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자: 즐거운 일기
- 책 밑줄긋기/책 2023-26
- 2026. 5. 24.

|
즐거운 일기 | 문학과지성 시인선 40 | 최승자 - ![]() 최승자 (지은이)문학과지성사 |
散散하게, 仙에게
한밤중 문득 잠에서 깨어날 때
여기가 어디일까 하는 당혹감,
그리고 족쇄 같은 기억들을 이끌고
지나온 모든 길 모든 도시를 더듬어
마침내 거기가 이국 어느 도시의
기숙사 방임을 깨닫게 될 너의 한밤중.
내가 예감하는 너의 한밤중.
하지만 누가 누구를 구원할 수 있으랴.
위장이 간장을? 심장이 허파를?
고통의 물물교환은 말처럼 그렇게 쉽게는……
일찌기 나는 흘러가는 것은 마찬가지했었다
다른 사람들이 길이로 넓이로 흘러가는 동안
나는 깊이로 흘러가는 것뿐이라고.
그러나 깨닫고 보면 참으로 엄청나구나.
내가 파놓은 이 심연
드디어는 내 발목을 나꿔 챌
무지몽매한 이 심연.
깊이와 넓이와 길이로 동시에 흐르기 위해선
역시 물처럼(바다!) 흘러가야 하지 않을까.
모든 숨을 다 내맡기고
빨간 염통까지 수면 위에 동동 띄운 채.
이제 진실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십년 전에도 십오 년 전에도
똑같은 단어와 똑같은 문법으로써
물었었던 그 질문.
그런데 어째서 그 질문의 배후에
이상한 흉칙한 그림자가 드리워지게 되었는지.
나는 언제나 내가 먹는 밥이
진실한 밥, 깨끗한 밥이기를 원했지만,
이게 뭐냐, 가해와 피해와 가학 자학과
자기 기만으로 얼룩진 밥
(생각나니, Das Brot der frühen Jahre?)
하지만 이런 게 삶일 줄은 몰랐다고 말하지 말자.
서른 세 살 (너는 서른 넷)나이에 그렇게 말한다는 건.
범죄 행위다.
시인 정호승 씨의 시 중에 이런 구절이 있더라.
"내가 그리워 그대를 부르는 날
그대는 밥그릇을 들고 별밤에 나오너라."
〔………〕
밥그릇을 두드리며 그대 홀로 나오너라."
슬프지, 아가야?
너도 살아 있다면,
먼 바다 건너 나를 향해
네 빈 밥그릇을 두드리며 노래 불러다오,
내 사랑 내 아가야.
이젠 정말 현실적으로 배가 고파 오는구나.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우선적으로
채워져야 할 밥통을 가진 밥통적 존재인 나는
아니 몸 전체가 정신 전체가
커다란 빈 밥통이며 빈 밥그릇인 나는......
그만 쓰자, 안녕.
안녕, 우리의 생물학적 사회학적 정신분석학적
삶을 위해.
'책 밑줄긋기 > 책 2023-26'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로빈 던바: 신을 찾는 뇌 (0) | 2026.05.24 |
|---|---|
| 존 프리처드: 교회 (0) | 2026.05.24 |
| 시모다 마사히로: 여래장과 불성 | 시리즈 대승불교 8 (0) | 2026.05.19 |
| 조반니노 과레스키: 돈 까밀로 러시아 가다 - 신부님 우리들의 신부님 10 (0) | 2026.05.19 |
| 길희성: 바가바드 기타 (0) | 2026.05.19 |
| 게오르그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청년 헤겔의 신학론집 - 베른/프랑크푸르트 시기 (1) | 2026.05.10 |
| 마이클 레이든: 칼 바르트 (0) | 2026.05.10 |
| 최승자: 이 시대의 사랑 (1) | 2026.05.10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