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 마조워: 발칸의 역사


발칸의 역사 - 10점
마크 마조워 지음, 이순호 옮김/을유문화사



프롤로그 : 명칭들


1. 발칸의 영토와 주민들

2. 국가 성립 이전의 발칸

3. 동방문제

4. 국가 건설


에필로그 : 폭력에 관해


감사의 말

참고문헌

연표

옮긴이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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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명칭들

16 '발칸'은 본래 산맥 이름으로, 고전 교육을 받은 서양인들에게는 중부유럽에서 콘스탄티노플로 갈 때 거쳐야 하는 고대의 헤무스로 더 잘 알려져 있다.


16 이 무렵에는 이미 몇몇 지리학자가 피레네산맥이 이베리아 반도의 산마루에서 북남 경계를 이루어 주듯, 발칸산맥도 유럽 남동부 반도를 가로지르는 것으로 착각해, 발칸을 그 지역 전체를 통칭하는 말로 확대 사용하기 시작했다.


17 발칸보다 한층 보편화된 명칭인 '유럽의 터키'라는 말로 사용했고, 그 결과 '발칸'이란 말은 19세기까지도 아주 희귀한 용어로 남아 있었다.


19 그리하여 1912년 제1차 발칸 전쟁 ─ 이 전쟁으로 유럽에서 오스만 지배는 끝났다 ─ 이 일어날 무렵 발칸이라는 용어는 이제 통용어가 되기에 이르렀다.


19 그로부터 반세기도 채 지나기 전에 이 새로운 지리적 용어는 주로 급작스러운 군사, 외교적 변화로 인해 일상용어가 되었기 때문이다.


19 1917년 동방문제를 다룬 역사책에는 이제 "이전 세기의 지리학자들이 '유럽의 터키'라 부른 지역이, 그 동안에 일어난 정치적 변화로 새로운 이름을 필요로 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이 지역도 '발칸 반도'나 혹은 간단히 '발칸'이라 불리게 되었다"라는 내용이 실려있다.


19 이전 명칭들과는 달리 발칸에는 폭력, 야만, 원시성과 같은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부정적 의미가 내포돼 있었다.


21 제2차 세계대전 뒤에는 이 같은 진부한 표현이 그다지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냉전기에 발칸은 서구인들의 의식 속에서 사라졌고, 남동부 유럽에는 철의 장막이 드리워져 그리스와 인근 공산국가들을 둘로 갈라놓았기 때문이다.


22 유고슬라비아 붕괴로 격화된 투쟁은 대중의 마음을 그 어느 때보다 더욱 그런 생각으로 가득 차게 만들었다. 집단 폭력에 대한 책임은 티토와 공산주의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인종적 다양성과 오랜 기간 지속한 종교, 문화적 갈등에도 그 원인이 있었다.


23 유럽의 영토와 정신을 1000년 이상이나 복잡한 투쟁 속에 몰아넣은 기독교와 이슬람 간의 몰이해로 생겨난 깊은 간극이다.


29 그 후 1세기 뒤 러시아의 한 저널리스트 ─ 훗날 레온 트로츠키라는 이름으로 유명해지는 ─ 는 제1차 발칸 전쟁이 일어나기 전야, 부다페스트에서 베오그라드로 철도 여행을 하던 중, 자신이 탄 열차의 차창 밖 풍경을 내다보며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이렇게 외쳤다. "아 동방! 동방이로군! 이 다양한 모습, 의상, 인종, 문화적 차이가 혼합해 만들어 내는 다채로움이라니!"


29 발칸의 도시들은 으레 동방적 실체는 뒤에 숨기고 겉모습만 유럽풍인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것은 가령 철로는 유럽식이지만 마차로는 유럽식이 아니라는 것, 기술은 유럽식이지만 예배의식은 유럽식이 아니라는 것과 같은 것이다. 사회구조는 거의 언제나 외양은 현대적이고 내용은 전통적인 것으로 분리돼 있다.


35 발칸을 좀더 순수하게 편견 없이 이해하려면, 그 지역에 대한 태도는 그곳에서 일어난 사건들에 의해서도 형성되지만, 그보다는 역시 유럽의 정체성과 문명의 발달에 관한 광범위한 글들에 의해 형성된 면이 많다.


36 역사학이 풀어야 할 기본 과제는 오스만 제국이 지배한 시대를 유럽사에 어떻게 편입시키느냐 하는 문제인데, 그에 대한 유럽 학자들의 태도는 늘 한결같았다. 


36 이 말은 곧, 오스만 지배로 발칸은 유럽의 나머지 지역에서 유리된 채 새로운 암흑기에 접어드는데, 그 까닭은 "유럽사의 전 과정을 통해 유럽은 곧 기독교 왕국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36 아놀드 토인비와 저명한 루마니아 역사가 니콜라이 이오르가는 정교회 비잔티움이라는 '보편적 국가'의 계승자가 사실상 오스만 제국이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37 발칸의 계승 국가들은 이 같은 논리에 따라 중세나 고전시대로 돌아가 자신들의 국가적 뿌리를 캐내려 하면서, 마치 오스만 통치기로부터 긍정적 교훈을 하나도 얻을 게 없다는 듯, 자국 역사가들에게 가능한 한 빨리 그 시기를 지워버리라고 주문했다.


37 세르비아인들은 코소보를 투르크족에 맞서 세르비아가 최후로 항전한 민족의 성지로 여기고 있다.



1. 발칸의 영토와 주민들

43 수백만 년에 걸친 지구 지각 판의 움직임으로 지중해 유역에는 유럽과 아프리카 사이의 지리적 경계를 따라 일련의 산맥이 융기, 형성되었다. 이렇게 형성된 산맥은 서쪽의 이베리아 반도에서 동쪽의 남동부유럽 산맥으로 굽이쳐 흐르다 나중엔 소아시아 및 중앙아시아 산맥과 이어진다.


43 이 산맥의 남쪽은 기름진 농토도 적거니와 토양도 척박하고 비도 자주 오지 않아, 북쪽의 상황과는 아주 판이하다.


43 이베리아 반도와 이탈리아 반도의 통로를 지켜주는 이 산맥과 달리, 발칸 산맥에는 외부의 침입을 막아주는 장벽이 없어 북쪽과 동쪽으로부터 접근하고 공격해오는데 쉽게 노출되어 있다.


43 발칸 반도는 반도 내 지역들보다는 오히려 반도 외곽 지역과 교신하기가 더 용이할 때가 많다.


44 발칸 반도는 비그늘효과로 유럽의 대륙성 기후대에 나타나는 수분이 거의 고갈되어 지형이 매우 메말라 있다.


44 전체적으로 볼 때 발칸 산맥 동쪽의 연평균 강수량은 산맥 너머 서쪽의 연평균 강수량보다 10인치에서 20인치 정도가 낮고, 그 때문에 가장 비옥하다는 평원도 연례행사처럼 매년 가뭄을 겪는다.


45 지중해성 기후대는 여름이면 강이 말라붙어 암석투성이의 하상과 계곡이 그대로 드러난다.


46 하천도 산맥만큼이나 번영에 중요한 요소였다. 그 까닭은 현대 이전만 해도 육로보다는 수로를 통한 운송이 비용도 싸고 편했기 때문이다.


46 하지만 남동부유럽에서는 서유럽의 라인강과 론강, 동류럽의 비수아강과 드네프르강에 비견할 만한 하천이 하나도 없다. 발칸의 강들은 모두, 겨울에 퍼붓는 억수보다 더 많이 쏟아질 경우에는 물살이 너무 빠르거나, 그렇지 않으면 가까운 해안선을 벗어나 하염없이 구불구불 흐르기 때문에 항행에 부적합해, 사바강, 바르다르강, 알리아크몬강과 같은 주요 하천도 교역과 통신에는 제한적으로만 이용되고 있다.


48 로마제국으로부터 풍부한 도로망을 물려받은 오스만제국은 여관, 대상숙사, 타타르 정부 사자의 말 대기소와 숙소 역할을 한 역참을 이용해, 효율적인 우편제도를 개발했다. 하지만 18세기 무렵 이 제도는 잦은 지체와 말 부족 현상으로 붕괴에 직면했다.


49 19세기 중반 도로 사정은 이제 너무도 열악해져서, 일각에서는 오스만 정부가 정책적으로 일부러 도로를 황폐하게 만들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52 발칸 지역은 늘 유럽의 경계지에 위치해 있는 이 같은 지형상의 특성 때문에, 어느 나라고 권한을 행사하는 데 많은 비용을 들었다.


55 발칸의 진정한 위기는 17세기에 찾아왔다. 그때는 유럽의 어느 곳이고 어렵지 않은 곳이 없었으나, 남동부 유럽은 특히, 정정 불안, 끝없는 전쟁, 빈번한 역병, 기아라는 복합적 재난이 한꺼번에 밀어닥쳤다.


55 역병은 한 도시의 인구를 절반 혹은 그 이상을 앗아갔으며, 그것은 발칸이 근동에서 서유럽으로 질병이 이동해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어 생겨난 일이었다.


57 발칸의 '고용 불안' 문제는 제2차 세계대전이 지나고서야, 급속한 경제 성장, 재개된 이주, 산업화를 통해 돌파구를 찾게 되었다.


60 앞선 세기의 기독교인 지주들 ─ 그리스인, 슬라브인, 프랑스인, 베네치아인, 카탈로니아인 ─은 날이 갈수록 농민들을 가혹하게 다루었는데, 오스만제국이 싹쓸이를 해준 것이 바로 이 지배계급이었다.


61 오스만제국의 문서에는 그것이 이런 식으로 표현되고 있다. "정복할 때 레야(농민) 소유였던 땅은 이제 무슬림 공동체의 소유가 되었다.


62 하지만 지배한지 2,3세기가 지나자 오스만제국도 여러 새로운 난관에 직면하게 되었다.


62 서구 유럽 경제는 새로운 상업 금융, 식민지 교역, 사유재산 증진, 제조업 성장의 방향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63 오스만 제국 전체 세수의 3분의 2가량을 차지하던 발칸이야말로 이 같은 반벙어리 리바이어던에게는 필요 불가결한 요소였고, 이 세금의 절반을 농민이 부담하고 있었다.


68 이들은 현금으로 세금을 내어 화폐 경제의 요구에 일찌감치 익숙해졌다. 그리하여 가축, 양가죽, 양모 제품, 치즈 등을 마을 시장이나, 20세기 초까지 발칸 교역의 원동력이 된 대단위 연례 정기시에 내다 팔았다.


69 15세기 말, 오스만 정부는 도시생활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단호한 정책을 취했다 도시민들이 필요로 하는 서비스를 제공할 요량으로 고위 관리들에게 재원을 마련해 공공건물 단지 ─ 대상 숙사, 지붕 덮인 시장, 공중목용탕, 모스크와 학교, 병원, 수도 등 ─ 를 조성토록 한 것이다. 


71 오스만 지배 초기, 도시화 정도는 전반적으로 높았고 살로니카와 두브로브니카 등의 해안가 교역 도시들도 번창했다. 1600년 무렵 콘스탄티노플은 유럽 최대의 도시였다. 


71 국가가 세금을 징수하고, 교역을 관장하고, 소금과 같은 생활필수품의 전매권을 확보할 수 있는 행정의 중심지였던 것이다.


72 오스만이 지배한 도시들이 진정한 산업화를 이루지 못했다면, 제국 내에서 기업농이 발달하지 못한 것도 이와 똑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요컨대 잘 정비되고 관리된 도로의 부족, 관료주의라는 장애, 인쇄 매체와 과학 지식의 확산을 금하는 종교적 제약, 마케도니아의 정치 투쟁이 격화되면서 날로 심해지던 사회적 혼란 등이 산업화와 기업농의 발달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다.


76 19세기 발칸에 일어난 대중 민족주의는 오스만제국에 일어난 이 같은 드라마틱한 경제·사회적 변화의 관점으로서만 이해가 가능하다.


81 발칸의 마을들은 수세기 동안 주요한 정치, 행정, 재정, 군사적 단위로 농촌 주민들의 집단적 삶을 구성해왔다. 발칸인들에게 '조국'은 곧 '마을'이었으며, 마을의 대표는 국가의 고위 인사나 타인들 앞에서 주민을 대신해 발언하는 대변자였다. 하지만 이 같은 고립된 집단성은 19세기 무렵부터 주민도 이해할 수 없는 어떤 방식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2. 국가 성립 이전의 발칸

91 발칸의 역사는 주로 위에 언급한 민족주의적 애국자의 자손들이 썼다.


92 발칸의 민족지 구성은 기본적으로 17세기에 형성된 이래 크게 변한 것이 없었다. 17세기 이전 도나우강 남부의 로마 속주는 게르만족과 훈족의 침입, 습격으로 붕괴하였다.


93 발칸 지역 토착민들은 땅과 권력을 놓고 이 신흥 세력과 투쟁을 버렸다. 알바니아에서는 거의 모든 곳이 슬라브어 정착촌으로 변모해가는 와중에, 토착민들은 산 속으로 피신해 그들만의 톡특한 언어를 지켜갔다.


93 슬라브족을 지배하던 튀르크어족의 불가리아인들은 결국 자신들이 지배하는 민족의 언어를 채택하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마케도니아는 20세기 초까지도, 시골마을에서는 슬라브어를 쓰고 도시에서는 그리스어를 쓰는 기본방식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101 오스만 유럽에서는 인구의 태반 ─ 80퍼센트는 될 것이다 ─이 기독교도로 남아 있었다. 심지어 이슬람이 침투한 농촌 지역에서조차 투르크어는 힘을 쓰지 못했다. 보스니아 무슬림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모국어인 슬라브어를 썼고, 무슬림인 잔니나의 알리 파샤도 투르크어가 아닌 알바니아와 그리스어를 썼다. 크레타의 무슬림 농민들은 그리스어를 쓰면서, 그들 대부분의 조상인 기독교인들만큼이나 크레타의 서사시 에로토크리토스를 즐겨 읽었다. 에디르네 일대 투르크족 중심지를 벗어난 외곽지역에서는 투르크어가 도심에서만 쓰는 행정 언어로 역할이 축소되었다. 보스나 세라예(사라예보), 스코페, 소피아 같은 도시들은 거의가 이슬람 일색이었고, 기독교 해역에 속하는 오스만 지배하에 투르크어를 사용하는 섬들도 독일어를 쓰는 도시들만큼이나, 슬라브어 사용 지역인 동유럽에서 제 역할을 다했다.


104 기독교도들은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짐미zimmi, 즉 '보호받는 민족'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제국에 충성을 다하며 세금만 잘 납부하면 그들 관습에 따라 스스로 통치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108 남동부 유럽은 국가가 아닌 정교도의 상징들로 규정되었다.


109 독립적이면서도 공존하는 종교제도는 오스만 통치 기구의 기본 방침이었다.


110 그 점은 특히 유럽 다른 지역의 지배 체제와 비교할 때 미증유의 종교적 관용을 베풀어준 지배 체제하에서는 진실이었다.


111 이 풍진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누구든 종류에 관계없이 신의 도움을 필요로 했고, 이 말은 곧 안 믿는 것보다는 어떤 신이든 믿는게 낫지, 그렇지 안으면 나락에 떨어질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112 이 모든 인간고들이 종교적 경계를 넘나드는 사람들 사이에, 하늘의 힘과 지혜 그리고 지식을 숭상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116 레이디 메리 워틀리 몬케규는 이렇게 주장했다. "기독교도와 무슬림 사이에 끼어 살며 논쟁에 익숙지 않은 사람들은, 이 둘 중 어느 것이 더 좋은 종교인지 도무지 분간이 안 간다고 털어놓는다. 그러면서도 진리를 거부하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아주 신중하게 두 종교를 함께 믿으면서 금요일에는 모스크에 가고 일요일에는 교회를 다닌다."


116 어떤 종교를 믿느냐를 질문에 마케도니아의 농부들은 성호를 그으며 "우리는 성모마리아를 믿는 무슬림입니다"라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117 서로 공유하며 사는 오스만 세계에서 신에 대한 예배는, 초자연적인 영역뿐 아니라 일상적이고 세속적인 삶의 영역에서도 신학적 경계를 허물어 뜨렸다.


117 두 종교의 이 같은 공종은 가장 내밀한 사생활의 영역까지도 결정했다.


120 18세기 이슬람 법정 진술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전해오고 있다.

질의: 제이드와 그의 아내 힌드는 교회에 다니며 이교도들의 특정 행위를 옳다고 여기다 끝내 불신자가 되었다. 이 경우 제이드와 힌드는 신앙과 결혼을 갱신해야 하는가? 

답변: 그렇다.


120 오스만 정부와 이슬람 종교 지도자들이야 물론 이슬람, 정교회, 가톨릭의 구분을 명확히 지어놓았다. 그러나 실생활에서는 이 셋의 구분이 뚜렷하지 않았다.


123 즉 개종하면 으레 배교, 실존적 고뇌, 개인, 국가적 배신을 떠올리기 마련인 우리와 달리, 오스만제국의 많은 사람은 '진정한 신앙'을 위해 '이교도 종교'의 '무지한 세계'를 떠나는 것을 크게 중요시하거나 갑작스러운 일로 여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의 관점으로는 한 종교에서 다른 종교로 이동하는 것이 한 종교를 포기하고 다른 종교에 빠져드는 행위라기보다는, 구종교에 새로운 종교를 하나 덧붙이는 행위로 보였다.



3. 동방문제

145 오스만제국 와해와 민족주의 분출이라는 이 같은 예측불허의 일들을 국제적으로 처리해가는 과정이 이른바 역사에서 말하는 동방문제다.


143 발칸 민족주의의 승리는 일부, 봉기와 저항으로 오스만 지배가 붕괴하는 데 도움을 준 발칸인 자신의 노력으로 이룬 것이었다. 그런 반면 이들의 노력은 또, 그 자체로는 결실을 맺지 못하고 유럽 강대국의 힘을 빌려서야 결실을 맞는 무기력한 것이기도 했다. 


143 제1차 세계대전은 해방을 위한 발칸의 이 같은 투쟁과 유럽 국가 체계의 복잡한 관계가 정점에 달한 사건이었다.


147 최초의 세르비아 봉기는 유럽에서 일어난 열강들의 싸움에 치여 패배로 끝이 났다.


149 세르비아는 또, 공식적으로 독립을 인정받은 1878년 베를린 회의 때까지는 도나우강 연안 공국들이나 새로 형성된 사모스 공국처럼, 오스만제국 내의 기독교 자치 공국으로도 볼 수 있었다. '국가'라는 궁극적 승리는 아직 먼 곳에 있었던 것이다.


151 투르크군은 러시아만이 아닌 루마니아 농민들도 그곳 봉기에 대한 지원을 거부하자 그리스 반군을 손쉽게 제압했다.


151 이번에는 저 남쪽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두 번째 그리스 봉기가 일어났다.


153 강대국들은 이 같은 상황에 유의하면서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소함대를 파견, 나바리노해전을 벌였고, 이 해전에서 영국-러시아-프랑스 함대는 이집트-투르크 함대를 격파했다. 이집트 육군도 프랑스 원정대의 감시 아래 군대를 철수시켰다. 이렇게 해서, 주로 외부의 간섭에 힘입어 1830년 독립 그리스 왕국이 성립했다.


154 발칸 국가들이 생겨난 배경을, 상인 이주민의 등장과 서구 이데올로기의 영향으로 기독교 민족주의가 승리했기 때문인 것으로 진단한 것도 그 같은 경우에 속한다. 하지만 이 요인들도 오스만제국 군대와 행정의 허약함이 없었다면, 그리고 국제적 힘의 균형이 변하지 않았다면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을 것이다.


155 이 두 신생국들은 준비 없이 즉흥적으로 세워진 촌티나는 나라였다.


156 독립국으로서 국가와는 거리가 멀었던 남동부 유럽의 신생국 지도자들은, 오스만의 세계관에 푹 젖어있는 농촌사회에서 국가를 새롭게 창조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159 이 나라들과 비교하면 불가리아의 등장은 다소 늦은 감이 있고 과정도 순탄치 않았다.


160 불가리아의 유력 인사들은 거의 문화적으로는 그리스, 정치적으로는 오스만에 기울어져 있었다.


160 불가리아인이라는 말은 지극히 생소하여 그 나라 출신의 학식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을 모두 그리스인이라 여겼다.


163 루마니아와 세르비아-몬테네그로는 독립을 얻었고, 이로써 수세기 동안 계속된 오스만의 유럽도 막을 내리게 된다.


164 발칸 지역의 국가 건설은 19세기 내내 계속되었다. 그것은 장기간에 걸친 지루한 실험이어서 발칸의 여러 '힘없는 민족들'은 이 기간에도 여전히 오스만제국의 신민으로 남아있거나 ─ 크로아티아인, 슬로베니아인, 세르비아인, 루마니아인, 그 밖의 다른 민족들처럼 ─ 합스부르크제국의 신민으로 남아있었다.


167 1878년이 발칸에 대한 열강의 지배가 최고조에 오른 시기였다면 이후 30년간은 발칸에 대한 열강의 지배가 와해된 기간이었다. 


168 러시아는 1905년 일본에 패한 뒤에야 남동부유럽에 다시 관심을 쏟기 시작했고,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과의 긴장관계는 더욱 높아졌다.


174 세르비아와 보스니아에서는 합스부르크제국의 통치에 반대하는 비밀 결사 조직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 결사 조직들 중 "단결 아니면 죽음"이라는 비밀조직이 1914년 사라예보 암살 사건과 연루돼 있었다.


174 세르비아는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제국이 보스니아 합병을 자신들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171 오스트리아는 친오스트리아 성향의 알렉산다르 오브레노비치가 암살된 뒤 세르비아가 독단적으로 행동하는 것에 크게 당황했다. 1905년에는 세르비아와 불가리아가 비밀리에 관세동맹을 체결하자, 그것을 깨게 만들었다. 


177 1912년에 일어난 제1차 발칸 전쟁으로 오스만은 불과 몇 주 만에 유럽영토를 상실했다. 세르비아와 그리스는 승전국이 되어 거대한 영토를 새로이 획득했다. 그에 반해 불가리아가 챙긴 몫은 변변치 못해, 이에 불만을 품은 불가리아는 이듬해 이전 동맹국들을 상대로 제2차 발칸 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들에게 패해 제1차 발칸 전쟁 때보다 더 하찮은 결과를 얻었다.


179 1914년 발칸 국가들은 또다시 이 시계추로 강대국들을 좌지우지했고, 이것이 이런 관계의 마지막은 아닐 터이다.


182 아닌 게 아니라 1918년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도 남동부유럽에서는 전투가 상당 기간 더 지속되었다. 오스만제국은 유럽의 다민족제국들 중 가장 일찍 와해되기 시작되었으나, 최종적인 붕괴는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조와 러시아의 로마노프 왕조가 사라진 훨씬 뒤에야 찾아왔다.


183 1921년에서 1922년까지 그리스와 전쟁을 벌이는 동안 투르크는 아타튀르크로 더 유명한 무스타파 케말 주도하에 터키 공화국을 탄생시킨다.


183 1923년 그리스와 터키의 강제 주민교환 ─ 이 조치로 무슬림들은 그리스를 떠나 터키로 향했고, 아타톨리아의 정교회 신자들은 그리스로 '돌아갔다' ─으로 양국의 인종 구성은 더욱 동질화되었다.


185 1923년까지는 동방문제가 일단락되었다. 10여 년에 걸친 전쟁으로, 수세기 동안 발칸과 동부유럽 대부분을 지배한 제국들은 마침내 와해되었다. 하지만 제국들이 붕괴해도 서방 진보주의자들이 예상한 평화는 찾아오지 않았다. 계승 국가들이 민족성 원칙을 내세우며 이웃국가들의 영토를 서로 차지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186 종교의 시대가 끝나고 이데올로기의 시대가 오고 있었으며 민족주의는 이 둘 다에 걸쳐 있었다.



4. 국가 건설

189 1853년 오스트리아 외무장관은 이렇게 경고했다. "민족성의 구분에 따라 국가를 새로 건설하려는 것은 그 모든 유토피아적 환상 중에서도 가장 위험천만한 생각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주장을 밀고 나가는 것은 역사를 중단시키는 행위이고, 그것을 유럽의 어느 곳에서라도 실행하는 것은 국가간의 견고한 질서 체계를 기반부터 뒤흔들어, 유럽대륙을 파괴와 혼란으로 몰아넣는 행위다."


189 1918년에는 합스부르크제국이 사라졌다. 빈회의에서 수립한 유럽 국가들의 질서는 베르사유 회담으로 재편되었다.


192 강요된 개종, 대량 처형, 수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의 도주, 이것이 바로 유럽에 남아있던 오스만 지방들을 민족성의 원칙에 따라 일소하려는 노력이 빚어낸 결과였다. 


193 1915년에서 1916년까지는 조직적인 학살 원정을 통해 100만 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을 살해했다.


195 강대국들은 주민교환 대신 국제연맹의 감독 아래, 발칸 국가들끼리 소수민족 권리 협약을 체결하도록 했다. 이 협약은 전쟁의 결과 그 중요성이 더욱 커진 집단적 권리까지를 포함하는, 예컨대 과거 19세기의 개인보호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1918년 루마니아는 거대 영토를 새로 얻는 과정에서 헝가리인, 우크라이나인, 유대인들도 많이 얻었다. 그 결과 루마니아에서 루마니아인 인구 비율은 72퍼센트밖에 되지 않았다. 사정은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왕국도 마찬가지여서, 이 왕국 인구의 15퍼센트가 이 세 민족의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다른 민족이었다.


197 소수민족에 대해 편협한 정책을 편 쪽은 보수파가 아니라 오히려 진보파였다.


197 그들은 소수민족의 학교를 허용해줌으로써 발생하는 문화적 분열에 반대하면서, 다수파의 언어를 배우게 하기 위해 더 많은 공립학교를 세우려고 했다.


198 발칸에서는 인종주의가 희미한 메아리에 불과했다는 말이다.


199 1941년 나치 점령 후에는 발칸 지역에도 그동안 여러 인종군 사이에 부글거리고 있던 불만이 수면 위로 끓어오르며, 몇몇 소수민족에게 양차 대전 기간 동안 그들 위에 군림했던 다수민족들에게 역습할 기회가 주어졌다.


202 1950년 발칸 지역의 인종구성이 전과는 판이해졌다.


202 20세기 전달에 일어난 총력전, 학살, 대량 이주의 결과 발칸 국가들의 인종적 동질성은 크게 높아졌으나 그럼에도 소수민족은 여전히 발칸 반도에 상당수 존재해 있었다.


207 경제 위기는 또, 허약하기만 한 의회정부의 기반도 뒤흔들어 놓았다. 1930년대 이전부터 이미 양차 대전 사이의 진주주의제도는 정당성을 잃어가고 있었다.


208 이렇게 보면 양차 대전 사이 진보적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은 좌익보다는 오히려 우익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08 1929년 이후 발칸의 모든 나라에는 민주주의 대신 우익 독재정권이 들어섰다. 하지만 그 형태는 파시즘 ─ 민주주의 과정을 통해 권력이 생긴 대중정당이 지배하는 ─ 이 아닌 왕과 왕이 뽑은 내각으로 구성된 독재 정부였다.


210 1944년 10월 처칠과 스탈린이 회동하여 남동부유럽의 전후 세력 범위를 결정했다.


216 몇 가지 점에서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는 당초 생각했던 것보다는 차이가 그다지 크지 않았다. 


216 발칸 지역 전역에서는 또 도시경제가 농촌경제를 대체했고, 문맹률도 사라졌으며, 도로 신설로 농촌도 더 이상 고립되지 않았고, 시골마을도 자가 번식을 멈추었다.


219 그와는 달리 공산주의 국가들에서는 경제위기가 곧 정치체제에 대한 도전이었다.


220 국가들의 질서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별로 변한 것이 없었다는 말이다.


222 1980년대 중반, 세르비아 민족주의의 부상과 함께 연방 시스템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222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1989년 대통령에 당선되어 2000년 실각할 때까지 대세르비아주의에 입각한 민족주의로 13년간 유고를 철권통치하며 보스니아 무슬림과 코소보 자치주의 알바니아인들에 대해 이른바 '인종 청소'를 자행한 전 세르비아 대통령으로, 헤이그 국제유고전범재판소에 수감되어 있던 중 2006년 3월 11일 옥중에서 사망했다.


226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처럼 발칸도 이제는 민족주의와 소수민족 권리의 문제가 전쟁과 평화의 문제에서 국경정책과 도시공존의 문제로 변해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226 재미있는 것은 국가 건설 투쟁이 끝나자마자, 국제적 차원에서 정치, 경제적 변화가 일어나 국가라는 생각 자체에 의문을 제기했다는 점이다.


227 정통적인 발칸 국가들은 이제 더 이상 옛 제국들의 도전을 받지 않았다. 인근 경쟁국들이나 적개심의 도전도 받지 않았다. 발칸의 가장 큰 위협은 국제 경제로부터 왔다.



에필로그 : 폭력에 관해

230 1993년 존 메이저 영국수상은 "보스니아 분쟁은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비개인적, 필연적 힘의 소산이었다." 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는 말이었다.


230 하지만 이 책에서 강조하고 있듯, 수세기에 걸친 발칸의 삶은 다른 지역보다 특별히 폭력적이지 않았다. 실제로 오스만제국은 인종과 종교의 다양성을 조절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오스만제국 말기를 목격한 아놀드 토인비도, 분쟁의 원인을 그 지역 외곽에 있는 것으로 보았다.


231 제2차 세계대전 때의 나치 이데올로기도 심적 통제력을 잃은 자들의 잔인한 행동이나 사디스트적 행동과, '필요에 의한' 비개인적 폭력을 확연히 구분 짓고 있었다. 1943년 뮌헨의 나치친위대 법정도 한 장교의 재판 과정에서, 피고의 '과도한 잔인성', '사디즘', '악랄한 무자비함'과 질서 있고 품위있는 살해를 분명히 구분 짓고 있었다.


232 문명화된 전쟁 규칙을 정하기 위한 서구의 더 장기적인 노력의 일환이 되었다.


235 현대의 정치인들은 폭력을 집단적, 가족적, 대중적인 것이 아닌 개별적, 사적, 비개인적인 것으로 보고, 폭력에 대한 새로운 규범을 적용했다. 현대 국가의 건설은 곧, 임의적 기관들에 분산돼 있던 폭력, 징벌, 입법의 행위를 그들에게서 빼앗아, 공권력의 손에 집중시켜주는 것을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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