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 작가의 얼굴 - 어느 늙은 비평가의 문학 이야기
- 책 밑줄긋기/책 2012-22
- 2022. 1. 11.
작가의 얼굴 -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 지음, 김지선 옮김/문학동네 |
서문
윌리엄 셰익스피어 11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 17
모제스 멘델스존 23
요한 볼프강 폰 괴테 29
프리드리히 폰 실러 35
프리드리히 횔덜린 41
프리드리히 슐레겔 47
E. T. A. 호프만 53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59
루트비히 뵈르네 65
하인리히 하이네 71
리하르트 바그너 93
테오도어 폰타네 99
에두아르트 폰 카이절링 109
안톤 체호프 115
구스타프 말러 121
아르투어 슈니츨러 127
게르하르트 하웁트만 133
리카르다 후흐 143
알프레트 케어 149
하인리히 만 155
하인리히 만과 토마슨 만 형제 161
알프레트 폴가 171
토마스 만 177
알프레트 되블린 205
프란츠 카프카 215
리온 포이히트방거 221
아르놀트 츠바이크 227
프란츠 베르펠 233
클라분트 239
요제프 로트 245
베르톨트 브레히트 251
볼프강 쾨펜 265
막스 프리슈 271
솔 벨로 285
페테르 바이스 291
하인리히 뵐 297
에리히 프리트 303
지크프리트 렌츠 309
귄터 그라스 315
토마스 베른하르트 331
옮긴이 주 337
옮긴이의 말 349
찾아보기 357
서문
나는 주간지 『차이트』의 상임 문학평론가로 있던 1967년 회사로부터 기막히게 멋진 브레히트 초상화를 받았다. 유명 조각가이자 화가인 구스타프 자이츠가 그린 것이었다. 이 그림과 동봉된 작품에 대해 글을 좀 써달라는 요청이었다. 글은 썼는데. 그 다음이 문제였다. 이제 이 브레히트 초상화를 어쩐다?
당시 함부르크 니엔도르프에 있던 우리집 벽은 전부 휑하니 비어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때는 우리 가족이 독일로 돌아온 지 몇 년 되지 않아 꽤 검소하게 살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아주 쪼들리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림을 살 돈은 없었다. 아직 그럴 여유는 없었다.'
아무튼 나는 자이츠의 브레히트 초상화를 액자에 넣었다. 그리고 내 서재, 내가 책상에 앉으면 항상 볼 수 있는 자리에 걸었다. 이 일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물론 당시에는 나도 미처 몰랐다. 내가 이내 이런 일에 재미를 붙였던 것이다.
그후로 미술품 상점이나 때로 골동품상 같은 데서 작가 초상화가 눈에 띄면 너무 무리가 되지 않는 한 사들이게 되었다. 동판화나 석판화, 나중엔 스케치 원본까지도 점차 꽤 사게 되었다. 처음엔 소박했지만 수집품이 점점 늘어나자 자연스레 우리집에 곧잘 드나들던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그러다보니 곧 이런저런 지인들이 다른 선물 대신 초상화를 하나씩 갖다주었다.
1973년 내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에 자리를 얻으면서, 우리는 좀 넓은 집으로 이사했다. 아내와 난 드디어 그림을 걸 자리가 넉넉해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얼마 안 가서 이 생각도 낙관적 오산으로 판명되었다. 아무리 그림을 점점 바짝 붙여 걷어도 소용없었다.
셰익스피어에서부터 토마스 베른하르트에 이르는 이 초상화들은 나와 내 손님들, 특히 문학에 관심 있는 손님들에게 큰 즐거움을 안겨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작품의 예술적 수준을 따지기에 앞서, 내게는 예나 지금이나 각별히 소중한 작가들의 초상화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이 초상화 수집은 우연한 계기로 시작했지만 내 인생의 일부가 되었다고.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한 문학평론가의
이력에 한몫을 담당했다고 말이다.
2003년 3월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M. R.-R.
윌리엄 셰익스피어
역사 이래 가장 뛰어난 작가로 누구를 꼽겠습니까, 간혹 이런 질문을 받으면, 나는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셰익스피어라고 대답한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이유가 궁금하다고 하면 나는 희극 『뜻대로 하세요』에 나오는 자크의 대사를 인용한다. 온 세상은 하나의 무대요, 모든 인간은 그저 잠시 등장했다가 퇴장하는 배우일 뿐이라는.
웬 동문서답이냐고 의아해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셰익스피어는 이 한 마디 말로 모든 것을 암시했다. 그의 연극관, 작품의 범위와 목표, 그리고 그가 거둔 성공의 비밀까지. 온 세상을 하나의 무대로 규정짓는 사람이라면 그 반대도 마찬가지로 이루었을 터, 그는 연극 한 편에 그야말로 온 세계를 담아낸 작가였다. 비단 자기가 살던 시대의 세계뿐이었으랴?
요한 볼프강 폰 괴테
대부분의 위대한 작기들이 쓴 거의 모든 것들이 결국 자기묘사로 귀착된다는 사실을 나는 괴테에게서 배웠다. 셰익스피어의 경우는 달라서 그는 모든 한계를 뛰어넘었지만, 아마 괴테는 이 말에 해당될 것이다. 그는 참으로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 대해 이야기했고, 동시에 우리 모두에 대해 이야기한다. 어쩌면 이것이 그가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근본적인 이유인지도 모른다.
내게 괴테는 흥미와 감탄이 새록새록 솟아나는 대상이었으며, 때로는 매료되었고 또 때로는 혼란스럽기도 했다고 말하면, 물론 너무나 진부한 고백이리라 하지만 사실이 그렇다. 괴테의 작품을 읽거나 무대에서 볼 때마다, 그에 대해 글을 쓸 때마다, 언제나 나는 괴테를 지향했다. 하지만 사실 독일 문학에 진지하게 관여하는 사람치고 누군들, 거듭거듭 괴테를 지향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인리히 하이네
독일 서정시인 중에서 제일 소중한 사람 셋이 누구냐고 내게 묻는다면 나는 지난 3세기를 대표하는 시인을 각각 한 명씩 들겠다. 18세기는 괴테, 19세기는 하이네, 그리고 20세기는 브레히트라고 말이다. 괴테에 대해서야 아무 이견이 없겠지만, 브레히트의 경우는 많은 독자들이 의아해하면서 차라리 릴케(이는 나도 이해하겠다) 아니면 아마 고트프리트 벤을 넣고 싶어하겠지만, 벤은 내가 수용하기 어렵다. 다른 낭만파 서정시인들은 어떨까? 아마 하이네보다는 아이헨도르프쪽으로 기우는 독자들도 꽤 있을 것이다.
[...]
하지만 많은 낭만주의 시들이 지닌 내면성이라는 게 나는 참 마음에 들지 않고, 아니 때로는 정말이지 넌더리가 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 진부한 서정성과 태평스러운 목가시풍, 무아경의 자연 예찬과 괴이한 비합리주의, 과장된 열광과 도취, 그 모호함과 평온함, 이 모두가 어찌나 철없고 갑갑한지, 어 찌나 편협하고 촌스러운지.
[...]
시적 전통에 충실하면서도 시를 새롭게 한 시인, 낭만주의적인 동시에 후기 낭만주의적인 시를 쓴 그를 대중은 기꺼이 따랐다. 이미 시든 줄 알았던 저 독일의 꽃이 이제 그의 손을 거쳐 건네지고 있었다. 그 푸른 꽃.
하이네의 시 한 편 한 편에 거의 전 유럽 전 세대가 울고 웃었다. 이들 시편은 그 시대에 사랑의 분위기를 각인시키고, 북돋우고 때로는 창출해냈다. 바로 그 사랑의 시들은 당대인들에게 정신과 노래의 합일 직관과 지성의 하나 됨을 호들갑 없이 보여주었다.
리하르트 바그너
언젠가―한 호텔 정원에서 열린 가든파티가 막 끝난 밤늦은 시간이었는데—어떤 텔레비전 방송국 기자가 던진 너무나 단순한 질문에 깜짝 놀란 적이 있다. 그는 도대체 어떻게 내가 리하르트 바그너 같은 지독한 유대인 혐오주의자를 참아내는지 궁금하다고 했다. 나는 그에게 곧바로 대답했다.
"이 세상에는 점잖고 고상한 사람들이 전에도 많았고 지금도 많지만 그 양반들이 〈트리스탄〉이나 〈명가수>를 쓰지는 않았으니 어쩌겠소." 그럼 그렇다고 해서 그가 「음악 속의 유대주의」 같은 논문을 쓴 것까지도 용서할 수 있을까? 아니, 결코 그렇진 않다.
안톤 체호프
고골이 사회 고발자였다면 톨스토이는 재판관이었고, 도스토옙스키가 스스로 피고인의 자리에 섰다면 체호프는 그저 증인의 역할을 맡았던 셈이다. 그는 결코 작중인물 위에 군림한 적이 없으며, 다만 항상 그들 곁에 서 있었다. 러시아의 다른 작가들이 목청 높여 신음하고 절규할 때 그는 그저 나직 나직 속삭였다. 하지만 지구의 절반이 곧 그에게 귀를 기울였다.
구스타프 말러
도달 불가능한 것을 동경하고 갈망하다가 최고조에 이르러 좌절한 구스타프 말러一같은 이유로 그와 비견되곤 하는 또 한 명의 유대인이 있으니, 바로 프란츠 카프카다. 이 두 사람, 말러와 카프카는 우리의 세계관一가장 근원적인 의미에서의 세계관—을 바꾸어 놓았다.
하인리히 만과 토마슨 만 형제
토마스는 하인리히의 소설이며 희곡을 혐오했다. 그러면서도 제멋대로 사는 그를 부러워했다. 이중적이고 모호한 성격은 둘 다 똑같았다. 토마스는 시민이면서 귀족이었고, 하인리히는 구제불능의 보헤미안이면서 준엄한 예술가였다.
프란츠 카프카
옛날에 호메로스를 두고 여러 도시가 그랬듯, 그를 두고 여러 민족이 각축을 벌인다. 체코, 오스트리아, 독일과 유대인들이 벌써 수십 년째 프라하에서 태어난 유대계 상인의 아들 프란츠 카프카를 둘러싸고 서로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1924년 그가 빈의 한 요양원에서 숨졌을 때 그의 작품을 아는 이는 극소수에 불과했고, 그가 가장 중요한 독일어권 작가의 반열에 들 거라고는 거의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물론 언제부턴가 그의 세계적 명성이 약간 퇴색된 듯한 인상은 지울 수 없다. 1980년대에 들어서부터 카프카와 관련해 일종의 권태 같은 것이 느껴지기 시작했고, 간혹 지겹다는 얘기까지 나왔다. 하지만 이는 그의 작품 자체보다는, 그의 작품에 관해 논한 무수히 많은 책들을 겨냥한 것이었다. 말하자면 예나 지금이나 염증을 불러일으키는 장본인은 카프카가 아니라, 오히려 국제적인 '카프카 산업'이다.
[...]
'불안'이라는 단어는 카프카의 작품을 여는 키워드요, 중심 개념이다. 한 편지에서 그는, "(...) 무엇보다 불안, 그것은 실로 나의 본질입니다"라고 썼고, 또 다른 편지에서는, "'불안'만 없다면 나는 거의 아주 건강할 텐데"라고 썼다.
귄터 그라스
〈4중주>는 문학과 삶, 작가와 독자 사이를 중개하고자 했다. 결국 이루고자 하는 목표는 지면을 통한 비평과 동일하나, 다만 방법을 달리했을 뿐이다. 왜냐하면 부분적으로나마 다른 대중을 겨냥했기 때문이다.
나는 비평의 큰 목표로 늘 명료성을 꼽았고, 방송이라는 매체에서 이는 더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방송에서는 특히 더 명확하게 말해야 하고, 특히 이해하기 쉽게 구체적으로 표현해야 하낟. 나아가 대화 이외에는 여하한 그림이나 영상자료도 끼워넣지 않기로 했고, 원고를 읽거나 쪽지를 들고 들어오는것도 금지했다.
[...]
이 200초 남짓의 시간 동안 작가의 고유한 특성에 대해 그의 최신작의 주제와 문제의식, 모티브와 인물들, 구사된 예술수단, 때로는 특정한 시대적, 정치적 측면들까지 논해야 했다. 그러니 〈4중주〉에서 본격적인 문학 분석이 이루어졌겠는가? 아니, 불가능했다. 단순화했느냐고? 불가피했다. 결과가 너무 피상적이었다고? 당연히 실로 수박 겉핥기에 불과했다.
'책 밑줄긋기 > 책 2012-22' 카테고리의 다른 글
최준식: 사후생 이야기 (0) | 2022.01.22 |
---|---|
움베르토 에코: 추의 역사 (0) | 2022.01.22 |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하로부터의 수기 (0) | 2022.01.16 |
하워드 P. 케인즈: 헤겔 근대 철학사 강의 - 근대 철학의 문제와 흐름 (0) | 2022.01.16 |
프리드리히 엥겔스: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 철학의 종말 (0) | 2022.01.11 |
잠바티스타 비코: 새로운 학문 (0) | 2022.01.04 |
최승자: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0) | 2022.01.03 |
책정리 | 2021년 밑줄긋기 (0) | 2021.12.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