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나드 마넹: 선거는 민주적인가 ━ 현대 대의 민주주의의 원칙에 대한 비판적 고찰

 

선거는 민주적인가 - 10점
버나드 마넹 지음, 곽준혁 옮김/후마니타스

서론

1장 직접 민주주의와 대표성
2장 선거제도의 승리
3장 탁월성의 원칙
4장 민주주의적 귀족정
5장 인민의 평결
6장 대의 정부의 변형들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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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현대의 민주주의 정부는 그 설립자들이 민주주의와는 대립되는 것으로 이해했던 정치 체제로부터 발전했다. 최근에는 동일한 정부 유형의 다양한 형태로 '대의 민주주의' 와 '직접 민주주의' 를 구분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대의 민주주의' 라고 부르는 정부 형태는 애초에는 민주주의의 한 형태 혹은 인민에 의한 정부로 간주되지 않았던 제도(영국, 미국, 프랑스 혁명의 결과로 만들어진 제도)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정치적 대의제에 대한 루소의 단호한 비판은 지금까지도 잘 알려져 있는데, 그는 18세기 영국 정부를 자유라는 짧은 순간에 일시 중단되는 일종의 노예제로 묘사했다. 또한 루소는 스스로 법을 만드는 자유로운 인민과, 자신을 대신하여 법을 만들어 줄 대표를 선출하는 인민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고 보았다. 비록 루소와는 정반대의 선택을 했지만, 대의 정치의 지지자들 역시 그들이 '대의정' 또는 '공화정'이라고 부르며 옹호하던 정치 체제와 민주정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라고 보았다. 한편 근대 '정치적 대의제'를 확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두 인물인 매디슨과 시에예스 역시 비슷한 표현들로 대의정과 민주정을 대비시켜 이야기했다. 이 두 사람에게서 이러한 유사성이 발견되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

매디슨은 "소수의 시민들이 모여 직접 정부를 운영하는" 고대 도시 국가의 민주정과 대표성에 기초한 근대의 공화정을 대립시키곤 했다. 실제로 매디슨은 이 두 정치체제의 대조적인성격을 매우 강하게 부각시켰다. 그에 따르면, 대의제가 고대 공화정에서 완전히 생소했던 것은 아니며, 고대 공화국의 민회가 정부의 모든 기능을 수행했던 것도 아니다. 일정한 직무, 특히 행정적인 업무는 행정관에게 위임되었고, 이 행정관들과 함께, 민회가 정부의 한 기관이었다는 것이다. 매디슨에 따르면, 고대 민주정과 근대 공화정의 진정한 차이는 "고대 민주 정부에서 통치로부터 인 민의 대표가 완전히 배제되었던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근대 공화주의 정부에서 집단으로서 인민의 참여가 완전히 배제된다"는 데 있다. […]

매디슨은 대의 정부를, 광대한 국가에서 시민들을 한 데 모으는 것이 불가능해짐에 따라 기술적인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인민에 의한 정부의 유사형태로 보지 않았다. 반대로 그는 대의 정부를 고대 민주정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보다 우수한 정치 체제라고 생각했다. 그는 대의 정부에서는 "선택된 시민 집단이라는 매개를 거치면서 대중의 견해가 정제되고 확대되는 효과를 가진다. 선출된 집단의 현명함은 나라의 진정한 이익을 가장 잘 분별할 수 있을 것이며, 그들의 애국심과 정의에 대한 사랑은 일시적이고 부분적인 이해관계 때문에 나라의 진정한 이익을 희생시키지 않을 것이다"라고 보았다. […]

여기서 대의 정부 창시자들의 제도적 선택에 대해 단 한 번도 이의가 제기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물론, 대의 정부는 지난 200년 동안 지속적으로 변화해 왔으며, 그 중에서도 선거권의 점진적 확대와 보통 선거의 확립은 가장 현저한 변화였다. 하지만 대표가 선출되고 공공 결정이 만들어지는 방식을 관리하는 제도들은 변하지 않았나 이러한 제도들은 오늘날 대의 민주주의라고 불리는 정치 체제에서도 여전히 시행되고 있다. […]

전통적으로 아테네 정체를 묘사할 때 사용되었던 민주정이라는 단어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동일한 역사적 대상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 이렇듯 구체적이고 일반적인 경우 외에도 민주정에 대한 근대적 의미와 18세기적 의미는 시민들 사이의 정치적 평등과 인민의 권력이라는 개념을 공유하고 있다. 오늘날 이 개념들은 민주주의적 이상의 요소이며, 1세기에도 역시 그러했다. 따라서 좀 더 상세하게 말하자면, 문제는 대의 정부의 원칙들이 어떻게 이러한 민주주의적 이상의 요소들과 연관되었는지 살펴보는 것이라고 하겠다.
[…]

18세기에 나타난 인식과의 대비가 보여주듯,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용어의 불확실성과 빈약함은 무엇 때문에 대의 정부와 민주주의가 유사한 것인지, 또한 어떠한 이유로 대의 정부가 민주주의와 구별되는지를 우리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대의제도는 우리에게 매우 익숙하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수수께끼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의 목적은 정치적 대표성의 궁극적인 본질이나 의미를 파악하려는 것이 아니다. 단지 두 세기 이전에 만들어진 일련의 제도적 장치의 불분명한 특성과 효과를 조명해 보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우리는 "대표"와 관련된 형태의 제도를 가지는 정부에 대해 언급할 것이다. 그렇지만, 궁극적으로 "대표성"은 그렇게 중요한 용어가 아니다. 이 책에서는, 그것을 뭐라고 부르든지 간에, 각 요소들과 제도적 장치들의 조합 결과에 대해 분석할 것이다.

대의제가 만들어진 이래 아래의 네 가지 원칙은 늘 변함이 없었다.
1. 일정한 시간적 간격을 두고 선거를 통해 통치할 사람을 임명한다.
2. 통치하는 사람의 정책 결정은 유권자들의 요구로부터 일정 정도 독립성을 가진다.
3. 피통치자들은 통치자들의 통제에 종속되지 않고, 그들의 의사와 정치적 요구들을 표현할 수 있다.
4. 공공 결정은 토론을 거친다.

대의 정부의 핵심 제도는 선거이다. 그리고 이 책의 많은 부분이 선거에 할애될 것이다. 아울러 우리는 통치자들이 추구하는 정책과 공공 결정의 내용을 구체화하는 원칙들을 분석할 것이다. 마지막 장에서는 대의 정부가 처음 고안되었던 시점부터 지금까지 대의 정부의 원칙에 의해 만들어진 다양한 정부 형태를 살펴볼 것이다.


결론

이 책을 시작할 때 언급했듯이, 대의 정부는 복잡한 현상이다. 비록 일상 생활에서 항상 접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대의 정부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말이다. 민주정과는 정반대인 것으로 이해되었던 대의정부는 오늘날 민주정의 한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보통 선거권이 시민집단으로 실질적으로 확장된 18세기에 비해 오늘날의 "인민" the people은 분명히 훨씬 더 큰 실체이다. 반면, 대표의 선출과, 선출된 대표의 결정에 대한 대중적 의지의 영향을 조절하는 제도에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지배 엘리트와 평범한 시민 사이의 간극이 좁혀졌는지, 아니면 유권자가 그들의 대표에 대해 갖는 통제권이 증대되었는지조차 불확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거리낌 없이 오늘날의 대의 체제를 민주주의 정체로 분류한다. 이와는 달리, 미국 헌법의 제정자들은 대의정부와 인민에 의한 통치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고 강조했다. 따라서 하나의 역설이 남게 된다. 즉 어떠한 현격한 변화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원래는 비민주적이라고 이해되었던 대표와 그들이 대표하는 사람 간의 관계가, 오늘날에는 민주적인 것으로 인식된다는 점이다. […]

대의 정부의 수수께끼에 대한 해답은 바로 대의 정부가 하나의 균형 체제라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대의 정부의 원칙들은 민주적 그리고 비민주적 부분을 혼합한 하나의 복잡한 절차를 구성한다.

첫째, 공약을 법적으로 속박하는 구속적 위임, 그리고 임의적 해임의 부재는 대표에게 어느 정도의 독립성을 부여한다. 그러한 독립성은, 설령 간접 지배라고 하더라도, 대의제를 인민의 지배로부터 구분한다. 역으로 정치적 의견을 표현할 수 있는 자유는 선출된 대표가 그들이 대표하는 사람을 완전히 대체하지 못하도록 하며, 대표가 정치적 영역에서의 유일한 행위자가 되지 않도록 한다. 인민은 언제든지 자신의 존재를 대표에게 일깨워 줄 수 있다. 왜냐하면 정부의 집무실이 인민들의 외침으로부터 격리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론의 자유는 대표의 비민주적 독립성에 민주적 평형추를 제공한다.

둘째, 선출된 대표는 유권자에게 한 약속에 구속되지 않는다. 비록 사람들이 후보가 제시한 정책을 선호했기 때문에 그 후보에게 투표했다 하더라도, 그들의 의지는 단지 희망 사항일 뿐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근대 대표의 선출은 앙시앵 레짐 하에서 소집된 삼부회에서의 대표 선출과 큰 차이가 없다. 한편, 대표들은 재선의 대상이기 때문에 평기를 받게 될 것이고, 그때에는 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대표들은 선거 날, 유권자가 자신의 과거 행적을 평결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따라서, 신중한 사람이라면 바로 지금 인민 재판의 날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알 것이다. 유권자가 미래에 대해 갖는 의지는 소망에 불과하지만, 현직자의 업무 수행에 만족하지 못했을 때, 유권자의 평결은 최종 명령이다. 매 선거마다 유권자는 다음 두 가지, 즉 미래에 원하는 것과, 과거에 대한 평가에 근거해서 마음을 정한다. 따라서 여기에 민주적 그리고 비민주적 요소들이 하나의 단일한 행동으로 혼합된다.

선거에 의한 대표의 임명은, 보통 선거권과 대표 자격 조건의 부재와 더불어, 민주적 요소와 비민주적 요소를 더욱 밀접하게 결합시킨다. 만약 시민들이 잠재적인 공직 후보로 간주된다면, 선거는 불평등한 방법이다. 왜냐하면 추첨과는 달리 선거는 공직을 희망하는 모든 사람에게 동등한 기회를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동료 시민이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여기는, 뛰어난 사람에게만 공직을 제한한다는 점에서, 선거는 심지어 귀족주의적이거나 과두제적인 절차이기도 하다. 게다가 선거 절차는 정부에 있는 사람들이 반드시 평범한 사람이어야 하며, 특성과 삶의 방식, 그리고 사람들과 거의 같아야 한다는 민주주의적 관심에 있어 그들이 대표하는 열망을 방해한다. 그러나 만약 시민들이 더 이상 선거를 통한 선택의 잠재적 대상이 아니라 선택하는 사람들로 간주될 때, 선거의 다른 측면이 나타난다. 

여기에서 선거는 민주주의적 모습을 띠게 된다. 즉 모든 시민들이 통치자를 임명하고 해임할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는 것이다. 선거는 불가피하게 엘리트들을 뽑는다. 그러나 무엇이 엘리트를 구성하며, 누가 엘리트에 속하는지를 규정하는 것은 평범한 시민이다. 따라서 통치자를 선거로 임명함에 있어, 민주적 차원과 비민주적 차원은 분석적으로 구별되는 요소, 예를 들어 투표의 전망적 그리고 회고적 동기와 연관되지 않는다. 선거는 관찰자의 견해에 따라 두 가지 다른 얼굴을 나타내 보일 뿐이다. 

위대한 철학자는 이렇게 썼다. 우리는 혼합이 완벽한 어떤 혼합 정체에서 민주정과 과두정 모두를 볼 수 있어야 하고, 또 모두 볼 수 없어야 한다. 계보학적 탐구를 통해 우리는 대의 정부에서 근대 혼합 정부를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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