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너선 D. 스펜스: 현대 중국을 찾아서 2


현대 중국을 찾아서 2 - 10점
조너선 D. 스펜스 지음, 김희교 옮김/이산


4부 전쟁과 혁명 

17. 제2차 세계대전 

18. 국민당 정권의 몰락 

19. 인민공화국의 탄생 

20. 신사회의 계획 

21. 혁명의 심화 


5부 세계와 더불어 

22. 문호 재개방 

23. 혁명의 재정의 

24. 권력의 층위 

25. 한계의 시험 


주와 허가 / 더 읽을 거리 / 용어해설 / 컬러 화보에 대하여 / 화보 출처 

붓글씨에 대하여 / 옮긴이의 말 / 찾아보기.





4부 전쟁과 혁명 

13 1937년 여름 일본과 전면전이 발발함으로써 장제스는 강력하고 중앙집권적인 민족국가를 건설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기회를 모두 잃어버렸다. 1년만에 일본군은 중국의 동부를 휩쓸었고 중국의 주요 산업 중심지와 가장 기름진 땅에서 국민당을 몰아내고, 사실상 중국과 외부 세계의 유대를 끊어 놓았다. 장제스의 새로운 전시(戰時) 거점인, 양쯔강을 수천km 거슬러올라가 있는 충칭은 일본에 대한 민족적 저항의 상징적 중심지이기는 했지만, 반격을 시도하기에 적당한 곳은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공산당 군대는 산시 성의 옌안 기지에 고립되어 있었는데, 이곳은 중국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 가운데 하나로 충칭보다 농업자원이 부족했고 산업기반도 거의 없었다. 그곳에서 공산당이 살아남을 수 있을지는 불확실했고, 더구나 거기에서 혁명이 확산될 것 같지도 않았다.

  전쟁 초반 수년 동안 국민당과 공산당은 통일전선이라는 명목상의 연합을 통해 민족통일의 이상을 그런 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중국인 협력자들이 주도하는 여러 괴뢰정권들을 이용해서 일본이 중국 동부를 휩쓸고 있을 때, 충칭과 옌안의 두 정부는 의미 있는 공동의 기반을 찾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공산당은 토지개혁을 중단하고 그들의 현란한 선전을 완화시켰으며, 국민당은 중국을 장기적으로 강화시킬 경제적•행정적 개혁을 실시 했다. 그러나 1941년 초반부터 두 정당은 또다시 논쟁을 벌였고 서로 무력충돌만 거듭했으며, 항일이라는 목전의 급선무보다는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내전에 대비하는 자세로 각자의 무력을 정비하기 시작했다.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폭격 이후 미국의 참전은 균형상태를 변화시켰다. 중국은 이제 서양 연합국에 의해 '강대국' - 적어도 문서상으로 - 으로 취급되었고 국사적 조언과 대규모 차관 그리고 중국 서부의 마지막 보급선이었던 인도에서 산맥을 넘어온 장비와 항공 연료 등을 보급받았다. 이러한 원조는 합법적으로 승인받은 중국의 정부인 충칭의 국민당에게 주어졌다. 옌안의 공산당은 그들이 직접 만든 조야한 무기나 항일투쟁에서 빼앗은 군수품으로 살아남아야 했다. 궁여지책으로 공산당은 게릴라 전술을 연마하고 장시 소비에트에서 개발한 대중동원술을 이용하여 일본군의 배후에 미로와도 같은 기지들을 건설했다. 그들은 농촌지역에서 더 많은 인민의 지지를 얻기 위해 더욱 급진적인 형태의 토지 몰수와 재분배 주장으로 되돌아갔다.

  1945년 전쟁이 종결되었을 때, 국민당은 오랜기간의 전투로 인한 사기저하, 사적인 분쟁에 의한 정부의 약화, 통치지역의 심각한 인플레이션 등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당은 신속하게 움직였으나 옛 일본 점령지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공석을 메울 준비된 인물도 별로 없었고, 전쟁으로 산산이 부서진 사회를 재건할 자금도 없었다. 공산당 역시 자원이 없기는 마찬가지였지만 패배한 일본으로부터 가능한 한 넓은 지역을 장악하고 중국 북부 인민들 사이에서 굳건한 지지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그들의 군사력을 증강시킬 최선의 장소로 만주를 선택했다. 그들의 전략은 적중했다.

  1948년에 만주에서 장제스의 군대는 완패했고 파국적인 인플레이션과 그동안 그를 지지했던 지식인, 학생, 전문가 계급, 도시 노동자들 대다수의 이반으로 인해 그의 권력기반은 완전히 무너졌다. 1949년에 이르면 장제스의 잔존 군대마저 어이없게 섬멸되었고,  그 해 말 장제스가 살아남은 지지자들과 함께 타이완으로 피신함으로써 마오쩌둥은 베이징에서 새로운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5부 세계와 더불어 

213 정부를 향한 학생과 지식인들의 불만은 1986년 말 폭발 직전에 달했다. 학생들은 계속되는 시위를 통해 정부의 규제에 항의하고 좀더 개방된 분위기에서 경제적 근대화가 진전될 수 있도록 중국 인민에게 민주적인 권리를 달라고 요구했다. 정부의 대응은 과거에도 그랬던 것처럼 당과 국가에 불복하였다는 이유로 학생들을 공격하고, 혁명적인 일치단결과 자기 희생이라는 신성한(그러나 이제는 낡아빠진) 고정관념을 다시 고취시키려고 했다. 공산당의 총서기는 소요를 막지 못했다는 이유로 해임되었다. 그런데 정부는 아이니컬하게도 모든 민주주의적 자유에 대한 요구를 짓누르는 반면, 새로운 공업이나 농업 기업체에 대해서는 법적으로 보호하여 활성화하는 방안을 채택하였다.

다수의 원로 혁명가가 1980년대 말에 물러났지만(또는 따돌림 당했지만), 그들 대신에 등장한 새 지도자들은 중국 사회에 그토록 만연해 있던 모순을 결코 해결하지는 못했다. 지나친 부와 고도로 발달한 새로운 기술이 원시적인 생활조건과 공존했고, 더 많은 개방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당으로부터 묵살당했으며, 만연한 경제적 부패는 소외된 사람들을 불안과 좌절로 빠뜨리는 뿌리깊은 연구주의와 정실인사로 이어졌다. 마지막으로 시위를 진압한지 2년도 채 지나기 전인 1989년, 이러한 긴장은 다시 불거져 나왔다. 이제 대립의 강도는 인민공화국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높아졌다. 5월 중순, 100만이 넘는 가계각층의 중국인이 베이징의 천안문 광장에 모여들어, 민주주의와 실생활 전반을 오염시킨 주범이 부패라고 규정하며 그 척결문제를 놓고 정부 지도자와 면담을 요구했다. 베이징 시위자들은 33년간에 걸친 중•소 분쟁을 끝내려는 소련 지도자의 중국 방문을 완전히 무색하게 만들면서 압박용 전술은 물론 단식투쟁까지 구사해 가며 자신들의 요구를 더욱더 강력히 밀고 나갔다.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이에 계엄령 선포로 대응했지만, 처음에는 베이징 시민이 시내로 들어오는 인민해방군 병사들을 용기있게 자발적으로 에워싸는 바람에 계엄령 집행이 저지되었다. 그러나 온건파보다 수적인 면에서도 또 술책 면에서 우세했던 강경파 지도자들은 탱크의 지원을 받는 중무장 군대를 새로 불러들여 천안문을 향해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그로 인해 자행된 학살은 중국과 세계를 놀라게 했고, 삶과 표현의 다양성을 추구하던 이들과 여전히 1당체제의 국가통제 아래 모든 계획을 집중시키려던 사람들간의 차이를 더욱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이 사건이 주는 교훈은 지도자들이 국민의 정당한 불만에 좀더 건설적인 방식으로 대응하지 않는다면 중국의 미래에는 먹구름이 드리워질 것이라는 점이다. 만약 정부의 유일한 대답이 무력과 위협이라면, 항거와 억압의 악순환이 계속될 것이다. 현재를 과거에 저당 잡힌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인류의 투쟁 가운데 하나는 오늘의 고통으로 되풀이될 것이며, 억압을 종식시키고 미래를 활짝 열겠다고 약속했던 그 혁명적인 당은 진보의 가장 큰 장애물이 바로 자기 자신임을 발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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