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너선 D. 스펜스: 현대 중국을 찾아서 1
- 책 밑줄긋기/책 2012-22
- 2014. 4. 21.
현대 중국을 찾아서 1 - 조너선 D. 스펜스 지음, 김희교 옮김/이산 |
1부 정복과 통합
1. 명 말기
2. 만주족의 정복
3. 강희제의 통합정책
4. 옹정제의 권위
5. 중국 사회와 건륭제의 치세
6. 18세기의 세계와 중국
2부 분열과 개혁
7. 서양과의 첫 충돌
8. 내부의 위기
9. 개혁을 통한 중흥
10. 청 말의 새로운 갈등
11. 왕조의 종말
3부 국가와 사회에 대한 구상
12. 새로운 공화국
13.'길이 만들어지다'
14. 충돌
15. 정부의 실험
16. 전쟁으로
1부 정복과 통합
16세기 말, 명 왕조의 영화는 절정에 달했다고 볼 수 있다. 문화나 예술면에서의 성과도 뛰어났고, 도시생활과 상업은 전례 없이 번창했으며, 인쇄•도자기•비단 제조술은 동시대 유럽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독보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 시기를 '근대 유럽'의 탄생기로 보는 것과 달리 중국의 경우 근대의 확실한 출발점으로 보기는 어렵다. 당시 서양은 전체로서의 세계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가져다 준 지구 탐험의 중심지였던 데 반해, 명의 통치자들은 오히려 해외원정과 그것에서 얻을 수 있는 지식으로부터 소외되어 있었을 뿐 아니라, 그로부터 50년도 채 못되어 왕조의 비극적인 종말을 초래한 일종의 자기파괴적 형태를 보이기 시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 명 왕조의 반만한 관료•경제 체제는 여러 부분에서 해이해지기 시작했다. 세수는 군인들의 보수를 제때 지불할 수 없을 만큼 줄어들었고, 빈번한 탈영은 적대적인 부족들의 국경 침임을 부추겼다. 또한 서양에서 유입된 은은 중국 경제에 예상치 못한 압박을 가했다. 곡창지대에 대한 국가의 통제력이 약화되었으며, 모진 기후 조건으로 인해 농촌 사람들의 영양실조율과 전염병 감염률이 높아졌다. 불만세력은 무작위로 차출되어 징집되었지만, 그들의 관심사는 오로지 살아남는 것뿐이었다. 이 모든 악재들은, 1644년 명의 마지막 황제가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을 만큼 치명적으로 뒤엉켜 있었다.
이런 혼란을 마감하고 질서를 새로이 확립한 세력은 농민반란군이나 소외되었던 관료들이 아니라 스스로를 만주(滿洲)라 부르는, 북쪽 변경에서 넘어온 여진족(女眞族)이었다. 그들이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기반은 중국 정복을 준비하기 훨씬 이전에 이미 군사•행정 체계와 관료제를 성공적으로 정비한 데 있었다. 이러한 제조들이 확립되고, 또 항복하거나 정복된 수많은 한인(漢人)이 그들의 정치 고문•군인•공장(工匠)•농민으로서 봉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만주족은 1644년, 마침내 중국을 침략할 기회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수많은 만주족 군대가 중국 대륙으로 퍼져 나간 움직임을 추적해 보면 우리는 중국의 대체적인 지리적인 특징을 파악할 수 있다. 농민반란 세력들과 명왕조의 다양한 잔존 집단들은 서로 다른 지역을 각자의 세력기반으로 삼고 만주족의 침략에 대항했다. 만주족의 남하와 서진의 형태는 지형의 원리뿐만 아니라 정치•경제적 요충지를 새로운 국가에 확고히 통합시키기 위한 필요에 따른 것이다. (만주족 군대의 진군 시기와 방향은 1949년 긴 분열기 이후 중국공산당이 대륙을 통일할 때 채택한 방법과 놀라울 정도로 일치한다.)
중국처럼 거대한 국가의 정복은 한인 가운데 수십만의 지지세력을 만주족 군대에 편입시키고, 또 만주인의 지위는 그대로 두되 한인 관료에게 실무를 맡김으로써 성공할 수 있었다. 비록 명 황실의 후손들이 맹렬히 저항했지만, 대다수 한인은 새 통치자를 받아들였다. 이는 만주족이 몇 가지 경우를 제외하고는 중국의 전통과 사회구조를 그대로 유지하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한지 얼마 되지 않던 봉기들마저 곧 진정되었고, 새로 창건 된 청(淸) 왕조는 굳건한 토대 위에서 1912년까지 중국을 통치했다.
그들의 선조나 후계자들과 마찬가지로 청 역시 국가체계를 확고히 통합시켜 안정화하는 작업이 시급했고, 이를 위해서는 전략적•경제적•정치적으로 꼭 필요한 정책들을 광범위하게 추진해야 했다. 청의 통합정책의 주요 설계자는 1661년에서 1722년까지 재위에 있었던 강희제(康熙帝) 였다. 그는 중국의 동•서•남•북•서북 변방의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계획된 경로를 따라 군사 정벌을 시도했을 뿐만 아니라, 정복 이전 만주족 조상들이 대략적으로 고안해 놓았던 통치제도를 공고히 했다. 강희제는 특히 효율적인 국가 감시체제를 복구하고, 믿을 만한 비밀 정보망을 통해 국가 정보의 흐름을 장악했으며, 국가 지원사업을 통해 잠재적으로 반란 가능성이 있는 학자들의 지지를 끌어내고, 정부 관직이나 사회 전반에 걸친 만주인과 한인 사이의 긴장을 해소시키는 데 주력했다. 그러나 경제면에서는 덜 성공적이었다. 그의 재위기간 동안 상업과 농업은 번성했으나 공정한 징세가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이것은 두고두고 청 왕조의 고질적인 병폐가 되었다.
강희제의 아들은 바로 이러한 문제점을 현명하게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세법을 개정하고 문화생활을 활성화하였으며, 특정인에 대한 사회적 불평등을 없애고, 중앙관료제를 강화하는 데 주력했다. 그러나 중국 인구가 18세기 말엽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이에 따른 토지에 가해진 압박 때문에 심각한 사회불안이 야기되면서 왕조의 전체적인 기강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비효율성과 부정부패는 국가의 대응능력을 약화시켰고, 국가는 이러한 국내문제에 신속히 대처하기보다는 회피했다. 대외정책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공격적인 서양 상인들이 중국이 시행하는 규제들을 시험해 보기 위해 중국 해안에 선박을 정박시키면서, 중국이 외국인을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제도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다. 이에 대한 청 왕조의 대응은 느리고 무기력했다. 다른 부분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청 왕조의 창조적 대응능력의 부재는 19세기에 닥쳐올 재앙의 한 원인이 되었다. 18세기 서양의 작가와 정치철학자들은 한동안 중국에 대한 존경심에 사로잡혀 있었으나, 예리한 눈으로 중국의 약점을 연구하기 시작한 뒤에는, 중국인이 세계 안에서 적응하며 살아갈 수 없다면 그것이야말로 중국이 말하는 지름길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2부 분열과 개혁
177 유교 교육을 받은 중국의 학자들은 19세기 초반 중국 사회에 가해진 도덕적•경제적 압박을 자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숭배해 온 지적 전통을 바탕으로 행정과 교육의 개혁을 제안했고 급증하는 인구에 대해 경고했으며 좀더 공정한 부의 분배를 요구했다. 어떤 학자는 남성과 여성을 가르는 사회적 불평등을 지적했으며, 일상생활에서 여성의 지위에 대해 더욱 관심을 보일 것을 촉구했다.
특히 아편 중독이 확산되는 것은 복잡한 사회적 딜레마였다. 학자, 관료, 그리고 황제까지도 마약을 합법화하느냐 전면 금지하느냐를 놓고 의견을 달리했다. 한편 영국은 마약의 생산과 공급에 막대한 자금을 투자했고 아편으로 얻는 수입이 영국 국제수지 전력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편무역은 영국 외교정책의 주요 현안이었다. 청은 이 문제가 전적으로 국내문제라고 판단하여 마약을 금지시키기로 결정했다. 영국은 무력으로 이에 대응했다. 영국이 청을 굴복시켜 강제로 체결한 1842년의 조약은 청과 외세와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고, 중국의 통치자들이 그들의 영토에 거주하던 모든 외국인을 효율적으로 통제하던 긴 역사의 흐름에 종지부를 찍었다.
중국에서 새로운 외세의 등장과 때를 같이하여 국내적으로도 새로운 혼돈의 물결(외세는 당연히 이를 야기하는데 일조했다)이 일었다. 18세기 후반에는 청에 대항한 반란들이 자주 발생했다. 19세기에 확대된 사회혼란으로 세기중반까지 네 번의 주요한 반란이 발생했는데, 그 중 적어도 두 사건 - 태평천국(太平天國)과 염군(捻軍) - 은 왕조를 전복시킬 만한 잠재력을 지닌 것이었다. 태평천국은 유교와 황제의 가치의 핵심을 뒤흔드는 근본주의적 기독교와 평등주의 원칙에 근거하고 있었고, 염군은 국가의 군사제도의 근간을 위협하고 국가의 위신을 실추시킨 새로운 유형의 역동적인 게릴라 전술을 선보였다. 또 다른 두 반란은 이슬람 교도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베이징에서 멀리 떨어진 청조의 힘이 닿기 어려운 서남부와 서북부 지역에서 비한족에 대한 청의 통치에 반발하여 발생했다. 이때 청조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전통적 가치에 충성을 바치고 기존의 사회•교육•가족 체제를 옹호하는 유학으로 무장된 학자들의 뛰어난 군사활동 덕분이었다.
역설적이게도 유교적 정치가들은 승리를 얻기 위해 외국의 군사기술과 국제법의 일부를 받아들였는데, 이는 궁극적으로 그들이 지키고자 했던 가치의 신성함을 손상시켰다. 그러나 처음에는 그런 결과를 예측하지 못했기 때문에 청의 자강(自强)을 이룩한다는 명분 아래 무기와 선박을 제조하기 위한 병기창을 새로 설립했을 뿐만 아니라 외국인을 고용했으며, 소규모의 서양 선박과 선원을 활용했고, 최초로 외무부에 해당하는 부서를 설립했다.
그러나 중국인과 외국인의 관계는 여전히 긴장된 상태였다. 중국의 반선교사 폭동은 미국에서의 반중국적인 폭동에 필적했으며, 중국인 이민의 물결은 미국측의 일방적인 규제로 의해 급격히 줄어들었다. 두 경우 모두 서로 다른 민족 사이에도 개인적인 노력 여하에 따라서는 관용과 연민을 가질 수 있고 기대하는 만큼 상호 적응이 가능한데도 불구하고, 상대방의 문화와 그 문화의 지향점에 대한 몰이해가 팽배했다.
19세기 말에 외압과 국내의 혼란에도 불구하고 청은 서양과 중국의 새로운 통합을 이룩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중국의 군사적•산업적 필요에 따라 외국의 기술을 적용해 얻은 많은 결과들이 두 번의 패배로 산산조각이 났다. 두 번의 짧지만 쓰라린 전쟁 - 한번은 프랑스, 또 한번은 일본과 - 은 중국인에게 고통을 안겨주었고 중국이 자랑하던 '근대적' 해군의 대부분을 바다 속에 수장시켜 버렸다. 1898년 분출된 개혁 열기가 보수적인 반대세력에 의해 유산되었을 때 뿌리깊은 반서구주의는 선교사와 중국인 개종자를 광범위하게 공격했던 1900년의 의화단 봉기를 일으킬 토양을 마련하고 있었다. 의화단은 외세에 의해 진압되었으나, 신문기사나 팜플렛, 불매운동, 그리고 청을 타도하려는 내부로부터의 질풍같은 반란활동은 반만(反滿) 민족주의가 성장하고 있다는 첫 징후였다.
청이 왕조의 힘을 만회하려는 마지막 시도는 정치•군사•경제 개혁의 효율적인 혼합이었다. 서양을 본떠서 입헌정부를 실험하기도 했고 서양식으로 군대를 재무장하고 재조직하려는 노력도 있었으며, 중앙집중적인 철도망의 건설을 통해 중국 경제를 보다 강력하게 통제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혼합은 안정을 가져다 주기는커녕 대립과 새로운 차원의 몰이해를 불러일으켰다. 각 성에 설립된 성의회는 청을 비판하고 지방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킬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숙련된 만주족의 지휘를 받는 근대화된 강력한 군대를 만든다는 미래상은 청으로부터의 독립을 꿈꾸는 한인 민족주의자들에게는 위협일 뿐이었다. 그리고 철도를 중앙 집중화하고 그것을 위해 차관을 얻으려는 정부의 시도는 지방의 투자가와 그들의 성급한 추종자들이 교묘하게 부채질하자 청의 기반은 크게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1911년 말에 발생한 군사반란에 속수무책이었던 만주족은 1912년 초 권좌를 포기하고 청조가 운명을 다했음을 선언하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국가의 중심에 결정적인 공백이 생겼으나 그것을 만회할 만한 뛰어난 지도자는 없었으며, 단지 대립되는 이념과 요구를 지닌 다양한 집단만 있을 뿐이었다. 왕조의 몰락이 남긴 유산은 확신에 찬 새로운 공화국이 아니라 내전과 지적 혼돈이었는데, 불행하게도 이것은 268년 전에 명이 멸망했을 때보다도 가혹했다. 그러나 이러한 혼란 속에서도 치국 사상가, 자강론자, 입헌개혁파, 혁명론자 등이 추구했던 강한 중국이라는 열망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청조가 지배한 마지막 세기가 갖는 건설적인 의미는 중국의 위대함이 죽어 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는 점이다.
3부 국가와 사회에 대한 구상
321 청 왕조에 잠재되어 있었던 분쟁의 불씨는 중앙과 지방 권력 사이의 균형 문제였다. 신임을 일은 제국체제 대신 생명령 있는 공화국을 건설하기 위해 힘쓰고 있었던 중국의 진보적 정치인들은 중국을 근대적 국민국가로 탈바꿈시킬 새로운 정부의 수립을 갈망했다. 베이징에서 일종의 의회가 성 대표자들로 구성되었고, 이 의회는 중앙과 지방을 하나로 묶어 줄 것처럼 보였다. 모두 4천만이 넘는 유권자들은 다양한 지역적 이해를 광범위하게 대변해 줄 대표를 선출했다. 다시 활력을 얻은 지방정부는 각 성의 상반된 이해를 조정하고 중앙정부에 새로운 재원을 제공함으로써, 중앙정부가 긴급한 개혁을 수행하고 외세를 막을 수 있도록 해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이러한 꿈은 1912년 중국 최초의 국민투표가 시행된 후 채 몇 달도 지나기 전에 물거품이 되었다. 다수당의 지도자가 암살되고 그의 조직은 임시대총통이었던 위안스카이에 의해 활동을 금지당했다. 위안스카이는 중국을 부활시킬 야심찬 계획을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중앙까지 장악할 만한 군사력이나 조직력은 부족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정치권력은 지방 - 농촌이나 도시 모두 - 의 엘리트, 또는 지방에서 독보적인 권력 중개인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수백 명의 군사 지도자들이 장학하게 되었다. 중국의 정치적 취약성은 국제정세에 의해서 더욱 심화되었다. 일본은 중국에 더 가혹한 요구를 해왔고 중국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서유럽 연합군과 협력하기 위해 10만명의 노동자를 파견하는 대담한 시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영토문제와 관련해서 열강의 지원을 받아 내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그 결과 일정 기간 동안의 정치적 불안과 전무후무한 지적 자기비판이나 모색이 등장했다. 많은 중국 지식인들은 국가가 망하기 거의 일보 직전이라고 확신했고 모든 종류의 정치적•제도적 이론을 연구하고 그들 자신의 사회구조를 검토했으며 새로운 형태의 교육과 언어의 가치에 대해 토론하고 서양과학의 핵심부에 있다고 생각되는 진보의 가능성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5•4운동으로 알려진 이 풍부한 지성과 회의(懷疑)의 집중적인 분출은 비록 그와 같은 탐색의 구성요소들이 명-청 전환기나 청 말 중국의 미래에 대한 논의에서 나타난 적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중국의 지난 2천 년의 역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것이었다.
5•4사상가에 의해 많은 선택의 가능성이 모색되었는데, 그 중 명석한 일부 지식인들은 소련에서 파견된 코민테른 요원들의 노력한 지도를 받으면서 마르크스주의적인 사회주의 이념에 몰두하게 되었다. 192년이 되면 중국 공산당의 핵심부가 구성되고 1921년에는 당의 첫 번째 전체회의가 열렸다. 비록 쑨원의 국민당이 훨씬 더 큰 명성과 지지자를 확보하고 있었지만 공산당은 군벌, 지주제도, 외국 제국주의에 맞서는 싸움을 통해, 그리고 성장하고 있는 중국 산업노동계급의 고난을 강조함으로써 중국의 열망에 적절히 부응할 수 있었다. 공산당 조직가들은 국민당 활동가와 합작하면서 인상적이고 효과적인 많은 파업을 조직해 낼 수 있었으나 파업 지도자들은 종종 용감한 행동의 대가로 자신의 목숨을 내놓아야 했다.
공산당과 국민당의 합작은 이들이 공유하고 있던 절망과 희망에서 탄생했다. 절마은 서로 갈등하고 있던 군벌 정권들과 외국인의 이권이 섞여서 만들어 낸 조각 난 중국의 상황에서 생겨났고, 희망은 중국 인민은 영원한 통일에 필요한 힘 - 정신적•기술적•지적 능력 - 을 창조해 낼 수 있다는 믿음에서 싹터 나왔다. 장기적인 목표와 차이와 사적인 불화에도 불구하고 공산당과 국민당은 적어도 군사력과 사회 개혁 세력의 합작을 통해 국가를 통일해야 한다는 당위성에는 동의했다. 농민을 조직화된 산업노동자 수준으로 끌어 올리기 위한 농촌협회를 결성하는 데 성공했다. 새로 결성된 군대를 이끌고 양쯔강까지 진군했던 1926년의 군사작전은 놀랄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군벌세력에 대한 신속한 제압은 사회정책에 대한 의견 차이를 심화시켰을 뿐이고 국민당을 앞질러 새롭게 국가의 방향을 잡으려 했던 공산당은 1927년에 자신들의 시도가 전부 실패로 돌아가는 것을 처참하게 지켜 봐야 했다.
도시에서 쫓겨난 공산당이 고립된 농촌지역에서 조직을 재건하려 애쓰고 있을 때 국민당은 중국 전역에서 주도권을 확고히 다지고, 마침내 1928년 말에는 만주에서 광둥까지 충국을 하나의 깃발 아래로 모으는 데 성공했다. 장제스는 엄청난 재정 부족을 조작해 가며 국가 행정기구를 재정비하고 교통•도시공공사업, 그리고 교육시설 같은 토대를 발전시키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같은 과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열강이 모두 적은 아니었다. 미국은 자금뿐 아니라 선교사와 함께 기술적으로 숙련된 인력을 제공했다. 독일은 군사 전문가들을 보냈고 독일의 무기와 중국의 희귀 광물을 대규모로 교환하자는 제안을 했다. 그러나 일본은 도발을 계속해 만주에 괴뢰정부를 세우고 그곳에 대한 지배를 확고히 했으며 만리장성 남쪽까지 군대를 진주시켜 중국으로 하여금 동북부 지역을 비무장지대로 선언하게 만들었다. 불만을 품은 지식인들이 이런 국민당의 대일본 유화정책에 반발함에 따라 약동하는 국가에 대한 꿈이 사라져 간 반면, 공산당은 토지개혁과 게릴라 부대를 급진적인 형태로 혼합시킨 크고 활력 넘치는 농촌정부를 창조하기 시작했다.
1930년 중반의 짧은 기간 동안 일본은 중국의 가장 부담스러운 적인 동시에 중국의 민족적 부활의 자극제였다. 장세스의 끈질긴 공격에 의해 중국공산당은 그들의 가장 크고 훌륭한 근거지였던 장시 소비에트에서 쫓겨나 황폐한 북부지방으로 대장정이라는 퇴각의 길에 올랐다. 그러나 그들은 일단 그곳에서 중국인끼리 서로 죽이고 죽는 내전에 지친 민중에게 다시 한번 성공적으로 호소할 수 있었다. 정변을 일으킨 군대에게 장제스가 납치되자 다시 한번 통일전선을 형성하여 침략자에 저항할 수 있는 하나의 국가를 재건할 기회가 주어졌다. 오랜 기간에 걸친 분열과 개혁의 와중에서 수많은 중국 인민이 끔찍한 고통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국가에 대한 이상은 여전히 살아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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