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콧 H. 헨드릭스: 마르틴 루터 ━ 그리스도교 개혁의 기수 l 그리스도교를 만든 3인의 사상가


마르틴 루터 - 10점
스콧 H. 헨드릭스 지음, 전경훈 옮김/뿌리와이파리


머리말

제1장 루터와 종교개혁

제2장 개혁가가 되기까지

제3장 개혁을 위한 노력

제4장 루터의 성경

제5장 새로운 그리스도교

제6장 정치 개혁

제7장 수도사에서 가정적인 남편으로

제8장 천사와 악마

후기


옮긴이의 말

참고문헌과 더 읽을거리

루터 연대표

용어 및 인물 해설

색인






제1장 루터와 종교개혁

22 정치 또는 철학사상가로서 마르틴 루터는 최초의 근대적 인물이라기보다는 최후의 중세적 개혁가였다. 다른 이들이 유럽의 지형을 바꾸는 데 실패했던 곳에서 그의 개혁은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그 자신과 그의 초기 추종자들을 넘어설 만큼 큰 사건이 돼 버린 종교 개혁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루터 또한 중세 로마 가톨릭 교회에 맞선 또 한 명의 불운 한 비판가가 되어, 대단찮은 유산만 남긴 채 신실한 개혁가들의 계보에 오르는데 그쳤을 것이다.


제2장 개혁가가 되기까지

45 나중에 루터에겐 개인의 의견을 주장할 권리가 없다고 하는 공격에 맞설 때 학위를 받고 교수가 되었다는 사실이 최상의 방어책이 되어 주었다. 루터는 공개적으로 선서까지 한 신학 박사로서, 비록 교회의 가르침과 관습에 비판적이더라도 자신이 성경에서 발견한 것들을 가르칠 의무가 있다고 주장했다.


46 루터는 대학에서 토론 주제들을 준비하기도 했다. 98개로 된 한 묶음의 주제들은 자신의 유명론자 스승들과 가브리엘 비엘에게서 배운 스콜라 철학을 비판하는 것이었다. 고위 성직자들을 포함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 신학 토론은 학술적인 것이었으며, 따라서 온건한 것이었다 그러나 두 번째 묶음의 주제들, 곧 마찬가지로 라틴어로 써서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성의 성당 문에 붙였던 주제들은 온건하지 않았다. 그날, 곧 만성절 전날 붙인 것이 사실이라면, 선제후 프리드리히가 소유한 성유물들의 화려한 전시를 보러 왔거나, 연옥 체류를 줄여 줄 대사/면죄부를 얻으려는 희망에 찾아온 군중이 '대사/면죄부의 효력에 관한 95개 논제'를 보았을 것이다.


48 1520년 초, 루터에 대한 심리가 로마에서 재개되었고, 그해 6월 교황의 교서를 통해 루터를 파문한다는 위협이 이어졌다. 하지만 10 월에 루터와 그의 지지자들은 이 교서를 불태워버렸다. 뒤이어 1521년 1월 3일 공식적인 파문이 신속히 이어졌다.


49 외부에서 오는 후원 말고도 마르틴 루터는 그 자신의 삶과 학문에서 두 가지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에 개혁가가 될 수 있었다. 그 깨달음 중 하나는 보름스 제국의회보다 먼저 얻었으며, 다른 하나는 그 뒤 바르트부르크에서 얻었다. 첫 번째 깨달음은 루터가 자신이 죽던 해에야 알리기는 하지만, 종교개혁의 신학적 근거가 됐으며, 보통 루터의 '종교개혁 발견'이라 부른다.


50 나는 하느님의 의로움이란 말을, 의로운 이들이 하느님의 선물에 의해 살았음을 의미한다는 것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이는 수동적인 의로움이며, 이 의로움에 따라 하느님은 신앙을 통해 우리를 의롭게 하신다. 성경에 '믿음으로 의로운 자들은 살리라'(하바쿡 2:4)라고 쓰인 그대로다. 나는 내가 완전히 다시 태어나, 열린 문들을 통해 낙원에 들어 갔다고 느꼈다.


50 여기서 논의되는 신앙이란, 메시아 예수 안에서 이뤄진 하느님의 약속들을 믿는 것이다. 이러한 신앙은 단식, 순례, 성인들에게 바치는 기도, 특별 미사, 중세 신자들이 스스로 의롭게 하거나 하느님께 받아들여지도록 행했던 다른 방법들을 대체하는 것이다.


제3장 개혁을 위한 노력

59 츠빙글리의 관점에서 예수는 자신의 말이 영적이고 비유적으로 이해되길 의도한 것이었다. 빵과 포도주는 다만 인류를 구원하고자 십자가 위에 바친 그의 몸과 피를 함의할 뿐이었다. 성사는 십자가와 영적인 합일을 이루지만, 그리스도를 물질적으로 신비롭게 영하는 것은 아니며 어떠한 구원도 영성체를 통해 나뉘어 주어지지 않는다.


59 1529년 마르부르크에서 딱 한 번 만난 츠빙글리와 루터는 이 사안에 대해 어떠한 합의점도 찾을 수 없었으며, 둘 사이의 균열은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 안에서 개혁교회와 루터교 사이의 영구적 분열로 이어졌다.


59 재세례파는 1525년 취리히에서 개혁 속도를 두고 의견이 엇갈려 츠빙글리와 결별했다. 비판하는 사람들이 보기에 츠빙글리는 너무 조심스러웠으며, 급진적인 추종자들이 비성경적이라 여긴 유아세례야말로 교회를 시청과 비슷하게 만들고 그 관리들에게 종속되도록 하는 주범이었다. 1528년 루터는 신자들의 재세례에 반대한다고 발표했으며 유아 세례를 종교개혁 이전의 그리스도교에 있었던 훌륭한 특징이라 칭송했다.


60 루터에게 결정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그가 복음이라고 부른 그리스도교의 정수였다.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며 그 믿음은 성령의 선물이지, 인간이 중립적인 의지에 따라 자유롭게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루터에겐 중립적인 의지란 존재하지 않았다.


60 루터가 가톨릭의 반대 세력들과 사적인 미사, 성지 순례, 단식, 대사/면죄부, 수도서원, 성직자의 독신, 자선 행위, 성인들에게 바치는 기도 등을 두고 벌이는 논쟁의 이면에도 같은 생각이 깔려 있었다. 이런 행위들은 인간의 자유의지로 하느님을 기쁘게 해, 믿음만 있는 것보다 더욱 쉽게 구원을 얻도록 해주며, 신앙에 대한 보충물 또는 선행이라 홍보되었다. 루터와 그의 동료들은 이러한 행위들을 폐기하거나 수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으나, 또한 신자들이 그들의 신앙을 보살피고 표현할 수 있는 방법들을 새로이 제시해야 했다.


61 루터가 독일과 스위스의 개혁가들에게 애써 얻은 신앙성명서는 카를 5세에게 거부당했다. 비텐베르크의 개혁가들과 그 동맹들이 제출한 이 성명서는 28개 조항으로 이뤄져 있었으며 보통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이라 부르는데, 당시 확장하는 자신들의 종교개혁운동을 로마가톨릭 교회와 또 취리히와 제네바에서 등장하고 있는 프로테스탄트 개혁교회와 구분하고자 '루터교'라는 이름을 점차적으로 쓰기 시작한 교회들은 이를 설립 기초 문서로 삼았다.


제4장 루터의 성경

78 '루터의 성경'이란 표현은 또한 그가 성경을 해석하고 성경의 권위를 바라본 방식을 이해하는 것과도 관련 있다. 루터는 한 구절에서 여러 층위의 의미를 추출해내는 중세적 도식을 물려 받았으나 이를 고수하지만은 않았다. 때에 따라 그는 유비적 설명을 차용하기도 했으나, 대체로 축자적 해석이나 영성적 해석 사이에서 맴 돌았다. 후자의 해석은 그가 신약 성경의 저자들처럼 히브리어 성경의 구절들이 메시아 예수를 가리키고 있다고 주장할 때 아주 명확히 드러난다.


80 그의 성경 해석에 시금석이 된 것은 복음이었다. 그는 복음을 '가장 간단하게' 정의하자면,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우리를 위하여 인간이 되셔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셔서, 만물 위에 주님으로 좌정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담론'이라고 했다. 복음은 '성경에 있는 우리의 안내자이자 교사'였으며, 루터는 신구약 양쪽에 들어있는 책들의 유용성에 등급을 매기는 데 이를 사용했다.


82 '오직 성경'이라는 문구는 성경이 초기 신학자들의 의견과 교회법의 규칙들, 공의회와 교황에게서 나온 교령들보다 우위에 있다는 진술을 두고 교황 세력과 논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생겨났다.


83 성경의 권위와 동등한 중요성을 지니고 있던 것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원칙이었다. 루터는 1520년에 쓴 동명의 에세이와 1522년 비텐베르크에서 한 설교에서 간결한 능변으로 이에 대해 설명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말고는 어떤 것도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으며 신자들에게 강제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85 다른 프로테스탄트들에게는 성경이 그 자체로 최고의 권위를 지녔을지도 모르지만 루터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성경이 권위를 지니는 것은 약속과 구원에 대한 성경 속이야 기들이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정의하고 강조하기 때문이었다.


86 일반에 알려진 이야기와는 반대로, 루터는 고립된 개인이 어떤 방식이든 자신이 원하는대로 성경을 해석해 교회와 사회의 다른 이들에게 그 해석을 강요할 수도 있다고 믿지 않았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사람들이 각자 성경을 사서 교회 없이도 충분히 하느님 말씀의 독립된 출처로 이용할 수 있게 되기 이전이었다. 마침내 인쇄기가 등장하고, 루터 및 다른 개혁가들의 성경 번역본들이 출간되면서 그러한 시나리오가 현실이 되었지만, 정작 루터 자신은 그러한 시나리오를 상상조차하지 못했다. 그는 교회에서 성경을 차단하는 것을 두고 다음과 같이 직접적으로 반박했다. "천년 동안 예언자들과 함께 교회를 통치한 사람이 아닌 한, 어느 누구도 성경을 충분히 맛보았다고 여길 수 없다. 우리는 가난뱅이들이다. 그것이 사실이다."


제5장 새로운 그리스도교

90 루터에게는 새로운 교회를 창설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다. 개혁가가 되기로 명확히 결정한 뒤에, 그의 의제는 잃어버린 정통 그리스도교를 회복하는 것에 맞춰졌다. 그렇긴 하지만 루터의 의제에는 신심 행위나 관례에서 사제들이나 평신도들이 저항할 만큼 충분히 혁명적인 변화들이 담겨 있었다. 프로테스탄트가 된 사람들로서는 새로운 그리스도교를 실천하게 된 셈이었는데, 그것이 그들의 조상들이 실천한 종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93 새로운 그리스도교에서 '오직 믿음'이란 하느님이 신자들을 받아들이시는 것은 오직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이지. 그들의 믿음을 보충하고 그 믿음이 효과를 낼 수 있도록 하는 공로를 쌓고자, '선행'을 베풀기 때문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럼에도 신자들에게는 선행이 기대되는데, 참된 믿음에는 언제나 유익한 행위가 따르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독일어 성경의 로마서 머리말에서 루터는 믿음이란 해야 하는지 아닌지를 물어보지 않고도 끊임없이 일하는 '살아 있는, 바쁜, 활동적인, 힘있는 하나의 실체'라고 썼다.


94 '여러분들은 선행이 아니라 오직 믿음에 의해서 구원받습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여러분은 선행을 하고 있어야만 합니다. 선행이 구원을 가져다 주지는 않지만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데는 필수적입니다.' 이것이 그 첫 번째 미묘한 의미다. 선행은 필수적이지만, 구원에 필수적이지는 않다.


97 그의 정의에 따르면 성사란 성경에서 지시된 것이어야 하며, 성사가 집행될 때는 영적인 약속과 함께 분명하게 보고 들을 수 있는 물질적 요소도 모두 주어져야 한다. 루터에게는 세례와 성만찬만이 명백하게 이 조건에 들어 맞았다. 세례에서는 물을 붓고, 성만찬에서는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신다. 그러나 고백과 사죄에는 그 어떤 물질적 요소도 없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속죄는 성사로 여겨지지 않게 되었다.


제6장 정치 개혁

107 카를 5세는 1521년 루터에 대한 추방령을 내렸으나, 오스만튀르크의 위협에서 독일을 지켜 내려면 프로테스탄트 지역의 도시들과 제후들의 지원이 필요했기 때문에 자신의 제국 안에 종교의 일치를 회복하고자 했으며, 그렇게 하는 동안에 살아남은 프로테스탄트 운동을 결국에는 번성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루터는 이러한 정치 드라마 안에서 실질적이고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1529년 이후에는 자신이 사건들의 흐름을 조정하기보다는 그 흐름을 따라 쓸려가는 일이 더 잦았다.


제7장 수도사에서 가정적인 남편으로

126 개혁가들에 따르면, 성직자의 결혼은 그들의 개혁을 뒷받침하는 중심 메시지 곧 그리스도의의 자유에 대한 증언을 공개적으로 실증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정말로 그것을 실증해 보여 주었다.


136 루터는 결혼, 정부, 교회라는 사회 영역들을 '참된 그리스도인의 질서들'이라 불렀는데, 그 이유는 그가 결혼을 그리스도인만의 것이라 생각하지 않고 어느 누구에게든 결혼하고 국가의 직무를 맡고 공공의 예배를 드리는 것이, 독신 생활을 하고 공직을 거부하고 선택된 수도자 집단 안에서 은둔하는 것보다 낫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제8장 천사와 악마

143 그에게 종교개혁이 역사의 분수령이 되었던 까닭은, 오랫동안 교황의 통치 아래 감금되어 있던 서구 그리스도교 세계를 종교개혁으로 해방시킴으로써 새로운 시대를 열었 기 때문이다. 그는 1520년 이후 줄곧 서구 교회가 로마에 있는 교황에게서 해방되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이제 교회의 개념은 루터에 의해 '참된 믿음과 소망과 사랑' 안에 살아가는 신자들을 망라하는 것으로 확장되었다.


148 소규모 유대인 공동체들을 향한 대중의 적대감은 중세 후기에 더욱 심해졌다. 유대인들은 성체를 훼손하고 그리스도인 아이들을 살해했다는 기이한 죄목으로 고발당해 대부분의 서유럽 국가에서 추방되었다.


148 1523년 루터가 말했듯 많은 유대 민족이 개종해 '그들 자신의 참된 신앙'으로 돌아오리라는 비현실적 희망을 품었다. 시편에 대한 초기 강의에서 루터는 아브라함과 다윗 같이 하느님의 약속을 믿었던 뛰어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모범이라고 주장했으며, 최초의 유대인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을 '충실한 회당'이라 칭찬했다. 그러나 루터의 선배들은 유대인들을 이단 및 악한들과 한데 묶어서 취급했고 루터는 유대인들을 개종시키려는 노력을 포기한 뒤로 이와 비슷한 연결 고리를 만들었다.


150 나치 정부가 유대인들(과 다른 이들)을 600만 명이나 살해하는 동안 많은 독일 그리스도인들이 침묵하고 있었으며, 나치 선전원들이 루터의 저술들을 이용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다른 독일 그리스도인들(가톨릭, 개혁과 루터교), 특히 고백 교회와 같은 이들은 그렇게 항거하다 살해당하고, 옥에 갇히거나 추방당했다.


후기

166 이들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은 평신도들이 좋아하든 싫어하든 그들의 일상 생활을 바꿔 놓았다. 성인들은 그들에게서 멀리 치워져 버렸고, 기적이 일어나길 바라며 핀란드에서 에스파냐까지 대륙을 가로 질러 행하던 성지 순례 또한 억제되었다. 장관을 이루던 라틴어 미사는 설교 중심의 예배로 바뀌어,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은 눈보다 귀로 집중해야 했다. 평신도들은 지역 언어로 성가를 불렀으며, 성찬례가 거행될 때는 빵만 아니라 여러 세기 동안 그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던 포도주도 함께 영했다. 새로운 인쇄술 덕분에 문맹률이 낮아졌으며, 역사상 처음으로 다수의 사람들이 성경을 소유해, 집에서 읽고 여행 길에도 가지고 다닐 수 있게 되었다. 가톨릭 신자들은 감추고 살든 드러내 놓고 살든 모든 나라에서 삶을 이어가긴 했지만, 프로테스탄트들은 중세의 교황이 견제하고자 했던 지역적이고 국가적인 세력들을 강화해 나갔다. 종교개혁은 프로테스탄트 세속 권력자들에게도 매우 요긴했다. 이들은 신민들에 대한 통제를 단단히 조이는 데 종교개혁을 이용했다.


옮긴이의 말

171 루터는 종교란 개인적인 도덕이 아니라 믿음과 정의에 관한 것이며, 구원을 받기에 충분하게끔 자기자신을 선하게 만드는 일이 아니라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본래 의도에 맞게 다른 이들의 삶을 개선하는 일에 관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171 루터의 유산 중 가장 훌륭 한 부분은 근본주의를 멀리한 것과 종교란 다만 신들을 달래어 그들의 호의를 얻는 수단이 아니라 이 세상과 세상에 필요한 것들을 이기적인 욕망들보다 우위에 둘 것을 항시 상기시켜주는 것이라 주장한 점이다.


173 그는 바오로를 다시 발견하고 아우구스티누스를 독자적으로 계승하면서 의례보다는 믿음을 강조함으로써 억압적인 지배 종교가 되어버린 중세의 로마가톨릭 교회에서 개인을 해방시켰다. 이제 각 개인은 누군가의 중재 없이도 스스로 신을 대면할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굉장히 근대적인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는 오직 믿음을 강조함으로써 오히려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서 유지되었던 이성적 사유를 억압하고 오직 은총을 강조함으로써 인간의 의지가 지닌 함의를 축소시켰으며, '오직 성경 '을 강조함으로써 성경을 축자적으로 해석하는 근본주의적 성향의 여지를 남겨 두었다. 그런 면에서 그는 개혁가였지만 오히려 보수적이었고 전근대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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