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집 | 문학과지성 시인선 78 | 최승자 - 최승자 (지은이)문학과지성사이제 가야만 한다 때로 낭만주의적 지진아의 고백은 눈물겹기도 하지만, 이제 가야만 한다. 몹쓸 고통은 버려야만 한다. 한때 한없는 고통의 가속도, 가속도의 취기에 실려 나 폭풍처럼 세상 끝을 헤매었지만 그러나 고통이라는 말을 이제 결코 발음하고 싶지 않다. 파악할 수 없는 이 세계 위에서 나는 너무 오래 뒤뚱거리고만 있었다. 목구멍과 숨을 위해서는 動詞만으로 충분하고, 내 몸보다 그림자가 먼저 허덕일지라도 오냐 온몸 온정신으로 이 세상을 관통해보자 내가 더 이상 나를 죽일 수 없을 때 내가 더 이상 나를 죽일 수 없는 곳에서 혹 내가 피어나리라. 아시는지 아시는지? 어느 날 갑자기 라면 먹고 싶은 것, 살고 싶음의 뿌리 그리..
내 무덤 푸르고 | 문학과지성 시인선 133 | 최승자 - 최승자 (지은이)문학과지성사마흔 서른이 될 때는 높은 벼랑 끝에 서 있는 기분이었지. 이 다음 발걸음부터는 가파른 내리막길을 끝도 없이 추락하듯 내려가는 거라고. 그러나 사십대는 너무도 드넓은 궁륭 같은 평야로구나. 한없이 넓어, 가도가도 벽도 내리받이도 보이지 않는, 그러나 곳곳에 투명한 유리벽이 있어, 재수 없으면 쿵쿵 머리방아를 찧는 곳. 그래도 나는 단 한 가지 믿는 것이 있어서 이 마흔에 날마다,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다. 세기말 칠십년대는 공포였고 팔십년대는 치욕이었다. 이제 이 세기말은 내게 무슨 낙인을 찍어줄 것인가. 한계가 낭떠러지를 부른다. 낭떠러지가 바다를 부여잡는다. 내가 화가 나면 나를 개 패듯 패줄 친구가 하나 있었으..
쓸쓸해서 머나먼 | 문학과지성 시인선 372 | 최승자 - 최승자 (지은이)문학과지성사 세월의 학교에서 거리가 멀어지면 먼 바다여서 연락선 오고 가도 바다는 바다 섬은 섬 그 섬에서 문득 문득 하늘 보고 삽니다 세월의 학교에서 세월을 낚으며 삽니다 건너야 할 바다가 점점 커져 걱정입니다 쓸쓸해서 머나먼 먼 세계 이 세계 삼천갑자동방삭이 살던 세계 먼데 갔다 이리 오는 세계 짬이 나면 다시 가보는 세계 먼 세계 이 세계 삼천갑자동방삭이 살던 세계 그 세계 속에서 노자가 살았고 장자가 살았고 예수가 살았고 오늘도 비 내리고 눈 내리고 먼 세계 이 세계 (저기 기독교가 지나가고 불교가 지나가고 道家가 지나간다) 쓸쓸해서 머나먼 이야기올시다
즐거운 일기 | 문학과지성 시인선 40 | 최승자 - 최승자 (지은이)문학과지성사散散하게, 仙에게 한밤중 문득 잠에서 깨어날 때 여기가 어디일까 하는 당혹감, 그리고 족쇄 같은 기억들을 이끌고 지나온 모든 길 모든 도시를 더듬어 마침내 거기가 이국 어느 도시의 기숙사 방임을 깨닫게 될 너의 한밤중. 내가 예감하는 너의 한밤중. 하지만 누가 누구를 구원할 수 있으랴. 위장이 간장을? 심장이 허파를? 고통의 물물교환은 말처럼 그렇게 쉽게는…… 일찌기 나는 흘러가는 것은 마찬가지했었다 다른 사람들이 길이로 넓이로 흘러가는 동안 나는 깊이로 흘러가는 것뿐이라고. 그러나 깨닫고 보면 참으로 엄청나구나. 내가 파놓은 이 심연 드디어는 내 발목을 나꿔 챌 무지몽매한 이 심연. 깊이와 넓이와 길이로 동시에 흐르기 위..
이 시대의 사랑 | 문학과지성 시인선 16 | 최승자 - 최승자 (지은이)문학과지성사 일찌기 나는 일찌기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마른 땅에 핀 곰팡이 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년 전에 죽은 시체. 아무 부모도 나를 키워 주지 않았다 쥐구멍에서 잠들고 벼룩의 간을 내먹고 아무 데서나 하염없이 죽어 가면서 일찌기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떨어지는 유성처럼 우리가 잠시 스쳐갈 때 그러므로,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너를모른다 나는너를모른다. 너당신 그대, 행복 너, 당신, 그대, 사랑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삼십세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 시큰거리는 치통 같은 흰 손수건을 내저으며 놀라..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 최승자 지음/난다 1부 배고픔과 꿈 2부 헤매는 꿈 3부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4부 모든 물은 사막에 닿아 죽는다 시인의 말 183 개정판 시인의 말 187 최근의 한 10여 년 * 내 병의 정식 이름은 정신분열증이다. 거진 다 나았어도 아직은 약을 먹어야 한다. 12년째 정신분열증과 싸우다보니 몸도 마음도 말이 아니다. 내가 했었던 일은 어떤 비밀스러운 다리를 이리저리 둘러보는 것이었는데 그 다리는 해체를 허락하지 않았다. 내게 그 구조를 보여주지 않았다. 정신과 입원과 퇴원을 반복한 것은 한 5년. 퇴원하여 두세 달 후에 보면 약을 안 먹고 밥도 안 먹고 있는 꼴을 보게 된다. 그럴 때 외숙이 오시면 한번 휘둘러보고 일견에 상황을 눈치채고 강제로 입원시킨다. 다시 입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