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하로부터의 수기
- 책 밑줄긋기/책 2012-22
- 2022. 1. 16.
지하로부터의 수기 -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계동준 옮김/열린책들 |
제1부 지하실
제2부 진눈깨비 때문에
현실 세계와 허구 세계의 뒤틀림
인간 소외와 반항의 상징
도스또예프스끼 연보
제1부 지하실
나는 병든 인간이다 ··· ···. 나는 악한 인간이다. 나는 호감을 주지 못하는 사람이다. 생각건대, 간에 이상이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나는 내 병에 대해서 아무 생각이 없었으며 사실 어디가 아픈지조차도 잘 모른다. 의학과 의사들을 존경하기는 하지만 나는 치료를 받고 있지 않으며 치료를 받은 적도 결코 없다. 게다가 나는 극도로 미신적인 사람이다. 의학을 존경하는 만큼 미신을 믿는다(나는 미신을 믿지 않도록 충분히 교육을 받았음에도 미신을 믿는다) 아니다, 내가 치료 받기를 원치 않는 것은 증오심 때문이다. 아마 당신은 이것을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해할 수 있다. 나는 물론, 지금 이런 나의 증오심으로 누구에게 불쾌감을 주는지 당신에게 설명할 수 없다. 내가 의사들에게 치료를 받지 않는다는 사실로 인해 의사들에게 결코 〈해를 입힐〉 수 없다는 것을 나도 잘 알고 있다. 나는 이 모든 일로 인해, 다른 누구가 아니라 단지 나 자신만을 해롭게 한다는 것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치료를 받지 않는다면 그것은 증오심 때문이다. 간장이 아프다, 그러나, 역시 더 심하게 아프도록 내버려두련다!
나는 이미 오랫동안 이런 식으로··· ··· 약 20년간을 살아왔다. 지금은 마흔의 나이다. 전에는 관청에 근무했지만, 지금은 근무하지 않는다. 나는 못된 관리였다. 나는 거칠었고 이 사실에서 만족을 느꼈다. 그러나 뇌물을 받지는 않았다. 따라서, 이 사실만으로도 내게 상을 줘야 한다(서투른 익살이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삭제하지는 않겠다. 이것이 대단히 날카로운 기지라고 생각하면서 쓴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추악하게도 이 사실을 뽐내고 싶어 한다는 것을 나 자신도 알지만 고의로 삭제하진 않을 것이다!). 내가 앉아 있던 책상으로 민원인들이 서류를 교부받으러 왔을 때··· ··· 나는 그들에게 이를 갈아 보이곤 했다. 누군가를 괴롭히는 데 성공했을 때는 가라앉히기 힘든 쾌감을 느꼈다. 거의 항상 그러는 데 성공했다. 그들은 대부분 겁쟁이들이었다. 부탁하는 이들이 그렇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그런데 폼 재기 좋아하는 놈들 중에서 특히 한 장교 놈에 대해서는 참을 수 없었다. 그는 결코 고분고분하지 않았으며 혐오스러울 정도로 칼소리를 절그럭거렸다. 나는 그와 1년 반 동안 이 칼소리 때문에 신경전을 벌였는대 마침내 내가 승리를 거두었다. 그는 더 이상 절그럭 소리를 내지 않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건 내가 아직 젊었을 때 있었던 사건이다. 그런데 여러분, 내 증오심의 주된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지 당신네들은 알고 있겠죠? 그렇다. 모든 문제는 내가 악하지도 않고 못된 인간이 될 수도 없으며, 내가 자주 심지어는 가장 화가 났을 때조차도, 단지 참새들만을 쓸데없이 놀라게 해서 스스로 위안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수치심과 함께 자각한다는 데 있으며, 여기에 바로 가장 추악한 것이 담겨 있다. 내가 입에 거품을 물 때 나에게 위안이 될 인형을 가져온다거나 설탕을 탄 차라도 한 잔 준다면, 나는 아마도 진정될 것이다. 심지어는 평안한 영혼을 소유할 수도 있을 것이다. 비록 그 다음 스스로에게 이를 갈고 수치심 때문에 몇 달 동안 불면증으로 고통은 받겠지만 이게 내 습관이니 어떡하랴.
조금 전에 나는 내가 못된 관리였다고 스스로를 비방하였다. 증오심 때문에 거짓말을 한 것이다. 나는 단순히 민원인들과 그 장교와 장난을 쳤을 뿐이지, 본질적으로 결코 고약하게 될 수는 없었다. 자주 그러한 것에 모순되는 엄청나게 많은 요소들이 내 자신 속에 들어 있음을 스스로 인정하곤 했다. 이런 모순적인 요소들이 내 안에서 꿈틀거리고 있음을 느꼈다. 나는 살아오는 동안 내내 그것들이 내 안에서 꿈틀거리며 몸밖으로 나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의도적으로 밖으로 나오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것들은 내가 수치심을 느낄 정도로 나를 괴롭혔다. 경련을 일으킬 정도까지 나를 몰고 갔으며, 마침내 나는 염증을 느끼게 되었다. 얼마나 나는 지겨웠던가! 그런데 여러분, 내가 지금 당신들 앞에서 무엇인가를 고백하고, 당신에게 용서를 빌 것처럼 생각되지 않는가·····? 당신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리라 확신한다··· ··· 그런데 당신이 그렇게 생각하든 말든, 나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단언한다··· ···.
나는 사악했을 뿐만 아니라 그 무엇도 될 수 없었다. 악한 자도, 선인도, 비열한 자도, 정직한 자도, 영웅도, 벌레도 될 수가 없었다. 영리한 인간은 진정 아무 것도 될 수 없고 단지 바보들만 무엇이든지 될 수 있다는, 비뚤어지고 무엇에도 쓸모없는 위안으로 나 자신을 흥분시키면서, 나만의 구석에 처박혀 살아갈 것이다. 그렇다, 19 세기의 영리한 인간은 도덕적으로 절대 어떤 성격을 가져서는 안 될 의무가 있다. 성격을 가진 인간, 즉 활동가는 대개 모자라는 인간들이다. 이것이 40년 동안 내가 가지고 살아온 확신이다. 나는 지금 마흔 살이다. 그런데 40년? 이것은 전생애라 할 수 있다. 그야말로 고령인 셈이다. 40년 이상을 산다는 것은 추잡스럽고 몰염치하며 비도덕적인 짓이다! 대체 누가 40년 이상을 살고 있단 말인가, 진실되고 솔직하게 대답해 주시오. 내가 당신에게 말하지요, 누가 그렇게 살고 있는지를 바로 바보들과 무뢰한들이 그렇게 살고 있다오. 나는 모든 노인들에게 맞대놓고 이것을 말할 것이다. 모든 존경받는 노인들에게, 백발이 성성하고 향내 나는 이 모든 노인들에게 말이다! 세상 모든 이들한테 맞대 놓고 말할 것이다!
제2부 진눈깨비 때문에
그때 나는 겨우 스물넷이었다. 그때에도 내 삶은 우울하고 혼란하고 거칠 정도로 고독한 것이었다. 나는 아무와도 사귀지 않았고 심지어 말하는 것도 피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더 방구석에 처박히게 되었다. 심지어 직장에서도 나는 아무도 쳐다보지 않으려 했다. 그리고 나는 나의 동료들이 나를 괴상한 놈으로 간주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一 이것 또한 내가 끊임없이 갖고 있던 인상이었다 — 혐오스러운 것을 대하듯이 쳐다본다는 것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나는 때때로 의문을 가졌다. 왜 나를 제외한 다른 이들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혐오스럽게 쳐다본다고 느끼지 않는 것일까? 우리 부서에 근무하는 이들 중에 한 친구는 불쾌하고 곰보자국이 덕지덕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그 얼굴에는 심지어 범죄자 같은 무언가가 있는 듯이 보였다. 그런 무례한 얼굴로는 나 같으면 감히 다른 이들을 쳐다보지도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다른 친구는 너무 낡은 제복을 입고 있어서 이미 그에게서는 심한 냄새가 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신사들 중 어느 하나도 결코 당황하지 않았다. 둘 다 옷 때문에도, 얼굴 때문에도, 어떤 도덕적인 면에서도. 사람들이 자신을 혐오스럽게 쳐다본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만일 그렇게 생각했다 하더라도, 그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들이 자신의 상관이 아니어서 개의치 않았을 것이다 끝없는 허영 때문에 나는 나 자신에게 가혹한 요구를 하면서, 자주 나 자신을 화가 나도록 불만스럽게 쳐다보았으며, 이런 이유 때문에 마음속으로 내 모습이 이렇게 보이는 것을 모든 사람들의 탓으로 돌렸다는 것이 지금 명백해졌다. 나는 내 얼굴을 싫어했다. 나는 내 얼굴이 소름끼치게 생겼다고 생각했고, 심지어 얼굴에 비굴한 표정 같은 것이 있다고까지 의심했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직장에 도착할 때마다, 아무도 내게서 노예 같은 표정을 감지할 수 없도록 기능한 한 당당하게 행동하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으며, 할 수 있는 한 고상한 표정을 지으려고 노력했다. 〈나는 못생긴 대신에.〉 나는 생각했다. 〈고상하고 인상적이며, 무엇보다도 대단히 지적인 표정을 지어야 한다.〉 그러나 나는 확실히 ━ 그리고 고통스럽게 ━ 이런 모든 완벽함들은 내 얼굴에 결코 나타날 수 없는 것들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것 중에서 가장 끔찍스러웠던 것은 내 얼굴이 정말 바보처럼 생겼다는 것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얼굴이 지적으로 보였다면 좋았을 텐데 ··· ··· 만일 내 얼굴이 대단히 지적이기만 하다면 나는 비굴한 표정까지도 감수했을 것이라고 말해도 좋다.
당연히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내 모든 동료들을 싫어했다. 그리고 그들을 모두 경멸했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그들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때때로 나는 갑자기 그들을 나보다 더 높이 평가하는 일도 있었다. 웬일인지 이런 변화들은 그때마다 갑자기 찾아오곤 했다. 이렇듯 나는 그들을 경멸하기도 했고, 그들을 나보다 더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예의 바르고 진보적인 인간은 허영을 부리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끝없는 요구를 해야 하며 자신을 증오할 정도로까지 자신을 경멸해야 한다. 그러나 내가 그들을 경멸했건, 혹은 나보다 더 높이 평가했건, 나는 내가 만났던 모든 이들 앞에서 눈을 내리깔았다. 나는 심지어 내가 그렇고 그런 사람들의 시선을 견디어 낼 수 있을까 하는 실험까지 했다. 하지만 항상 먼저 내 눈을 내리깔았다. 이것은 나를 미칠 정도로 괴롭혔다. 또한 우습게 보일지도 모른다는 내 두려움은 병적이기까지 했다. 그래서 나는 외모에 관련된 모든 관습적인 것을 비열할 정도로 흠모했다. 나는 평범한 틀에 열정적으로 합류했고 진심으로 내 안의 어떤 기이함까지도 두려워했다. 그러나 내가 어떻게 억제할 수 있었겠는가? 나는 우리 시대의 진보적인 인간들에 걸맞게 병적으로 진보적이었다. 한편 그들은 모두 우둔했으며, 양떼 속의 양들처럼 서로 닮아있었다. 아마도 나는 관청 안에서 자신을 겁쟁이에다 노예라고 끊임없이 생각하는 유일한 인간이었다. 분명 내가 그들보다 진보적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느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그렇게 보인 것만이 아니라 실제가 그랬다. 나는 겁쟁이인 동시에 노예였다. 나는 어떠한 당황함도 없이 이것에 대해 말한다. 우리 시대의 모든 예의 바른 사람은 겁쟁이이고 노예여야 한다. 그것이 인간의 정상적인 상태이다. 나는 이 사실을 확고히 믿고 있다. 인간은 그렇게 만들어졌고 그렇게 자라 왔다. 어떤 우연에 의해서, 현재만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항상 예의 바른 인간은 겁쟁이이고 노예였다. 그것이 지구상에 있는 모든 예의 바른 인간들을 위해 마련된 자연의 법칙이다. 만일 이들 중 하나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허세를 부리게 된다 할지라도, 그는 그것 때문에 편안하다고 느끼거나 심취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그는 무엇인가에 대해 겁을 낼 것이다. 그것이 유일하게 오래도록 지속될 출구이다. 오직 당나귀들과 그와 같은 잡종들만이 허세를 부린다. 그리고 그들은 그 확실한 벽이 있는 곳까지만 허세를 부린다. 그들에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 그들은 절대적으로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
몇 해가 지난 지금까지도 나는 어째서인지 이 모든 것을 매우 불쾌한 느낌으로 회상하고 있다. 지금 불쾌한 기분으로 기억하는 많은 일들이 있다. 그러나 〈수기〉를 바로 여기서 끝내야 하지 않을까? 나는 이것을 쓰기 시작했을 때부터 내가 실수를 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어쨌든 나는 이 이야기를 쓰는 동안 내내 부끄럽게 느끼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이것은 더 이상 문학이 아니라 교화시키기 위한 처벌이다 결국 구석에서의 도덕적 타락과 적당한 환경의 결핍, 살아 있는 것들로부터의 소외, 그리고 지하에서의 자신의 과장된 악의 때문에 어떻게 내가 내 인생을 소진했는가에 관하여 긴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은 신에게 맹세코 흥미롭지 않다. 소설은 주인공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나는 이곳에 일부러 반(反)주인공의 모든 특징들을 모아 두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이 불쾌한 인상들을 남긴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삶으로부터 소외되어 있기 때문이며, 우리 모두는 더 많이 혹은 더 적게, 정도에 따라 비틀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토록 소외되어 있기 때문에 참된 〈실제의 삶〉에 대하여 사람들이 상기시킬 때 때때로 참된 〈실제의 삶〉에 어떤 혐오감 같은 것을 느끼며 그래서 참을 수가 없는 것이다. 정말 우리는 참된 〈실제의 삶〉을 거의 노동이나 근무 같은 것으로 생각할 정도가 되어 있으며 우리 모두는 속으로 책에 씌어진 대로 사는 것이 더 좋다는 데 동의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왜 때때로 소란을 피우며, 왜 변덕을 부리며, 왜 바라는 것일까? 우리 지신도 무엇 때문인지 모른다. 만약 우리의 변덕스러운 소원들이 이루어진다면, 우리는 더 나쁘게 될 그런 위인들이다. 그래 한번 시험해 보자, 우리에게 예를들면 더 많은 독립성을 부여하라, 우리들 중 누구라도 손을 풀어줘 봐라, 우리의 행동 영역을 확장시켜 봐라, 감독을 약하게 해봐라, 그러면 우리는 아마도··· ···. 나는 당신에게 확언한다. 우리는 곧 다시 한번 감독받게 해달라고 빌게 될 것이다. 며근 아마도 이 말 때문에 당신이 내게 화를 낼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당신은 내게 소리를 지를 것이다. 당신은 발을 구를 것이다. 「네 이야기만 해라, 지하에서의 너의 불쌍한 삶을, 그러나 감히 우리 모두라고는 말하지 마라」 잠깐만, 신사 양반. 나는 그 모두라는 표현으로 나 자신의 책임을 면하려는 것은 아니다. 특히 내가 내 인생에서 당신이 관련되어 있는 한 나는 단지 내 인생에서 당신이 감히 절반도 실행할 엄두도 못 낸 것을 극단까지 밀고나갔다. 그리고 덧붙여 말하자면, 당신은 당신의 비겁함을 상식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당신 자신을 속이면서, 그것에 의해 위안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당신에 비하면, 내가 당신보다 더욱더 〈살아 있다〉는 결론이 된다. 자세히 봐라! 결국 오늘날 우리는 정확히 이 〈살아 있는〉 삶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있고, 그것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며 그것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를 혼자 내버려둬 봐라, 책 없이 그러면 우리는 곧 혼란에 빠질 것이고 길을 잃을 것이다. 우리는 어디로 합류해야 할지도, 무엇을 붙잡아야 하는지도,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증오해야 하는지도, 무엇을 존경해야 하고 무엇을 경멸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심지어 인간들이, 진정한 자신의 육체와 피를 가진 그런 인간들이 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발견한다. 우리는 그것을 부끄러워하고 그것을 치욕으로 여기며 전례가 없는 일반적인 인간 같은 것이 되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다. 우리는 사산아들이다. 그리고 오래 전부터 우리는 더 이상 살아 있는 아버지들로부터 태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이 더욱 더 우리 마음에 드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위한 취향을 발전시키고 있다. 곧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관념으로부터 태어나는 방법을 생각해 낼 것이다. 그러나 충분하다. 나는 더 이상 〈지하에서〉 쓰는 것을 원치 않는다.
하지만 이 역설주의자의 〈수기〉는 이곳에서 끝나지 않고 있다. 그는 참지 못하고 계속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곳에서 중지해도 될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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