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주의의 뿌리 | 01 낭만주의의 정의를 찾아서


필사본이 있어서 별도로 강의 내용을 요약하지 않았다.


강유원의 낭만주의의 뿌리 강의 1

강의 교재: 이사야 벌린의 <낭만주의의 뿌리>

강의 목차: 1강 낭만주의의 정의를 찾아서

               2강 계몽주의에 대한 최초의 반격

               3강 낭만주의의 진정한 아버지들

               4강 억제된 낭만주의자들 (1)

               5강 억제된 낭만주의자들 (2)

               6강 해방된 낭만주의

               7강 지속되는 영향력

               8강 지속되는 영향력


도서목록: 아르놀트 하우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3권

             칼 쇼르스케: 세기말 비엔나

              앨런 재닉,스티븐 툴민:빈, 비트겐슈타인, 그 세기말의 풍경

              데이비드 하비: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




2006년 여름 풀로엮은집

낭만주의 강의

강사 : 강유원

필사 : 이재만

교재 : 이사야 벌린,『낭만주의의 뿌리』(The Roots of Romanticism), 이제이북스,2005


1강 낭만주의의 정의를 찾아서

『이사야 벌린의 자유론』(아카넷)은 정치사상에 관한 책이고,『낭만주의의 뿌리』는 낭만주의와 같은 그 밖의 주변부에 관한 강연을 담은 책이고,『비코와 헤르더』(민음사)는 학문적 방법론에 관한 책이다. 이 세 권을 읽으면 이사야 벌린의 학문적 영역을 대체로 알 수 있다. 이 세 가지를 골고루 영어로 맛보고 싶다면『The Proper Study of Mankind』를 읽으면 된다. 이 책은 하나의 제목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쓴 것이 아니라 여러 논문들을 영역별로 모아 놓은 것이다.


이번 강의에서 지금 들고 나온 책들을 모두 읽을 생각은 없다. 이번 강의의 목표는 『낭만주의의 뿌리』이 한 권을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읽는 것이다. 텍스트를 깊이 있게 읽고 싶다면 그 텍스트의 특성을 먼저 살펴봐야 한다. 우리는 그 부분에 관한 교육을 거의 받지 않은 상태에서 책을 읽어왔다. 다시 말해 ‘밑줄 쫙~’ 중심으로 공부해왔다. rhetoric, 수사학의 측면에서 책을 읽는 것에 관해 대학 다닐 때도 배운 적이 없다.


『낭만주의의 뿌리』는 이사야 벌린의 강연을 녹취해서 책으로 만든 것이다. 이 점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벌린이 어떻게 강연했는지는 동영상이 남아 있지 않아서 알 수 없다. 지난 번에 강의할 때 Harvey Mansfield에 관해 언급한 적이 있다. 이 사람은 레오 슈트라우스의 제자로 정치학 전공자이다. 마키아벨리의『군주론』은 이탈리아어로 쓰여졌는데, 영어판 군주론 중 최고의 번역을 해낸 사람이다. 슈트라우스의 제자들이 아주 강점을 보이는 텍스트들이 몇 개 있다. 플라톤의『국가론』, 마키아벨리의『군주론』등이 그렇다. 플라톤의『국가론』은 Allan Bloom의 번역이 좋다고 정평이 나 있다.


이른바 보스턴 교양주의라는 것이 있다. 보스턴을 중심으로 한 명문 대학들에는 noble하고 귀족적인 것을 추구하는 이들이 있다. Harvey Mansfield는 보스턴 교양주의를 갖추고 있는 미국의 우파인데, 이 사람이 강연한 동영상이 있다. 그걸 보면 나처럼 상스럽게 강의하지 않는다. 우리가 입으면 지쳐버리는 단추 두 개 달린 양복입고 묵직하게 강연한다. 내가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이 사람이 쓴 책을 보면 구사하는 영어가 굉장히 고급 영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고급스러운 인문학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다. 하버드 대학은 원래 신학대학이었기 때문에 인문학이 없었다. 다 영국에서 이식되어간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modern Western tradition 을 따르는 진짜 교양 있는 사람들을 꼽아보라고 하면 벌린 같은 이들을 꼽는다. 이제 어떤 식으로 벌린이 강연을 했을지 짐작이 갈 것이다.


벌린, Collingwood, Cornford 같은 이들이 서구 교양주의에 속하는 인물들이다. Cornford는 고대 그리스 철학을 전공한 사람이다. 이 사람 책 중에『종교에서 철학으로』(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가 있는데, 이 책을 보면 특정 영역에 국한되지 않고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시작해서 고대 그리스 철학을 쫙 훑은 다음 사상사적으로 재정리하고 있다. 철학과에서 가르치기도 그렇고, 종교학과에서 가르치기도 그렇고, 사학과에서 가르치기도 어려운 텍스트들이 있지 않은가. 그런 텍스트들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이다.


이 책이 가지고 있는 레토릭이 있다. 분명 벌린은 강의노트를 가지고 강연을 했을 텐데, 말을 끊지 않고 계속 말한다. 가령 예를 하나 들어보자.


“이것이 불가능하기에 완벽한 삶이라는 전체 개념 - 모든 인간이 추구해야 하는 목표로서의 인간 이상이 존재하며, 이런 종류의 질문들에는 바로 화학이나 물리학, 수학에서 원리적으로 최소한 어떤 종류의 궁극적인 답변이 주어지듯이, 또는 궁극적이지는 않다 해도 어느 정도는 궁극에 가까워서 우리가 지금까지 얻은 어떤 대답보다도 궁극적이며, 같은 방향으로 계속 진행한다면 궁극적인 해답에 더욱 가까워지리라는 희망이나 최소한 가능성이 있는 특정한 질문들에 대답이 존재하듯이, 어떤 종류의 대답이 존재한다는 전체 개념 - 이 붕괴한다.”(107쪽)


벌린이 이렇게 문장을 길게 쓰는데, 자세히 보면 점층법을 쓰고 있다. 어떤 전체 개념을 설명할 때 어떤 경우에는 넓은 범위에서 좁은 범위로, 또 어떤 경우에는 아주 사소한 실마리를 잡아서 모든 범위로 확장한다.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집중이 되게끔 말한다. 이것이 이 책의 수사학적 특징이다.


모든 책들을 이렇게 볼 필요는 없다. 그러나 상당히 많은 고전들은 그런 방식으로 쓰여졌다. 고전을 읽을 때는 그것이 가지고 있는 형식적인 특징들에 굉장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근대 이전의 고전들은 숫자를 가지고 장난을 친다. 예를 들어 마키아벨리의『군주론』은 모두 26개의 섹션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전에 쓰여진 『로마사 논고』에서 마키아벨리가 다루고 있는 군주들이 26명이다. 그런 식으로 계산을 하고 쓴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에 관해 충분히 생각할 필요가 있다.


더구나 이사야 벌린 같은 서양의 고전학자들은 단순한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고전적인 사람들이다. Classic하다는 것은 Ancient와 거의 동의어이다. 다시 말해 그들은 17세기 이전 것들을 시대적으로 Classic으로 본다. 그 이 후에 나온 것, 과학적 세계관이 등장한 이후에 나온 것은 심하게 말하면 쌍티나는 것이라고 본다. 이 책에서 벌린이 낭만주의에 대해 상당히 좋게 평가하고 있지만, 그 저변에는 싸구려라는 생각이 있다. 그러면서 동시에 계몽주의도 별 볼일 없는 것이라고 본다.


벌린은 기본적으로 비코나 헤르더까지, 즉 15~16세기까지를 한계로 본다. 서양의 고전학자들이 classic research를 하고 있다고 말하면, 플라톤부터 시작해서 길게 잡아야 단테, 마키아벨리까지이다. 17세기 이후에 나온 것들은 고전으로 취급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최소한 5, 6백년 전이어야 한다.


서양의 고전학자들이 가장 만만한 고전 입문서로 집어 드는 텍스트가 단테의『신곡』이다. 고전을 읽는다고 하면 일단『신곡』에 관해 대화를 할 줄 알아야 한다. 기본적으로 대화를 할 수 있는 코드를 맞추어야 한다. 그런데『신곡』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단테는 굉장히 종교적인 사람이다. 지금 우리는 신화, 종교, 정치, 철학을 분리해서 알고 있다. 고전을 쓴 사람들은 이걸 분리해서 알고 있는 우리와는 기본적인 mentality 자체가 다른 것이다. 가령 플라톤의 대화편 중 정치가편을 보면, 정치가는 신적인 정치가여야 한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느닷없이 신화를 가져다가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티마이오스를 보면 창조자 이야기가 나온다. 신화, 종교, 정치, 철학이 경계 없이 넘나들고 서로 엉켜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 한국인들, 그리고 현대 서구인들도 이해하기 어려운 텍스트가 된다. 언어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현대 서양인들이나 한국인들이나 어렵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러니까 절망할 필요 없다. 적절한 안내를 받으면 할 수 있다.


벌린이 이 강연을 하기 전에 읽은 텍스트들이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말을 하면 그 사람이 어떤 배경에서 배웠는지, 어떤 텍스트를 읽었는지를 알 수 있듯이, 벌린이 읽은 것을 알아야 그가 써놓은 것을 알 수 있다. 벌린은 서양 고전들을 읽었고, 그 저변에 놓여 있는 mentality를 알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이 어려운 것이다. 단편적인 지식만을 가지고는 읽다가 지쳐버린다. 처음 이 책을 읽는 방법을 알려주자면, 여기에 나오는 구체적인 내용을 모른다고 해서 절망하지 말고 텍스트를 즐기라는 것이다. 소리 내서 읽어보라. 강연이기 때문에 번역할 때 벌린의 장중한 입말을 살리기 위해서 애썼다. 최종 원고를 넘기기 전에 처음부터 끝까지 소리 내서 읽어봤다. 나는 소리 내서 읽어봐서 껄끄럽지 않으면 번역이 잘 됐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항상 번역 원고를 넘기기 전에 소리 내서 읽어본다. 소리 내서 읽고 눈으로 읽으면서 텍스트를 즐겨라.


내가 서해문집에서 나온 단테의『신곡』을 짜증스러워 하는 이유는, 번역은 정확하지만 원래 운문인『신곡』을 산문으로 번역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레토릭을 즐길 수가 없다. 단테는 이탈리아어로 운율을 맞춰 썼다. 이탈리아 사람에게 들으니 『신곡』을 소리 내서 읽으면 무척 즐겁다고 한다. Longfellow가『신곡』을 영어로 번역했는데, Longfellow는 시인이기 때문에 그걸 읽어 보아도 운율이 있어서 굉장히 즐겁다. 일단 고전은 레토릭을 즐겨야 한다. 고전 번역에 관한 여러 가지 원칙이 있는데, 사치스러운 조건일 수도 있지만 한 가지 덧붙이자면 우리말로도 레토릭을 즐길 수 있도록 번역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다 그랬던 건 아니지만 나는 내가 잡은 텍스트에 한해서는 그렇게 하려고 노력한다.


텍스트에 주눅들 필요 없다. 우리는『낭만주의의 뿌리』, 단테의『신곡』, 마키아벨리의『군주론』을 읽고 시험 볼 사람들이 아니다. 그리고 대학에서 그것을 가르치고 시험 보는 선생도 없다. 그저 읽고 즐길 수 있을 만큼 즐기면 된다. 읽을 때 중요한 부분이 어딜까 고민하지 마라.


즐기는 차원에서 책을 잠깐 들여다보자. 나 혼자만 알고 있는 독법 같은 것 없다. 항상 다 알려준다. 114쪽 펴라. “칸트는 과학의 신봉자였다”라는 문장이 있다. 나는 이 문장에 밑줄을 쳤다. 이 챕터는 ‘억제된 낭만주의자들’이다. 그렇다면 칸트는 낭만주의자이긴 한데 낭만주의 티를 못 내는 낭만주의자라는 말이 아니겠는가? 벌린은 어떻게든 칸트를 낭만주의의 아버지로 엮어 보려고 하는 사람이다. 칸트의 철학과, 칸트의 시대적 배경과, 칸트 철학의 전개과정과 그것의 낭만주의와의 관계가 모두 “칸트는 과학의 신봉자였다”라는 말로 집약된다.


“그는 엄격하며 극도로 명징한 정신의 소유자로, 쉽게 이해하기 힘든 글을 썼으나, 모호하게 쓴 적은 거의 없었다. 그 자신이 뛰어난 과학자이기도 했던 (그는 우주론자였다) 칸트는 과학의 원리가 그 어떤 학문의 원리들보다 심오하다고 믿었으며, 과학적 논리와 과학적 방법의 근거를 설명하는 것을 일생의 과업으로 삼았다.”(114쪽)


『순수이성비판』은 과학의 신봉자로서 칸트의 뛰어난 업적이다.『순수이성비판』의 목적은 순수 수학과 순수 물리학에 철학적 기초를 제공하는 것이다. 나 칸트는 과학의 신봉자로서 기꺼이 과학에 철학적 기초를 제공하겠다고 말한 것이다. 그만큼 과학을 존중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 다음 문단을 보면 “칸트는 사실 인간의 자유라는 관념에 경도되어 있었다”라는 문장이 나온다. 칸트는 한편으로는 과학의 신봉자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보면 서양 철학에서 칸트만큼 인간의 내면적 자유를 모든 구속으로부터 해방시킨 사람이 없다. 내가 입만 열면 버릇처럼 하는 말인데, 니체 따위는 칸트에 비하면 하수이다. “신은 죽었다”고 말할 필요가 없다. 칸트는 은밀하게『순수이성비판』이라는 잘 드는 칼을 가지고 한 번에 신의 목줄을 끊어냈다. 악 쓰고 지랄하지 않고. 제일 무서운 사람이 이런 사람 아닌가? 칸트는 신의 암살자이다. 대놓고 신은 죽었다고 떠드는 것과는 질이 다르게 규모 있고 체계적으로 단칼에 해치운 사람이다. 그 전까지 서양인들에게 인간의 자유라는 것은 없었다. 신에 의해 제약되어 있었다. 그런데 칸트는 인간 내면의 주관적 자유를 외부의 어떤 제약과도 무관하게 인간 고유의 것으로 세운 사람이다.


칸트가 인간의 내면적 자유를 극도로 존중했다는 것, 바로 이것이 칸트 철학이 낭만주의의 저변에 놓이게 되는 이유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칸트는 과학의 신봉자였다”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문장이 될 수 있다. 텍스트를 읽을 때, 지금 내가 어떤 맥락에서 읽는지, 그리고 내가 이 텍스트에서 무엇을 얻어내려 하는지에 따라, 어떤 부분은 밑줄을 치고 어떤 부분은 그냥 넘어갈 것인지가 결정된다. 이 점을 생각하면 텍스트를 즐길 수 있다. 내용을 다 알아야 이해할 수 있을 거라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 대신 혼자 읽은 것이니 어디에 써서 발표하지는 마라. 그건 안 된다. 엄밀한 독법들이 있기 때문에, 너는 네 마음대로 나는 내 마음대로 이건 아니다. 텍스트에 대한 스트레스를 없애기 위해서 말한 것이지,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공적인 권위를 획득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내가 이 책을 읽은 이유는 선생님의 권유 때문이다. 이것이 책 읽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선생님이 헤겔 철학을 이해하는 데 있어 독일 낭만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셔서 읽었다. 헤겔 철학이 고도로 이성적인 철학인 것 같지만 사실 그 밑에는 헤겔이 당시의 시대로부터 도저히 벗어나지 못했던 낭만적인 추동력들이 있다.


우선 목차를 펴라. 1장 ‘낭만주의를 찾아서’ introduction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2장‘계몽주의에 대한 최초의 반격’은 낭만주의를 말한다. 3장 ‘낭만주의의 진정한 아버지들’, 4장 ‘억제된 낭만주의자들’, 5장 ‘해방된 낭만주의’, 6장 ‘지속되는 영향력’ 이렇게 역사적 순서를 따르고 있다. 이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오늘은 1장 ‘낭만주의의 정의를 찾아서’를 읽는다.

“여러분은 이 강의가 어떤 식으로는 낭만주의를 정의하거나 적어도 어떤 일반론을 통해, 여기서 내가 말하는 낭만주의의 뜻을 명확히 하는 것으로 시작하리라 기대할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런 뻔한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 한다.”(9쪽)


즉 이사야 벌린은 낭만주의에 대한 정의를 초두에 내리고, 그것을 어떻게 하겠다는 식으로 강의를 진행한 것이 아니다.


9쪽에 라신, 포프, 워주워스, 콜리지, 호메로스, 칼리다사, 이슬람화 되기 전의 아라비아 서사시, 중세 스페인의 시가 등이 나오는데 이런 것들 모른다고 해서 이 책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낭만주의는 베르길리우스가 묘사했던 어두운 동굴처럼 어느 곳을 향해 걸어도 한 방향에만 이르도록 되어 있지 않으면, 폴리페모스의 동굴처럼 한번 들어간 사람은 결코 살아 나오지 못하는 곳이다. 내가 이 주제를 선택하면서 약간의 두려움을 느끼는 것도 바로 이런 까닭이다”(10쪽)


멋진 문장이다. 이런 것을 즐겨야 한다. 그 다음 문단이 이 책 전체의 주제이다. 이건 누구나 알 수 있다. 이 책 내용만을 파악하고자 하는 사람은 더 이상 읽어나갈 이유가 없다.


“낭만주의의 중요성은 이것이 서구 세계의 삶과 사고를 근본적으로 바꾼 가장 광범위한 근대의 운동이라는 것이다. 내게 이것은 서구인들의 의식에 일어난 단일한 변화로는 가장 거대해 보이며, 19세기와 20세기에 일어났던 다른 모든 변화들은 이보다 비교적 덜 중요하거나, 적어도 이 운동에 깊이 영향을 받은 듯하다.”(10쪽)


이 문단에서 가장 중요한 한 단어가 무엇인가? ‘근본적으로’이다. 서구 세계의 삶과 사고를 근본적으로 바꿨다는 것은, 아까 말한 classic과 modern의 단절을 결정적으로 매듭지은 것이 19세기 낭만주의 운동이라는 것이다.


이 책을 읽은 후에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책으로는 칼 쇼르스케의『세기말 비엔나』(구운몽), 『빈, 비트겐슈타인, 그 세기말의 풍경』(이제이북스), 데이비드 하비의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생각의나무)가 있다. 이 책들의 특징은 19세기 말, 즉 세기말을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혼란스러운 세기말의 특징은 18세기 후반~19세기 초 낭만주의에서 유래한 것이다.


계몽주의도 서구 세계의 핵심적인 단절 중 하나이다. 그러나 적어도 계몽주의가 깨뜨리지 않은 것이 하나 있다. 이 책에도 나오는데, 계몽주의는 종교적인 것을 부인했을지언정 세계를 파악하는 객관적인 진리 모형이 있다는 것은 부인하지 않았다.


이것은 고대세계로부터 이어져온 것이다. 그런데 낭만주의는 이것마저 폐기시켜버렸다. 벌린이 서구 세계에 있어 낭만주의가 계몽주의보다 더 중요하다고 여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 예로, 고대 그리스의 철학과 문학을 생각해 보자. 플라톤의 철학을 읽는 사람은 그가 기하학적 모형이나 수학적 모형을 따르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10쪽)


플라톤은 세계를 이해하는 객관적인 진리 기준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을 요즘에는 패러다임이라고 말한다. 플라톤은 어떤 전형을 인정하는 것이다. 다음에 나오지만, 히브리 사람들은 고대 그리스인들과는 다른 모형으로 세계를 이해한다. 그것이 특정한 시대에 특정한 집단에 의해 공유된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각자가 가지고 있는 기준을 존중해준다. 벌린은 6장 ‘지속되는 영향력’에서 낭만주의의 긍정적인 성과 중 하나가 각각의 개인이 가지고 있는 내면의 심성을 존중하는 태도가 낭만주의 이후 널리 퍼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다른 한편 객관적 기준이 없기 때문에 상당히 혼란스럽고 고통스러울 수도 있다.


“어딘가에 완전한 통찰이 존재하며, 엄격한 훈련이나 방법만 있으면 수학에서의 차갑고 추상적인 진리와 어느 정도 유사한 이러한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관념은, 플라톤 이후의 수많은 다른 철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11쪽)


플라톤의 경우 ‘완전한 통찰’은 초월적인 세계에 있고,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 각각의 개별적인 사물 속에 있다. 진리가 있고, 엄격한 훈련이나 방법만 있으면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 따라서 고대의 철학책들은 교육학 저서이다. 플라톤의『국가』는 어떤 국가를 만들 것인가에 관한 책이다. 국가의 이념뿐만 아니라 아이들을 기르는 방법, 재산을 소유하는 방법 등에 관해 말한다. 이런 것들이 ‘엄격한 훈련이나 방법’에 해당한다.


서양 철학에서 플라톤의 역할의 중요성을 나타내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엄격한 훈련이나 방법만 있으면 수학에서의 차갑고 추상적인 진리와 어느 정도 유사한 이러한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관념”, 즉 패러다임이 있고, 이 패러다임이 바로 객관적인 진리 기준이 될 수 있다는 모형을 만들어낸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사람들은 물론 이와 비슷한 관념을 가지고 있었으며, 스피노자 같은 철학자를 비롯해, 18세기나 19세기 철학자들도 분명, 절대적이지는 않다 해도 어느 정도 절대적 진리에 가까운 무엇에 도달하여 이것으로 세상을 정리하고 어떤 종류의 합리적 질서를 세우는 것이 가능하며, 그 안에서 공들여 습득한 지식을 사용 하고 보편적으로 이해 가능한 이성을 적용하면, 마침내 과거에 인간을 그토록 무수한 파멸의 길로 이끌었던 비극과 악덕과 우매함을 피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11쪽)


벌린이 하는 이야기를 보라. “절대적 진리에 가까운 무엇에 도달하여”, 이건 철학적인 영역이다. 경험을 통해서건 오로지 이성적인 통찰을 통해서건, 절대적 진리에 도달한다는 것은 넓은 의미에서 합리적인 것이다. 질서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서양 철학은 플라톤 철학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하면, 기본적으로 합리적인 것이다. 합리적이라는 것은 이해 가능하다는 것이다. 낭만주의 이전에는 다 이해 가능한 철학들이었다. 그 다음에 “이것으로 세상을 정리하고”, “어떤 종류의 합리적 질서를 세우는 것이 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나쁘게 말하면 철학자의 오만이다.


“그 안에서 공들여 습득한 지식을 사용하고 보편적으로 이해 가능한 이성을 적용하면, 마침내 과거에 인간을 그토록 무수한 파멸의 길로 이끌었던 비극과 악덕과 우매함을 피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이것이 플라톤의 의도이기도 하고 계몽주의자들의 의도이기도 하다. 플라톤이 왜 정치철학을 했는가? 전쟁 나서 고대 아테네 폴리스가 콩가루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겠는가? 질서를 세워야 한다. 질서는 어떻게 세우는가? 변하지 않는 절대적 지식을 철학자가 알고, 그걸 안 사람이 철학자이니 그가 정치를 해야 한다. 이것이 서양 사상의 기본적인 지식인론인 동시에 모형이다.


“이것은 한 가지 모형을 예로 든 것에 불과하다. 이러한 모형들은 언제나 인간을 과오와 혼란으로부터, 그들이 하나의 모형을 가지고 설명하고자 하는 어떤 불가해한 세계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에서 출발하지만, 거의 예외 없이 바로 그 동일한 인간들을 노예로 만들고, 경험 전체를 설명하는 데 실패하는 것으로 끝난다. 해방자로 시작하여 일종의 독재자로 끝을 맺는 것이다.”(11-12쪽)


벌린의 성향에 관해 말해보자면, 그는 기본적으로 자유주의자이다. 자유주의자는 개인주의자로, 개인의 이성적 판단을 중시한다. 자유주의자의 한계는 개인의 이성적 판단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사회의 구조적 측면까지는 나아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이들이 벌린, 칼 포퍼 같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어떤 구조를 누군가 먼저 세운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다. 굉장히 긍정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 즉 전체주의적 성향이 강한 집단에서는 이러한 의미의 자유주의가 긍정적일 수 있다. 이에 반해 일반적으로 보수주의자들은 대다수 개인은 이성적 판단을 할 수 없으며, 몇몇 사람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대다수 개인은 passion(정념)에 의해서 움직인다고 생각한다.


벌린은 어쨌든 긍정적인 의미에서 개인의 이성적 판단을 중시한다. 그렇다면, 개인의 이성적 판단을 중시하고, structure에 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에, 그것을 불신하기 때문에, 벌린은 모형을 가지고 설명하려는 시도에 대해 궁극적으로 어떤 태도를 취하겠는가? 그리 마뜩해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벌린이 반계몽주의적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이 책의 입장이 미묘한 것이, 낭만주의를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계몽주의를 적극적으로 비판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누군가 전에 liberal로 살아가는 것은 어렵다고 말했다. 자유주의자들은 개인의 이성적 판단을 중시하지만, 개인들을 모두 사회 속에서 살고 있다. structure를 어느 선까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데 structure를 인정하게 되면 자기의 출발점에 있는 신조 자체를 부인하게 된다. 상당히 피곤한 인생을 살게 되는 이들이 전형적인 자유주의자들이다.


“모형을 가지고 설명하고자 하는 어떤 불가해한 세계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에서 출발하지만”, 즉 이해 불가능한 것을 이해 가능한 것으로 만들려면 그 사이에 모형이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모형은 나쁘게 말하면 simplify, 단순화하는 것이다. 피타고라스가 수학적 모형을 가지고 세계를 설명하려 했듯이, 모형은 굉장히 폭력적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모형을 거칠 때 우리는 불가해한 세계로부터 해방된다. 사람들은 강유원이 우파인지 좌파인지 딱지를 붙이고 싶어한다. 그것도 일종의 모형을 사용하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보고 싶지 않은 것이다. 또 있는 그대로 보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카테고리에 들어오지 않으면 이해가 잘 되지 않으니까 어떻게 해서든 그 속으로 집어 넣고 싶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모형의 폭력이다.


그런데 “거의 예외 없이 바로 그 동일한 인간들을 노예로 만들고, 경험 전체를 설명하는 데 실패하는 것으로 끝난다.” 경험 전체를 설명하는 데 실패한다는 것은, 방금 말했듯이 단순화하다 보니 세세한 것들은 추상화시킬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한다.


그 다음 문장이 멋지다. “해방자로 시작하여 일종의 독재자로 끝을 맺는 것이다.” 이런 말은 멋진 말이긴 하지만 따다가 아무데나 쓰진 말아달라. 니체의 독자들처럼 제발 그러지 말아달라. 니체의 책을 읽어보면 앞에 설명이 있고 맨 나중에 멋진 말이 들어간다. 그런데 맨 나중 말만 따다 쓰면 얼마나 추접스러운가. 갑자기 필 꽂혀서 외우고 그러는데 그러지 말라. 앞에 한 문단이 있기 때문에 이 문장이 멋지게 되는 것이다.


플라톤의 사례를 들어 말했는데, 벌린이 단순화해서 말하기를, 고대 그리스는 전형적으로 수학적 모형을 사용해서 세계를 이해하려 했다.


“고대 그리스와 비교되는, 그와 비슷한 시대에 있었던 성서와 유대인들의 문화를 살펴보자.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인들에게는 불가해해했을 전혀 다른 지배적 모형과 전혀 다른 관념의 집합을 발견하게 된다.”(12쪽) 


토마스 쿤의 용어를 빌려다 말하자면, 패러다임들은 서로 통약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다른 모형을 이해하는 것이 어렵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근대를 사는 우리가 플라톤의 모형을 이해하려면, 고대 그리스의 모형 전반을 이해하려면, 성서와 유대인들의 모형을 이해하려면 어떻게 해야겠는가? 이것이 두 번째 문제로 제기된다. 아까도 말했듯이, 고대의 텍스트들을 읽을 때 이해되지 않은 이유는 그들의 mentality와 모형을 우리가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가장 좋은 방법은 안 읽는 것이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다. 한 가지 방법은 사상사의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다. 벌린은 그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긴 사람이기도 하다.


13쪽을 보면 “상이한 모형들이 얼마나 낯설게 느껴질 수 있는가에 대한 얘기를 해보겠는데... 잠바티스타 비코... 는 아마도 고대 문화의 생소함에 주의를 기울이게 한 최초의 학자일 것이다”라고 했다. 벌린은 비코의 방법론을 빌려오겠다는 것이다.

아까『비코와 헤르더』라는 책이 있다고 말했다. 벌린은 비코에게서 고대 세계를 이해하는, 또는 서로 상이한 모형들을 이해하는 방법을 빌려온다.


“좀더 친숙한 예를 들어 보자. 아리스토텔레스가『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우정을 주제로 논할 때, 그는 우리에게 다소 놀라운 방식으로, 세상에는 다양한 종류의 우정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두 가지 종류의 우정이 있어서, 한편으로는 자기 인생 전부를 사랑에 바치거나 적어도 열정적으로 사랑의 감정에 빠진 이들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서로에게 신발을 파는 이들이 있는데, 이들 두 부류의 사람들이 같은 유개념에 속한 종이라고 말하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는 사실은... 오늘날의 우리들이 받아들이기에는 다소 어렵다.”(14쪽)


아리스토텔레스는 열정적으로 사랑의 감정에 빠진 이들을 가리킬 때도 우정이라는 말을 쓰고, 서로에게 신발을 파는 이들을 가리킬 때도 우정이라는 말을 쓴다. ‘서로에게 신발을 파는 이들’, 이 표현 정말 멋지지 않은가? 가령 여기에 다른 물건, 이를테면 신발 대신 도자기를 썼으면 대조가 뚜렷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이런 사례들을 제시하는 것은 단순히 이런 고대 문화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이질적임을 보여 주기 위해서일 뿐 아니라, 그저 무비판적으로 고전들을 읽는 것만으로는 알 수 없는 더 커다란 변화가 인간 의식의 역사에서 일어나왔음을 알리기 위해서이다.”(14쪽)


모형이 있고, 그 모형을 알아야 한다. 여기까지는 쉽게 갔다. 그 모형을 알려면, 인간 의식의 역사에서 일어난 커다란 변화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낭만주의를 알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까 말했듯이, 인간 의식의 역사에서 일어난 ‘근본적인’ 변화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낭만주의를 기점으로 해서, 그 이전과 이후에는 서로 전혀 다른 의식의 변화가 있었고, 서로 통합 불가능한 모형들이 성립되었다는 것이다. 지금 벌린은 근대 이후에 일어난 인간 의식의 가장 커다란 변화가 낭만주의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이런 것이 벌린의 레토릭을 즐기는 독법이다. 그 문단에서 사람들이 못 알아들을 것 같으니까 같은 얘기를 반복한다.


“일반적으로 어떤 분야가 우세해지면 - 예컨대 물리학이나 화학 - 그것은 당대의 상상력에 엄청난 지배력을 미치고, 그 결과가 다른 영역에까지도 마찬가지로 적용된 다.”(15쪽)


순서를 잘 보라. ‘예컨대 물리학이나 화학’, 벌린 책을 읽다가 이렇게 하이픈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을 무시하면 안 된다. 굉장히 중요한 경우가 많다. 물리학이나 화학이 우세해졌다. 이것이 상상력에 지배력을 미친다. 물리학이나 화학이 상상력에 지배력을 미치면 어떻게 되겠는가? 상상력이 거의 고갈될 것이다.


“이런 일이 19세기의 사회학에서 일어났고, 우리 시대의 심리학에서도 일어났다.”(15쪽)


19세기의 사회학은 누구의 사회학인가? 콩트의 사회학이다. 콩트는 실증주의자이다. 상상력이 없다. 그리고 우리 시대의 심리학은 거의 인간을 기계로 본다는 얘기다. 물리적인 대상이나 화학적 대상으로만 본다는 말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대놓고 깔 필요가 없다. 이렇게 가볍게 눌러주면 된다. 이런 것이 벌린의 텍스트에서 나타나는 은근슬쩍 깔아뭉개는 대표적인 경우이다. 이런 것을 발견하면 굉장히 즐거워 진다. 속된 말로 텍스트가 쫙쫙 빨린다. 여기에 빨대를 꽂으라.


“내가 논증하고나 하는 바는 낭만주의 운동이 그처럼 거대하고 급진적인 변혁이었으며, 낭만주의 이후로는 이와 유사한 운동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초점을 맞추고자 하는 주장이다.”(15쪽)


16쪽 아래 문단이 18세기 유럽의 역사를 한 문단으로 정리한 것이다. 정말 정리를 잘했다.


“출발은 프랑스의 18세기, 즉 모든 것이 순조롭고 평온하게 시작하며, 삶과 예술은 법칙을 따르고”(16쪽). 여기서는 ‘법칙’이 가장 중요하다. 18세기 프랑스는 계몽주의의 시대이다.


“일반적으로 이성이 진보하고, 합리주의가 확산되고, 교회의 세력이 약화되며, 비이성적인 것은 프랑스의 계몽주의 철학자들에게 호되게 비판을 당하는 우아한 세기다. 거기엔 평화가 있고, 고요함이 있고, 우아한 건축이 있으며, 인간사뿐 아니라 예술적 실천, 윤리, 정치, 철학에까지 보편적 이성을 적용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16쪽)


삶과 예술까지도 법칙을 따른다는 것, 이것이 계몽주의 미학의 핵심이다. 계몽주의 시대에는 미학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계몽주의 미학이라는 것이 있다. 데카르트에 근거를 둔 이상, idealistic mimesis(이상주의적 모방)을 따르는 미학이 있다. “인간사뿐 아니라 예술적 실천, 윤리, 정치, 철학에까지 보편적 이성을 적용할 수 있다는 믿음” 이것이 벌린이 정리한 계몽주의이다.


“그때 느닷없이 명백하게 설명할 수 없는 습격이 일어난다.”(16쪽) ‘느닷없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말로 느닷없는 것이다. ‘느닷없이’라는 표현, 정말 좋지 않은가? 학문적인 책에는 이런 표현을 쓸 수 없다는 편견을 버려야 한다. 순수한 우리말을 쓰면 표현이 쇼킹해지면서, 독자들로 하여금 정말로 느닷없다는 생각을 갖게 할 수 있다. ‘단절적으로’ 같은 표현보다는 ‘느닷없이’가 훨씬 좋은 표현이다.


“갑자기 감정의 거친 폭발, 즉 어떤 열광이 생겨난다. 사람들은 고딕 건축과 자신의 내면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그들은 갑자기 신경증적이고 우울해지며, 타고난 천재의 불가사의한 약동을 찬미하기 시작한다. 지금까지의 조화롭고 우아하며 평온했던 사태에 대한 관심은 어디서나 감소한다. 동시에 다른 변화들 역시 일어난다. 프랑스 혁명이 터지고, 불만이 팽배하며, 국왕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고, 공포시대가 열린다.”(16-17쪽)


이 부분은 낭만주의의 전조를 이야기하고 있다. 18쪽에 루소가 나오지만, 뒷부분에 루소가 또 나오니 설명하지 않고 넘어가겠다. 계몽주의를 규정하는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보편적 이성이라고 말했다. 보편적 이성이란 누구나 존중하고 따라야 하는 추상적인 원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낭만주의 시대에 이르면 그렇지 않다.


“전심 전력을 다하는 태도, 성실함, 영혼의 순수함, 무엇이든 관계없이 자신의 이상에 헌신하는 능력과 망설임 없는 자세가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21쪽)


이성적인 방식으로 무엇을 하나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면의 열정이 중요한 것이다. 종교개혁 시기에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는 서로 싸움을 벌였다. 같은 신을 믿는다는 것이 용납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낭만주의 시대에 이르면, 네가 열심히 믿고만 있다면 이슬람도 용서하겠다는 태도가 생겨난다. 이것이 낭만주의이다.


“그게 무엇이 되었든, 이 점이 중요하다.”(21쪽) 이 문장 중요하다. 무엇이 되었든 내용은 따지지 않겠다. 다만 “전심 전력을 다하는 태도, 성실함, 영혼의 순수함, 무엇이든 관계없이 자신의 이상에 헌신하는 능력과 망설임 없는 자세”가 중요하다. 이 것도 하나의 모형이라면, 낭만주의의 모형이 이것이다.


‘유럽을 갈라 놓은 끔찍한 종교 전쟁’, 이른바 30년전쟁(1618~48)은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낭만주의에서도 중요하고, 예술사에서도 중요하고, 정치경제학에서도 중요하고, 철학에서도 중요하고 다 중요하다. 16세기 이후 유럽사를 이해하는 데 30년전쟁이 굉장히 중요하다. 이 전쟁에서 아주 근본적으로는 회의주의적인 태도가 생겨났다. 같은 신을 믿는 사람들끼리 30년 동안이나 싸웠다고 생각해보라. 이제 무엇을 믿든 싸우지 말고 삽시다, 이렇게 되지 않았겠는가. 30년전쟁 이후에 생겨난, 무엇이든 열심히만 믿는다면 인정하는 태도가 낭만주의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을 것이다.


벌린은 대표적인 사례로 볼테르의 연극 <마호메트>를 든다.


“마호메트는 미신에 사로잡힌 잔인하고 광신적인 괴물로 자유와 정의와 이성을 향한 모든 노력을 짓밟는 존재로 그려져 있으며, 당연히 볼테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모든 것, 관용과 정의, 진리와 문명의 적으로 비난받고 있다.”(23쪽)


“칼라일 - 매우 독특한 철학자로 다소 과장해서 말하면 낭만주의 운동의 대표자 - 은『영웅숭배론』에서 수많은 영웅들을 하나하나 열거하며 분석하는 중에 마호메트를 묘사하고 있다. 마호메트는 여기서 “어머니 자연의 광대한 가슴에서 빚어낸삶의 불덩어리”로 묘사된다”(23쪽)


재미있는 표현이 있다. “다소 과장해서 말하면 낭만주의 운동의 대표자”, 이것이 무슨 뜻이겠는가? 칼라일을 깔보는 것이다. 우리가 ‘대단한 분이야’라고 말하면, 그게 정말 대단하다는 건 아니다. ‘다소 과장해서 말하면’ 이런 표현은 배워둬야 한다.


“칼라일은『코란』의 진리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으며,『코란』에 칼라일 자신이 믿게 될 만한 어떤 내용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아예 염두에 두지 않았다.”(23쪽)


그런데 왜 칼라일은『영웅숭배론』에서 마호메트를 높이 샀던 것일까? 이어지는 문장에 그 이유가 나온다.


“칼라일이 마호메트에게서 높이 사는 점은 그가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열정적인 인생에서 엄청난 수의 추종자를 거느렸으며, 무언가 강력하고 장엄한 사건을 통해 인류의 역사에 위대하고 감동적인 순간을 가져왔고, 이것을 실증했다는 점이었다.”(23쪽)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열정적인 인생’과 ‘감동적인 순간’이다. 이것이 바로 칼라일의 영웅 기준이다. 그러니 칼라일의 영웅들은 다 어떻겠는가? 광분남녀들이다. 마호메트가 중요한 이유는 그의 행동 특성 때문인지 신념의 내용 때문이 아니다. 이 얼마나 반계몽적인 태도인가. 낭만주의는 바로 이러한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28쪽부터 벌린의 말장난이 장난 아니게 시작된다. 여기서부터 벌린의 잘난척에 질려버린다.


“이 모든 것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누구든 이 공통점을 찾으려 하면 다소 놀라운 광경과 마주치게 된다. 이제 내가 낭만주의에 대해 언급했던 가장 탁월한 이들의 저작에서 낭만주의에 관한 정의를 일부 발췌해 보겠다. 여러분은 이 주제가 결코 다루기 쉽지 않음을 알게 될 것이다. ”(28쪽)


이렇게 말했는데, 사실 일부가 아니다. 스탕달, 괴테, 시스몽디, 프리드리히 폰 겐츠, 하이네, 마르크스주의자들, 러스킨, 이폴리트 텐, 프리드리히 폰 슐레겔, 콜리지, 셸리, 페르디낭 브륀티, 세예르 남작, 어빙 배빗, 아우구스트 빌헬름 슐레겔, 스탈 부인, 르낭, 가스통 파리, 요제프 니들러, 아이헨도르프, 샤포브리앙, 조제프 에나르, 미들턴 머리, 루소, 게오르크 루카치.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거론된다. 이걸 읽고 절망하지 마라.


이렇게 나열한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재미삼아 생각해보자. 이건 정답이 없는 질문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이걸 주목해서 읽지 않을 것이다. 내 생각에는 이렇게 많은 소리가 헛소리였다는 걸 말하고 싶은 것 같다. 이제부터 나의 정의에 귀를 기울여 달라는 것이다.


여기서 끝나지 않고 계속 나온다. “다음 단계는 이 주제를 다뤄 온 작가나 비평가들이 생각하는 낭만주의의 특징을 살펴보는 것이다.”(31쪽) 31쪽부터 35쪽까지 낭만주의의 특징이 거론된다.


“아서 O. 러브조이가 낭만주의를 다루며 거의 절망에 가까운 상태로 접근한 것도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35쪽)


러브조이도 탁월한 학자인데 그도 절망했다. 이제 남은 사람은 누구인가? 벌린. 또다시 36쪽에서 “러브조이의 제자인 조지 보아스가 낭만주의에 관해 쓴 글의 일부”를 길게 인용한다.


“러브조이가 낭만주의의 특성들을 구별한 이후로, 낭만주의의 진정한 정의에 관한 논의는 더는 진전되지 말아야 했다”(36쪽)

조지 보아스는 러브조이가 낭만주의에 관해 말한 정의로 끝이 났으며, 그 이상은 없다고 말한다. 벌린은 “나는 이렇게 할 생각이 없음을 밝혀 여러분을 당장 안심시켜야 할 것이다.”(37쪽)라고 한다. 그러고 나서, “러브조이와 보아스 모두 비록 탁월한 학자들이며, 사상사를 조명하는 데 커다란 기여를 해 왔지만, 여기서는 오류에 빠졌다고 생각한다.”(37쪽) 이렇게 간략하게 처리해버린다.


이런 책을 읽다 보면 벌린 같은 이들을 움직이는 힘이 뭘까,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공부하게 할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결국 명예욕을 위해서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가끔 든다. 그리고 대가와 대가가 아닌 사람의 차이는 잘난척을 멋들어지게 하느냐 아니면 대놓고 하느냐, 이런 차이가 있지 않을까 싶다. 벌린은 꽤나 잘난척을하고 있지만, 꽤나 은근슬쩍 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촘스키의 책은 그 내용은 좋지만 나에겐 재미가 없다. 촘스키의 책에는 레토릭의 즐거움이 없다. 읽다 보면 뻑뻑하다.


지금까지 읽은 것을 돌이켜보면, 세계를 파악하는 기본적인 모형이 있다는 것, 그런 모형들의 변화는 단순히 의식 속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전개된다는 것, 18~19세기에 인간 의식의 엄청난 혁명적 변화가 있었다는 것, 그것을 낭만주의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쨌든 관념이 관념을 낳지는 않는 법이다. 어떤 사회적.경제적 요인들에 의해 인간 의식에 중대한 변동들이 일어났음은 분명하다.”(18쪽)


“어쨌든 관념이 관념을 낳지는 않는 법이다.” 나는 1장에서 한 문장을 꼽으라면 이 문장을 꼽고 싶다. 여러분들도 앞으로 한 장씩 읽어오면서 그 장의 문장을 골라봐라. “어쨌든 관념이 관념을 낳지는 않는 법이다.” 이 문장은 벌린의 낭만주의를 파악하는 기본 태도를 보여준다. 이것이 구체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뒤에 나온다.


“여기에 접근하는 유일하게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방법, 최소한 내가 유익하다는 것을 알게 된 유일한 방법은, 천천히 인내심을 가지고 다가서는 역사적 방법이며”(37-38쪽)


벌린은 관념이 관념을 낳지는 않는 법이라고 말했으니, 무엇이 관념을 낳았는지 추적해보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역사적 방법이다.


“18세기 초를 관찰하여 당시의 상황이 어떠했는지를 살펴본 다음, 그 저변을 잠식하던 요인들이 무엇이었는지 하나하나 생각해 보고, 18세기 후반까지 이 요인들에 어떤 특수한 결합이나 집합이 일어나, 내게는 분명 우리 시대 서구인들의 의식에 가장 큰 변화로 여겨지는 낭만주의 운동을 일으켰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38쪽)


이런 문장들은 잘게 쪼개 읽어야 한다. 먼저 ‘18세기 초를 관찰’한다. 그러고 나서 ‘저변을 잠식하던 요인들’을 생각해 본다. 18세기 초의 상황은 표면인데, 그 저변을 살펴보고, 그 다음에 저변에 있는 요인들이 어떻게 결합해서 낭만주의 운동을 일으켰는지 살펴본다. 이것이 벌린이 말하는 역사적 방법이다.


다음 주는 제헌절이기 때문에 쉬고, 그 다음주에 한다. 이번에 이 강의를 통해서 여러분들이 기본적으로 습득했으면 하는 지식 내용들이 있다. 다음 주에는 2장 ‘계몽주의에 대한 최초의 반격들’을 하니까 당연히 계몽주의에 관해 알아야 한다. 그 다음 3장부터 본격적으로 낭만주의에 들어간다.


이 강의의 첫 번째 목표는 우선 이 텍스트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이사야 벌린의 사상사 방법론, 즉 계몽주의와 낭만주의처럼 서로 대립되는 것들을 놓고 설명하는 사상사 방법론에 대해 어느 정도 아는 것이다. 그리고 벌린이 대가이니, 이 사람이 레토릭을 어떻게 구사하는지 아는 것이다.


계몽주의는, 어떻게 보면 기계적이고 너무 정형화된 것일 수도 있지만, 인간이 버려서는 안 되는 이성적인 통찰을 바탕으로 하는 시대 사조이다. 현대처럼 열정만 있으면 된다고 말하는 것은 콩가루 세상을 만드는 지름길이 될 수 있다. 따라서 나는 이 강의를 통해 계몽주의의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측면들을 받아들일 수 있길 바란다.


이 책에는 계몽주의에 관한 설명이 거의 없다. 참조할 만한 텍스트를 알려줄 테니 읽어오면 도움이 될 것이다. 아르놀트 하우저의『문학과 예술의 사회사』3권에서 계몽주의와 낭만주의 부분을 읽어오라. 18세기의 표면, 즉 사회.정치.경제적 상황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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