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기 20분 | 03 영락제 4


영락제 - 10점
단죠 히로시 지음, 한종수 옮김/아이필드


책읽기 20분 | 영락제 4 [ 원문보기]

제4장 찬탈로 가는 계단
2대 황제 건문제의 정책들: 삭번정책(황제권 강화), 민생중시책(황제권의 약화)

제5장 역사의 전복
연왕의 거병과 황제찬탈
4년 동안의 내란 — 정난靖難의 변

제6장 잃어버린 시간 속에서
“찬탈과 살육의 오명을 어떻게 씻어낼 것인가?”

제7장 천명天命의 소재
봉천정난奉天靖難(하늘의 뜻을 받들어 국난을 안정시킴), 여기에 실질을 덧붙여 정당화를 얻고자 하는 시도들
1) 대전 편찬사업
영락대전永樂大典 — 지상세계를 총괄하는 성왕, 사상의 통일시도
2) 내각과 환관 — 황제독재체제의 기구







지난 시간에 대명제국의 탄생을 읽고 그에 이어서 제3장인 황통의 장래를 읽었다. 대명제국의 탄생은 명나라 건국의 역사인데 홍무제가 자기 황제자리를 큰아들에게 물려주려고 했지만 일찍 죽어서 손자에게 물려줬다. 그런데 영락제는 북평 지방의 왕으로 나가 있었다. 자기 위로의 형들은 죽고 조카가 황제가 되었다. 황제에게는 존속이 영락제만 남아있었다. 그 상태에서 제3장이 황통의 장래가 어떻게 될 것인가 이다. 우리가 알고 있다시피 영락제가 건문제를 죽이고 왕이 황제가 된다. 그것이 제4,5,6장에 걸쳐서 영락제가 황제가 되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영락제 자체에 대해서 우리가 관심을 갖고 있으면 이 부분을 촘촘하게 읽어볼 필요가 있는데 현재 영락제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시작한 것이 아니라 화이질서의 완성에 관심을 갖고 읽기 시작했기 때문에 이 부분은 지나가기로 하겠다. 그래도 좀 그냥 지나가면 안되니까 4장을 조금 보자.


건문제가 어떻게 해서 영락제와 싸움을 하게 되었는지 보면 건문제가 취한 정책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삭번정책이고, 다른 하나는 민생을 중시하는 양민책이다. 삭번정책은 자기 숙부들이 아무래도 위쪽에서 세력을 얻고 있으니 걱정이 되어서 숙부들을 제거하려고, 봉했던 땅을 빼앗고 직접 통치로 들어가는 것이다. 황제의 직접 통치가 시작되니까 황제권한이 강화되는 것. 그러면서 건문제는 저자에 따르면 유교적인 덕치국가를 세우려고 노력을 한 사람. 당연히 민생을 중시하고 덕을 베풀고 하려고 했다. 그러다 보니 방효유라는 학자를 등용해서 민생을 중시하는 정책을 펼치게 되었다. 그런데 당연하게도 삭번정책이 영락제와 충돌을 일으키는 지점이 생겼다.

107 삭번정책은 뒤에 언급하겠지만 왕들의 번국을 없애버리는 정책으로, '연왕의 반란 = 정난의 변'을 유발해 건문정권을 붕괴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126 확실히 여러 왕들 중에서도 연왕의 위협은 두드러졌다. 최연장자로서 북방 방위에 전념하면서 실전을 통해 키운 그의 군사적 탁월함이 부담이 되었으므로 건문정권의 제왕 정책은 당연히 연왕을 표적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건문정권이 연왕에게서 군사력을 빼앗고 그의 봉국을 없애버리는, 이른바 '삭번'으로 치달린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연왕의 대립이 시작되었다는 것이 제5장이다. 연왕의 거병과 황제찬탈하는 얘기가 나온다. 정난靖難의 변이라 해서 4년 동안의 내란이 일어난다. 그리고 영락제가 조카인 건문제를 죽이고 드디어 황제에 오른다.

139 연왕, 즉 훗날 영락제의 65년 생애에서 40세부터 43세까지 걸쳐 있는 정난의 변이 큰 전기가 되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가 이 내전에서 승리해 명나라 3대 황제가 되고 22년간의 재위 기간 중 여러 가지 정책을 추진함으로써 '영락의 성세'라는 시대가 등장하게 되었다.


그 다음에 제6장은 황제 제위를 찬탈한 다음에 어떻게 영락제가 건문제의 흔적을 지우고 자기가 홍무제로부터 직접 황통을 이어받은 사람이다 라는 것을 세우려 했는가를 다루고 있다. 여기서 방효유라는 학자를 자세하게 다룬다. 많은 학자들이 변절을 하고 영락제에게 충성을 바치겠다고 했다. 그런데 방효유는 그렇지 않았다. 잔인한 얘기지만 해보면 방효유라는 사람 때문에 800명이 넘는 사람이 죽었다고 한다. 3족을 멸한다고 해도 어마어마한 것인데 A라는 사람의 아버지와 아버지의 형제를 죽이고, 그 다음에 A라는 사람의 형제와 형제들의 소생인 조카를 죽이고, 결혼을 했으면 아들과 손자를 죽이는 것. 그런데 9족을 멸한다고 하면 일단 아버지 쪽으로 4족을 죽인다. 부모, 형제, 자매, 아들을 죽이고, 고모와 고종사촌을 죽이고 출가한 자매와 외조카들을 죽이고, 출가한 딸과 외손자들을 죽이는 것이 부계 4족이다. 그 다음에 모계쪽으로 3족을 죽인다. 외조부 일가를 죽이고 외조모 친정일가를 죽인다. 그 다음에 처계로는 2족을 죽인다. 장인일가와 장모의 친정일가이다. 그러면 10족은 친구와 제자와 동문을 합쳐서 죽인다는 것.

188 천하 제일의 문인에게 정중한 즉위의 조를 기해한 영락제에게 '연적찬위'(연나라의 도적이 제위를 빼앗다)라는 네 글자로 답했다.


188 방효유의 순난을 표현할 때 '10족이 희생되었다'고 말한다. '9족'이라는 말은 흔히 사용되지만 '10족'이라는 표현은 생소하다. 아버지 쪽으로 4, 어머니 쪽으로 3, 처가 쪽으로 2 일족을 합한 '9족'에, 친구와 제자와 동문을 합쳐 '10족'이라고 부른 것이다. 이 말은 방효유의 비극에 빗대 만들어진 말이다.


그런데 연왕이 황제가 된 다음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찬탈과 살육의 오명을 어떻게 씻어낼 것인가가 이 사람에게는 심각한 문제였다는 것. 그래서 저자는 이후에 일어난 영락제의 업적들은 모두 다 바로 "찬탈과 살육의 오명을 어떻게 씻어낼 것인가?"라는 부정적인 동기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190 찬탈과 살육의 오명을 어떻게 씻어낼 것인가? 영락제는 극심한 혹박에서 도망치고 싶은 숙명과 평생 대치해야만 했다.


그래서 먼저 제7장이 천명의 소재인데 내치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우선 자신이 하늘의 뜻을 받들어 국난을 안정시켰다, 봉천정난奉天靖難을 내세우고 그 다음에 한 것은 영락제 시대의 아주 유명한 편찬사업인 영락대전 편찬사업에 들어간다. 그냥 이것저것 책을 모아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원리에 따라서 책을 모은 것이다. 유교 관련서적, 그리고 역사서와 지리서, 유교 이외의 제자백가, 문인들의 문집 등 모든 분야를 망라한 자료를 모은 다음에 명 태조가 정한 홍무정운의 운 순서대로 배열했다. 22,877권에 11,095책으로 완성된 방대한 유서다. 이것을 함으로써 영락의 성서를 연출해서 지휘를 정당화한 것. 그런데 이게 단순히 싹 끌어모든 총서가 아니라 유서 형식으로 한 것은 영락제 스스로가 성스러운 제작자로 여기고 지상세계를 총괄하려는 성왕이 되려고 했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영락대전은 단순한 편찬사업이 아니라 자신이 이 세계의 천명을 받은 사람으로 지배자임을 세상에 알리려는 작업이었다는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198 《문헌대성》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유서는 영락제의 방침에 따라 경(經, 유교 관련서적), 사(史, 역사서와 지리서), 자(子, 유교 이외의 제자백가), 집(集, 문인들의 문집)에서 천문, 의학, 점복, 기예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를 망라한 엄청난 분량의 책자였다. 


199 이렇게 수집한 여러 서적들은 모두 2,169명의 스태프의 협력을 받아 태조가 정한 《홍무정운》의 운 순서대로 배열해 약 3년만에 완성되어 황제에게 바쳐졌는데, 영락 5년 11월이었다. 모두 합치면 22,877권에 11,095책으로 완성된 이 방대한 유서는 연호를 기념하기 위해 《영락대전》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200 영락제가 모든 전적을 '총서'가 아니고 '유서'의 형식으로 하나로 정리한 것은 어쩌면 '성스러운 제작자'가 되겠다는 의도가 담겨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영락대전과는 다르게 《사서대전》 《오경대전》 《성리대전》은 "국정교과서가 되어 사상의 통일을 꾀했으니 뜻있는 지식인들은 도저히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이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명나라에서 만들어진 대전들이 사실 학문에 끼친 영향들이 굉장히 크다. 그러면 이런 것들을 영락제가 간행한 이유는 무엇인가. "영락제는 《대전》을 편찬함으로써 주자학을 공인된 체제교학으로 삼아 국가의 정치이념을 확립하려고 했다." 

204 영락13년(1415)에 간행한 《사서대전》 《오경대전》 《성리대전》이라는 세 《대전》이 그것이다.


205 이런 조잡한 대용물이 국정교과서가 되어 사상의 통일을 꾀했으니 뜻있는 지식인들은 도저히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206 영락제는 《대전》을 편찬함으로써 주자학을 공인된 체제교학으로 삼아 국가의 정치이념을 확립하려고 했다.


이렇게 이념적인 방면에서만이 아니라 내각의 창출이나 환관의 중용도 있다. 내각을 창설함으로써 관료기구를 자기 손안에 쥐게 되었다. 이게 바로 황제독재체제가 과도하게 진전된 것. 중국이라는 나라는 그때 이후로 황제독재체제가 강화되었다. 이것이 가장 잘 작동한 때는 청나라 옹정제 때다. 그 시기를 다룬 게 미야자키 이치사다가 쓴 《옹정제》라는 책인데 이 책을 읽어보면 황제는 초인적인 능력을 가져야만 가능하지 않나 생각이 든다.

207 영락제가 내정 면에서 거둔 성과는 이데올로기 방면에만 머물지 않았다. 실무 면에서도 그 자신이 공부를 더해서 전제체제를 강화해 나갔다. 그 중에서도 특히 후세에 영향을 미친 것은 다름 아닌 내각제도의 개설과 환관의 중용이었다.


환관이라고 하면 내시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은 그렇지 않고 이 책에 보면 "출사, 원정, 감군, 분진, 간첩 같은 분야에서 큰 권한을 쥐게 된 것은 모두 영락 시대부터였다고 기술했다." " 환관을 외국에 사절로 임명하기도 하고, 때로는 군대의 감시역이나 진수관으로 전국에 파견했다. 그중에서도 환관에 대한 영락제의 신임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악명 높은 특무기관 '동창'이었다." 동창은 비밀 경찰조직을 말한다. 금의위라는 것이 홍무제 때 있었는데 동창은 스파이 활동을 했다. 동창의 '창'과 금의위의 '위'를 합쳐 창위라고 불렸다. 환관이 왜 중요한가. 환관이 정화와 같이 원정도 하게 되었고, 황제의 직속이었다. 

210 《명사》의 <환관전>에는 환관들이 출사, 원정, 감군, 분진, 간첩 같은 분야에서 큰 권한을 쥐게 된 것은 모두 영락 시대부터였다고 기술했다. 영락제는 환관을 외국에 사절로 임명하기도 하고(정화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때로는 군대의 감시역이나 진수관으로 전국에 파견했다. 그 중에서도 환관에 대한 영락제의 신임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악명 높은 특무기관 '동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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