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다보면 | 06 허먼 멜빌의 모비딕 4


모비 딕 - 10점
허먼 멜빌 지음, 김석희 옮김/작가정신


2017년 11월 4일부터 CBS 라디오 프로그램인 변상욱의 이야기쇼 2부에서 진행되는 "강유원의 책을 읽다보면"을 듣고 정리한다. 변상욱 대기자님과 강유원 선생님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팟캐스트 주소: http://www.podbbang.com/ch/11631




20180317_20 허먼 멜빌의 모비딕 4


허먼 멜빌의 《모비딕》을 읽어나가고 있다. 지난 시간은 경계를 떠돌고 있던 이슈메일, 자기의 목표를 향해가는 에이해브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

에이해브는 구약성서 열왕기에 나오는 아합 왕을 따와서 설정된 주인공이다. 아합의 모티브를 전제하고 이해한다 해도 이슈메일과는 다르게 아주 적극적으로 신을 떠난 자이다. 신을 떠난 이교도이다. 이슈메일은 적어도 유일신 하나님까지는 아니어도 가끔은 튀케 여신을 생각하기도 한다. 그런데 허멘 멜빌이 이 작품을 내놓을 당시에 미합중국의 복음중심주의적인 시대를 생각해보면 아주 적극적으로 신을 떠난 이교도를 내놓는다는 것은 모험이다.


사실은 청교도들이 아메리카에 건너가서 허먼 멜빌의 시대를 한 참 지나고서도 마녀사냥을 벌이기도 한다. 엄격한 신앙에 입각해서 사람을 판단하고 처리하는 사회였다.

적어도 아메리카 대륙에서 청교도들이 그래도 계몽주의적인 행태를 보이기 시작한 것은 1차세계대전이 끝난 다음이다. 그 전에는 자기네들이 지상낙원을 찾아간 것처럼, 순결에 대한 성급함, 자기들의 확신이 있었다. 에이해브를 보면 소설가로서는 모험을 걸어본 셈이다. 에이해브 선장의 공격적인 성향은, 다시말해서 이슈메일은 '나는 이런 것은 진리라고 생각해'라는 것을 적극적으로 표현하지 않는 것에 비하면 에이해브는 아주 뚜렷하게 그리고 멜빌이 작품 안에서 에이해브는 뚜렷하게 이교도라는 것을 보여준다. 에이해브는 위엄있는 사람이고, 신을 믿지 않는, 오히려 자기가 신같은 사람이다. 기독교의 세계에서 떠나있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문제는 고래를 잡으러 간다. 고래는 그 사람에게 무엇인가.

41장을 보면 "신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백발노인, 증오심에 가득 차서 욥의 고래를 찾아 세상을 돌아다니는 노인"이라고 되어있다. 욥의 고래는 야훼 하나님의 고래이다. 기독교 세계에서는 낯선 사람인데 그가 욥의 고래를 찾아 다니니까, 욥의 고래는 신의 작품이다, 그래서 낯선 사람임을 넘어서서 신의 작품을 죽이려는 사람이니까 아주 극악무도한 이교도이다. 문제는 욥의 고래를 모비딕으로 형상화했기 때문에 모비딕이 무엇인지, 에이해브가 절멸시키려고 하는 모비딕은 무엇인가가 그 다음 얘기가 되겠다.


245 신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백발노인, 증오심에 가득차서 욥의 고래를 찾아 세상을 돌아다니는 노인이 있었고, 그의 부하 선원들은 주로 더러운 배반자와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 그리고 식인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모비딕은 세상의 모든 불행과 고통과 절망들이 모두 뭉쳐져 있는 하나의 어떤 실체인가.

그렇다. 41장을 보면 바로 나온다. "사람을 가장 미치게 하고 괴롭히는 모든 것, 가라앉는 앙금을 휘젓는 모든 것, 악의를 내포하고 있는 모든 진실, 체력을 떨어뜨리고 뇌를 굳게 하는 모든 것, 생명과 사상에 작용하는 모든 악마성 ━ 이 모든 악이 미쳐버린 에이해브에게는 모비딕이라는 형태로 가시화되었고, 그리하여 실제로 공격할 수 있는 상대가 되었다." 가시화되어 있는 실체로 등장하는 모득 악과 혼란의 총체로서의 모비딕. 불가사의한 힘이기도 하고, 우리가 알지 못하지만 절대적인 위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을 향해서 돌진하는 자는 인간으로서는 최전선에 서있는 사람이고, 그러니까 모디빅에 대한 에이해브의 증오는 개인의 복수 감정이 아니겠다. 소설 상으로는 고래 잡다가 다리를 잃었으니 복수를 하러가는 것인데 어떻게 보면 인간을 대표해서 신에게서 벗어나고자 하는 인간 실존의 절박한 시도이다. "한 뼘 길이의 칼날로 한 길 깊이에 있는 고래의 생명에 닿으려고 애썼다." 에이해브의 시도의 위대함을 드러내 보여주기 위해서 멜빌이 굉장히 노력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41장을 충실히 읽어보면 그런 대비들이 뚜렷하다.  


241 한 뼘 길이의 칼날로 한 길 깊이에 있는 고래의 생명에 닿으려고 애썼다. 그 선장이 바로 에이해브였다.


242 사람을 가장 미치게 하고 괴롭히는 모든 것, 가라앉는 앙금을 휘젓는 모든 것, 악의를 내포하고 있는 모든 진실, 체력을 떨어뜨리고 뇌를 굳게 하는 모든 것, 생명과 사상에 작용하는 모든 악마성 ━ 이 모든 악이 미쳐버린 에이해브에게는 모비딕이라는 형태로 가시화되었고, 그리하여 실제로 공격할 수 있는 상대가 되었다.


"에이해브는 아담 이후 지금까지 모든 인류가 느낀 분노와 증오의 총량을 그 고래의 하얀 혹 위에 쌓아 올려, 마치 자기의 가슴이 대포라도 되는 것처럼 마음 속에서 뜨거워진 포탄을 그곳에다 겨누고 폭발시켰던 것이다." 그러면 에이해브는 기본적으로 증오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일텐데 그런 증오심을 가지고 있다 해도 아담 이후의 모든 증오심을 떠안았다고 해도 끊임없이 욥의 고래를 쫓아다니면서 죽인다 해도 에이해브는 욥의 고래를 죽인다 해도 증오심을 완전히 해소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242 에이해브는 아담 이후 지금까지 모든 인류가 느낀 분노와 증오의 총량을 그 고래의 하얀 혹 위에 쌓아 올려, 마치 자기의 가슴이 대포라도 되는 것처럼 마음 속에서 뜨거워진 포탄을 그곳에다 겨누고 폭발시켰던 것이다.


그래서 에이해브 같은 사람은 이슈메일 같은 사람을 철저하게 경멸한다. 한발 물러서서 계속 관조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 자유에 의한 결단인가, 과감하게 자기를 던져서 실존 속에서 자기를 결단해야 하지 않는가. 내가 한번 찌른다고 하는 것이 인류 총체의 문제에서 0.01도 덜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한 번 찌르는 것이 진리이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것이 샤르트르의 말이 그래서 나온 것이다. 진리라는 것은 내가 모비딕을 칼로 찌르는 순간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에이해브가 굉장히 강력하게 신에게 반발하고 있는 것 같지만 114장을 보면 에이해브가 어떤 독백을 한다. 그런 독백을 보면 에이해브의 니힐리즘, 실존의 고투 이후의 니힐리즘을 보여준다. 처음 멜빌의 작품이 발견되었을 때는 독백의 부분이 인용부호가 없이 써있었다. 그러면 이슈메일의 이야기가 된다. 화자가 이슈메일이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이슈메일은 니힐리즘을 보여줄 수 있으니 이해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원래 인용부호가 있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갑자기 에이해브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이 바뀌었다. 에이해브는 저돌적이고, 고래를 죽이려고 하는 성격이었는데, 갑자기 복합적인 인물로 재탄생하게 된다. 그래서 이 대목부터 에이해브의 매력을 증폭시키는 부분이다. 그 구절은 굉장히 긴데 일부만 보면 "하느님, 이 축복받은 평온이 오래 지속되게 해주옵소서. 하지만 뒤섞이고 뒤엉킨 삶의 실오라기는 날줄과 씨줄로 엮이고, 평온한 날씨는 반드시 폭풍과 교차한다. 우리의 삶에도 온 길로 되돌아가지 않는 한결같은 전진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정해전 단계를 거쳐 나아가다가 마지막 단계에서 멈추는 것도 아니다. 즉 유년기의 무의식적인 도취, 소년시절의 맹신, 청춘시절의 의심 (모든 사람에 게 공통된 운명), 이어서 회의, 그다음에는 불신의 단계를 거쳐 마침내 '만약에'를 심사숙고하는 성년기의 평정 단계에서 정지하는 것은 아니다. 일단 그 단계를 다 거치고 나면 우리는 다시 첫 단계로 돌아가서 유아기와 소년기를 거쳐 어른이 되어 '만약에'를 영원히 되풀이하는 것이다. 우리가 더 이상 닻을 올리지 않을 마지막 항구는 어디에 있는가?"


585 "아아, 풀이 우거진 숲 속의 빈터여! 아아, 영혼 속에 끝없이 펼쳐진 봄날 풍경이여. 그대 안에서 ━ 지상 생활의 지독한 가물에 시달려 이미 오래 전에 바짝 말라버렸지만 그대 안에서 사람들은 이른 아침에 클로버 밭에서 뒹구는 망아지들처럼 뒹굴 수 있고, 덧없이 지나가는 몇 분 동안이나마 영원한 생명을 주는 차가운 이슬을 몸에 느낄 것이다. 하느님, 이 축복받은 평온이 오래 지속되게 해주옵소서. 하지만 뒤섞이고 뒤엉킨 삶의 실오라기는 날줄과 씨줄로 엮이고, 평온한 날씨는 반드시 폭풍과 교차한다. 우리의 삶에도 온 길로 되돌아가지 않는 한결같은 전진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정해진 단계를 거쳐 나아가다가 마지막 단계에서 멈추는 것도 아니다. 즉 유년기의 무의식적인 도취, 소년시절의 맹신, 청춘시절의 의심 (모든 사람에 게 공통된 운명), 이어서 회의, 그다음에는 불신의 단계를 거쳐 마침내 '만약에'를 심사숙고하는 성년기의 평정 단계에서 정지하는 것은 아니다. 일단 그 단계를 다 거치고 나면 우리는 다시 첫 단계로 돌아가서 유아기와 소년기를 거쳐 어른이 되어 '만약에'를 영원히 되풀이하는 것이다. 우리가 더 이상 닻을 올리지 않을 마지막 항구는 어디에 있는가? 아무리 지친 사람도 싫증내지 않을 세계는 어떤 황홀한 창공을 항해하고 있는가? 버려진 아이의 아버지는 어디에 숨어 있는가? 우리의 영혼은 아이를 낳다가 숨진 미혼모가 남긴 고아와도 같다. 아버지가 누구인가 하는 비밀은 어머니의 무덤 속에 있으니, 그것을 알려면 무덤으로 가야한다."


그러니까 이 구절이 원래 이슈메일이 한 얘기다라고 하면 아무런 감흥이 없이 읽을 수 있다. 그런데 갑자기 에이해브가 한 말로 되니 한결같은 전진은 존재하지 않는다, 유아기와 소년기를 거쳐 어른이 되었다, 훌륭한 사람이 된 것도 아니고 진리를 터득한 것도 아니고, 항구를 맨날 찾으러 다녔는데 또 항구를 찾아서 떠나야 한다고 하는 고통, 이것이 에이해브의 니힐리즘이다. 인생이 무엇인지 물었을 때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대답하는 것은 니힐리즘이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라는 것도 답이다. 그러니까 니힐리즘이라는 것은 ‘그것을 왜 물어봐? 그것은 지금 대답할 수 없어’라고 하는 것이 니힐리즘이다. 아무 것도 아니다 라고 말하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닌 이라는 이름을 가진 항구를 찾은 것이다. 


유명한 신학자 슐라이어마허는 석학이 된 다음에도 서명을 할 때에는 항상 신학생 슐라이어마허라고 썼다고 한다. 신학생이라는 것이 사실 '아무것도 아닌'이라는 맥락일 것이다. 그래서 에이해브는 아직 닻을 내릴 항구를 찾지 못했다고 하는 것은 my name is nobody도 아닌 상태이다. 그래서 마지막에 135장에서 스타벅에게 "어떤 자는 썰물에도 죽는다. 어떤 자는 얕은 물에도 빠져 죽고, 어떤 자는 홍수에도 죽는다. 나는 지금 가장 높은 물마루에 도달한 파도 같은 기분일세." 이렇게 말할 때 가장 높은 물마루에 올라서 인생이 성취되었다고 말하기 보다는 높은 곳에 오르면 파도는 곧 사그러들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지금 내가 실존에서 가장 절정에 이르렀다고 느낀 순간 나는 죽고싶다는 것이다. 실존의 절정에서 죽었기 때문에 패배한 것이 아니다.


672 "내 영혼의 배는 세 번째로 향해를 떠난다네, 스타벅."

"예, 선장님은 그걸 원하시겠지요."

"어떤 배는 항구를 떠난 뒤 영영 행방불명이 된다네, 스타벅."

"그건 사실입니다, 선장님.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요."

"어떤 자는 썰물에도 죽는다. 어떤 자는 얕은 물에도 빠져 죽고, 어떤 자는 홍수에도 죽는다. 나는 지금 가장 높은 물마루에 도달한 파도 같은 기분일세. 스타벅, 나는 이제 늙었네. 자, 악수하세."

그들은 손을 맞잡고 서로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스타벅의 눈물은 끈적끈적한 아교 같았다.


패배한 것이 아니라 절정에 이르렀던 것뿐이다. 41장에서 극악한 품성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여주다가 114장에서의 독백을 읽은 후 135장에 있는 스타벅에게 말을 읽으면 에이해브를 다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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