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기 20분 | 03 영락제 1


영락제 - 10점
단죠 히로시 지음, 한종수 옮김/아이필드


책읽기 20분 | 영락제 1 [ 원문보기]

전근대 동아시아 국제질서, 즉 ‘화이질서華夷秩序’의 완성자로서의 영락제를 다룬다.

현대 중국에서는 영락제의 적극적인 외교정책의 측면에서 그를 재평가한다.


- 저자의 관점

“14, 15세기 무렵의 중국과 이에 휘말린 동아시아 각 나라들의 관계를 축으로, 영락제 시대를 재현하고 그에게 부여된 역할을 객관적으로 분석”


- 명대 이후의 동아시아 질서

“중국의 영향을 받은 주변 국가들은 영락제 시대에 명나라를 중심으로 한 국제질서에 편입되어 그 구조 안에서 행동하도록 강제되었다.”


- 영락제의 ‘화이일가華夷一家’라는 용어와 그것의 현실적 실현, 다민족 복합국가로서의 명나라 체제


- 청대 옹정제의 ‘화이일가’, 건륭제의 ‘중이일가中夷一家’ 등은 영락제의 이념을 계승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오늘부터 일본 교토여자대학의 교수인 단죠 히로시의 《영락제》를 읽는다. 서양에서의 제국에 관한 논의를 다룬 책을 읽다가 중국 제국의 역사책으로 넘어왔다. 관심사가 계속 제국이다. 지금까지 읽은 책 중 중국과 관련된 부분을 찾아본다면 우선 《옥스퍼드 중국사》에서 명나라 부분이 있다. 정화의 남해대원정. 사실 명나라가 동아시아 세계의 전근대 질서를 만들어낸 나라이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는 살펴볼만한 부분이 많이 있다. 그리고 《대포, 범선, 제국》에서도 정화의 남해대원정을 거론한 적이 있다. 또한 뮌클러의 《제국》에서도 상세하게 언급은 안했지만 중국 제국이 어떻게 해서 아우구스투스의 문턱을 넘어갔는가에 대한 논의들을 더러 했었다. 그런 것들을 보면 중화제국에서 무엇을 볼 건인가는 이미 결정되어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저자는 우리의 독서를 알고 있지 못한 상태이고, 또 이 책은 이 책 나름의 관점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먼저 살펴본다. 책뒷표지를 보면 아마도 출판업계에서 흔히 표4라고 부르는 부분을 보면 "21세기 중국을 읽는 또 다른 코드, 영락제를 보면 시진핑이 보인다!" 아마 현대 21세기의 중국이 중화이념을 바탕으로 해서 제국주의적인 질서를 만들어 내려고 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들지만 좀 추잡스럽다. 그리고 박한제 교수가 쓴 당나라에 관한 책을 보면 또 당나라를 현대 중국에서 모델로 삼고 있다는 얘기를 하는데 글쎄 명나라를 모델로 삼는 것이 훨씬 더 현대의 중국에 가깝지 않나 생각된다.


저자 서문에 보면 "현대 중국의 민족문제를 반영하는 견해인데, 여기에서 영락제가 긍정적으로 평가받고 있다"는 것을 거론하고 있다. 예전에는 중국에서 영락제나 영락제의 아버지인 홍무제, 명나라를 건국한 주원장, 이 두 사람을 낮게 보았는데 요즘에는 그렇지 않다. "중화의 위엄을 해외에 크게 떨친 영락제의 적극적인 대외정책에 대한 평가 때문일 것이다." 라고 얘기하고 있다. "근대화에 성공함으로써 자신감이 붙은 중국에서 1990년대 이후 영락제의 전기가 계속 나오는 것도 다 이유가 있다." 그런데 영락제는 해금, 바다를 금한다는 해금정책을 했기 때문에 오늘날처럼 중국이 해외진출하는 것에 대한 선행 모델로서의 역할을 하기에는 조금 모자라지 않나 한다. 이념만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예전에 명나라에서 시도했던 책봉체제나 화이질서 이런 것들을 중국이 생각하고 동아시아 세계의 다른 나라들에게 그런 것을 강요한다면 택도 없는 소리이다. 전에 '대국의 말을 소국은 들어야 한다'고 말했었는데 현실적으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힘의 강약은 있다 하더라도 현재 국제질서는 주권국가들의 평등한 질서이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면 영락제를 본받고 싶어하는 시진핑이라고 한다면 시대착오적인 것이 분명하다.

13 현대 중국의 민족문제를 반영하는 견해인데, 여기에서 영락제가 긍정적으로 평가받고 있다는 사실이 아주 중요하다.


13 아마도 철저하게 내향적으로 비친 주원장과는 달리 중화의 위엄을 해외에 크게 떨친 영락제의 적극적인 대외정책에 대한 평가 때문일 것이다.


13 근대화에 성공함으로써 자신감이 붙은 중국에서 1990년대 이후 영락제의 전기가 계속 나오는 것도 다 이유가 있다.


우리가 지금 이 책을 읽는 목적과는 다르게 저자가 이 책을 쓴 목적은 따로 있겠다. 이 책을 읽을 때 어떤 점을 염두에 두고 있을 것인가는 우리에게 달려 있지만 그대로 본래 저자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이 책을 썼는가는 뚜렷이 집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보면 13페이지를 보면 "14, 15세기 무렵의 중국과 이에 휘말린 동아시아 각 나라들의 관계를 축으로, 영락제 시대를 재현하고 그에게 부여된 역할을 객관적으로 분석하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출발점으로 중화라는 의미가 무엇인지 따지면서 시작하는데 현대의 중국에서 발행되는 연구들처럼 영락제가 과연 오늘날 중국에게 과연 어떤 좋은 점을 남겼는가 이런 것을 따지지 않고 그냥 시대 안에서 보겠다는 말이다. 특히 "동아시아 각 나라들의 관계를 축으로" 즉, 동아시아 질서를 만들어낸 영락제를 염두에 두겠다는 말이다.

13 14, 15세기 무렵의 중국과 이에 휘말린 동아시아 각 나라들의 관계를 축으로, 영락제 시대를 재현하고 그에게 부여된 역할을 객관적으로 분석하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그것이 좀더 뚜렷하게 드러나 보이는 것이 저자 후기이다. 이 책은 1997년에 나왔던 책인데 다시 문고판으로 2012년에 나왔다. 97년의 저자 후기와 문고판 저자 후기를 집중적으로 보겠다. 먼저 97년의 저자 후기를 보면 일단 명나라 역사의 측면에서 영락제와 홍무제를 본다면 홍무제는 외부의 원정을 나갔던 황제는 아니다. "영락제의 진가는 외정 면넹서 두드러졌다." 원래 이 책의 원제는 '중화 세계 시스템의 꿈'이라는 부제를 달고 나왔으나 문고판으로 나올 때는 '화이질서의 완성'으로 바뀐 것. 그런데 홍무제와 영락제는 얼핏보면 다른 것 같지만 기본적으로는 중화사상을 바탕으로 해서 홍무제는 천명사상을 주로 내세웠다면, 영락제는 화이사상인 중화와 이적을 주로 내세웠다.

292 부제에서 표현했듯이 영락제의 진가는 외정 면에서 두드러졌다. 내정을 중시한 주원장의 정책과는 얼핏 보면 단절된 듯 보인다.


그래서 저자는 이 두 사람을 같은 사상적 근본 위에서 정치를 한 사람이다 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특히 《영락제》에서 주목해보고자 하는 점 이렇다. 근대 이전 사회, 한국 사회는 근대 이전 사회라고 하면 조선사회인데 우리가 보통 근대 이전이라고 말하면 대개 15세기에서 17세기에 한반도에 형성된 조선사회가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그 15~16세기의 조선의 대외정책 또는 조선이 가지고 있었던 사회체제 이런 것들이 명나라에서 만들어진 것과 깊은 관계가 있고 명나라가 설계한 동아시아 국제관계와 깊은 관계가 있다. 그래서 저자가 292페이지에서 하는 말을 보면 "중국 국내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에도 '근대' 이전의 사회를 규정하게 했다. 좋건 나쁘건 중국의 영향을 받은 주변 국가들은 영락제 시대에 명나라를 중심으로 한 국제질서에 편입되어 그 구조 안에서 행동하도록 강제되었다. 해금=조공무역체제는 명나라만이 아니라 이후 청나라도 답습했고 주변 여러 나라에 영향을 미쳤다. 조선과 안남에서도 해금이 채택되었고, 일본도 에도 시대에 '쇄국'이 실시되었다. 쇄국이 해금의 결과라는 것은 지금은 상식이 되었다. 이런 동아시아의 국제관계를 지배한 시스템의 완성은 영락 시대에 이루어졌던 바"라고 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14-15세기 동아시아 질서를 지배한 시스템이 영락제 시대에 완성되었다는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292 그가 확립한 체제는 중국 국내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에도 '근대' 이전의 사회를 규정하게 했다. 좋건 나쁘건 중국의 영향을 받은 주변 국가들은 영락제 시대에 명나라를 중심으로 한 국제질서에 편입되어 그 구조 안에서 행동하도록 강제되었다.


293 해금=조공무역체제는 명나라만이 아니라 이후 청나라도 답습했고 주변 여러 나라에 영향을 미쳤다. 조선과 안남에서도 해금이 채택되었고, 일본도 에도 시대에 '쇄국'이 실시되었다. 쇄국이 해금의 결과라는 것은 지금은 상식이 되었다. 이런 동아시아의 국제관계를 지배한 시스템의 완성은 영락 시대에 이루어졌던 바, 이 대목에서 영락이라는 시대가 지닌 무게의 느낌이 와 닿는다.


그런 점에서 문고판 저자 후기는 그럼 측면들을 강력하게 제시를 한다. 저자가 처음 글을 쓰고 나서 문고판을 내면서 책을 수정도 하고 그랬다. "이 15년 동안 학계의 추세는 확실히 달라졌다"라는 말도 하고 있다. 중국사 연구추세가 달라졌다. "당시에 비주류에 속해 있던 근대 이전의 대외교류사와 국제관계론이 지금은 연구의 주류를 점해 매년 많은 성과물이 나오고 있다." 사실 청나라 역사에서 대해서는 많이 나오고 있고, 이제는 명나라에 대해서도 그런 것 같다.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를 논할 때 중국을 중심으로 한 '화이질서'는 이제 상투적인 단어가 되었"다.

295 이 15년 동안 학계의 추세는 확실히 달라졌다. 당시에 비주류에 속해 있던 근대 이전의 대외교류사와 국제관계론이 지금은 연구의 주류를 점해 매년 많은 성과물이 나오고 있다.


296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를 논할 때 중국을 중심으로 한 '화이질서'는 이제 상투적인 단어가 되었고, 이 구조 속에서 국제질서를 분석하는 작업이 명·청사 분야에서 왕성하게 진행되고 있다.


영락제에 의해서 처음 사용된 단어가 '화이일가'라는 단어가 있다. 이 단어는 당나라 때부터 있었던 것인데 당나라의 건국주체는 중국한족이 아니니까 중국과 일체감을 만들기 위해서 그런 말을 썼다면 이제 한족에 의해서 건국된 나라가 이 말을 썼으면 본격적으로 한족 중심의 제국주의에 대한 이데올로기가 나오게 된 것이다. 그런데 저자가 여기서 하나 지적해 두는 것은 화이일가는 다민족 복합국가인 청나라의 통치이념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말은 사실 영락제가 처음 썼다. 왜그랬느냐. 다민족 복합국가로서 명나라 체제가 완성된 것은 몽골을 여러차례 공격을 했던 그래서 몽골의 조공을 실현한 것이 영락제이다. 명나라에게 가장 직접적인 적은 몽골이었다. 몽골을 어떻게 해결하는가가 사실은 영락제에게도 상당히 심각한 문제였을 것이고, 몽골의 조공을 완성시킨 다음에 '화이일가華夷一家'을 내세우면서 현실 국제정치에서 실현시키려고 했다는 것이 영락제의 업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 말은 청나라에도 그대로 이어져 왔고 옹정제 시대가 되면 화이일가라는 말이 다시 등장하고, 그리고 건륭제 시대에는 중외일가라는 관념이 등장하게 된다. 화이라는 말은 사실은 잘 안쓰게 된다. 왜냐하면 청나라 자체가 만주족이 세운 나라다 보니 자기네가 화가 아니다.

297 이런 가운데 영락제에 의해 처음으로 사용된 것이 '화이일가華夷一家'라는 단어였다. 일반적으로 화이일가는 다민족 복합국가인 청나라의 통치이념으로 알려져 있고 지금도 자주 인용되고 있다.


299 영락제의 위대한 점은 화이일가를 단순히 관념상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현실 국제정치에서 실현시켰다는 데에 있다.


저자는 "옹정제의 화이일가든 건륭제의 중외일가든 모두 그 기원은 영락제가 선언한 화이일가에서 나왔다."라고 말한다. 동아시아 세계에서는 중국이 오랫동안 제국 시스템을 작동시켰는데 그 시스템은 사실 한나라 때부터 시작된 것. 그리고 바로 앞에서 《제국》을 읽었을 때 중국은 영락제 때 정화의 남해 대원정을 했으나 외부로 세력을 확장시키는 것이 자칫 잘못하면 내부에서의 균형을 상실하게 될 위험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금했다 는 정도로 읽었다. 그런데 명나라 이후에도 청나라도 계속 제국 시스템을 유지해왔다. 그것을 깨뜨리자고 나온 것이 일본제국이다. 그런데 일본제국은 미국에 의해서 무너지고 또 그것에 강력한 저항을 했던 것이 또한 중국이다. 이런 것들을 생각해본다면 사실 일본에서도 제국이라는 것을 시도할 때 어디서 모형을 가져왔는지 생각해보면 중화제국을 본뜬 것이다.

302 옹정제의 화이일가든 건륭제의 중외일가든 모두 그 기원은 영락제가 선언한 화이일가에서 나왔다.


영락제는 명나라 초대황제 주원장의 넷째 아들이고 3대 황제에 즉위했다. 그 황위 찬탈 과정에서 만명 정도에 가까운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주원장만큼이나 잔인하고 의심이 많은 성격이었고 화려한 것을 좋아했다. 역자 후기를 보면 "생각해보면 영락제만큼 우리나라와 인연이 깊은 중국 황제가 있을까 싶습니다.", "연왕 시절에는 사자로 명나라를 방문한 왕자 이방원을 만났고, 황제가 되어서는 역시 사자로 온 세자 양녕대군과 대면한 바도 있지요." 또 수양대군은 그를 모범으로 삼아서 조카인 단종을 몰아내고 왕이 되었다 라고도 말한다. 그런 것들이 영락제와 연관된다. 그러나 우리는 목적이 분명하게 전근대 동아시아 질서, 국제관계를 생각하는 측면에서 《영락제》를 읽겠다.

11 대몽골전의 전진기지인 북경을 분봉 받은 한 왕이 수만의 병사를 이끌고 남경을 함락하고 황위를 힘으로 빼앗았다. 그는 젊은 조카 건문제에 과감히 반기를 든 지 4년 만에 전투에서 승리하고 제3대 황제에 즉위했다.


12 그때 1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는데, 치세 기간 동안 10만 명을 피의 제물로 바친 아버지 주원장과 본질은 다를 바 없었다. 잔인하고 의심이 많은 성격 역시 비슷했다. 이렇듯 초기의 명나라는 비할 데 없이 잔혹한 두 황제를 두게 된 것이다.


304 생각해보면 영락제만큼 우리나라와 인연이 깊은 중국 황제가 있을까 싶습니다.


304 연왕 시절에는 사자로 명나라를 방문한 왕자 이방원을 만났고, 황제가 되어서는 역시 사자로 온 세자 양녕대군과 대면한 바도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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