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 카뮈: 최초의 인간
- 책 밑줄긋기/책 2012-22
- 2013. 3. 18.
최초의 인간 - 알베르 카뮈 지음/열린책들 |
제1부 아버지를 찾아서
제2부 아들 혹은 최초의 인간
부록1. 낱장 Ⅰ-Ⅴ
부록2. 최초의 인간(노트와 구상)
부록3. 두 통의 편지
가장 오래된 것과 가장 싱싱한 것의 만남
알베르 카뮈 연보
138 할머니가 죽고 아이들이 떠난 뒤로 동생과 누이는 같이 살고 있었는데 어느 한쪽이 없으면 잠시도 살 수가 없었다. 그는 누군가가 돌봐주지 않으면 안 될 처지였으니 그런 면에서 누이는 그에게 식사며 빨래를 해주고 필요할 때는 병간호도 하는 아내나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아이들이 생활비를 대주므로 돈이 아니라 옆에 있어 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래서 함께 살아온 여러 해 동안 에르네스트가 나름대로 보살펴 주었다. 그렇다, 그들은 살이 아니라 피를 나눈 남편과 아내로서, 둘 다 불구로 인하여 사는 것이 그토록 힘들어진 가운데 서로 도우면서, 비록 짧은 토막말이나 간간이 던지면서 무언의 대화를 이어 가는 것이 고작이지만 정상적인 부부들보다도 서로의 마음속을 더 잘 읽으면서 한데 뭉쳐서 살아왔다.
143 그가 자취를 찾아갔던 아버지에 대해서도 또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그들은 이제 더 이상 가난에 쪼들리지 않았지만 습관이 들어서, 그리고 또 삶의 고통을 견디어 온 사람들 특유의 불신 때문에 여전히 궁핍을 먹고 살았다. 그들은 동물적으로 삶을 사랑하고 있었지만, 삶이란 또한 그 뱃속에 가지고 있는 줄도 몰랐던 불행을 규칙적으로 낳아 놓곤 한다는 것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다가 지금 그의 주위에 말없이, 추억마저 비우고 오직 몇 가지 알 수 없는 영상들에만 충실한 채 허리가 굽어져 가지고 앉아 있는 그들 두 사람은 이제 다 같이 죽음의 바싹 가까이에서, 다시 말해서 항상 현재 속에서 살고 있었다. 그는 결코 그들의 입을 통해서 그의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알게 되지는 못할 것이었다. 그리고 오로지 그들이 자신들의 존재 그 자체 만에 의하여, 가난하지만 행복했던 한 어린 시절로부터 온 신선한 샘물을 그의 내면에 다시 솟아나게 해준다 해도 그의 내면에서 샘솟아 나오는 그토록 풍부한 추억들이 과연 진정으로 그의 어린 시절에 충실한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184 그러자 시험에 합격했다는 기쁨 대신에 엄청난 아픔이 그의 어린 가슴을 쥐어뜯는 것을 느꼈다. 마치 그 합격에 의해서 그는 그의 것이 아닌 낯선 세계, 마음으로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저 선생님보다 다른 선생님들이 더 유식하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세계 속으로 던져지기 위하여 저 가난의 순진무구하고 진정 어린 세계, 사회 속의 섬처럼 안으로 닫혀 있으되 가난이 가족과 유대감을 대신하는 세계로부터 이제 막 떨어져 나왔음을 미리부터 알게 되었다는 듯이. 이제부터 그는 도움을 받지 않고 배우고 이해해야 하며, 그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주던 하나뿐인 그분의 도움 없이 마침내 어른이 되어야 하고, 가상 비싼 대가를 지불하고 드디어 혼자 일어서지 않으면 안 될 것이었다.
203 광장에서 들려오는 한줄기 음악에 귀를 기울이고 야외 음악당 주위 아랍인들의 단단하면서도 무표정한 얼굴, 베이야르의 웃음과 고집 센 얼굴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그리고 또 폭발의 소리가 들리자 파랗게 질리던 어머니의 얼굴을 가슴을 쥐어 뜯는 듯한 정다움과 슬픔과 함께 머릿속에 떠올리며, 그가 오랜 세월의 어둠을 뚫고 걸어가는 그 망각의 땅에서는 저마다가 다 최초의 인간이었다. 또 그 땅에서는 그 역시 아버지 없이 혼자서 자랐을 뿐, 이야기를 해도 좋을 만한 나이가 되기를 기다렸다가 아버지가 아들을 불러서 집안의 비밀을, 혹은 오랜 옛날의 고통을, 혹은 자신이 겪은 경험을 이야기해주는 그런 순간들, 우스꽝스럽고 가증스러운 폴로니어스조차 레이티스에게 말을 함으로써 돌연 어른이 되는 그런 순간들을 그는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었다. 열여섯 살이 되어도 스무 살이 되어도 아무도 그에게 말을 해주지 않았고 그는 혼자서 배우고 혼자서 있는 힘을 다하여, 잠재적 능력만을 지닌 채 자라고, 혼자서 자신의 윤리와 진실을 발견해 내고 마침내 인간으로 태어난 다음 이번에는 더욱 어려운 탄생이라고 할, 타인들과 여자들에게로 또 새로이 눈뜨지 않으면 안 되었다.
253 어머니는 다정하면서도 건성인 키스로 응해 주고 나서는 박명(薄明) 속의 그 부동자세로 되돌아가 자신이 앉아 있는 언덕의 저 발아래서 지칠 줄도 모른 채 흘러가고 있는 삶의 흐름과 거리 쪽으로 지칠 줄도 모른 채 시선을 던지고만 있었고, 아들은 목이 컥 막혀 오는 것을 느끼면서 지칠 줄도 모른 채 어둠 속의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러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불행과 대면한 채 불안 가득한 눈으로 구부리고 있는 그 메마른 등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280 방학을 즐기지 못하는 권리를 갖기 위하여 거짓말을 하고, 그토록 좋아하는 여름 하늘과 바다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을 하고 나서, 학교 공부를 다시 시작하기 위하여 또 거짓말을 한다는 이 부당함을 생각하니 죽고 싶을 정도로 가슴이 막혔다. 쾌락을 위한 거짓말에 끌려 들어갈 줄은 모르는 터이고 보니 가장 나쁜 것은 어차피 하지 못하고 만 그 거짓말들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잃어버린 그 즐거움들, 빼앗겨 버린 한철 동안의 햇빛 속에서의 휴식이었다.
282 할머니는 다시는 그를 때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집에 월급을 벌어 오기 위하여 비썩 마르고 근육질이며 더벅머리에 과격한 눈매를 번뜩이며 여름 내내 일을 했던 그 소년 속에서 과연 옛날의 그 어린아이는 죽어서 이제 막 고등학교 축구부의 정식 골키퍼로 지명되어 다시 태어났고 그보다 사흘 전에는 깜빡하는 바람에 어떤 처녀의 입술을 생전 처음으로 맛보았기 때문이다.
290 그리고 그 역시, 어쩌면 그녀보다도 더, 조상도 기억도 없는 땅, 그에 앞서 이 세상에 왔던 사람들의 소멸이 더욱 완벽했었던 고장, 늙어 가면서도 문명된 나라들 [ ]에서처럼 우수를 통한 위안을 얻을 수 없는 고장에서 태어났기에, 어쩌면 그녀보다도 더, 단번에 그리고 영영 으깨져 버릴 운명인 고독하고 항상 진동하는 큰 파도처럼, 완전한 죽음과 맞서 있는 순수한 삶의 열정인 그는,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세월의 물살 위로 그를 들어 올려 주었고, 가장 모진 상황들을 만나면 그에 버금가는 능력을 갖도록 자양을 제공해 주었던 그 알 수 없는 힘이, 그에게 삶의 이유들을 부여해 주던 그 지칠 줄 모르고 한결같은 너그러움으로 늙어 갈 이유와 반항하지 않고 죽을 이유 또한 그에게 제공하리라는 맹목적인 희망에서만 자신을 맡긴 채, 오늘 삶이, 젊음이, 존재들이 어떻게 구해 볼 길도 없이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가장 오래된 것과 가장 싱싱한 것의 만남>
369 끝으로 그는 그 새로 쓰는 작품의 중심에는 <한 어머니의 저 탄복할 만한 침묵, 그리고 그 침묵에 어울릴 수 있는 정의, 혹은 사랑을 찾기 위한 한 사나이의 노력>을 갖다 놓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거기에는 카뮈의 저 감동적인 예술론이 결론으로 이어진다.
한 인간이 이룩한 작품이란, 예술이라는 우회의 길들을 거쳐, 처음으로 가슴을 열어 보였던 한두 개의 단순하고도 위대한 이미지들을 다시 찾기 위한 기나긴 행로에 지나지 않는다.
마침내 카뮈는 1959년 5월, <안과 겉>을 썼던 <그 모든 것>을, 아니 지금까지 서투른 형식으로 썼던 모든 작품들을, 다른 말로 바꾸어 <아직 시작조차 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작품을 전혀 새로운 형식과 격조와 방대한 서사적 구조로 <다시 쓰는> 기나긴 <우회>의 행로에 오른 것이다. 그것이 바로 여기에 소개하는 <최초의 인간>이라고 나는 믿는다. 따라서 이 작품이야말로 카뮈에게 있어서는 일생일대의 승부요 그의 모든 역량의 집대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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