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원: 숨은 신을 찾아서 ━ 신념 체계와 삶의 방식에 관한 성찰


숨은 신을 찾아서 - 10점
강유원 지음/라티오


1 2 3 . . . 7 8 . . . . . . . . . . 19 . 21 . 23 24 . . . . . . . . 33 34 . . 37 38 39  추기追記






8 신이 인간을 구원하리라는 예언적 언사들이 있다. 넘친다. 넘치면, 그것은 착란적 언사다. 착란의 배경에는 착각이 있다. 인간의 힘에 대한 착각, 인간은 신 앞에서 할 일이 없다. 해야만 하는 의무도 없다. 날마다 기도하고 경건한 삶을 살며 '구원의 확신 속에 잠든다'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서 불안을 달래기 위해서 남에게 자신의 신앙을 뽐내기 위해서 수행하는 짓에 불과하다. 

  신앙은 무엇인가. 신앙은 기도로써 이루어지지 않는다. 무조건적으로 신에게 헌신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신앙은 인간의 앎을 넘어서 있다. 앎을 넘어서 있다. 인간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신앙은 무엇인가 ─ 이 물음은 물음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인간이 묻고 인간이 대답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신앙인이 되려고 몸부림 치다가 죽기 직전까지도 참다운 신앙인이 되었는지 의심하다가, 간신히 신앙의 끝에 와본 듯하다는 어렴풋한 느낌을 가질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이 전부다. 

  도저히 넘어갈 수 없는 선을 긋자. 아니, 거대한 절벽을 세우자. 이쪽에 인간이 있다. 인간은 이쪽에서 버둥거린다. 기도도 한다. 열심히 봉사도 한다. 뭔가를 한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것들을 끝없이 쌓아 올리고 한없이 늘여도 저 선을 넘어갈 수는 없다. 저 절벽을 올라갈 수 없다 이쪽에 쌓이는 것일 뿐이다. 쌓고 있는, 늘이고 있는 스스로를 보라. 기특한가, 갸륵한가, 보기 좋은가, 모두 헛된 말들. 적절한 표현은 '무기력'이다. 다른 것과의 비교를 통한 열등감이나 상대적 괴로움이 아니라 절대적 무기력이다. 무기력 자체이다. 절망이다.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무기력과 절망을 뚜렷하고 냉혹하게 자각할 때, 저 선은 넘을 수 없고 저 절벽은 올라갈 수 없음을 몸에서 알아차릴 때, 비로소 신앙이 시작될 기미라도 보인다. 인간은 그런 존재이므로 그러하다. 신앙이 가능한지, 자신이 신을 믿을 자격이 있는지를 의심해야만 한다. 

  더러 누군가 비웃는다. 그러한 선은 없다고, 절벽은 없다고, 인간의 망상일 뿐이라고, 스스로 선을 긋고 그것을 못 넘어간다고 자학하지 말라고, 무거운 돌을 손에 들고 까닭 없이 힘겨워하지 말라고, 그저 내려놓으면 간단 할 일을 두고 헛된 힘을 쓰지 말라고, 그런다. 쓸데 없는 고민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지금 여기에 적힌 절대적 무기력의 자각 또한 망상일 가능성을 열어 두기로 하자. 그것을 열어 둔 채로, 그것을 인정한 채로 한번 밀고 가보려는 게 지금부터의 일이다. 신을 믿는 종교가 거대한 환상에 불과하다는 비웃음을 인정하고서 그것이 정말 그러한지 물어 보려는 것이다. 

  종교가 환상이라면, 그것에 매달린 인간 자체도 헛된 것이다. 이를테면 기독교의 신을 탐색하는 것은 그것을 탐색하고 있는 인간에 대해 탐색하는 것이다. 인간은 신을 보고 싶어 한다. 그리하여 인간은 신을 찾는다. 그러나 신은 보이지 않는다. 숨어 있다. 비교 검증할 데이터가 없으니 신을 만났다는 것을 확인할 도리가 없다. 결국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인간 자체를 탐색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인간은 신에 대한 논의를 수 없이 해왔다. 그것부터 알고 싶어 한다. 자신에 대해서보다는 신에 대해 알고 싶어 한다.


14 철학자들은 바울로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새로운 가르침"(kaine didakhe)이라 불렀다. 이 가르침은 예루살렘에서 온 것이다. "새로운 가르침"은 예수가 인간을 구원하러 이 세계에 왔고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한 이라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알고 있는 이치에 들어 맞지 않는 것이다. 인간은 나면 반드시 죽는 존재이다. 희랍 아테나이의 세계에서 이것은 되풀이 되어 말해진다. 바울로는 분명히 예수가 사람이라 하였다. 그러면서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였다고 말하였다. 예수는 신이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바울로에 따르면 예수는 신이다. 동시에 예수는 인간이다. 이 두 명제는 '동시에' 성립 할 수 없다. 그런데 바울로는 그렇다고 하였다. 예수는 죽었다. 그런데 예수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났다고 하였다. 예수가 죽었다면, 그가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필멸의 존재이므로 예수가 인간이라면 당연히 죽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되살아났다. 신이기 때문인가? 신이라면, 불멸의 존재라면, 죽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는 신도 아니요 인간도 아니다. 그러 면 무엇인가. 아테나이의 철학자들에게는 알 수 없는 존재였을 것이다. 철학자들에게 그 "가르침"은 '생소한' 것이었다. 낯선 것이었다. 그들은 그것에 대한 앎(gnosis)을 갖고자 하였다. 바울로는 아레오 파고에서 벌어진 심문에 서 원인과 결과를 따져서 대답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예수에 대한 앎을 가질 수 없었다.


148 신이 세계를 창조하였다는 것은 신이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였다는 것이다. 신이 세계에 부여한 의미는 '좋음'이다. "이렇게 만드신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창세기 1:31). 존재의 진상은 있음과 없음을 오가는 것이라 해도 그 과정 자체에 '좋음'이라는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기독교이다. 신이 세계를 창조하였다는 것은 신이 세계에 '좋음'이라는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두려움에 머물려 있지 않고 세계를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두려운 나머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 하지 말고, 두려움의 끝에서 사악함을 뿜어내지 말고, 두려움을 받아들이고, 인간의 유한함을 인정하고, 언젠가는 무로 되돌아갈 것을 용인하면서, 세계는 신이 좋음이라는 의미를 부여한 곳임을 고백하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기독교도의 태도이다. 우리의 마음 속의 두려움을 신이 부여한 좋음으로써 이겨내는 것이다. 좋음을 주는 신을 찾아서 믿음으로써, 그러한 신을 향함으로써, 그러하니 신과 함께 하지 않는 인간은 비참하고 신과 함께 하는 인간은 행복하다. "신만이 인간의 진정한 행복이다"(팡세, §181). 그저 믿고 의지하면 된다. 하찮은 유한자의 처지에서 세계를 내 정신으로 해보려 애써서는 안 된다. 인간은 신의 자리로 결코 건너 갈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하면 오만함이다. 자신이 진리의 담지자라고 선포하는 것이다. 차라리 나는 유한한 존재임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깜냥껏 살겠다고 하는 것이 낫다. 인간은 신에게다가 갈 수 있을지언정 어디에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신을 찾았다고 선언할 수도, 현존을 증명할 수도 없다. 파스칼은 고백한다. "하느님께서는 숨어 계시기를 원하셨다는 것. (...) 하느님께서는 이처럼 숨어 계시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숨어 계신다고 말하지 않는 모든 종교는 참 종교가 아니다"(팡세, §275). "참으로 당신은 자신을 숨기시는 하느님이십니다"(이사야, 45:15). 

  신은 숨어 있다. 우리는 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 알 수 없으니 신이 있는 곳으로 갈 수 없다. 알지 못하니 갈 수 없다. 어쩌면 우리는 이것에서 위안을 얻을지도 모른다. 멈춰 설 곳을 알지 못한 채 계속 나아가 기만하는 것은 비극적 전망이 아니다. 그저 가는 것이다. 꿈도 없이 희망 도 없이. 어디에 있는지 알면서도 가지 못하는 것이 차라리 비극이다. 저기에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가 닿을 수 없는 것 ─ 그것이 슬픔 아닌가.


153 우리의 모든 탐구는 숨은 신을 찾으려는 시도이다. 그것이 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지 않는다 해도, 우리는 그것을 찾아가는 삶의 과정에 있다. 더러는 바다를 건너가기도 하면서 더러는 바다를 바라보기도 하면서, 때로는 오뒷세우스처럼 때로는 에이해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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