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기 20분 | 05 파시즘 1
- 강의노트/책읽기 20분 2016-18
- 2017. 6. 26.
파시즘 - 케빈 패스모어 지음, 이지원 옮김/교유서가 |
책읽기 20분 | 파시즘 [ 원문보기]
캐빈 패스모어(지음), 이지원(옮김), <<파시즘>> , 교유서가, 2016.
원제: Kevin Passmore, Fascism: A Very Short Introduction (2014)
파시즘, 초판, 옮긴이의 말
근대세계의 여러 특징 가운데 하나는 정치가 삶의 모든 영역을 규율한다는 것인데, 이때 정치사회를 구성하는 여러 세력들은 그들 나름의 규율원리를 정리하여 서로 각축을 벌이거니와, 우리는 이 원리들을 ‘주의ism’라 부르기도 한다. 얼핏 보기에는 파시즘도 이러한 원리들 가운데 하나일 듯하나 그것을 주도하는 정치세력의 정체성이 모호하고 그에 따라 내세우는 주장을 종잡을 수 없어서 그만큼 많은 사람을 혼란에 빠뜨린다. 파시스트 체제를 경험하고 제법 오랫동안 그에 대한 연구를 수행해온 서구의 상황이 이러한 데다 한국의 처지는 더 말할 나위도 없으므로 지금은 뚜렷한 개념 정의와 간명한 역사적 통찰이 요구되는 시점이라 하겠다.
주지하듯이 인류의 역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관철된 정치체제는 일인 또는 소수의 지배자 집단과 다수의 피지배자(이들은 체제의 적극적 구성원이 아닌 그저 숫자로만 처리되었다)로 구성된 것이었다. 지배자와 그를 둘러싼 지배집단은 서로 힘을 합해 지배력 행사의 구체적 수단인 폭력을 제도적으로 독점하고 정치적 권위를 정당화하는 근거인 과거와 미래를 배타적으로 장악했다. 이러한 독점과 장악에서 주요하고도 뚜렷한 구실을 한 것은 우리가 종교라 부르는 신념체계들이다. 이집트의 종교, 희랍의 올림포스 신들, 메소포타미아의 다신교 신앙, 페르시아의 배화교拜火敎, 인도의 고대 신앙, 중국의 천天, 시베리아나 아메리카 인디언의 샤먼, 남아메리카의 태양신 숭배 등을 떠올리면 우리는 곧바로 ‘제정일치祭政一致’가 인류의 오랜 전습傳習임을 알 수 있으며, 그에따라 그 역할도 짐작할 수 있다. 기독교, 이슬람교, 불교 등으로 불리는 보편종교의 역할 역시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서구 근대세계는 ‘근대화’ 과정(이 과정은 종교가 더는 삶의 희망이 아니라 고통과 비극의 원천임을 징그럽게 보여준 30년 전쟁, 반종교[기독교]주의에서 시작된 계몽주의, 지상과 천국을 수학적으로 통일하려 한 과학혁명, 욕망을 부추기는 삶의 극대화인 자본주의의 등장 등을 포괄한다)을 거치면서, ‘제祭’를 떼어내고 ‘정政’으로써만 세계 지배의 핵심을 삼았으며, ‘제’가 제거된 곳에는 오늘날 우리가 ‘이데올로기’라 부르는 이념체계가 들어섰거니와, ‘자유주의liberalism’, ‘보수주의conservatism’, ‘사회주의socialism’, ‘공산주의communism’ 등이 그것에 해당한다(‘민주주의deomocracy’는 이념체계라기 보다는 이념이 작동하는 방식이며, 이를 인식하는 것이 민주주의를 둘러싼 논의의 출발점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ism’이 아니라 ‘cracy’임을 주목하라).
그렇다면 파시즘fascism은 앞서 거론한 ‘이즘’들과 마찬가지로 특정한 근본원리를 가지고서 그것들과 마찬가지의 역할을 수행했는가? 우리는 이 물음에 대해 ‘예’와 ‘아니오’를 동시에 말할 수 있다. 아니 더 정확하게, 근본원리에 대해서는 ‘글쎄’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을 듯하며, 역할에 관해서는 ‘아주 그렇다’는 답변을 내놓을 수 있을 것이다. 고대의 신념체계, 보편종교가 성립시킨 교설, 근대의 이데올로기 모두는 출발점으로 삼는 단 하나의 원리가 있다. 이를테면 세계의 창조주는 아훼 하느님이라든가, 광명의 신 아후라 마즈다가 악의 신 아흐리만을 타도하고 새로운 세계를 만든다든가, 세계 속의 모든 인간은 자신의 신체의 주인이라든가, 모든 인류는 인간이 인간 아닌 것으로 취급되는 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들이 그것이다. 그런데 파시즘은 이러한 원리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어떤 것을 긍정하는가 하면 동시에 그와 반대되는 것을 긍정하여 두 개를 동시에 세운다. 민족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의 표어인 ‘민족사회주의’에만 해도 특정 민족을 중심으로 하는 민족주의와 노동자를 중심에 둔 사회주의가 뒤엉켜 있다. 심하게 말해 파시즘은 그때그때 필요하다 싶은 것들을 거의 즉흥적으로 가져다가 이리저리 짜 맞추면서 형성된, 그래서 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항상 변화하는 역동적인 이데올로기이거니와, 바로 이것이 파시즘을 명료하게 파악하기 어렵게 만드는 주된 요소이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이런 잡탕 덩어리가 전간기戰間期 서구에서 아주 강력한 위력을 발휘했다. 지도자와 그를 둘러싼 지배층, 지배기구의 구성원, 피지배집단(이들의 참여를 감안하면 ‘피지배’ 라는 말을 붙이는 게 타당한지 의문이긴 하다. 그런 점에서 파시즘을 규정할 때에는 치밀하게 적극적인 대중동원과 열광적이고 긍정적인 대중참여를 반드시 고려해야 하며, 이는 파시즘이 참여 민주주의적으로 작동했다는 판단도 가능케 한다)이 한 덩어리가 되어 이념체계 실현에 몸과 마음을 아낌없이 바쳤던 것이다. 이러한 실행과정 역시 명료한 파악을 저해하면서 동시에 파시즘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고 밀고 나간 인간 군상의 심성구조 이해에 커다란 걸림돌로 작용하는 요소다.
한국에서 파시즘 논의는 서구의 파시즘 논의가 가진 한계를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 한국적 수용과정에서 생겨난 난점들까지 더해져 그 혼란이 더없이 크다. 군사독재에 대해서도, 파편화된 대중이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취향을 강요하는 짓에 대해서도, 심지어 일상에서 벌어지는 억압적 행태에 대해서도 파시즘이라는 표찰을 붙여왔다. 아예 파악해보려는 생각을 접는 것이 파시즘을 파악하기 위한 최선의 방책인 듯하다. 사실 뭐라 이름붙이건 그런 사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만 하면 되지 않는가 하는 것이 사람들의 중론이다. 그러나 그러한 이름붙이기는 불명료한 사태파악에서 비롯된 것이고, 불명료한 사태파악은 부적절한 처방으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최소한의 준거틀이라도 마련해두는 것이 공부하는 이의 현명한 태도겠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 출판부에서 펴내는 ‘A Very Short Introduction’ 시리즈 가운데 하나인 이 책을 읽음으로써 우리는 파시즘의 기본개념, 그것의 다양한 변(형)태들, 앞으로의 전망 등에 관한 간명한 식견을 가질 수 있을 것이며, 이는 완전에 근접한 대안의 바탕으로 기여할 것이다. 현실을 이론을 거부하니 이론적 활동이 부질없어 보인다 해도 우리는 이를 포기할 수 없다. 이성적 사유를 포기하는 순간이 곧 파시스트적 열정에 몸을 맡기는 시점始點이다.(2007년 11월)
리처드 버릿지, 《복음서와 만나다》
오늘부터 캐빈 패스모어의 《파시즘》을 읽으려고 한다. 올해는 제국주의에 관한 책들을 읽어왔다. 사실 1970년대 중반 유신헌법 이후 한국사회는 권위주의체제인 군사독재체제가 지속되어 왔다. 그것을 파시스트 체제라고 부르기도 했다. 80년대 초반에 있었던 여러 시위에서도 파쇼에 대항하는 투쟁이라 불려왔기 때문에 파시즘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리고 파시즘이라는 말이 꽤나 널리 쓰였다. 무조건 권위적인 또는 독재적인 것에도 파시즘이라는 용어를 썼다. 이 용어가 상대를 몰아붙이는데 굉장히 편리하게 쓰였다. 어쨌든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 한국사회에서 파시즘적인 경향은 완전히 소멸되지 않았나 생각했었지만 다시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다시 그 말이 특정정치세력을 가리키는데 사용되기 시작했다. 지금 현재 등장한 19대 대통령 정부는 자유주의 정부인데 진보라 부르는 사람도 있고 어떤 곳에서는 파시즘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지난 역사의 교훈, 사실 유사 파시즘이라 해도 다시는 한국사회가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가 후퇴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을 보고 지금부터 10년 후에도 그런 일이 다시 벌어지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게다가 파시즘을 극복하고 자유 민주정을 확립했다고 하는 유럽의 여러 나라들에서 요즘에 전개되는 우경화 사태를 보면서 우리들보다 훨신 더 많은 희생을 치러내면서 파시즘을 또는 나치즘을 이겨낸 사람들이 불과 60-70년 만에 또다시 그 교훈을 잊어버리고 다시 그런 우경화로 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과연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역사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특히 이번 프랑스 대선에서 극우민족주의자들이 국민전선이 무시할 수 없을 만큼 표를 얻었다. 그런 것을 보면서 아주 환멸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파시즘이라고 하는 주제 아래서 논의되는 것들, 파시즘은 아주 명백하게도 19세기 이후의 산물인데 이것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해봐야 하지 않나 한다. 1800년대 후반, 1900년대 초반에 등장한 여전히 백 년이 지났지만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지 않는가 생각을 하게 된다.
선거 결과에 따라 리처드 버릿지의 《복음서와 만나다》를 읽으려고도 생각했었다. 그런데 경계한다는 의미에서 다시는 우리가 퇴행하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이런 책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통령 선거 결과가 그나마 조금 나은 방향으로 귀결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지나간 일들에 대해서 되짚어 보는 의미에서 읽어보려고 한다.
캐빈 패스모어의 《파시즘》는 원래 2002년에 초판이 나왔다. 한국어 번역본은 10년 전에 초판을 번역해서 출간했었다. 그때가 이명박 정권이 시작되는 시점이었다. 그때 이 책을 펴내면서 9년이 이렇게 가리라고는 상상을 못했다. 그리고 항상 이런 책을 낼 때는 걱정이 앞섰다. 출판사도 옮긴이도 그때는 걱정이 앞섰다. 그리고 이 책이 2014년에 원서 개정판이 나왔다. 12년만에 개정판이 나온 것. 그래서 교유서가에서 다시 번역한 책이 나왔다. 이 책이 다시 나왔을 때 고맙고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만큼 서양에서도 파시즘에 관한 연구가 그 사이 축적되었을 것이고, 또 그것에 관해서 연고의 성과를 한국에서도 읽어보는 것이 좋지 않나 한다.
2007년에는 서구사회에서는 파시즘에 대해서 전혀 염려할 상황이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한국어 번역본이 나온 2017년 5월 이 시점에서는 서구의 주요 나라들이 우경화되고 있다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그게 우경화가 아니라 국제주의 또는 세계화의 끈이 느슨해지고 자국주의 또는 국가주의가 만연한다는 것으로 이해한다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금 서구사회에서 배제의 정치학이 횡횡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굉장히 무서운 점이다. 그래서 파시즘이라고 하는 이것을 다시금 되새겨봐야 하는 어찌보면 굉장히 서글픈 시점에 이르렀다고 본다.
서문을 보면 이전 판과 마찬가지로 저자는 파시즘을 정확하게 규정하는 것이 어렵다고 얘기한다. 그리고 국가 단위 사례를 파악하는 것도 어렵지 않나 한다. 파시즘이라는 것이 A이면서 A가 아닌, 서로 모순되는 것들이 함께 붙어있기 때문에 정확한 규정을 내리는 것이 어렵다고 이야기 한다. 그래서 다시 서문을 보면 "이 책의 초판이 발간된 2002년 이후, 두 가지 방법론적 전환이 파시즘의 연구 동향을 변화시켰다. 당시의 목표는 파시즘의 주요 특징들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정확한 정의(혹은 '모델'이나 '유형 분류 체계')를 도출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제2판의 장 구성과 일부 내용은 초판 그대로 유지되었지만, 논지와 꽤 많은 내용이 완전히 바뀌었다." 초판을 읽은 분들도 다시 이 책을 사야할 것으로 보인다. 아무리 번역자라고 해도 출간한지가 꽤 되었고, 파시즘을 주제로 강의도 했지만 예전 판은 낡은 판이니 두고 다시 새 판으로 공부하려고 한다. 바라는 것은 지금부터 10년 후인 2017년에는 다시는 파시즘에 대해서 말하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7 이 책의 초판이 발간된 2002년 이후, 두 가지 방법론적 전환이 파시즘의 연구 동향을 변화시켰다. 당시의 목표는 파시즘의 주요 특징들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정확한 정의(혹은 '모델'이나 '유형 분류 체계')를 도출하는 것이었다.
8 이 책의 초판에 이미 정의의 한계에 대한 나의 부분적인 인식이 드러나 있다. 그러나 그러한 문제 제기는 결국 나 나름의 정의를 도출하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제2판의 장 구성과 일부 내용은 초판 그대로 유지되었지만, 논지와 꽤 많은 내용이 완전히 바뀌었다.
오늘은 책 전체 내용을 살펴보기 보다는 예전 초판의 역사 서문을 잠깐 이야기하려고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신념체계가 있다. 근대 이후에는 종교적인 신념체계가 폐기되고, 서구에서는 기독교의 신인 하느님의 정치적인 권위의 정당성이 폐기되고, 이론적으로 따져보자면 정치사상의 맥락에서 보자면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이 마지막 이론 체계가 아닌가 한다. 그것이 끝나면서 우리가 이데올로기라고 부르는 이념체계가 있다. 자유주의와 보수주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이런 것들. 민주주의는 이념체계가 아니라 이념들이 작동하는 방식이니까 민주정이라고 말하는 것이 적당하겠다. 그런데 파시즘이라고 하는 것은 특별히 하나의 줄거리가 되는 이념체계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근본원리가 없고, 어떻게 보면 굉장한 잡탕 덩어리이다. 예를 들어서 나치라고 부르는 당만 해도 민족주의와 사회주의가 붙어있다. 그런데 민족주의라고 하는 것은 게르만족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고, 그런데 사회주의는 말 그대로 마르크스가 말했던 것처럼 '전세계의 프롤레타리아트여, 단결하라' 말한 그것이다. 사회주의는 국제적인 연대, 그래서 노동자, 민족과 생김새와 피부와 상관없이 서로 연대해야 한다는 것. 따라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는 대립되는 요소가 더 많이 있다. 그런데 나치는 민족사회주의라는 말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가져다 붙인다. 거기에 독일노동자당이라고 말했다. 말 자체가 이미 정신 사납고 서로 같이 붙일 수 없는 말들을 붙인 것. 그래서 즉흥적으로 필요하다면 이것저것 짜서 맞추는 것. 따라서 저자도 그런 것을 강조하는데 파시즘은 정치 스펙트럼의 전반에 걸친 다양한 사상들을 차용하고 변용해서 자기 것으로 가져다 놓는다고 말한다. 특히나 파시즘은 아주 조직적으로 대중을 동원한다. 그래서 이 측면을 강조하기 위해서 대중독재라는 말도 사용되기도 했다.
예전에 출간했던 《주제》라는 서평집이 있다. 그 책에서도 파시즘을 가지고 이것저것 써놓은 것이 있는데 그 책을 살펴보니 파시즘이라는 것이 어찌 보면 잡탕 덩어리이다. 이 책 21페이지를 보면 극단적 내셔널리즘, 카리스마있는 지도자, 독재, 인종주의, 반유대주의, 유일 정당, 준군사조직, 코포라티즘 이런 말들이 있다. 그런데 한가지 뚜렷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아주 조직적으로 열광적으로 대중을 동원한다는 것이다. 중요한 점이다. 대중들은 그것에 또 열광적으로 호응한다. 그래서 대중독재라는 말을 한국의 파시즘 연구가들도 상당히 선호해서 사용했다. 욕망을 부추기고, 열광적인, 긍정적인 대중참여를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보면 참여민주주의적으로 작동했다는 판단도 가능하기 때문에 최근에는 그런 얘기들을 한다. 어떤 정치인에 대한 참여와 팬덤 현상을 파시즘 아니냐 하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점에서 파시즘은 뭐라고 규정하기 어려운 점이 파시즘의 고유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파시즘을 이해하는데 많은 난점이 있다. 그리고 이 책 한 권을 읽어서 파시즘이 무엇인지 알아내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우리는 이러이러한 것들은 경계해야 하지 않나 하는 교훈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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