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르겐 몰트만: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역사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역사 - 10점
위르겐 몰트만/대한기독교서회



제1부 삼위일체의 역사에 관하여

01. "나는 하나님 아버지를 믿습니다." / 하나님을 가부장적으로 말할 것인가, 비가부장적으로 말할 것인가

02. 어머니와 같은 아버지와 그의 자비의 능력 

03. 신정론에 대한 물음과 하나님의 고통 

04. "나는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 그리스도를 형제로서 말하기

05. 희생자와 가해자를 위한 정의 

06. "성령의 사귐" : 삼위일체적 성령론 

07. "성령이여 오소서, 온 피조물을 새롭게 하소서." 

08. 삼위일체 하나님의 초대하는 일치성 


제2부 삼위일체적 역사 이해에 관하여

01. 그리스도교의 희망 : 메시아적인가 아니면 초월적인가?  / 요아킴 피오레와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화적 대화

02. 그리스도인됨, 인간됨,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 / 칼 라너와의 대화

03. 창조, 계악 그리고 영광  / 칼 바르트의 창조론에 관한 대화

04. "희망이 있는 곳에 종교가 있다" / 희망의 철학과 희망의 신학

05. 밖에서만 돌진하는 자가 어찌 하나님이겠는가? / 지오르다노 브루노를 회상하며


제3부 내가 걸어온 신학의 길 

01. 내가 걸어온 신학의 길





제1부 삼위일체의 역사에 관하여

01. "나는 하나님 아버지를 믿습니다." / 하나님을 가부장적으로 말할 것인가, 비가부장적으로 말할 것인가

50 예수의 아바로부터 시작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라는 표현에 이르기까지 분명해지는 점은, 하나님은 그리스도교적 방식에서, 다시 말하면 메시아적 방식에서 가부장주의적으로가 아니라 오로지 삼위일체적으로만 아버지로 이해될 수가 있다는 사실이다. 삼위일체론의 형성은 항상 가부장주의적 지배 표상이 배제된 이러한 자녀 신분의 관계를 표현하려는 시도이기도 했다. 삼위일체론은 특별히 그리스도교적인 의미에서 하나의 비판적 신론이다. 삼위일체론은 자녀를 아버지에게 그리고 아버지를 자녀에게 묶어 주며, 하나님 아버지를 예수의 행동과 운명 안으로 이끌고 간다.



02. 어머니와 같은 아버지와 그의 자비의 능력 

58 사도신경은 두 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 한 번은 "전능하사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리하고, 다른 한 번은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우편에" 앉힌 죽임 당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리한다. 성서에서 아버지 이름이 두 가지로 사용되었고 또 사도신경에서 아버지가 두 번 언급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개념이 신학적으로 모호해지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59 두 번째의 경우에는 시선이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다"(요 14:9)라고 스스로 말한, 많은 형제들과 자매들 중에서 "처음 태어난 자"를 향한다. 그의 아버지는 우리와 그의 형제적 사귐을 통하여 비로소 우리의 아버지가 되며, 오직 그의 사귐 안에서만 하나님의 자녀 신분은 경험된다. 이 자녀 신분의 덕택에 우리는 예수처럼 "아바, 사랑하는 아버지" 라고 부를 수 있게 된다. 여기서 아버지 이름은 언어적인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출생적인 관계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첫번째의 경우에 아버지 이름은 호의적인 지배를 둘러 표현하는 것이다. 두번째의 경우에 중요한 것은 사랑의 기원 관계이다. 하늘의 "주-하나님"으로 이해되는 아버지는 고난 받을 수 없다. 왜냐하면 만물이 그로부터 나왔지만, 그는 그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아들의 아버지"로 이해되는 아버지는 아들의 운명에 열정적으로 참여한다. 아들이 있는 곳이라면 아버지도 거기에 있다. 만약 아들이 고난 받으면 아버지도 함께 고난 받는다. 만약 아들이 기뻐하면, 아버지도 기뻐한다.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나왔으나, 아버지는 아들에게도 의존한다.


65 "하늘 아버지"의 일신론은 부계사회의 종교였고 지금도 그러하다. 이것은 마치 추측컨대 "어머니 땅"의 범신론이 그 이전의 모계사회의 종교였던 것과 같다.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론은 어머니와 같은 아버지와 하나님의 잉태하는 자비에 대한 진술로써 하나님 이해 안에 있는 일방적인 남성적 비유어들을 극복하는 첫 실마리를 제공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모계사회적인 표상으로 넘어가자는 것은 아니다. 종속이나 우월권이 없는 여자들과 남자들의 공동체로 인도하려는 것이 그 진정한 의도이다. 인류의 처음 태어난 형제와의 사귐 안에서 여자들과 남자들은 하나이며, 다같이 약속의 유업을 물려 받을 상속자들이다(갈 3:28 이하).



03. 신정론에 대한 물음과 하나님의 고통 

73 종교사와 철학사에서 우리는 항상 다시금 세 가지 해결책을 발견한다. 1. 첫째는 세계 안에서 서로 투쟁하는 선의 원리와 악의 원리라는 이원론적 표상이다. 이 투쟁에서 인간은 선의 원리 편에 서야 한다. 모든 선은 신으로부터 나오고 모든 악과 죄는 반신으로부터 나온다. 이러한 이원론은 페르시아 종교, 마니교 그리고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묵시문학에서 생생하게 표현되었다. 2. 둘째는 일원론적 표상이다. 오로지 선만 존재하고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존재는 선하다. 악은 선의 결핍이거나 존재의 파괴이다. 악은 존재할 가치가 전혀 없고, 오로지 존재 부정의 가치만을 갖는다. 3. 셋째는 변증법적 표상이다. 악은 역사 안에서 이런 저런 방법으로 선에 봉사한다. 왜냐하면 선은 부정적인 것의 부정 안에서 그 존재 가치를 입증하기 때문이다.


74 2. 불의한 인간이 아니라 의로운 인간이 겪는 고난도 있다. 의로운 자의 고난에는 행위 결과의 상관 관계를 적용 할 수 없다. 욥기가 말하듯이, 죄없이 고난을 당하는 의로운 자의 하나님 신앙은 단지 하나님에 대한 꾸준한 항의 안에서만 견지될 수 있다. 하나님의 행동은 측량 할 수 없다. 인간에게 남아 있는 일이란 끈질긴 항의나 침묵하는 겸손(롬 9:20)이다. 3. 끝으로 인간만이 아니라 인간과 더불어 하나님 자신도 겪는 고난이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맺은 그의 계약을 통하여 그의 이름과 그의 영을 그의 백성 안에 거하게 한다. 이스라엘이 공격 당하면, 하나님도 역시 공격 당한다. 이스라엘이 박해 당하면, 하나님은 그의 "내주"를 통하여 친히 그 고난에 참여하며, 이스라엘과 함께 포로가 되어 떠난다.


77 고난으로부터 생겨나는 하나님에 대한 물음은 이론적, 형이상학적인 대답을 줄 수 없거니와 주어서도 안 된다. 욥처럼 억울하게 고난 당하는 자는 왜 자기가 고난을 받아야만 하는지 격분하면서 종교적인 해명을 제기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고통 중에서 우리와 함께 연결되어 있다는 신비적인 해답이 있다. 우리의 진정한 고난은 그의 고난이기도 하다. 우리의 슬픔은 그의 슬픔이기도 하다. 우리의 고통은 그의 사랑의 고통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존재가 완전하다고 말할 때, 고통의 여지를 갖는 그러한 완전한 하나님만이 우리를 위로 할 수 있고 우리의 경배를 받을 수 있다. 우리는 고통 중에서 무감정하고 무관심한 하나님을 무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살아 있는 하나님은 자비를 베푸는 하나님이기도 하다.



04. "나는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 그리스도를 형제로서 말하기

92 양자는 서로 위격적으로 다르지만 본질 안에서는 구분되지 않는다. 아들은 아버지의 자아가 아니라, 그의 영원한 대면으로서 아버지의 타자이다. 이 점은 다른 면에서 영원한 아버지에게도 해당된다. 오직 이들의 일치성과 타자성을 다함께 생각할 때 우리는 예수의 하나님 관계를 올바로 이해할 수가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과 하나님 아버지는 일치하지만, 하나는 아니다. 위격적인 타자성과 타자성 안의 일치성을 구성하는 것은 사랑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원한 아버지와 영원한 아들의 관계 안에서 더 나아가 아버지의 생산적인 사람과 아들의 응답적인 사랑을 구분해야 한다.


93 삼위일체성은 신성이고, 신성은 삼위일체성이다. 이것은 항상 그리스도교 신학의 성패를 좌우하는 전제이다. 그러므로 아들과 아버지는 다같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원한 구조에 속한다. 아들이 없는 영원한 아버지의 신성은 그리스도교적으로 생각할 수 없다. 인식 할 수 없고 지칭 할 수 없으며 늘 초월하는 한 하나님을 말하는 단순한 유신론은 그리스도교적으로 불가능하다.



05. 희생자와 가해자를 위한 정의 

110 인류의 폭력사의 희생자들과 함께 고난 받는 그리스도의 이러한 연대성은 희생자들을 위해 의미를 갖는가? 만약 그가 단지 또 하나의 희생자일 뿐이라면, 그의 고난은 아무런 특별한 의미를 갖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친히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고후 5:19), 그리스도는 그의 수난을 통하여 이 세상의 수난사 안으로 영원한 하나님의 사귐과 생명을 창조하는 하나님의 의를 가져다 주며, 하나님을 폭행의 희생자들과 동일시한다. 반대로 여기서 희생자들은 자신들을 하나님과 동일시 하기도 하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보호 아래 놓이게 되며, 인간으로서 정의를 박탈당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에게서 정의를 발견하게 된다.


111 희생자는 비인간화되고, 정의를 박탈당한다. 폭행은 이와 같은 두 측면을 갖고 있기 때문에 자유와 정의를 추구하는 방법은 두 측면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피억압자를 억압의 고난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은 억압자를 억압의 불의로부터 해방시킬 것을 요구한다. 그렇지 않으면, 평화를 창조하는 해방과 정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폭행이 사라지고 정의가 수립되는 인간들 간의 그리고 인간과 다른 피조물 간의 불안이 없고 열려진 사귐이야말로 목표가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억압 당하는 자들을 해방시키고 정의를 박탈 당한 자들에게 정의를 행하는 것은 많은 상황에서 특히 폭행의 희생자들에게는 자명하다. 폭행자들을 그들의 불의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은 대개의 경우에는 특히 불의로부터 이득을 취하는 폭행자들에게는 자명하지 않다. 그들은 자신들이 일으키는 희생자들의 고난을 보지 못한다. 그들은 눈이 멀어 있다. 그들은 여러가지 이유로써 자신들의 불의를 정당화한다.



06. "성령의 사귐" : 삼위일체적 성령론 

129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그리스도교 신학의 초기부터 설명되지 않고 있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성과 통치, trinitas와 monarchia의 관계가 중요하다. 하나님의 통치는 오직 유일한 주체에 의해서만 행사될 수가 있다. 한 하나님의 통치에 대해서는 오직 복종의 태도가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한 하나님에게 아들도 복종해야 하며, 아들에게 성령이 복종해야 한다. 그러나 삼위일체 하나님은 그 자신 안에서 하나의 유일한 사귐이어서, 이 사귐 안에서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똑같이 경배되고 찬양된다"(니케아 신조). 다른 이들과 "함께 똑같이" 경배되는 이는 다른 이들에게 종속될 수 없다. 그는 동일한 영원한 위엄과 동일한 신적인 자질을 갖추고 있다. 고대 교회에서 이루어진 대부분의 신학 논쟁은 군주론적인 일신론과 삼위일체적인 사귐에 대한 신앙 사이의 갈등 때문이다. 아리우스주의자들의 관심사는 아들의 격하가 아니라 한 하나님의 우월한 군주적 통치에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아들을 종속시켰다.


130 니케아 신조에 필리오케(filioque: 그리고 아들로부터)를 삽입한 일은, 서방에서의 그 영향사를 고려해 볼 때, 분명히 지지되어서는 안된다. 이 일은 또한 과대하게 평가되어서도 안된다. 필리오케가 서방의 교회와 신학의 모든 오류에 대해 책임이 있는 것도 아니며, 이것의 누락이 동방의 모든 미덕을 설명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필리오케를 통하여 성령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약점이 주어졌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의 서열보다 낮다. 성령의 본질은 오로지 아버지만을 통해서가 아니라 아들을 통해서도 규정된다. 이 질서를 통하여 아들과 영의 관계가 일방적으로 형성된다. 이 관계는 더 이상 상호 간의 관계로 이해될 수 없다. 만약 영이 아들로부터도 나온다면, 아들은 영으로부터도 나올 수가 없다. 만약 필리오케를 통하여 삼위일체의 원래적인 관계가 아버지 - 아 들 - 영의 질서에 고정된다면, 구원사에서의 그 관계도 이와 마찬가지로 이해되어야 한다.


131 우리가 주장 할 수 있는 점은, "필리오케가 성령을 그리스도에게 종속시킨다는 사실, 그것은 성령을 '비인격화'하는 경향으로 기운다는 사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성령을 교회에 종속시키는 일도 촉진할 수 있어서 이로 인해 교회가 권위주의적인 제도주의로 경직된다는 사실 이다." 


132 만약 우리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면,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된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단일성은 단지 하나의 동질적이고 신적인 실재나 동일한 신적인 주체만이 아니라 무엇보다 세 위격들의 유일 독특한 사귐에 있다. 삼위일체의 위격들은 다같이 신적인 통치의 신적인 본질을 공유한다. 그러므로 선행하는 것은 바깥을 향한 그들의 삼위일체적 단일성, 이들의 실재적 단일성과 그들의 주체적 단일성이다.



07. "성령이여 오소서, 온 피조물을 새롭게 하소서." 

159 하나님의 영이 만물 안에 거하고 만물이 하나님의 거처로 준비한다는 이러한 견해로부터 우주적인 하나님 찬양과 만물 안의 하나님 찬양이 생겨난다. 신자들이 교회 안에서 행하는 것은 대리적으로 온 우주와 관련된다. 이미 솔로몬의 성전도 소우주로서 대우주를 대변하고 그 와 상응하기 위하여 그 당시의 사람들이 이해한 우주의 척도에 맞춰 건설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영이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 임재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영이 만물의 새 창조 안에 임재하는 것의 전조와 시작이다. 교회는 그 설립과 본질에서부터 우주를 지향한다. 교회를 단지 인간 세상에만 제한하는 것은 위험한 현대의 협소화였다. 그러나 만약 교회가 우주지향적이라면, 지구 피조물의 "생태학적 위기"는 그 자신의 위기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지구의 이러한 파괴로 인하여 "살 중의 살과 뼈 중의 뼈"가 파괴 당하기 때문이다. 만약 더 약한 피조물들이 죽어 간다면, 온 창조의 공동체도 고난을 당하는 셈이다. 만약 교회가 자신을 창조의 대변자로 이해한다면, 더 약한 피조물들의 이 고난은 자신 안에서 분명한 고통이 된다. 그리고 교회는 이 고통을 공개적인 저항 속에서 외치면서 드러내어야 한다.



08. 삼위일체 하나님의 초대하는 일치성 

179 끝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일치의 삼위일체론적 개념과 그 구원론적 개념의 상호보충성을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다. 만약 우리가 증언되고 경험된 구원사를 따른다면, 우리는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의 일치를 삼위일체론적으로 이해해야 하며, 이것을 양태론적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만약 구원의 완성이 분리되고 찢겨진 피조물들과 삼위일체적 하나님의 결합에 달려 있다면, 우리는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의 일치를 열려 있고 초대하며 결합하고 통합하는 일치로 이해해야 한다. 성서의 증언에 따르면, 아들 예수와 아버지의 일치는 파송과 순종, 희생과 부활 안에서 이루어진 의지의 일치이다. 이것은 관계론적 일치이다. 이것은 이를 넘어서 아버지가 아들 안에, 아들이 아버지 안에 그리고 영이 아버지와 아들 안에 상호 내주하는 일치이다. 즉 이것은 순환론적 일치이다. 이것은 이를 넘어서 성령을 통한 변모 안의 일치이다. 이것은 반사되고 발현된 일치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적 본성의 일치는 앞에서 말한 일치의 특징에 의해 구성되며, 이를 폐기하지 않는다.



제2부 삼위일체적 역사 이해에 관하여

01. 그리스도교의 희망 : 메시아적인가 아니면 초월적인가?  / 요아킴 피오레와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화적 대화

219 로마 제국에 교회가 설립됨으로써, 천년왕국론은 종말론으로부터 사라졌다. 천년왕국론이 사라진 것은, 알버트 슈바이처와 루돌프 불트만 이후 늘 거듭 주장되었듯이, "실망의 경험" 때문이 아니라 성취의 꿈 때문이다. 콘스탄틴 제국의 궁정 신학자들은 이 그리스도교 왕국을 "천년왕국"이라고 선언했다. 로마의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천년왕국이라고 선언했다(티코니우스,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도 이런 의미에서 교회의 현 상태를 천년왕국으로 믿은 자였다. 그러므로 그는 교회 외에 이스라엘의 특별한 소명을 인식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 끝날과 천상의 행복에 바로 이른다고 그는 생각했다.


220 요아캄과 토마스는 그리스도교의 희망의 두 측면을 대변한다. 전자는 천년왕국적 측면을, 후자는 종말론적 측면을 대변한다. 우리가 이들의 대화를 다시 수용한 것은 그리스도교의 희망을 세계사의 연대기로 바꾸는 관념적인 행위와 또 이를 초자연적인 덕으로 대체하는 이에 못지 않은 관념적 행위로부터 해방시키고, 이들의 도움으로 그리스도교의 희망이 종말론적 기대 안에 있는 메시아적 희망이라는 것을 새롭게 이해하기 위함이다.



02. 그리스도인됨, 인간됨,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 / 칼 라너와의 대화

227 교회가 다른 많은 세계종교들 중의 한 종교가 되어가면 갈수록, 그리고 교회가 아시아의 오래된 문화권에 발을 들여놓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자신만이 유일한 종교를 대변한다고 내세우던 교회의 주장은 사라져 간다. 물론 교회는 모든 민족들 안에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대개가 주변적인 소수로 존재할 따름이다. 서양에서조차도 교회는 "작은 무리"로 줄어드는 것 같이 보인다. 사회와 종교의 외적, 내적 다원주의 안에 있는 교회의 이러한 시대사적 문제의 뒷면에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됨의 더 깊은, 즉 본질적인 문제가 숨어 있다. 절대적인 것, 무한하고 영원한 하나님이 어떻게 상대적인 것, 유한하고 제한적이고 인간적인 하나님의 백성에 의해 일반적으로 설명될 수 있겠는가? 보편적인 것, 하나님의 나라와 그 안의 참 인간됨이 어떻게 특수한 것, 그리스도인됨에 의해 일반적으로 대변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절대적인 것이 상대적인 것에 의해 보편적인 것이 특수한 것에 의해 설명되고 대변될 수 있는지 아닌지의 문제가 아니라, 그렇게 되더라도 어떻게 절대적인 것이 절대적인 것으로, 상대적인 것이 상대적인 것으로, 보편적인 것이 보편적인 것으로, 특수한 것이 특수한 것으로 남아 있을 수 있고, 전자와 후자의 대리적 동일성이 해체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228 모든 보편성 주장처럼 그리스도교의 구원주장의 보편성도 역시 "이 길 밖에는 구원으로 인도하는 다른 길이 없다"는 배타적 요구에 근거해 있다. "인간이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하며, 하나님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는 사실을 그리스도인은 확신하고 있다." 라너는 이러한 종말론적 주장을 교회론적 주장과 결합시키기 위하여 "하나의 참된 교회에 속해 있어야 함"에 동의 한다. 옛 고백서가 말하듯이, "실로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결론이 이로부터 생겨난다. 하지만 그의 교회전통과는 달리 그는 "하나의 참된 교회"에 대해 말하지만, 이것을 "로마-카톨릭 교회"라고 분명히 말하진 않는다. "참된 교회"는 성령에 의해 설립된 신자들의 공동체이다. 이런 규정은 당연히 로마 카톨릭 교회를 배제하지 않지만, 동시에 정통주의적, 개신교적 교회 규정에 대해서도 열려 있다. 라너가 확신 하듯이, 인간에 대한 결정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달려 있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고대의 문장은 "그리스도 밖에는 구원이 없다"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존재하고 신앙되는 곳에는 교회도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존재하고 신앙된다는 의미에서, 전자는 후자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03. 창조, 계악 그리고 영광  / 칼 바르트의 창조론에 관한 대화

258 코케유스 Coccejus에게서 창조는 단지 계약을 가능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행위만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하나님의 계약, 즉 창조계약이다. 계약의 역사는 공로계약을 단계적으로 허물고 은총계약을 단계적으로 세운 다음에 영광의 나라의 미래로 전진한다. 초기 교부들 이래로 신학 전통이 항상 말해왔듯이,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영광 때문이다.


274 바르트는 그 나름대로 슐라이에르마허의 이해를 따랐다. 죽음은 "그 자체상 심판이 아니며, 그 자체 상 그리고 그 자체로서 하나님의 심판의 표시도 아니다"(770). 죽음은 "그 자체상" 단지 유한한 존재의 한계의 형태일 뿐이고, "그 자체로서" 인간의 본성에 속한다. 인간의 탄생이 "비존재로부터 존재로 나아가는 단계 이듯이, 죽음은 "존재로부터 비존재로 나아가는 단계"이다. 왜냐하면 "유한성은 사멸성을 뜻하기" 때문이다 (761). 즉 "죽음 그 자체"는 유한한 인간 존재의 시한부적 생존에 속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죽음 그 자체"의 이러한 본질을 바르트는 실제적 죽음과 구분한다. 이것은 실로 죄인들의 죽음인데, 죄인들은 이 죽음을 저주로 두려워하고 형벌로 경험한다. 그리스도와 신앙이 없다면, 죽음 그 자체와 실제적 죽음은 하나가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고 신앙 안에서 우리는 저주의 죽음으로부터 "자연스러운 죽음"으로 해방된다. 그리하여 "부자연스러운 죽음으로부터의 이 해방은 영원한 생명을 위한 해방이기 때문에, 이것은 분명히 자연스러운 죽음으로 의 인간해방을 의미하기도 한다" (777).


277 신앙은 실로 늘 일종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인 죽음에 대한 종교적인 두려움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킬 수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담담히 확신있게 죽을 수 있다. 하지만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탄식하며 고대하는 모든 피조물들과의 연대성 속에서 죽도록 한다. 끝으로 희망은 우리로 하여금 살아있는 생명체들의 이러한 죽음에 대해서는 체념할 수 있지만 개체의 죽음에 대해서는 체념할 수 없도록 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 개체의 죽음을 "자연스럽고"' 또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지 못한다. 시간이 있는 한, 오로지 잠정적인 세력만 이 죽음에게 다가온다. 죽음의 미래는 죽음이 멸망됨으로써 창조가 죽음이 없이 완성되고 새롭게 되는 데 있다.


04. "희망이 있는 곳에 종교가 있다" / 희망의 철학과 희망의 신학

306 유대교적 전통에 따르면, 메시아 시대는 옛 세계의 죽음의 고통과 새 세계의 탄생의 고통과 더불어 시작된다. 그리스도교적으로 보자면, 이 시대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과 더불어 만인을 위해 대리하는 이 한 분에게서 이미 시작되었다. 탄식하는 피조물에게 메시아 시대를 열어 주고 소외된 인간에게 메시아적인 삶을 열어 주는 것은 하나님의 초월 적인 비밀 안으로 자신을 던져 넣은 예수의 투신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이 세계의 내적인 비밀 안으로 자신을 던진 그의 투신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희망은 오로지 구체적인 것에 대한 온전한 자기 투신을 통해서만 실천된다. 이 투신은 유동 상태도 아니고, 열려있는 과정도 아니고, 단순한 실험적 생활 태도도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메시아의 십자가와 부활의 빛 안에서 살고 죽는 역설이다. 



05. 밖에서만 돌진하는 자가 어찌 하나님이겠는가? / 지오르다노 브루노를 회상하며

317 하나님의 단일성은 새롭게 발견된 우주의 복수성과 무슨 관계를 맺는가? 브루노는 분명히 하나님과 우주의 차이를 설명하려고 애썼다. 하나님은 제한하는 자요, 세계는 제한되는 자이다. 세계는 무한하지만, 하나님은 완전한 전체성을 지니고 온전히 만물 안에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우주의 포괄 자이다. 우주는 절대적인 무한정이 아니라 자원적인 무한정을 갖는다.


317 브루노는 하나님을 세계 안으로 끌어가지 않고 세계를 하나님 안에서 조명한다. 이 세계가 측량할 수 없고 차원적으로 무한하다면, 하나님은 존재하는 그 자체로서 더 큰 자 semper major임에 틀림이 없다. 브루노에게서 하나님의 개념은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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