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포퍼: 열린사회와 그 적들 2


열린사회와 그 적들 2 - 10점
칼 R.포퍼 지음/민음사


제 2권

1. 예언적 철학의 등장 

2. 마르크스의 방법 

3. 마르크스의 예언 

4. 마르크스의 윤리 

5. 그 여파들




+ 2011년에 1권을 읽었는데 이제서야 2권을 읽었다.


서론

  이 책은 목차를 보아서는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을지도 모르는 문제들을 제기하고 있다. 이 책은 오늘 우리의 문명이 당면한 난점들이 무엇인가 그 윤곽을 그려 보려고 한다. 우리의 문명은 인간다움과 도리에 맞는 것, 평등과 자유를 겨냥하는 문명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우리의 문명은 아직도 그 유년기에 처해 있으므로, 과거의 인류의 많은 정신사적 지도자들이 그런 방향으로 가는 문명을 흔히 배반하기는 하였지만 앞으로 계속해서 성장해 나가야 할 것이다. 이 책이 밝혀 보여 주고자 하는 것은, 우리의 문명은 아직도 그 탄생의 충격으로부터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채, 마력에 끌려가는 종족적인 닫힌 사회로부터 인간의 비판적 힘을 활짝 풀어 놓은 열린사회에로 가는 전환기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전환의 충격 때문에 우리의 문명을 전복시켜 저 종족주의에로 다시 복귀시키려는 반동적인 움직임들이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을 이 책은 보여주려고 한다. 우리 문명 자체만큼이나 오래되었다면 오래되었다고 젊었다면 젊은 그 전통의 한 가닥이라는 것을 지적하고자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책은 전체주의가 무엇인가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돕는 데 기여하며, 그 전체주의에 대한 영속적인 투쟁이 무슨 의의를 지니고 있는가를 분명히 하는 데 이바지 하고자 한다.

  또한 이 책은 과학의 비판적이며 합리적인 방법을 열린사회의 문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가도 검토하려고 한다. <유토피아적 사회공학>이라는 것과 반대되는, 내가 <점진적 사회공학>이라고 부른 (제1권 9장에서) 민주적 사회개조의 원리가 무엇인가도 분석하려고 한다. 그리고 이 책에서 사회개조에 대한 합리적 접근을 가로막고 있는 장애 요소들을 또한 제거하려고 나는 노력할 것이다. 그것을 가로막고 있는 가장 강력한 철학이 바로 역사주의 historicism인데 나는 그것을 비판하려고 한다. 이 책의 중요한 주제는 역사주의 가운데 중요한 형태가 어떻게 등장하여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일부의 역사주의적 철학의 발전과정에 대한 하나의 脚註錄에 불과하지 않을까 한다. 역사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며 그것이 내가 언급한 다른 쟁점들과 어떤 연관을 맺고 있는가는 이 책이 어떻게 쓰여지게 되었는가에 대해 몇 마디 함으로써 해명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비록 나의 주된 관심이 물리학의 방법론에 (그리고 이 책에서 다른 문제와는 거리가 먼 아주 전문적인 문제에) 있긴 하지만, 지난 수년 동안 나의 관심거리가 되었던 것은 사회과학과 특히 사회철학에 있어서 사뭇 불만족스러운 상태에 머물러 있는 문제들이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방법론적 문제들이었다. 전체주의의 등장은 이런 문제에 대한 나의 관심을 더욱 자극해 주었다. 더욱이나 여러 가지 사회과학과 사회철학이 그 전체주의가 도대체 어떤 것인지에 대해 제대로 해명해 주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나의 관심을 더 자극해 주었다.

  이 대목에서 각별히 나의 마음을 흔들어 놓은 점이 하나 있다. 이런 형태이건 저런 형태이건 도대체 전체주의는 불가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이야기를 우리는 흔히 듣는다. 타고나 지능으로 보나 받은 교육으로 보나 자기가 한 말에 책임을 져야 할 많은 사람들이 전체주의 밖에 별수 있는가 하는 소리를 공공연하게 떠들어댄다. 민주주의가 언제까지라도 존속하리라고 믿을 정도로 그렇게 순진할 수 있느냐고 그들은 우리에게 되물어 온다. 또한 민주주의는 역사의 진행과정에 생겼다가 사라지고 마는 수많은 정부 형태의 하나가 아니겠는가라고 그들은 말한다. 민주주의가 전체주의와 맞붙어 싸우려면 전체주의의 방법을 본떠서 전체주의 자체가 되어 버리는 수 밖에 없지 않느냐고 그들은 이야기 한다. 혹은 그들은 이런 주장을 펴기도 한다 : 산업사회는 집단주의적 계획 방법을 채택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 계속 명맥을 유지할 수 없으므로, 전체주의는 불가피한 것일 수 밖에 없다.

  이런 논변은 참 그럴싸하게 들린다. 그러나 그럴싸하다고 해서 그것이 이런 문제에 대한 믿고 따라갈 만한 지침이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사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방법론적 문제를 고려해 보기 전에는 이와같은 겉으로 그럴듯해 보이는 논변을 따지고 들려고 해서는 안된다. 만일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미래가 인류에게 무엇을 장만해 놓고 있는가를 물어 본다면 그 무책임한 점쟁이의 대답 같은 것 이외에 무엇을 더 기대할 수 있겠는가?

  이 물음은 사회과학의 방법론에 관한 문제이다. 그것은 분명히 어떤 역사적 예언을 뒷받침하는 논증을 비판하는 것보다는 더 근본적인 문제이다.

  이러한 문제를 자세히 검토해 본 결과 나는, 그와 같은 전면적인 역사적 예언은 전적으로 과학적 방법의 영역 밖에 있는 문제라는 확신에 도달했다. 미래는 우리 인간에게 달려 있는 것이요 우리가 역사적 필연성에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와 정반대 견해를 주장하는 아주 영향력 있는 사회철학들이 있다. 그들은 이렇게 주장한다: 우리 모두 머리를 쥐어짜서 다가올 미래의 사건을 예측하도록 해야 한다. 전투의 결과를 예견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러한 예측보다 전면적인 역사적인 예언과의 경계선은 모호하다. 그리고 그들은 또 이렇게 주장한다: 사회과학 일반의 임무는 예측을 하거나, 우리의 일상적 예언을 개선하는 데 있다. 특히 사회과학의 임무는 우리에게 장기적인 역사적 예언을 장만해 주는 데 있다. 그리고 역사적 사건들의 진행과정을 그들로 하여금 예언케 해주는 역사법칙을 그들이 발견했다고 믿는다. 이러한 종류의 주장을 내세우는 사람들을 다 한데 묶어 나는 역사주의라는 명칭을 붙였다.  [역사주의의 빈곤 The Poverty of Historicism]이라는 나의 책에서, 나는 그 역사주의의가 그럴듯해 보임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과학의 방법에 대한 엄청난 오해에서 나온 주장이요, 특히 과학적 예측역사적 예언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고 내세우는 주장이라는 것을 밝혀 보임으로써 나는 그 역사주의를 반박하려고 하였다. 역사주의의 주장들을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비판하는 일을 하면서 나는 그 역사주의 전개의 모습을 보여주는 자료들을 수집하려고 하였다. 그 목적으로 수집한 자료들이 이 책의 토대를 이루었다.

  역사주의에 대한 체계적 분석작업은 과학적 작업의 성격을 띤 것이기를 지향한다. 그러나 이 책은 그런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여기에 표현된 대부분의 견해는 개인적인 견해이다. 이 책에서 과학적 방법에 힘입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대체로 자기의 한계를 인식하는 그 점이라고 하겠다. 증명할 수 없는 것을 가지고 증명하려고 하지도 않았으며, 개인적 의견을 제시할 수 밖에 없는 것에 대해 과학적인 체하는 거드름을 피우려고 하지도 않았다. 철학의 옛 체계를 새로운 체계로 바꾸어 놓으려고 하지 않았다. 오늘날 한창 유행하고 있는 바와 같은 역사와 운명의 형이상학이라는 지혜로 가득 찬 그 두꺼운 책에다 무엇을 더 보태 넣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이 책이 보여 주려고 하는 것은 차라리 이러한 예언적 지혜는 해롭기 짝이 없으며, 역사에 관한 형이상학은 과학의 점진적 방법을 사회개혁의 문제에 적용하는 것을 막아 버린다는 점이다. 그리고 우리가 역사에 관한 예언자로 행세하기를 중지할 때, 우리는 우리의 운명의 창조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또한 보여 주려고 하였다.

  역사주의의 전개과정을 추적해 보면서 내가 발견한 사실은, 지성의 지도자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는 역사적 예언의 위험스러운 버릇은 여러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어떤 秘法을 아는 집단에 속해 있어서 역사의 진행과정을 예측하는 비상한 재주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생각만 해도 마음이 흐뭇해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거기다가, 능력은 있으나 예언하는 재주를 갖지 못한 지식인은 사회에서 보잘것없는 존재가 되는 전통마저 있으니 말이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야바위꾼으로 세상에 폭로될 위험도 매우 적으니, 그 까닭은 그 예언이 잘 안맞는 경우에는 그것까지 말한 것은 아니라고 말하면 되니 말이다. 이것과 점쟁이 소리와는 그 경계가 매우 모호하다.

  역사주의적 신념을 지니는 다른 더 깊은 동기가 가끔 있다. 지상천국이 도래한다는 것을 예언하는 예언자는 가슴 깊숙이 도사린 불만을 밖으로 표현해 준다. 그런 꿈 없이는 살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지상천국의 꿈은 한없는 희망과 격려를 안겨 준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은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매일 부딪치는 사회적 현실의 문제로부터 외면하게 하는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그리고 전체주의에로 빠져들어가는 것과 같은 작은 사건은 꼭 일어나게 되어 있다고 알리는 작은 예언자들은, 그들이 원하건 그렇지 않건, 이러한 사건을 초래하는데 기여한다. 민주주의가 영속하지 않으리라는 말은, 인간 이성이 영속하지 않으리라는 주장과 같이 맞는 말이긴 하나 정곡을 찌르지 못한 말이다. 민주주의만이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이성을 사용함으로써 정치적 개혁을 할 수 있게 하는 제도적 틀을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그런 이야기는 전체주의에 맞서 투쟁하는 사람들의 사기를 꺾기만 할 뿐이다. 그 동기는 문명에 대한 반역을 지원하려는 데 있다. 역사주의적 형이상학이 인간을 책임이 주는 긴장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효과가 있다는 것을 고려하면 또 다른 동기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당신이 무엇을 하든지 만사는 그렇게 되도록 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무엇이 일어나든 그와 대결하여 투쟁을 벌일 생각을 아예 하지 않게 된다. 더욱이나 모든 사람이 사회악이라고 생각하는 전쟁, 혹은 그보다는 적은 일이기는 하지만 더 중요한, 일개의 보잘것없는 관리의 독재와 같은 일들에 대해 어떤 대처를 하려는 생각을 단념하게 된다.

  그렇다고 역사주의가 반드시 그런 영향만 끼친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책임의 긴장으로부터 인간을 벗어나게 하길 원치않는 역사주의자들- 특히 마르크스주의자들 - 이 있다. 다른 한 쪽에는 역사주의일 수도 아닐 수도 있지만, 사회적 문제에 있어서 이성의 무력함을 설파하는 반합리주의적인 다음과 같은 태도를 퍼뜨리는 사회철학들이 있다: <위대한 정치지도자를 좇아가든가 네 자신이 지도자가 되라.> 이러한 태도가 많은 사람에게 의미하는 것은, 사회를 통치하는 힘에, 그것이 인격적이든 익명적인 것이든, 무조건 복종하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성을 규탄할 뿐 아니라 현대의 사회악에 대한 책임은 이성에 있다고까지 비난하는데, 그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역사적 예언은 이성의 힘 밖에 있다는 것을 그들이 알기 때문이요, 또 다른 하나는 역사적 예언 이외의 다른 기능을 하는 사회과학이나 사회적 이성을 그들은 상상도 못하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해서 그들은 절망에 빠진 역사주의자들이다. 역사주의의 빈곤을 깨달았음에도 불구하고 사회과학이 무슨 소용이 있다면 그것은 예언을 하는 데 있다는 역사주의의 근본적 편견을 그들이 지니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그들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이러한 태도는 과학이나 이성을 사회적인 문제, 특히 지배와 복종의 권력의 문제에 적용하는 것을 배격하게 되고 만다는 점이다.

  도대체 이런 사회철학들이 문명에 대한 반역을 지원하는 까닭이 무엇인가? 그들이 인기를 얻는 비결이 무엇인가? 그것들이 그렇게 많은 지식인들의 주의를 끌어 매혹시키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들은 인간의 도덕적 이상과 완전에의 꿈을 실현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할 수도 없는 이 세계에 대한 가슴속 깊이 쌓인 불만을 표현해 주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나에게는 든다. 역사주의 (그리고 그와 관련된 견해) 문명에 대한 반역을 지원해 주는 성향을 지니게 되는 것은, 역사주의 자체가 문명의 긴장에 대한 하나의 반동이며 개인적 책임에 대한 하나의 반동이기 때문이다.

  여기 마지막에 한 이야기는 좀 모호한 암시에 불과하다. 그러나 서론으로써 충분하다고 본다. 나중에 특히 [열린사회와 그 적들]이라는 제1권 10장 속에 있는 역사적 자료에 의해서 그것에 관한 이야기가 더 보충될 것이다. 나는 그 제10장을 이 책 첫머리에 두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그 주제적 관심 때문에 훨씬 더 매력적인 서론이 될 수 도 있겠기에 말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생각해 보면, 이 책의 제1권 앞 부분에서 논의된 자료를 먼저 읽지 않고서는, 그 역사적 해석의 무게를 제대로 느낄 수 없다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우리가 플라톤의 정의론과 현대 전체주의의 이론과 그 실재에 대한 역사적 해석의 절박한 필요성을 느끼기 전에, 그것들이 얼마나 서로 유사한 이론들인가를 먼저 살펴보고, 마음에 어떤 느낌을 갖는 것이 좋을 것이다.



 제15장 역사는 도대체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379 역사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나는 주장한다. 그러나 나의 이런 주장은 우리가 기껏 할 수 있는 것은 정치 권력의 역사를 얼빠진 모양으로 쳐다보고만 있거나 그것을 하나의 잔인한 농담으로 보아넘겨야 한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우리 시대에 해결하려고 선택하는 문제들을 눈여겨보며 역사를 해석할 수 있다. 우리는 열린사회를 위하여, 이성의 지배를 위하여, 정의와 자유와 평등을 위하여, 그리고 국제적 범죄의 통제를 위하여 우리가 벌이는 투쟁의 관점에서 권력정치의 역사를 해석할 수 있다. 역사가 그 자체로 목적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의 이러한 목적을 역사에 부여할 수 있다. 그리고 역사가 자체로 의미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가 역사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자연과 관습 convention의 문제와 만난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한다는 것을 자연도 역사도 우리에게 말해 줄 수 없다. 자연적 사실이나 역사적 사실 그 어느 것도 우리를 대신해서 결정을 내려 줄 수 없으며, 우리가 선택하려고 하는 목적을 결정해 줄 수 없다. 자연과 역사에 목적과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우리 자신들이다. 인간은 그 자체로 평등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평등권을 위한 투쟁을 벌일 것을 결정할 수 있다. 국가와 같은 인간의 제도들은 그 자체로 합리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보다 합리적으로 만들기 위한 투쟁을 벌일 결정을 내릴 수 있다. 우리들 자신과 우리의 일상언어는 대체로 합리적이기보다는 정서적이다. 그러나 우리가 스스로 조금 더 합리적이 되도록 노력할 수 있으며, 우리가 우리의 언어를 (낭만주의적 교육가들이 말한 바와 같은) 자기 표현의 수단이 아니라 합리적 의사소통의 수단으로서 사용하도록 우리 자신을 훈련시킬 수 있다. 역사 자체는 - 내가 말하는 역사는 정치권력의 역사요, 인류의 발전에 대한 꾸민 이야기가 아니다 - 아무런 목적도 의미도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가 그 둘 다를 역사에 부여하기로 결정할 수 있다. 우리는 열린사회를 위한 투쟁과 그 적들(궁지에 몰리면 이들은 파레토의 충고에 따라 인도주의적 정감을 앞세운다)과의 항쟁을 벌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에 따라 우리는 역사를 해석할 수 있다. 궁극적으로 같은 이야기를 삶의 의미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 무엇이 삶의 목적이 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들 자신에게 달렸다.

  사실과 결정의 이러한 이원론은 아주 근본적인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사실 자체는 아무 의미도 가지고 있지 않다. 사실은 우리의 결정을 통해서만 의미를 획득할 수 있다. 역사주의는 이러한 이원론을 무너뜨리려는 많은 시도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그것은 공포로부터 탄생한다. 우리가 선택하는 표준에 대해서까지 궁극적 책임을 우리가 져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움츠러든다. 그러한 시도는 보통 미신이라고 말하는 바로 그것을 대표하는 것같이 나에게는 보인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씨뿌리지 않은데서 추수할 수 있다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역사에 발을 들여놓기만 하면 만사가 제대로 흘러가게 마련이며 우리쪽에서 어떤 근본적인 결정을 내릴 필요가 없다고 그것은 우리에게 계속 타이르기 때문이다. 역사주의는 우리의 책임을 역사에 전가하려고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배후에 있는 마력의 유희에 책임을 내맡겨 버리려 한다. 역사주의는 우리의 행동들의 토대를 신비적 영감이나 직관에 있어서만 나타나는 이러한 마력의 숨은 의도에 두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자신과 우리의 행동들을 점괘나 꿈에 의해서 제비뽑기의 행운의 숫자를 선택하는 사람의 도덕적 수준에 머물게 한다. 도박과 같이 역사주의는 합리성에 대한 절망과 우리의 행위의 책임에 대한 두려움에서 탄생한다. 그것은 격하된 희망이며 격하된 신앙이다. 그것은 도덕에 대한 강한 예찬과 성공에 대한 경멸로부터 솟아나오는 희망과 신앙을 사이비 과학으로부터 나오는 확실성으로 바꾸는 시도이다. 그 사이비 과학은 별들과 <인간의 본성> <역사의 운명>에 관해 이야기한다.

  역사주의는 합리적으로 지지될 수 없는 것일 뿐 아니라 양심의 중요성을 가르치는 어떤 종교와도 어긋난다고 나는 본다. 그러한 종교는, 우리의 행동과 그것이 역사의 진로에 미치는 파급효과에 대한 최고의 책임을 강조하는 역사에 대한 합리주의적 태도와 일치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참으로 우리는 희망이 필요하다.  희망 없이 행동하며 사는 것은 우리의 능력 밖의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이상도 필요치 않으며 그 이상 우리에게 주어져서도 안된다. 윌에겐 확실성은 필요없다. 특히 종교가 꿈이나 자기 마음속의 소원의 대용품이 되어서는 안된다. 종교가 복권을 사는 것이나 보험회사에 보험을 드는 것과 같아서는 안된다. 종교에 있어서의 역사주의적 요소는 일종의 우상숭배이며 미신적 요소이다.

  사실과 결정의 이원론에 대한 강조는 진보관련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또한 결정한다. 만약 우리가 역사는 진보해 가도록 되어 있다든지 우리는 진보하도록 되어 있다고 생각하게 되면, 역사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그 안을 들여다보면 발견될 수 있으므로 우리가 역사에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고 믿는 사람과 같은 오류를 범하게 된다. 여기서 진보는 인간존재인 우리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그 어떤 목적을 향해 움직여 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역사>는 그런 일을 해내지 못한다. 그것을 할 수 있는 것은 우리들 개개의 인간뿐이다. 우리는 자유와 함께 진보가 의존하고 있는 민주주의 제도들을 지키고 강화함으로써 진보를 이룩할 수 있다. 진보는 우리에게 달렸다. 즉 우리의 경계와 노력과 우리의 목적에 대한 분명한 생각과 목적 선택에 있어서의 현실적 감각, 이 모든 것에 진보가 달려 있다는 사실을 보다 더 깊게 인식하면 할수록 우리는 진보를 더 잘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예언자로서 나서는 대신에 우리의 운명의 창조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최선을 다해 일을 하는 법을 배워야 하며, 우리의 오류를 항상 눈여겨보도록 우리 자신을 길들여야 한다. 권력의 역사가 우리의 심판자라는 생각을 우리가 내던져 버릴 때, 역사가 우리를 정당화해 줄 것인가에 대해 염려하는 버릇을 끊어 버렸을 때 그 때에야 비로소 아마도 우리는 권력을 길들이는 데 성공하게 될 것이다. 이리하여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역사를 정당화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는 정당화를 너무나 절실하게 요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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