스 뒤로 가게 되어 파이드로스, 파우사니아스, 에뤽시마코스 여기까지가 에로스에 관한  한덩어리, 아리스토파네스, 아가톤, 소크라테스 이렇게 한덩어리가 된다. 크게 둘로 나눠주는 효과가 있다.


2. 약간 우스꽝 스럽다.

아리스토파네스는 희극작가, 에뤽시마코스는 의사이다.

아리스토파네스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에뤽시마코스는 그것에 대처하는 의학지식을 뽑낼기회를 준다.

딸꾹질에 대해 에뤽시마코스는 대단한 질병이라도 되는 양 처방을 내린다.

우스꽝스럽고 진지하게 대응하는 것에서 두사람에 대해 플라톤이 가볍게 조롱하는 의도가 있지 않았나하는 생각.


그 당시 텍스트는 파피루스에 씌여진 것이고, 파피루스는 이집트 수입품. 그 생각을 해보면 책을 구하는게 쉽지 않았을 것.

어쨌든 플라톤은 자신이 발휘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서 막간을 집어넣고 어떻게 해서든지 독자들에게 당시의 분위기를 전해주려고 하고

자신의 의도를 사람들에게 읽히게 하려고 노력을 했다. 매체에 대한 생각을 하면 텍스트에 대한 마음가짐이 달라진다.


* 에뤽시마코스

파이드로스, 파우사니아스는 에로스에 대해 얘기할 때 사람의 행위에 관련해서 얘기를 했다.

그런데 에뤽시마코스는 한 단계 더 나아가서 에로스가 사람들의 영혼에만 있는 것도 아니고 또 아름다운 자들에 대해서만 있는 것도 아니고 세상 만물속에 있다고 말하려고 한다. 일종의 우주만물의 원리다. 에로스의 의미를 확장시키는 것.


의술에서 에로스를 말하는 것이 첫번째. 의술은 채움이나 비움과 관련해서 에로스가 몸안에서 하는 일들에 대한 앎이다. 

에로스를 '~에 대한 사랑'이라기 보다는 조화를 이루는 힘이라고 정의를 하고, 그런 조화가 우리 몸 안에서 일어나도록 하는게 의술. 그 다음에 예를 드는 것이 체육기술과 농사 기술, 그다음이 시가. 마지막으로 온갖 제사나 예언술, 인간과 신 사이를 좋게 만들어주는 힘도 에로스.

의술, 체육, 농사기술, 시를 짓는 것은 우리눈에 보이는 것이고 우리에게 가까운것.

천문학은 우리 눈에 보이기는 하는데 멀리 떨어져있는 것, 신과 인간의 관계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 멀리 떨어져있는 것.

에로스가 관할하는, 관여하는 범위를 확장시켜서 말하는 것. 온 우주의원리를 에로스로 설명하는 것이 에뤽시마코스의 이야기. 

그 능력이라고 하는게 에뤽시마코스는 의사이니 기술의 측면을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좋은 것들과 관련하여 절제와 정의를 가지고 이를 이루어 내는 것이 에로스. 일체의 행복을 마련해주고 신들과 사귀고 친구가 될 능력을 갖게 해주기도 하는 것이 에뤽시마코스의 관점. 유념할 것이 하나 있느데 에로스는 기술이니까 어떻게 해주는 힘만을 얘기했다. 어떤 기구를 가지고 있을때 칼을 가지고 있을 때 칼이 의사의 손에 쥐어지면 사람을 살리고 강도의 손에 쥐어지면 사람을 죽인다. 그런데 의사의 손에 쥐어졌다고 해서 반드시 사람을 살리는 것은 아니다. 

에뤽시마코스가 말하는 에로스는 기술의 측면이고 그것이 정신적으로 언제 어디서나 모든 사람에게 참으로 좋은 것을 만들어 주는지는 아직 논의가 되지 않은 셈.

그럼 과연 무엇인가라는, 기술을 사용하는 목적이 어디에 있는가가 이제 나온다.


* 아리스토파네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이야기. 우리 몸은 원래 한몸이었는데 쪼개졌다는 이야기.


<향연> 작품속의 대화가 일어났던 연대가 서기전 416년, 저술연대가 385년으로 추정. 

그런데 파이드로스와 에뤽시마코는 서기전 415년 경에 추방을 당하거나 고소를 당했다. 

파우사니아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결과에 따라 마케도니아로 망명한 사람.

결국 독자들이 이 향연을 읽을 무렵에는 파이드로스, 파우사니아스, 에뤽시마코스 세 사람 모두 아테네에 살지 않았다.

다음에 읽게되는 아리스토파네스는 소크라테스를 고발한 고발인 중 한사람이며, 아카톤은 역시 마케도니아로 망명한 상태. 마지막으로 알키비아데스는 피살을 당했다.


어떻게 보면 책의 내용이 굉장히 비극적이다.

독자들은 이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천상의 에로스는 커녕 범속의 에로스도 못누리는 상태라는 것을 알고 있는 상황.  

항상 대화편 안의 연대하고 서술연대의 차이를 보고 등장인물들이 어떻게 인생살이 변했는지는 봐야한다.





2013-03-09 19회 플라톤의 "향연" 6

오늘은 아리스토파네스 이야기 차례

앞서 말했듯이 이야기가 넘어가는 막간, 사람들의 대화에 주목할 만한 것이 있다.

의사인 에뤽시마코스 다음에 희극 작가인 아리스토파네스 이야기의 시작. 


* 아리스토파네스

189a 난 놀라워하고 있다네. 몸의 질서가 재채기 같은 그런 소음과 간지럼 태우기를 욕망한다는것에 말일세.


>> 에뤽시마코스는 에로스를 찬양하면서, 질서와 조화를 가져다 준다고 얘기했다. 그리고 자신은 의사로서 질서와 조화를 가져다주는 일을 수행하는 사람이다. 자부심을 드러내보였다. 의사인 에뤽시마코스가 아리스토파네스의 딸꾹질에 처방을 내리기를 재채기를 하거나 간지럼 태우기를 하면 된다고 했다. 이런 것들은 무질서한 것, 이런 무질서가 개입된 후에야 질서가 잡힌다는 것은 사실 에뤽시마코스가 했던 얘기에 어긋나는 셈. 그래서 아리스토파네스가 질서가 원하는 것이 무질서가 아니냐, 무질서 때문에 질서가 생기는 것이 아니냐 하고 비꼬는 것. 결국은 플라톤이 에뤽시마코스를 비꼬고 싶었던 것.


어짜피 이세계는 무질서로 분류할 수 있는 것들이 있고, 그것들을 어떻게 해서든지 포괄해서 설명을 해야 에뤽시마코스의 설명 체계가 앞뒤가 들어맞을 텐데 무수히 많은 무질서들을 내버려 두고 심지어는 아리스토파네스가 지적했던 것처럼 그런 무질서들이 없으면 질서 자체가 성립될 수 없는 상황이 있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는 것. 언제 어디서나 좋은 것이려면 변칙적인 것까지도 포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이제부터는 이야기가 질적으로 달라지는데 아플라톤이 이제 아리스토파네스를 단순한 희극작가가 아니라 진지한 사람으로 변경하여 막간을 이용하여 등장시키며 의미있게 묘사했다. 희극작가는 보통 일반적으로 우스운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지만 여기서는 우스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부각시키려는 것.


189b 앞으로 말해질 것들과 관련하여 내가 저어하는 것은 혹여 우스갯소리를 하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 아니니까 말일세. 이건 유익한 것이고 또 우리 뮤즈 여신에게 고유한 것이거든. 오히려 내가 저어하는 것은 웃음거리를 말하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네."


>> 웃음거리를 말하게 되는 것과 우스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은 분명히 구별되는 것이다. 플라톤은 분명히 성격 규정을 하고 있다.


아리스토파네스는 신이라든가 이런 얘기를 하지 않고 에로스를 인간의 본성과 관련지어서 이야기 한다. 먼저 물론 설명을 위해 신화를 동원하는데 우리가 들어보면 그럴만하다 설득력 있게 이야기를 한다. 

아리스토파네스에 따르면 인간이 원래 성별 구별이 셋이었다. 남성, 여성, 남성과 여성이 한몸으로 이루어진 셋.

원래 인간은 팔도 네개고 다리도 네개고 얼굴도 두개. 남남,여여,남녀. 광장히 힘이 세었고, 오만해져서 신들도 공격하겠다고 하늘로 쳐들어 가려고 했다. 그래서 신들이 반으로 갈랐다. 그래서 인간은 잃어버린 반쪽을 찾아 다닌다는 것. 일반적으로 남녀 한몸이었는데 나뉘었다고 흔히 생각하는데 남남,여여,남녀를 자른 것. 그래야 동성애와 이성애가 다 성립하는 것.


그런데 처음에는 반으로 자를 것이아니라 다 죽여버리려고 했다. 그러나 다 죽여버리면 신들이 받는 숭배와 제사가 싹 없어져 버릴테니 죽이지는 않았고 둘로 잘라놓으면 경제적인 효과, 수가 많아져서 신들에게 쓸모가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한 것은 2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번째가 신들의 탐욕을 비꼬는 것, 숭고한 뜻이라든가 이성적 계획이 아니라 탐욕에 따라 움직이는 것.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곡 작품들을 보면 실제로 신들의 위대함을 찬양하지 않고 좋지 않는 점만 묘사했다. 아리스토파네스는 소크라테스를 고발한 사람 중에 하나인데 소크라테스가 미워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인간이 알 수 없는 영혼 불멸, 증명 불가능한 얘기들을 하고 다닌다는 이유에서였다. 두번째는 둘로 나뉜 것이 남남, 여여, 남녀니까 나누기 전의 것을 찾아다니려면 남자남자은 남성 동성애, 여자여자는 여성 동성애, 남녀는 이성애 였다는 것을 신화적으로 설명하려고 한 것.

동성애에 대해서 배타적인 사고방식이라고 하면 어렵게 받아들여졌을 것이나 그 당시는 동성애가 만연해 있었기 때문에 당연한 것으로 받아졌을 것. 


동성애건 이성애건 간에 '자신에 대한 갈망'이 바로 에로스다라고 설명하는데 상당히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나중에 소크라테스에 가면 육체적인 것만이 아닌 정신적인 것을 포괄하는 수준 높은 이야기로 전개된다.

원래 내 것인 것에 대한 갈망이 이것이 아리스토파네스 주장의 핵심.


반쪽이 되어서 헤매어 다니게 된다는 그의 논지를 받아들인다면 이것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갈증의 원천인데 동시에 비극의 원천이 되는 것. 항상 반쪽을 못찾아서 헤매이고 다닐지도 모른다 외로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속에 살아야 하는 두려움.

희극작가가 인간의 비극적 측면을 말하고 있다. 


흐름상 보면 다음에 반대 이야기가 나와야 한다. 다음 이야기가 아가톤.

아카톤은 비극작가임에도 즐거움을 이야기 한다.


195a 나는 내가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를 우선 말하고 나서 그 다음에 말하고 싶네.

>> 나는, 내가 굉장히 자신감이 충만한 것. 독자적으로 논의하겠다는 것. 오만한 태도가 있다. 


아가톤은 에로스는 가장 젊고 여리고 가냘프고 유연하다는 신체적인 특성과 정의롭고 절제있으며 용기롭고 지혜롭다는 덕의 측면의 이야기 한다. 좋은 것은 다 있다. 앞에 파이드로스는 신화에 끄집어다 대기도 했는데 아가톤은 아무런 근거도 없이 무조건 좋은 것은 다 가져다 붙여놓고 좋은 것만 이야기 한다. 에로스가 태어나면서부터는 아름다운 것들을 사랑함으로 인해 모든 것들이 신들과 인간들에게 생겨났다. 여기까지 오면 아가톤은 스스로가 절정으로 빠져서 자아도취 상태가 된다. 비극작가 답지 않는 모습. hybris.


다음시간은 이제 아가톤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비판.





2013-03-16 20회 플라톤의 "향연" 7

198a 아가톤이 말을 마치자 그 젊은이가 자신에게도 또 그 신에게도 어울리게 말을 했다는 생각에서 참석자들 모두가 환호했다고 아리스토데모스는 말했네. 그러자 소크라테스 선생님이 에뤽시마코스 쪽을 쳐다보며 말씀하셨다고 하네. "아쿠메노스의 아들이여, 아까 전부터 내가 두려워했던 게 기우라고 자넨 생각하나? 아가톤이 놀라울 정도로 말을 잘할 것이고 나는 막막해 하리라고 방금 전에 내가 말한 것이 예언자다운 말 아니었나?"

>> 기우라는 말을 그리스어로 직역을 하면 '두려울게 없는 두려움을 두려워 하는 것'

두려움이라는 말을 세번이나 사용했는데 말이 안되는 말을 하면서 똑같은 단어를 되풀이 하는 것은 상대방을 조롱하기 위한 것.

아가톤이 앞에서 똑같은 얘기를 여러차례 되풀이 했고, 아름답고 현란하다고 소크라테스는 얘기를 하나 귀담아들을 내용은 없다는 것. 말도 안되는 말을 한다는 것. .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린 플라톤이 아가톤과 소피스트를 엮어서 바판하는 것. 사실은 중요하지 않고 현란한 말을 함으로써 말의 뜻을 바꾸어 버리는 것. 민주정이라고 하는 것은 말의 뜻이 아주 중요한데 말을 현란하게 함으로써 체제의 위협을 가하는 것. 

소크라테스는 민주정을 반대한 것이라 말을 현란하게 하는 자들이 선동적으로 정치를 해나가는 것을 경계했던 것.


198c 내가 참 우스운 자로구나

>> 소크라테스가 스스로를 낮추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이것 또한 비꼬는 것. 자신을 한껏 낮춘 다음에 직설법으로 아가톤을 비판.


198e 하지만 실은 어떤 것을 아름답게 찬양한다는 것이 이게 아니었던 것 같네. 오히려 그 대상에게 가능한 한 가장 위대하고 가능한 한 가장 아름다운 것들을 봉헌하는 일이었던 것 같네. 그것들이 실제로 그렇든 안 그렇든 상관없이 말이네. 그것들이 거짓이라해도 사실 문제되 건 전혀 없던 거지

>> 아가톤이 한 얘기는 아름답고 멋있는 이야기 만을 계속 늘어놓는 것이고 그것이 사실에 부합하든 안하든 그 사람에게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


199a 어쨋거나 자네들의 찬양은 아릅답고 인상적이네.

>> 사실에 근거해서 에로스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똑같은 얘기를 되풀이하고 현란하고 아름다운 말을 가져다가 그냥 찬양만 했을 뿐이지 올바른 방식이 아니다라고 직설법. 그리고 나서 소크라테스는 나는 내 방식에 따라 이야기 하겠다는 것.


아가톤의 이야기가 끝나고 소크라테스와 언쟁을 하는 막간 부분은 철학적으로 중요한 부분이다.

대화를 할 때 그 사람의 이야기의 꼬투리를 잡아 시비를 걸고 옭아매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 소크라테스의 대화하는 방법. 그래서 아테나이 사람들에게 미움을 산 것.

사람들은 틀렸다고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진실을 말하면 화를 낸다. 그래서 자신의 앎을 근원적으로 무너뜨리는 자가 나타나면 반기지도 않을뿐더러 격렬한 혐오감을 표출한다. 그래서 소크라테스가 아고라에서 따지고 다니니까 사람들이 화가 났던 것. 


그런데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이를 벗어날 수 없다. 소크라테스가 질문을 해서 아가톤이 자신이 알고 있던 것이 사실은 거짓이었다, 무지했다는 자부심을 무너뜨려야 아가톤 뿐만 아니라 자기도 이야기를 해 나갈 수 있는 것.

나 자신의 방식에 따라 이야기하겠다는 것이 사실은 내말만 하겠다가 아니라 네가 말한 부분에서 잘못된 부분을 쳐내면서 이야기 하겠다는 것. 이게 바로 소크라테스의 학문 방법론인 논박술, 즉 엘렝코스다.

무지를 자백하는 순간부터 긍적적인 길로 들어가는 것, 무엇이 사실인지 알아가는 과정이 산파술이다.

아가톤에게 몇가지 작은 질문을 하겠다는 것은 논박술, 그 이야기에 이어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산파술, 묶어서 소크라테스의 대화방법. 이것이 막간에 들어가 있는 것.


201b 그러자 아가톤이 말했다고 하네. "재가 앞서 말했던 것들 가운데 아무것도 전 알지 못하는것 같습니다."

>> 막간에서 이제 소크라테스가 아가톤에서 질문하는 것이 논박술을 펼쳐보이는 것.


201c 자네들에게 죽 이야기해 보기로 하겠네

>> 소크라테스는 지금부터 에로스가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라는 것을 주장하려는 것. 그렇다고 추한 것이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어쨋든 적어도 에로스가 아름다운 것이다를 주장하지는 않을 것. 상대방의 이야기를 논박함으로 해서 자기 이야기의 최소 출발점을 마련하는 것이 소크라테스의 방법이다.


* 디오티마에 관한 이야기. 

원래 향연 이야기라는 것이 아폴로도로스가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고, 아폴로도로스 역시 아리스토데모스에게 전해들은 이야기를 전해 주는 것이고, 소크라테스 역시 디오티마에게 들은 이야기를 하겠다고 하는 것으로 흔히 말하는 액자 구성이다.

형식적으로 디오티마가 한 이야기가 소크라테스에게 전해지고, 소크라테스가 다시 그것을 아리스토데모스에게 전한 것이고, 아리스토데모스가 아폴로도로스에게 , 아폴로도로스가 친구들에게, 그리고 이것을 읽는 아테나이 독자가 있고 그리고 우리가 있다.


이러한 방식이 그 당시 희랍의 독자들은 힘들지 않았다고 짐작할 수 있는 것이 구송에 의해서 사람들이 정보를 전달하던 시기에는 액자 방식이 우리에게 낯설고 힘든 것일 수 있어도 희랍사람들에게는 일상적인 이야기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210c 다만 언젠가 내가 만티네아 여인 디오티마에게 들은, 에로스에 관한 이야기를 (그녀는 이것들만이 아니라 다른 많은 것들에 있어서도 지혜로웠지. 한 번은 역병이 나기 전에 아테네 사람들에게 제물을 바치라고 시켜서 그 병이 10년 동안 유예되도록 해 준 적이 있었네.

>> 디오티마에게 들은 이야기를 하겠다고 해놓고 관련이 없어 보이는 설명을 하기 시작한다.

만티네아 여인 디오티마라고 하면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플라톤의 독자들에게는 만티네아라는 단어에서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떠올랐을 것.


역병이라고 하는 것이 아테나이 역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시작되고 나서 그 다음 해에 아테나이에서 역병이 돌았고, 많은 수의 사람이 죽었다. 그래서 페리클레스가 애초에 구상했던 전쟁 전략이 완전히 무너졌다. 사람수가 줄어들었기 때문.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만티네아 여인 디오티아라고 하면 이 사건이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시작된 다음이겠구나, 황량한 시기였음을 환기시켜주는 효과.

더욱이나 만티네아 전투라고 하는 것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해상,육상전투가 있는데 육상전투에서 최대의 전쟁이었고 스파르타가 이긴 전쟁. 더 중요한 것은 만티네아 전투에서 아테나이가 무너지면서 알키비아데스가 본격적으로 정치 전면으로 나왔던 것. 배신자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기 시작한 시점이 만티네아 전투 이후이다. 여러가지 역사적 맥락을 독자들에게 전해준다.


여기까지 소크라테스가 아가톤의 이야기가 끝나고 대화를 이어가기 전에 막간을 소개 했다. 이제부터 상당히 중요한 얘기된다.


에로스가 누구이고 어떤자인가, 그 다음에 에로스는 어떤 일을 하는가(기능), 그런데 그것이 아가톤이 했던 것과 비슷한 얘기들을 디오티마에게 했다가 소크라테스가 혼다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그러니 너도 나대지 말고 나처럼 겸손하게 배워라' 라는 메시지를 주면서 시작하는 것.




2013-03-23 21회 플라톤의 "향연" 8

이번 소크라테스의 이야기는 향연의 본론에 해당하는 부분.

플라톤은 일부러 독자들이 귀찮고 지겹고 빤해 보이는 과정을 거치도록 텍스트를 구성해 놓았고, 우리는 지겹더라도 따라가야 하고 따라가보면 남는게 전혀 없다해도 그 과정 자체가 우리에게 결코 손해가 아니다.


소크라테스가 하는 이야기는 크게 셋으로 나뉜다. 

1. 에로스가 무엇인가, 정체가 어떤 것인지 어디서 생겨났는지를 이야기하고

2. 에로스가 하는 일은 무엇인가, 

3. 에로스를 연마하는 법, 에로스의 사다리. 사다리는 진리에 이르는 보편적인 상징.

지금 에로스에 대해서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순서는 사실 플라톤의 고유한 방법이라기 보다는 어떤 사태를 설명할 때 오래 전부터 사용해온 것.


에로스의 정체를 밝히는 부분을 보자.

소크라테스의 대화 방법론에서 말했듯이 아가톤과 대화하는 부분에서 실마리를 잡아야 한다.

201b "이것들이 그러하다면 자네는 여전히 에로스가 아름다운 것임을 인정하겠는가?", "제가 앞서 말했던 것들 가운데 아무것도 전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디오티마의 입을 빌려서 이렇게 말을 한다.

202d 에로스야말로 좋고 아름다운 것들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그가 결여하고 있는 바로 이것들을 욕망한다

앞서 아가톤과의 대화를 떠올려 보면, 아가톤은 에로스가 아름답다고 했고, 소크라테스는 그렇지 않다고 했다. 그런데 에로스가 아름답다면 에로스는 아름다움의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 가지고 있으니까 더 이상 아름다움을 찾지 않는다.

에로스는 아름답지도 추하지도 않다. 그러니까 에로스는 아름다움을 찾으려고 한다. 그런 존재가 에로스다.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이 영원히 살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이라는 존재를 소크라테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기사자( = 가히 죽을 자)이다. 그런데

인간은 불멸을 욕망한다. 에로스는 인간도 아니고 신도 아니기 때문에 중간에 있다. 죽을 운명에 처한 자인 인간을 대변해서 불멸의 신을 추구한다. 


202e 인간들의 것을 신들에게, 그리고 신들의 것을 인간들에게 해석해주고 전달해 줍니다. 인간들로부터는 탄원과 제사를, 그리고 신들로부터는 명령과 제사의 대가를 해석해 주고 전달해 주지요. 그들 양자의 가운데 있어서 그들 사이를 메워 주고, 그래서 그 전체가 그 자체로 서로 결속되게 해줍니다.

>> "양자의 가운데 있어서" 중간자의 역할. 에로스에 관한 가장 포괄적이고도 적절한 규정이다.


그러면 이제 에로스가 신도 아니고 인간도 아니기 때문에 이런 존재가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이야기해야 할 차례.

에로스의 아버지는 '포로스'라는 신이며 포로스란 수단, 방책이라는 뜻이다. 어머니는 '페니아', 가난, 궁핍을 뜻한다.

어머니는 가난을 뜻하는 인간 여인이고, 아버지는 수단을 뜻하는 포로스 신.

신들의 잔치가 있어서 포로스가 넥타르에 취해서 잠들었을때 페니아가 어떻게 이 가난을 벗어날 수단이 없을까 궁리하다가 동침을 하였다는 신화가 있다. 

그래서 에로스는 어머니를 닮은 구석(= 가난하고 아름답지 않은 늘 결핍되어 있는), 아버지를 닮은 구석도 있어서 아름다운 것과 좋은 것을 얻어낼 계책도 잘 꾸민다.


203e 전 생애에 걸쳐 지혜를 사랑하며, 능란한 마법사요 주술사요 소피스트입니다.

>> 에로스는 사랑의 신이 아니라 사랑을 갈구하는 신이다. 그리고 그때 사랑은 육체적인 것이기 보다는 지혜를 사랑하는 것이다.


204b 지혜는 그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것들에 속하는데, 에로스는 아름다운 것에 관한 사랑이지요. 그래서 에로스는 필연적으로 지혜를 사랑하는 자일 수밖에 없고, 지혜를 사랑하는 자이기에 지혜로운 것과 무지한 것 사이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의 기원이 바로 이것들에게도 원인 노릇을 합니다. 아버지는 지혜롭고 방도를 잘 갖추고 있지만 어머니는 지혜롭지 못하고 방도가 없으니까요.

>> 에로스의 정체에 관한 규정이 일단락 된 것.

여기서 플라톤은 에로스를 철학자의 상징으로 쓰고 있다. 철학은 곧 필로소피아 = 지혜에 대한 사랑, 소포스 = 지혜를 가진자 , 필로소포스 =  지혜를 사랑하는 자,



이제 우리는 에로스에 대한 규정을 정리했으니 하는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 보자.


지혜에 대한 사랑은 "좋은 것이 자신에게 늘 있음에 대한 것"이다. 

늘 좋은 것을 늘 내것으로 하고 싶어 하는 것 이것이 에로스가 가지고 있는 핵심.


앞서 말했듯이 인간은 가사자, 우리가 좋은 것을 늘 가지고 있고 싶어도 인간의 본성상 그것은 불가능하다.

이 지점에서 인간의 불멸에 대한 추구에 대해 소크라테스가 디오티마의 입을 빌려서 말한다.


208b 사실 가사적인 것이 다 이런 방식으로 보존 되지요. 즉 신적인 것처럼 모든 면에서 늘 같은 것으로 있음으로써가 아니라 늙어 가고 떠나가는 것이 그것 자체의 원래 모습과 닮은 또 다른 새로운 것을 남겨놓음으로써 보존됩니다. 소크라테스, 이런 장치에 의해 몸에 있어서든 다른 모든 것에 있어서든 가사적인 것이 불사에 참여하지요. 하지만 불사적인 것은 다른 방식으로 보존됩니다. 그러니 모든 것이 다 본성적으로 자신의 새싹을 귀중히 여긴다는 것에 의아해 하지 마시길. 이런 열성과 사랑이 가사적인 것 모두에게 붙어 다니는 건 바로 불사를 위해서니까요.

>> 좋은 것을 낳아놓음으로서 좋은 것을 이어간다.

죽지만 후세에게 남는 것은 생물학적인 후세가 아니라 좋음을 가진 후세. 이런 의미를 조금만 확장해 보면 당장 플라톤의 향연도 2천년이 넘게 남아서 우리에게 있는 것. 즉, 플라톤이 좋음을 낳아 놓은 것. 후세 사람들이 계속 읽어서 이게 아름다운 것이구나를 느끼고 이런 것이 불멸이 되는 것.

플라톤의 정신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가 생물학적 불멸보다는 정신적 불멸 그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새로운 것을 남겨놓음으로서 보존된다는 것이 꼭 육체적인 새로움이 아니다.



2013-03-30 22회 플라톤의 "향연" 9

에로스의 사다리 차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데에는 5단계가 있고,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로 올라가는 것이다.


에로스의 사다리 이야기 다음에 알키비아데스 이야기가 남아 있다. 이것까지 넓은 의미에서 에로스의 사다리 안에 포함시킬 수 있다면 2단계를 추가하여 7단계로 볼 수도 있다.

예로부터 내려오는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의 신화들을 보면 이런 사다리들이 등장하는데 대개 7단계로 되어있다. 


그런데 알키비아데스가 끼어든 장면은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내려가는 부분.

에로스의 사다리가 아름다움 자체에 대한 앎으로 올라가는 것인데 거기까지 올라간 다음에 사다리를 치우고 나만 잘 지내면 되는 것이 아니다.

참으로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사다리를 타고 내려와서 세상을 교화해야 된다. 그래서 내려오는 것까지 포함시킬 수 있다면 7단계가 되는 것이고, 그렇게 내려와서 세상을 교화시키는 얘기가 알키비아데스 이야기에 포함되어 있다.


* 에로스의 사다리 

1번째

210b 이 일을 향해 올바르게 가려는 자는 젊을 때 아름다운 몸들을 향해 가는 것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 우리에게 가장 직접적인게 몸이다. 그래서 몸을 향해 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런데 첫째 단계 바로 앞에서 디오티마가 소크라테스에게 일종의 경고를 한다.

210a 올바르게 따라가는 경우 이것들의 최동 목표이기도 한 최고 비의(秘儀)는 당신이 입문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어쨌든 내가 말해 주겠습니다. 어떤 노력도 아끼지 않으면서 말입니다. 그러니 당신도 할 수 있는 한 따라오려 노력해 주세요.

>> 디오티마와 소크라테스의 이야기는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제자임에도 소크라테스를 풋내기로 묘사하고 있다. 

플라톤이 말하는 모든 이야기가 사실 소크라테스의 것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은 아닐 것이다. 자신이 쓴 대화편의 주인공은 소크라테스 인데 에로스의 사다리는 플라톤의 정말 공유한 창안물이라는 것을 드러내 보이기 위해서 약간 소크라테스를 풋내기로 묘사한게 아닐까 추측할 수 있다.

하나의 몸이 아름답다는 것을 발견한다면 그것에 이어서 다른 몸도 아름답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2번째

다른 몸으로 가는 것이, 몸에 대한 앎이 보편적인 상태로까지 나가게끔 하는 것이 둘째 단계이다. 앎이 확장되어 가는 것. 

210b 모든 몸들에 속한 아름다움이 하나요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아주 어리석은 일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걸 파악하고 나면 모든 아름다운 몸들을 사랑하는 자가 되어 하나의 몸에 대한 이 열정을 무시하고 사소하다 여김으로써 느슨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3번째

몸에 있는 아름다움보다 영혼들에 있는 아름다움들이 더 귀중하다고 여기는 것이 셋째 단계

영혼들에 있는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에 들어서니까 우리는 질적으로 새로운 또는 우월한 단계에 올라선다


210c 그럼으로써 몸에 관련된 아름다움이 사소한 어떤 것이라고 여기게 될 것입니다.

>> 이게 흔히 말하는 정신적 사랑. 정신적인 것에 대한 추구, 교류 


4단계

정신적인 것으로 올라갔으니까 영혼의 아름다움을 봤으니까 영혼으로서만 할 수 있는 것이 앎, 지식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단계에 이르면 인간은 

210d 아름다움의 큰 바다로 향하게 되고 그것을 관조함으로써, 아낌없이 지혜를 사랑하는 가운데 많은 아름답고 웅장한 이야기들과 사유를 산출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결국 거기서 힘을 얻고 자라나서 어떤 단일한 앎을, 즉 다음과 같은 아름다움에 대한 것으로서의 앎을 직관하게 됩니다.

>> 지식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단계, 그속에서 지혜를 사랑하고 아름답고 웅장한 이야기와 생각들을 만들어 내는 단계


5단계

하나의 앎, 지혜에 관한 이야기들, 이것들을 모두 포괄하는 지식이 있다. 그것을 플라톤은 여기서 아름다움에 관한 앎이라고 얘기를 한다.


210e 그러니 이제 할 수 있는 한 최대의 노력을 기울이도록 노력해보세요. 아름다운 것들을 차례차례 올바로 바라보면서 에로스 관련 일들에 대해 여기까지 인도된 자라면 이제 에로스 관련 일들의 끝점에 도달하여 갑자기 본성상 아름다운 어떤 놀라운 것을 직관하게 될 것입니다. 소크라테스, 앞서의 모든 노고들의 최종 목표이기도 했던 게 바로 이겁니다.


주목해야 할 단어가 "갑자기" 라는 단어이다. 

끝 점에 도달했을 때 본성상 아름다운 것을 직관하는 것은 "갑자기" 일어나는 것. 갑자기라는 술어가 굉장히 의미심장한데 향연 전체 텍스트에 걸쳐서 4번 나온다. 갑자기가 나오면 이야기가 나오면 그 뒤에 나타나는 전개를 주목해야 하는데 플라톤이 보여주는 독특한 수사법.


아름다운 것들을 모두 다 포괄하는 하나의 아름다움, 즉 아름다움 자체.

뭔가 이 위에 엑기스 같은 것이 있어서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에게 그것을 하나씩 나누어주는 그것 자체. 그건 사실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가령 착한 사람이 있다고 하자. 착한 사람이라고 얘기할 때 우리 머리속에 사실은 착함이라는 것이 있다. 이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이 모여서 이러이러한 속성을 착함이라고 정하자고 약속 할 수도 없다. 착한 사람들을 자주 보게 해야 한다. 어느날 이게 착함이라고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불현듯한 깨달음, 이것은 플라톤 철학에서 말하는 멋있는 점이기도 하다.


귀납은 수많은 사례가 모여서 일반원리를 이끌어내는 것인데 거기에서 단 하나의 반증사례라도 나온다면 오류의 가능성이 생긴다.

플라톤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


※ 늘 내 것으로 해야 한다는 데에 까지 가는 것

그러려면 아름다움이라는 목표를 두고 욕망을 참아가면서 끊임없이 자기를 향상시켜서 나아가야하는 한다.

인간은 어찌보면 딱 하나의 몸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에 머물러 있을 수도 있고, 거기서부터 시작하여 아름다움을 추구하겠다는 결단을 내려서 아름다움 자체로 까지 갈 수도 있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것을 권유하고 있는 것.


212b 나 자신도 에로스의 일들을 높이 평가하고 남다르게 연습하며 남들에게도 그러라고 권유한다네. 그래서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내내 힘이 닿는 한 에로스의 능력과 용기를 찬미하려네.


갑자기 라는 단어에 들어 있는 뜻이 알았다는 것도 있고 알았으니 실천하자는 것도 있다.

여기서 앎과 실천이 갑자기라는 말로 연결되면서 이어진다. 그래서 소크라테스가 연습과 용기라는 말을 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에로스에 대한 이야기를 연습하는 것이 아니라 에로스 그 자체를 연습하는 것

그러려면 용기가 필요한다.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하는 가에 대해서 사람들이 끊임없이 떠드는데 그것보다는 공부 그 자체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실은 우리는 에로스에 관한 이야기를 연습을 했다. 계속 하다 보니 소크라테스가 이야기 연습은 그만하고 이제 에로스 연습을 해라고 하는 것.


결국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 버렸다.  172a 나는 자네들이 묻고 있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할 준비가 꽤 되어 있다고 생각하네. 

이게 바로 희랍의 고전 텍스트에서 가장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원형구조. 


이제 에로스의 사다리에 관한 이야기가 끝났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를 더해서 완성을 시켜가는 것이 알키비아데스의 이야기.

아리스토파네스가 무언가 소크라테스에게 토를 달려고 하고 있는데 '갑자기' 바깥문을 두드리는 큰소리가 나면서 알키비아데스가 등장한다.


알키비아데스의 등장도 갑자기이다. 몇 줄 가지 않고 또 갑자기가 나온다.

우리가 천상의 아름다움 자체에 올라가 노닐고 있는데 갑자기 알키비아데스가 등장하여 떨어져 내려오는 것.

알키비아데스의 이야기도 앞의 5단계 못지 않게 중요하다.




2013-04-06 23회 플라톤의 "향연" 10

플라톤의 향연 마지막 시간.

알키비아데스의 이야기를 듣고 끝나는 부분.


마지막이기는 한데 소크라테스와 알키비아데스의 관계가 잘 드러나나 있고 분량이 많지는 않아도 지금까지의 이야기들보다 훨씬 밀도가 높다. 

이 부분만 따로 떼어서 대 여섯번 수업을 할 만한 가치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복잡적인 맥락이 있는 부분.


주인공은 보통 마지막에 나오는데 왜 알키비아데스를 가장 마지막에 넣었을까? 

소크라테스가 에로스에 관해서 전해들은 이야기는 약간 엄숙하는 듯 하면서도 각자가 '나도 에로스에 관해서 연습해야겠다'는 다짐도 하고 좋은 것을 내 것으로 만드는 일상의 실천법을 배웠으니 약간은 들떠 있지 않을까.. 하지만 갑자기 가라앉으면서 분위기가 깨졌다.


그만큼 중요한 얘기가 나올까, 아니면 알키비아데스에 대해서 플라톤이 좋게 생각하지 않는 걸까

알키비아데스가 등장하는 시점을 보면 소크라테스가 아름다움이 무엇이고 또 아름다움 자체에 이르는 방법, 늘 좋은 것을 어떻게 하면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가를 얘기 했는데 그 자리에 알키비아데스는 없었다.

즉 알키비아데스는 소크라테스가 전해주는 비법을 듣지 못했다.

일단 알키비아데스는 비법을 들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거나 또는 못들은 사람으로 만들어 놓고 얘기를 시작하는 것이다.


술에 취해 들어와서는 소크라테스를 발견하고서는 놀라는 장면.

213b 여깃 소크라테스 선생님이와 계시네! 또 숨어서 절 기다리고 계시는 군요. 선생님이 계시리라고는 도통 생각도 못한 곳에 갑자기 나타나곤 하시던 평소의 습관대로 말입니다.

>> 갑자기가 또 나온다.

갑자기 아름다운 자체에 대한 앎으로 올라간다는 장면에서 처음 나왔고, 알키비아데스가 등장하는 부분이 2번째

이제 3번째


알키비아데스에게 에퀵시마코스가 지금까지의 상황을 설명을 해준다. 

에로스에 관한 애기를 하면서 찬미하기로 했었다. 그러면서 알키비아데스에게도 한마디 하라고 권한다.


알키가 여기서 중요한 말을 하는데

214d 선생님이 계시는 한은 다른 어느 한사람도 제가 찬양하지 못할테니까요.

>> 선생님이 에로스를 능가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자신는 에로스에 대해서 찬양 못하겠다는 것.

그러자 곧바로 에뤽시마 코스가 

214d 아니 그럼, 바로 그렇게 하게. 자네가 원한다면 말이네. 소크라테스 선생님을 찬양하게.


알키비아데스는 이제 진실을 말할거라 이야기 한다.

여기서 의문을 가져볼만 한 것이 처음에 등장해서 큰소리로 술취해서 왔는데 지금부터 진실을 말할거야라고 한다.

이게 과연 진실인지는 플라톤이 내놓은 아이러니. 

아무리 술이 취해도 소크라테스의 훌륭함은 내가 감당치 못하겠다, 혹은 술 취한 김에 한번 거짓말을 진실인척 해보지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지금 일반적으로 합의된 사항은 소크라테스가 직접 찬양하기는 쑥스러우니 알키비아데스를 불러다가 찬가를 집어넣었다는 것 


어쨌든 알키비아데스는  소크라테스의 찬양을 시작한다.

우선 소크라테스의 겉모습에 대해 얘기한다.

소크라테스 석상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조각가의 작업장에 앉아 있는 실레노스에 비유한다.

'납작코에 퉁방울 눈을 가지고 있었고 올챙이배와 두터운 입술로' 유명한 겉모습을 얘기한다.

그렇게 말해놓고 이제 내면에 대한 얘기를 한다. 

겉모습의 흉칙함과 내면의 고결함을 확연히 대비시키려고 하는 장치.


그런데 알키비아데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크라테스에게 자신이 반했고, 놀라운 말을 시작한다.

217a 내겐 아주 신적이고 황금과 같으며 아주 아름답고 놀라운 것들로 보였네

'신적이다' 라고 표현한 것이 중요하다.

신이라고 하는 말은 오늘날에는 문장 앞에 주어로 쓰이나 아테나이에서는 신이 고유명사로 쓰이지 않았다.

제우스 신 이렇게 하나 하나의 신을 가리키는 말은 있었어도 신이라고 하는 일반명사는 없었다.

신적이다 그러면 대단하다, 더 이상의 비유를 가져다 댈 수없다, 인간의 경지를 넘어선듯 하다는 그런 형용사로 쓰였다. 


알키비아데스는 소크라테스를 그렇게 훌륭한 분이라 여기고 자신이 반했는데 소크리테스에게 잘 가르침을 받아서 잘 익히면 되었을 텐데 왜 그렇게 못한 것인가?

알키비아데스는 소크라테스에게 배움을 청했고 자기가 소크라테스를 떠나면 어리석은 사람이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 알키비아데스는 누구 밑에서 진득하게 배우는 품성이 없었던 것.


216b 나는 이분이 명하는 일들을 꼭 해야 하는 거냐고 이분에게 반론할 수 없지만 이분을 떠나면 많은 사람들이 주는 명예에 굴복하게 된다는 걸 잘 알고 있거든.

>> '많은 사람들이 주는 명예' 이 것은 곧 정치적인 명성, 다시 말해서 알키비아데스는 '많은 사람들이 주는 명예'와 소크라테스에게 인정받는 것 이 두 사이를 들락 날락하면서 나대고 있었던 것. 또한 많은 사람들이 주는 명예에 굴복을 하고 있는 자신을 스스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소크라테스를 만나서 공부를 열심히 하겠다고 했었던 것.

이 시기에 알키비아데스는 실제로 아테나이에서 명성을 받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소크라테스가 가지고 있는 내면의 고결함을 갖지 못했다.


그렇게 보면 소크라테스에게 다가가서 제자가 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완전히 관계를 끊고 도망가지도 못하는 알키의 처신이 안쓰럽기도 여겨지기도 한다. 선생에게 이쁨받지 못한자의 비애.. 

많은 사람들이 주는 명예, 남들이 나를 알아주었으면 하는 욕망이 끓어오르는데 죽치고 앉아 있을 수가 없었고, 알키비아데스처럼 중간에 서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들락날락하는 모습은 인간이 보일 수 있는 현실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알키비아데스의 이야기는 그에게 변명의 기회를 준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알키비아데스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아래는 소크라테스와 아가톤과의 대화.

222d 친애하는 아가톤, 그의 뜻대로 되는 일이 전혀 없도록 하세. 어느 누구도 나와 자네 사이를 갈라놓지 못하도록 조처를 취하게.

222e 저와 선생님 사이에 앉은 것도 우리를 떼어 놓으려 했다는 걸 보여주는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222e 아무렴, 그리하게. 이리 와서 내 아래쪽에 앉게.


그리고 마지막 4번째 '갑자기' 등장한다. 

223b 아가톤이 소크라테스 선생님 곁에 가 앉기 위해서 일어서고 있었다네. 그런데 갑자기 주흥에 겨워 노니는 자들이 무척이나 많이 문가에 왔는데, 누군가가 막 나가고 있는 바람에 그 문이 열려있는 것을 보게 되자 그들이 막바로 자기들 곁으로 들어와서 앉으려 했다고 하네. 사방이 온통 북세통이 되었고 이젠 더 이상 그 어떤 질서도 없이 모두가 엄청 많은 술을 강제로 마실 수밖에 없게 되었다고 하네.

>> 마지막 '갑자기'에 주의해야 하는 것이 '어떤 질서도 없이 모두가 엄청 많은 술을 강제로 마실 수밖에 없게 되었다' 

술을 마시지 말고 향연을 벌였는데 이 부분을 보면 이제 자리가 거의 엉망이 된 셈. 

어쩌면 당시 현실이나 사람들이 살아가는 일반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


4번의 갑자기 중 마지막 2번의 갑자기가 점진적인 하락을 나타낸다.

취하지 않은 사람은 소크라테스 뿐이고, 이게 진짜 소크라테스를 가장 찬미하는 부분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223d 소크라테스 선생님은 저들을 잠들게 한 후에 일어나 떠나갔고 뤼케이온으로 가서 씻은 후에 다른 때처럼 하루의 나머지 시간을 보내다가 그렇게 날을 보내고 저녁이 되어서야 집에 가서 쉬었다고 했네. 


그는 외부의 상황이 어떠하던 간에 맨정신인 사람이다. 그래서 깨어있는 사람이다. '깨어있는 자 소크라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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