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R. 브라우닝: 아주 평범한 사람들


아주 평범한 사람들 - 10점
크리스토퍼 R. 브라우닝 지음, 이진모 옮김/책과함께



한국어판 서문 

서문 

지도 


1. 유제푸프에서의 어느 아침 

2. 치안경찰 

3. 치안경찰과 최종해결: 1941년 러시아 

4. 치안경찰과 최종해결: 강제이송 

5. 101예비경찰대대 

6. 폴란드에 도착하다 

7. 집단 학살의 서막: 유제푸프 학살 

8. 집단 학살에 대한 성찰 

9. 워마지: 2중대의 추락 

10. 8월 트레블링카행 강제이송 열차 

11. 9월 말의 학살 

12. 다시 시작된 강제이송 

13. 호프만 대위의 이상한 병 

14. “유대인 사냥” 

15. 마지막 집단 학살: “추수감사절 작전” 

16. 그 이후 

17. 독일인, 폴란드인, 유대인 

18. 아주 평범한 사람들 


후기 

감사의 말 

옮긴이의 말 




16 이런 종류의 일상사 사례연구에 대해 제기될 수 있는 또 다른 비판은 학살자들을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과정에서 학살자에 대한 감정이입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학살자 들의 이야기' 같은 주제를 다루는 역사 서술은 관련자들을 단순히 악마적 존재로 규정하는 어떠한 시도도 분명히 거부해야 한다. 집단 학살을 자행하고 강제이송을 담당했던 예비경찰대대 대원들은 이 작전에 참가하는 것을 공개적으로 거부하거나 은밀하게 회피했던 다른 대원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이었다. 따라서 내가 모든 학살자나 회피자의 행위를 최대한 이해하고 설명하기를 윈한다면 동일한 상황에서 스스로 학살자 또는 회피자 - 양자 모두 인간 - 가 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이러한 인정은 사실상 두 가지 행동 양식으로 감정을 이입하는 시도를 의미한다. 그럼에도 나는 설명이 변명을, 이해가 용서를 의미한다는 식의 상투적인 옛 설명 방식은 결코 수용할 수 없다. 설명은 변명이 아니며 이해는 결코 용서가 아니다. 범죄자들을 인간적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시도 없이는 이 연구뿐 아니라 조잡한 일차원적 캐리커처 수준을 넘어서 홀로코스트 학살자들을 깊이 있게 다루는 어떠한 역사 연구도 불가능할 것이다. 유대계 프랑스 역사가 마르크 블로크는 나치에 의해 처형되기 직접 이렇게 썼다. "우리의 연구를 이끄는 목표는 결국 오직 한 단어 '이해 understanding'이다." 나는 바로 이 정신에 입각해서 이 책을 집필하고자 했다.


84 전체적으로 101 예비경찰대대 대원들은 독일 사회에서 낮은 계층 출신이었다. 그들은 사회적 신분 상승이나 지리적 이동을 경험하지 않았다. 단지 소수만 경제적으로 자립한 상태였다. 도제교육이나 직업훈련을 제외하면 그들은 14,15세에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어떤 교육도 더 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1942년까지 놀라울 정도로 높은 비율의 대원들이 나치당에 입당했다. 그러나 검찰 조사 보고서에 적절한 정보가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이 중 몇 명이 1933년 이전에 공산당이나 사회민주당 당원 또는 노동조합 조합원이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대원들의 사회적 성분을 볼 때 적지 않은 수가 그곳에 가입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물론 나이로 볼 때 그들이 성장한 시기는 모두 나치 이전이었다. 그들은 나치의 이념과는 다른 정치적 가치들과 도덕 규범을 아는 자들이었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가장 덜 나치화된 지역으로 명성 있던 함부르크 출신이었으며 다수는 정치 문화적으로 반나치 정서를 갖고 있던 사회계급 출신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나치의 비전, 즉 유대인 없는 인종적 유토피아를 건설하기 위한 집단 학살자를 배출하기에는 매우 유망한 그룹은 아니었을 것이다.


113 유제푸프에서는 500명 가운데 단 12명 정도의 대원들만 트라프 소령의 제안에 본능적으로 반응함으로써 임박한 집단 학살에 참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애초부터 사살에 참여하고 싶지 않다고 선언한 대원들의 수는 왜 이렇게 적었을까? 트라프의 제안이 갑작스러웠다는 것이 아마 그 부분적인 원인일 수 있다. 대원들은 유제푸프 작전에 대해 들은 순간 매우 "당황했다". 그들은 아무런 사전 경고도 받지 못했고 생각할 시간도 없었다. 트라프의 제안에 순간적으로 반응할 수 없었을 때 그들은 그만 첫 번째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122 그들이 도대체 어떤 역할에 익숙해졌으며 전체 학살 과정에 어떻게 적응해갔다는 말인가? 여기서 한 가지 사실만 미리 언급한다면, 얼마 후 그들이 다시 사살 임무 앞에 서게 되었을 때 그들은 결코 "미쳐버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점차 효과적이고 무감각한 학살 집행자로 변해갔다.


132 물론 이번에는 그들이 희생자와 일대일로 얼굴을 마주하지 않았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개인적인 연결은 차단되었다. 유페푸프에서와는 전혀 대조적으로 단 한 명의 경찰만 그가 사살한 특정 유대인의 신상을 기억했다. 각각 신속한 교대를 통해 대원들이 쉴 새 없이 그리고 끝없이 이어지는 사살 참여를 피할 수 있었다는 사실도 학살 과정을 탈인간화 depersonalization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유제푸프에서는 이와 달리 쉴 새 없이 사살이 오래 계속되었다는 점이 두르러졌다. 그들의 이번 사살 작전 참여는 덜 개인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한층 제한적이었다. 습관화 habituation라는 요소도 영향을 주었다. 이미 한 번 살인을 했었기 때문에 두 번째에서는 첫 번째와 같은 정신적 충격을 겪지 않았다. 다른 많은 일들처럼 살인도 적응할 수 있는 사상이었다.


193 그러나 "유대인 사냥"은 달랐다 그곳에서 그들은 다시 희생자들과 얼굴을 맞대고 마주 섰으며 사살도 개인적인 성격을 띠었다. 이보다 한층 중요한 것은 경찰대원들이 다시 각자 상당한 정도의 선택권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사살조 참여냐 회피냐의 선택권이 어떻게 행사되는지에 따라 대대가 얼마나 "강한 사나이들"과 "겁쟁이"로 분열되어 있었는지를 보여주었다. 유제푸프 작전 이후 몇 달 동안 많은 대원들은 점차 무감각하고 냉담한 그리고 여러 경우에는 매우 열렬한 살인자로 변해갔다 반면 단지 제한적으로만 살인에 동참했으며 특별한 노력이나 별다른 처벌 없이 피할 수만 있다면 즉각 이를 회피했던 대원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 비동조자들 가운데 끊임없이 위협받는 자신의 도덕적 자율성 영역을 지키는 데 성공한 대원은 오직 소수였다. 그들은 자율 의식이 살아 있는 한, 학살에 참여하지 않기 위해 용기를 내어 여러 가지 행동 패턴과 영리한 전략을 개발 할 수 있었으며 그 결과 냉혹한 살인자가 되어가는 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었다.


214 "추수감사절 작전"이 끝나자 루블린 구역은 실제로 유대인 없는 지역이 되었다. "최종해결"을 위해 101 예비경찰대대가 수행했던 살인적 임무도 이로써 막이 내렸다. 확인된 통계에 근거해서 추정할 때 유제푸프와 워마지 작전에서 학살된 유대인 6,500명과 "유대인 사냥"에서 사살된 1,000명, 그리고 마이다네크와 포니아토바에서 사살된 적어도 3만 500명의 유대인들을 모두 합쳐, 101 예비경찰대대는 적어도 유대인 3만 8,000명에 대한 학살에 직접 가담했다. 1943년 5월 초에 또 한 번 최소한 3,000명의 유대인들을 미엥지제츠에서 트레블링카로 강제이송했기 때문에 예비경찰대대에 의해 죽음의 수용소행 열차에 실린 유대인 수는 4만 5,000명으로 증가했다. 이로써 500명도 안 되는 1개 예비경찰대대가 죽음으로 몰아넣은 유대인 수는 적어도 8만 3,000명을 기록하게 되었다.


282 101 예비경찰대대가 보인 집단행동은 우리를 매우 불안하게 하는 깊은 함의를 지닌다. 오늘날 인종주의 전통에 물들고 전쟁과 전쟁 위협 때문에 포위 심리에 사로잡힌 사회들이 많다. 어디서나 사회는 각자의 직업 분야에서 출세하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모든 근대 사회에서 드러나는 삶의 복잡성과 그로 인해 초래되는 관료화·전문화는 공식적인 정책을 집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개인적 책임감을 점점 희석시키고 있다. 실질적으로 모든 사회 공동체에서 개인이 속해 있는 집단은 개인들의 행동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도덕적인 가치기준을 설정한다. 만약 101 예비경찰대대 대원들이 당시의 조건 아래서 학살자가 될 수 있었다면, 오늘날 유사한 조건이 주어질 때 어떤 집단이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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