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고전강의 | 03 단테 신곡 5


신곡 : 연옥 - 10점
단테 알리기에리 지음, 김운찬 옮김/열린책들


강유원, '인문고전강의' 

일시: 2013년 2월7일 – 12월 5일, 매주 목요일 오후 7시30분 – 9시30분(총 40주)

장소: 과천시정보과학도서관


* 강의 목차

20130502 13강 단테신곡(1)

20130509 14강 단테신곡(2)

20130523 15강 단테신곡(3)

20130530 16강 단테신곡(4)

20130613 17강 단테신곡(5)

20130620 18강-1 단테신곡(6)




20130613 17강 단테신곡(5)

<신곡> 다음에 공부할 <군주론>은 서울대출판부에서 나온 박상섭 교수의 번역을 준비하면 되고, 까치에서 나온 강정인, 김경희 교수의 번역본이 있으면 사용해도 된다. 


오늘은 <연옥편>과 <천국편>을 읽겠다.

신곡의 나오는 이야기들을 읽다 보면 서사시나 신화에 나오는 내용을 단테가 가져다가 쓰는 경우 거기에 나오는 내용과는 다르게 이야기 하는 경우가 있다. 아주 주요하게는 단테가 그 이야기를 정확하게 모르고 있고, 책을 놓고 인용한 것이 아니라 기억에 의존해서 인용했기 때문에 그러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가능성은 단테가 이야기를 살짝 바꿔 놓은 것은 재해석 했기 때문에 그런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걸 꼭 알아두어야 한다. 그런데 어떤 경우는 재해석이고, 어떤 경우는 정확하지 알지 못했기 때문인 건인가? 이건 규칙이 없다. 봐야 안다. 


극단적인 예가 헤겔의 법철학서문을 보면 괴테 <파우스트>를 인용하는 부분이 있다. 읽어보면 <파우스트>에 나온 얘기를 정확하게 인용을 안하고 패러프레이즈를 해서 나오는 부분이 있다. 그런 부분은 그것에 대해서 해석이 분분하다. 파우스트의 재해석이다 얘기가 있고,, 기억에 의존해서 인용한것이다라는 것이 있는데 많은 헤겔 연구자들이 기억이 틀려먹었다는 결론이 났다. 그런데 단테의 그런 경우는 거의 다 재해석이다라고 보면 된다. 어떤 텍스트라는 것이 특정한 시기에 다시 읽히고 재해석되고 또는 재해석을 통해 내용을 전복시키고 그런 경우가 많다. 

똑같은 사건이라도 여러가지 방식으로 해석이 된다. 그리고 당대의 맥락과 후대의 맥락이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그런 것들에 대해서 민감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청렴결백한 것. 불변의 가치 기준에서 언제나 청렴결백하게 받아들여질 거라고 착각이다.


플라톤 <국가> 10권을 보면 살아서는 사람들의 칭찬을 받는데 죽어서는 어떻게 되느냐, 죽어서도 좋은 일이 있다네. 올바름에 대한 보답이 뭐냐, 살아서나 죽어서나 좋은 일이있다. 이게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서 내놓는 얘기. 어떻게 이 얘기를 하느냐면 죽은 다음 얘기를 할 때 알키노오스가 듣게 된 이야기가 있다. <오뒷세이아>에서 오뒷세우스가 배를 타고 난파가 되어서 스케리아 섬에 표류를 한다. 스케리아 섬에 표류를 한 다음에 알키노오스 왕을 만나서 자기가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얘기를 해준다. 그래서 알키노오스가 듣게된 이야기. 플라톤은 알키노오스가 듣게된 이야기가 아니라 에르라고 하는 한 용감한 남자에게서 소크라테스가 듣게 된 이야기라고 말을 한다. 이게 나오면 이 부분에는 알키노오스가가 듣게 된 이야기라고 뜬금없이 나온다. 우리는 주석이 없거나 <오뒷세이아>를 읽지 않은 사람은 이야기를 모르겠지만 희랍사람들은 바로 안다. 그런데 알키오노스가 듣게 된 이야기가 아니라 에르라는 한 용감한 남자한테 들은 이야기라고 시작한다. 이 지점부터는 계속해서 플라톤 <국가>에서는 호메로스 비난한다.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나오는 인물들을 본받아서는 내가 말하는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호메로스의 서사시는 비잔티제국 서기 1000년대에도 표준 교육자료로 사용할 정도로 영향력이 컸다. 공용어가 그리스어였기 때문. 계속해서 <오뒷세이아>, <일리아스>에 나오는 아킬레우스가 희랍 젊은이들에게는 굉장히 모범사례였다. 아킬레우스는 계속 나대고, 감정이 격하고 이성이 없는 상태. 그래서 플라톤은 그런 사람을 모범으로 해서 자라면 우리 사회가 그래서 전쟁만 한다, 전쟁에서 능란한 놈들을 모범사례로 하면 안된다는 것이 플라톤의 생각. 그래서 호메로스를 계속 비난하는 건 시인으로서 가 아니라 교육자료로서 호메로스를 비난하는 것. 플라톤가 시인을 미워했다가 아니다. 플라톤이 예술을 싫어했다고 하는 것은 알지 못한 상태에서 상대를 비난하는 것. 


<신곡>에는 단테 이전 사람들이 많이 나온다.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를 생각해봐야 한다. 단테가 이 사람들에 대한 행적에 대해서 잘못 알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해석을 한 것인가. 여기서 그러니까 계속해서 플라톤이 <국가>에서 호메로스 서사시가 이게 문제가 저게 문제다 하면서 맨 마지막에 결정적으로 10권에서 결론을 낸다. 바로 재해석에 들어간다. 자기가 에르에게 듣는 이야기를 전하는데 여기서 벌써 호메로스 서사시 얘기를 하면서 플라톤이 호메로스 서사시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내놓는다. 그런데 10권에서 조금 더 에르의 해나가면서 결정적으로 달라지는 핵심적인 2두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인간의 죽은 다음에 모이라(운명의 여신) 앞에 제비뽑기를 하는데 전생에 살았던 삶의 습관을 그대로 가진 채 그 습관에 따라 뽑더라라고 얘기를 한다. 전생의 습관이 중요하더라. 전생의 습관에 따라 다음 생에 어떤 삶을 살아갈지 뽑더라. 정해주는것이 아니다. 물론 애초에 한번 거른다. 올바르지 못하게 산 사람은 왼쪽 아래로 내려가고, 사람답게 산사람은 오른쪽 위로 올라가는데 이 사람들이 제비뽑기를 하는데 전생의 습관에 따라 고르더라는 것. 플라가 소크의 입을 빌려 말하는 부분. 자, 그러니 죽기 전에 공부를 해야 할 것인 아닌가. 어떻게 하면 좋은 것인지 유익하고 올바른 것인지 배워가지고 가야 다음 생애에서 제대로 된 걸 뽑지 않겠는가 한다.  사실이 그렇다. <티벳 사자의 서>를 읽어봐도 살아있을 때 올바른 것에 대한 감각이 있느냐에 따라 그의 영혼이 어디로 가는지 결정난다고 한다. 어쨌든 사람은 올바른 것을 해야 한다. 살아서 올바름에 대해 공부해야 한다. 익히는 최선의 학문을 배워야 한다 얘기한다. 그리고 두 번째 가면 이렇게 된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플라톤 <국가>는 일년 내내 40주 읽을 수 있다. 그거 하나만 읽으면 나도 이제 웬만큼 읽었구나 뿌듯함이 있을 것. 두 번째는 그런데 에르가 마침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나오는 주인공들이 제비뽑기를 하는 장면을 보게되었다는 얘기를 한다. 의도적으로 삽입되어 들어간 것. 아킬레우스의 무구를 가지려고 했다가 안되니까 열받아서 자폭 죽는 아이아스는 무엇을 선택했나, 사람으로 다시 안 태어난다고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아가멤논은 희랍의 모든 인물 중에 가장 불쌍한 인간인데 아예 인간이라는 종족에 대한 환멸 때문에 독수리의 삶을 선택한다. 이쯤 되면 여기서 이 이야기를 하면서 플라톤이 <오뒷세이아>를 읽고 이걸 열심히 따라해도 사실은 그것들의 삶이 제대로 된 게 아니라는 비난을 퍼 붇고 있는 것. 굉장한 비난. 그래서 젊은이들 타락시킨다는 소크라테스가 법정에서 구속되었다. 어마어마하게 사람들에게 스며들어가 있는 내용을 이런 식으로 부정해갔기 때문.


여기서 하나 더 오뒷세우스에 대해서 길게 얘기한다. 오뒷세우스는 기나긴 여행 끝에 이제 명예에 대한 욕망도 없어진 오뒷세우스. 오뒷세우스가 결국 원하는 것은 명예가 아니다. 공명심·공적인 영역에서 얻게 되는 명예가 아니라 편안하게 개인의 삶을 사는 사인의 삶을 찾아 헤매다가 그것을 간신히 발견하고서는 그 삶을 선택했다고 한다. 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 오뒷세우스의 행동동기가 호모프로쉬네. 그것에 대해서는 플라톤도 공감하는 것. 그런데 사인의 삶이라는 것을 완전히 공감하지 못한다. 철학적 통치자는 공공영역의 삶이니까. 거기에는 해석이 몇가지 덧붙일 것이 있는 데 그건 플라톤은 <국가>를 읽게 되면 이야기 하겠다.  플라톤이 얘기하는 건 통치자가 되려면 기본적으로 모든 사태에 대해서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평정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 플라톤은 영역에서 벌어지는 일과 사적인 영역에서 벌어지는 일을 철벽처럼 나누고, 공적 사람들은 삶 자체를 공적인 것으로 보통 사람들은 오뒷세우스처럼 살아라라는 것이다. 아 플라톤이 호메 로스 서사시를 재해석해서 썼구나를 알 수 있다. 단테를 읽을 때도 그런 부분이 나타나면 기존에 나와있는 얘기들을 재해석 했구나 생각하는 것이 합당한 해석이다. 유념할 것


<연옥편> 27곡을 보자. 여기서부터 슬슬 천국에 갈 수 있는 예고편으로 볼 수 있다. 


Dante, Divina Commedia, Purgatorio.27.88

그곳 바깥은 조금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그 약간의 틈으로 평소보다

훨씬 더 밝고 커다란 별들을 보았다.


평소보다 훨씬 더 밝고 커다란 별들을 보았다 >> 자기에 보기에 그렇다는 것. 이런 것들이 이제 암시가 있는 것. 이런 암시들을 찾아내는 것이 서사시를 읽는데 어려운 부분. 별들이 평상시보다 더 밝고 커다랗게 보인다. 하늘에 가까이 갔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말하자면 감각있게 찾아내는 것이 공부.


<신곡>이라는 텍스트는 단테가 고통에 처해있을 때 썼다. 단테는 어떻게 했는가. 너무나 괴로울 때 시를 쓴 것. 베아트리체는 베르길리우스에게 당신이 훌륭한 말로 이끌어달라고 한다. 단테가 자기 말을 한 것. 단테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쓴 것.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고통에 빠져있는 나를 위한 것. 이게 시인이 하는 일. 자기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서 말을 했는데 그렇게 말을 했기 때문에 우리도 이 시를 읽으면서 구원을 얻을 수 있게 되는 것. 이게 시인의 일. 그러면 이 순간 말이라고 하는 것을 내놓는 순간 시인은 갑자기 지극히 사밀한 사적이고도 은밀한 이 영역 안에서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언어의 강을 쏟아내놓으신 베르길리우스라고 말하는데, 사실은 단테가 다 하는 것. 지극한 사밀한 영역 안에 들어있는 구원의 말들을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나 스스로를 위해서 내가 나를 위하여 써놓은 이 말들이 당대의 이탈리아 피렌체 사람들뿐 아니라 현재 21세기 한국에 있는 사람에게까지 와서, 변역이라는 절차를 거치기는 했지만, 와 닿아서 우리에게 오는 순간 이 시인은 갑자기 사밀한 영역에서 공공의 영역으로 나오는 것. 시의 공공성. 이렇게 되는 것. 참여문학이란 아주 저급한 문학이론. 폭압과 독재의 시대를 거치면서 저항시인에 대해 굉장한 존경심을 있는데 그건 그것대로 인정한다. 그것은 시인으로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보여준 숭고한 저항으로 인정을 해야지 그들의 시를 가지고 인정하면 안되다. 그 시가 여전히 우리에게도 구원의 메시지로 읽을 수 있는가는 별개.


인문학공부라는 것은 말을 공부하는 것이다. 훌륭한 말. 말을 잘해야 한다. 지금은 말을 잘하는 것에 대해서 아무런 교육이 없다. 고전텍스트가 얼마나 번역이 잘되었는가를 떠나서 내가 얼마나 잘 읽어낼 수 있겠는가 따져물어야 한다.


Dante, Divina Commedia, Purgatorio.27.115

나는 벌써 일어난 스승님들을 보았다.

「사람들이 열심히 수많은 가지들을

통해 찾아다니는 그 달콤한 열매가

오늘 너의 배고픔에 평화를 주리라.」


그 달콤한 열매가 오늘 너의 배고픔에 평화를 주리라. >> 육체의 욕망이다. 단테는 육체의 욕망이 있다. 그런데


베르길리우스는 나를 향해 그런 말을

하셨으니, 거기에 비할 만큼 즐거운

소식은 전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빨리 위로 날아오르고 싶은 욕망이

나를 사로잡았으니, 이후 걸음마다

날개가 돋아서 날아가는 것 같았다.

우리가 달려 올라온 계단들이 모두

발밑에 있고, 맨 위 계단에 이르자

베르길리우스는 내 눈을 응시하면서

말하셨다. 「아들아, 너는 순간의 불과

영원의 불을 보았고, 이제는 내가


순간의 불은 연옥, 영원의 불은 지옥이다. 외워라.


더 이상 알지 못하는 곳에 이르렀다.


지옥과 연옥을 거쳐 내가 더 이상 이제 알지 못하는 곳에 이르렀다. 천국에 대해서는 모른다는 것, 


내 지성과 재주로 여기까지 인도했으나,


'지성'이라는 말은 말 그대로 인텔리전트, '재주'라는 말은 한국어 맥락에서는 잔재주를 많이 쓰는데 원래 이탈리아어로는 아르떼, 기술. 희랍사상 이후로 희랍어에서 에르곤 ergon, 기능에 대해 말을 한 적이 있다. 어떤 지적인 것을 다 포함하지만 가치판단이 완전히 배제된 function, 작동방식을 가리킬 때 에르곤을 쓴다. 이 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뭐든지 가치판단을 먼저 해버리만 서구사고방식에서는 가치판단을 나중에 하고 그것이 얼마나 잘 작동되는가, 얼마나 강한 능력을 가지고 있느냐, 어느 정도 정교한가, 가치적으로 좋고 나쁨을 떠나서 기능주의적인 태도들이 있다. 그것에 대해서 탁월하다는 이름을 붙인다. 그게 바로 희랍 철학에 나타나는 탁월함. 아레테. 덕. 여기서 '재주'라는 것도 아르테. 왜 이렇게 강조를 하는가. 마키아벨리를 읽을 때는 에르곤이라는 희랍어 개념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군주라고 하면 인격을 떠올리는데 반해 군주의 덕, 비르투라고 할 때 군주가 가지고 있는 위력과 힘, 능력, 재주, 이런걸 가리키는 말이다.  알아둬야 한다.


이제부터는 네 기쁨을 안내자로 삼아라.

이제 험난하고 힘든 길에서 벗어났으니,

보아라, 태양이 네 이마 위에 비치고,

여기 땅에서 저절로 혼자 자라나는

풀잎과 꽃들, 작은 나무들을 보아라.

눈물을 흘리며 나를 너에게 보냈던

아름다운 눈이 즐겁게 오는 동안

너는 이곳에 앉거나 거닐어도 좋다.

나의 말이나 눈짓을 기다리지 마라.


이런 것은 상당히 지옥과 연옥을 거쳐온 사람치고는 상당히 감미롭다. 신곡의 저변에 놓여있는 낙관주의, 이런 맥락에서 낙관주의가 느껴진다. 인간은 원래 완전하게 되어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  진화론이 과학적으로 맞아서 선뜻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 진화론의 입장에서는 인간이 너무 하잖다. 그래서 플라톤의 과학이론을 현재 과학이론으로 보면 안 된다. 하나의 판타지로써 이념체계로써 받아들여야 한다. 철학에서 플라톤주의라고 말을 하면 가장 좋은 점은 인간에 대한 낙관주의다. 인간이 대단히 훌륭한 존재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플라톤의 인식론에 따르면 인간은 원래 레테의 강물을 마시기 전에 다 알고 있었다고 한다. 우리가 뭔가를 안다고 할 때 새로운 것을 아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아는 것을 하나씩 깨우쳐 가는 과정. 이 것이 인간의 앎. 이것의 밑바닥에 까리는 전제는 인간은 본래 신과 마찬가지로 다 아는 존재. 에르라는 사람은 망각의 물을 안 먹어서 그래서 다 기억하는 것. 그러니까 우리가 노력을 해서 신과 같은 존재가 될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인간을 사랑하고 훌륭한 존재라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  고대세계의 텍스트들이 판타지가 있다. 현대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는 알게 모르게 1차 세계대전 이후의 철학사상과 고달픈 한국 현대사에 시달리다 보니까 인간이라는 존재는 쓰레기 같고 불완전하고 개판이고 심지어 훈육 받아야 하는 심지어 채찍으로 맞아야 하는 이상한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철학공부를 시작할 때는 인간은 참 쓰레기 같은 존재구나 생각을 했고, 인간으로서는 성취할 수 없는 영원한 뭔가가 있을 줄 알고 철학책을 가까이 하면 되겠구나 생각했는데 철학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느끼는 것은 위대한 철학자들도 인간의 위대함을 얘기한다. 자학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 특히나 <신곡>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신성화 가능성에 대해서 밀고 갈때까지 밀어본 텍스트. 적극적 긍정적 가능성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봐야 한다. 베르길리우스가 단테에게 <연옥편> 27곡에서 하는 말이 무슨 말일까 생각해봐야 한다. 


네 의지는 자유롭고 바르고 건강하여

거기에 따르지 않음은 옳지 않으리니,

너에게 왕관과 주교관(主敎冠)을 씌우노라.」


영원한 불과 순간의 불을 거친 정련된 의지, 자유의지인데. 주석이 조금 잘못되어 있다. 완전히 자유로운 의지에 따라 행동해도 좋다는 의미다라고 되었는데 안 좋다. 서구에서 자유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하나가 말 그대로 제멋대로 하는, 자의적인 자유. 그리고 이성적인 원리에 따라서 자신을 정련해서, 공자님 말대로 마음에 내키는 대로 해도 도에 어긋남이 없었다 라고 하는 것처럼 그것도 자유라는 개념으로 설명이 된다. 여기가 그런 부분. 정련된 의지로써의 의지를 말하는 것. 리버럴리즘, 자유주의라고 말할 때 그때는 우리가 뭔가를 욕망하는 자유만을 자유라고 인정하는 자유주의. 그런 자유는 서양사람들도 열렬하게 매몰되어 있지 않다. 기독교 생황을 오래했기 때문에 정련된 자유라는 개념이 훨씬 더 있다. 


네 의지는 자유롭고 바르고 건강하여 거기에 따르지 않음은 옳지 않으리니 >>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왕이 된 것. 성리학에서는 내성외왕 內聖外王이라고 말하는데, 훌륭한 군주는 내면으로는 성인이요, 겉으로는 훌륭한 군왕이라는 것. 자기자신을 다스리는 것. 그래서 의지를 완전히 다스리고 지성마저도 따라갈 수 있는 상태. 너에게 왕관과 주교관을 씌우노라 >> 왕관이라는 것은 세속의 권력이고 주교관이라는 것은 정신세계의 권력인데 이 말은 해석의 여지가 많이 있다. 일단은 단테 너는 인간세상의 이치와 하늘나라 이치, 즉 세속적인 것과 신적인 것을 모두 깨달았다 를 의미하기도 하고, 그리고 약간 신학적인 해석을 하면, 우리가 중세시대를 거치면서, 이 설명이 아주 중요하다. 왜 중요한가. 서양 근대 정치사상이나 마키아벨리나 이런 것을 이해할 때 중요. 세속권력과 신권 이 두 개가 있는 지금 왕관과 주교관을 씌우노라 라고 말을 한다. 그러면 단테가 살았던 중세시대에는 왕관과 주교관을 한 사람이 다 가질 수 없었다. 이 두 개가 대립되기도 하고 화해하기도 한다. 그래서 중세시대의 가장 중요한 사건들은 어떤 사건들이냐, 교황과 황제가 충돌나는 것이 중요한 사건이다. 카노사의 굴욕 이런 것이 중요한 것. 두 개의 권력의 대립. 이 두 개를 동시에 가질 수 없다. 동시에 가지면 난리가 난다. 단테의 시대에 보니파키우스 8세와 같은 이들 때문에 계속해서 긴장상태. 기독교 신학에서 동시에 쓰는 것은 굉장한 신성모독. 이런 구절 때문에 오랫동안 금서였던 것. 주교관과 왕관을 한 손에 쥐고 통치를 한 사람들이 비잔틴제국의 황제. 로마는 다신교 국가. 카이사르도 죽으면 신이 된다. 신적인 권위로써 정치적인 권력을 뒷받침하는 것이 기본 포맷인데 어떤 사람이 권력이 쎈 진짜 능력자가 나타나서 이 권력의 핵심을 무력과 교활함으로 장악한 능력자가 나타나면 신적인 권위 따위는 얼마든지 자기 손에 쥐고 자기를 정당화하는 써먹을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라가 평안해진다고 생각한 사람이 마키아벨리. 정치권력과 신적 권위라는 두 개의 프레임을 가지고 정치사상을 생각해야 서양정치사상이 이해가 된다.

   

그 다음 28곡을 보면


Dante, Divina Commedia, Purgatorio.28.1

새날의 햇살을 눈에 부드럽게 가려 주는

신선하고 우거진 성스러운 숲 속과

그 주위를 돌아보고 싶은 욕망에 나는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암벽을 떠났고,

사방으로 향기를 내뿜는 흙을 밟으며

들판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들어갔다.

조금도 변함없이 불어오는 감미로운

미풍이 내 이마를 스쳐 지나갔는데

가벼운 바람보다도 더 부드러웠다.


지옥의 첫머리에 나오는 어두운 숲 속에 있었던 것과 비교해보면 단테가 얼마나 많이 애썼는지 알 수 있다. 그래서 <연옥편>을 지나서 단테가 30곡에서 베아트리체를 만난다.


Dante, Divina Commedia, Purgatorio.30.31

하얀 베일에 올리브 나뭇가지를 두르고

초록색 웃옷 아래로, 생생한 불꽃 색의

옷을 입은 여인이 내 앞에 나타났다.


3가지 색깔이 나왔다. '하얀 베일에'는 가톨릭의 하얀 면사포을 떠올리면 신앙을 상징하고, '초록색 웃옷'은 희망, '생생한 불꽃 색'은 사랑을 상징한다. 그러니까 신앙·희망·사랑을 가리킨다. <지옥편>은 신의 섭리, 즉 올바름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그런 다음에 <연옥편>의 핵심적인 주제는 희망, 그리고 <천국편>에 가면 사랑이다. 정의와 희망과 사랑을 묶으면 <신곡> 전체의 핵심적인 메시지는 신에 대한 사랑을 신앙이라 한다면 고전적인 의미의 에로스, 불멸에 대한 그치지 않은 열정 추구, 플라톤 <향연>에 나오는 에로스이다. 그래서 정의와 희망과 좁은 의미의 사랑이 <신곡> 각각의 주제라면 이 세 개를 아우르는 주제는 넓은 의미의 사랑이라 할 수 잇는데 사랑이 겹치니까 천국편은 신앙이라고 하고 그 세개를 아우르는 것을 사랑이라고 할 수 도 있다. 여기서 사랑이라는 것이 지적인, 의지의 수련을 다 표현하고 있는 것이며 플라톤의 에로스라고 봐도 무방하다. 단테는 분명히 희랍과 로마의 전통들을 이어왔고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내면을 가지고 있다.


올바름과 희망과 신앙이 이렇게 인간을 어떤 존재로 만들어주는가, 먼저 올바름이 있어야 한다. 조선시대 유학의 핵심적인 논제 중에 하나로 4단7정론이 있다. 4단은 인의예지, 7정은 희(喜)·노(怒)·애(哀)·구(懼)·애(愛)·오(惡)·욕(慾)을 말한다. 인의예지라고 하는 이 4가지는 인간이라면 갖추고 있어야할 끝트머리, 단적으로 가져야 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다 합하였을 때 유가적인 의미에서 성인. 인-의-예-지. 이것들이 구별되지 않은 상태에서 어느 경지에 가면 인간의 내면 안에 조화를 이루어져 갖춰지는 상태가 성인이다. 마찬가지로 <신곡>을 읽을 때는 올바름과 희망과 신앙 이 3가지를 통틀어서 고전적인 의미에서 사랑이라고 말한다면 이 사랑은 이제 함께 조화를 이루는 새로운 차원으로 올라선 인간을 보여준다. 단순히 기독교적인 텍스트가 아니다. 이마미치 도모노부는 <단테신곡강의>에서 우정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필리아. 우리말 번역어가 우정인데 친구들만의 우정이 아니라 필리아 역시 플라톤의 사상에서보면 에로스와 같은 의미의 것으로 볼 수 있다. 결국은 사랑이라는 것. 이것이 하나의 완성된 인간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것을 잘 드러내보여주는 일종의 샘플로 등장하는 사람이 베아트리체이다. 


그 다음에 베르길리우스가 떠나간다.  


Dante, Divina Commedia, Purgatorio.30.49

더없이 인자하신 아버지 베르길리우스,

내 구원을 위해 의지했던 베르길리우스여,

옛날의 어머니가 잃어버린 모든 것도

이슬로 씻긴 나의 뺨들이 눈물로

얼룩지는 것을 막지는 못하였으리라.

「단테여, 베르길리우스가 떠났다고


단테라는 이름이 여기서 딱 한번 나온다.


아직은 울지 마오, 아직은 울지 마오.

다른 칼로 울어야 할 테니까.」


여기서부터는 자기가 안내하겠다는 것. 연옥에서 벌써 베아트리체가 나오니 천국의 예고편이라는 것을 우리가 짐작할 수 있겠다.


33곡 마지막을 보자.


Dante, Divina Commedia, Purgatorio.33.142

나는 그 성스러운 물결에서 돌아왔고,

새로운 잎사귀로 새롭게 태어난

나무처럼 순수하게 다시 태어났으니,

별들에게 오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Stairway to heaven. 천국과 연옥을 연결하는 계단에 올라가는 것.


단테가 훌륭하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어려운 환경에 처하면 화도 나고 절망도 하고 한탄하기 쉬운데 단테라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개인적인 역사와 삶을 생각해볼 때 그 시기가 이럴 때가 아닌데 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훌륭한 말을 썼다.


이제 <천국편>을 보자.


Dante, Divina Commedia, Paradiso.1.13 

오, 훌륭한 아폴론이여, 이 마지막 작업에서

그대가 사랑하는 월계관에 합당하도록 나를

그대의 역량이 넘치는 그릇으로 만들어 주오.

여기까지는 파르나소스의 한 봉우리로

충분했으나 이제는 두 봉우리와 함께

나머지 싸움터에 들어가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무사의 여신을 부르기도 하고 베리길리우스가 도와줬는데 여기서는 없다. 이제 무사가 아닌 아폴론을 부르는 이유는 예언의 신이기 때문. 이제부터는 미지의 경험이 시작된다. 그런점에서 아폴론을 부르는 것. 천국은 말그대로 순수한 상상의 세계. 그리고 아폴론을 부른다는 건 희랍과 로마의 전통을 배제하고 있지 않음을 나타낸다.


내 가슴속에 들어와, 마르시아스를

사지의 덮개에서 벗겨 냈을 때처럼

그대의 영감을 불어넣어 주소서.


아폴론에게 영감을 받아서 하느님을 만나러 가는 단테.

단테 안에서 아폴론과 베르길리우스의 인도를 받는 Greco-Roman Tradition과 Catholic Tradition, 이 3개의 전통이 나오고 있다. 단테가 이 전통들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지 못한 상태였다면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없었을 것이다. 단테가 탁월한 시인이어서 가능했던 것인가. 아마 30% 정도는 단테에게서 나왔고, 나머지는 그리스와 로마와 가톨릭의 전통이 함께 뭉쳐서 들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이를 유념할 필요가 있다.  아폴론은 활을 잘 쏘다. 활을 잘 쏜다는 것은 극도로 혼란하고, 고양되있고, 살기가 등등한 이 전투장면에서 활로써 상대를 제압한다는 것은 무시무시한 정적을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위력이 있어야 가능한 것.  신 중의 신. 철학자의 신. 진정한 시인의 신이 아폴론이다.


천국편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인간이 천국에 합당한 존재여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가.


Dante, Divina Commedia, Paradiso.1.64 

베아트리체는 영원한 바퀴들에다

눈을 응시하고 있었고, 나는 태양에서

거둬들인 눈빛을 그녀에게 고정하였다.

그녀를 바라보면서 나는 내면적으로

마치 글라우코스가 해초를 맛보고

바다의 다른 신들과 동료가 된 것 같았다.


영원한 바퀴는 하늘을 말하고 것. 지금 단테는 하늘을 쳐다보면서 글라우코스처럼 어떤 신체적인 또는 정신적인 상태의 변화가 일어났음을 여기다 적고 있다. 신적인 입장에 올라선다는 것.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다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겠지만, 은총이 그런 경험을

허용해 주는 자에게는 이 예로 충분하리라.


즉 초월했다는 것이다. 천국을 여행하려면 지금까지 나와던 주교관과 왕관만 가지고는 안되고 업그레이드해야 한다. 

초월했다는 것이 이탈리아어로 trasumanar. 인간세계의 한계를 넘어서 나아가야 하는 영역에 왔기 때문에 당연히 인간의 능력을 초월해야한다. 


하늘을 다스리는 사랑이여, 당신의 빛으로

나를 들어 올리셨으니, 내가 단지 영혼

속에만 들어 있었는지 당신이 아십니다.


사랑은 신을 말한다.  이로써 단테는 떠날 준비가 되었다. 신의 사랑을 향해서 빛의 들림에 의해서 transformation이 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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