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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헤겔의 신학론집 | 프리즘 총서 28 | 게오르그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 ![]() 게오르그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지은이),정대성 (옮긴이)그린비 |
옮긴이 해제
민중종교와 기독교에 대한 단편들
예수의 생애
기독교의 실정성
엘레우시스 - 횔더린에 부쳐
독일 관념론에 대한 최초의 체계 계획
종교와 사랑에 대한 단편들
기독교의 정신과 그 운명
1800년 체계 단편
역사와 정치에 대한 단상들 - 베른/프랑크푸르트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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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객관종교는 사람들이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신앙fides quae creditur이며, 이 종교에서는 오성과 회상이 작용한다. 오성과 회상은 지식을 탐구하고 숙고하게 하여 그 지식을 보존하거나 믿게 한다. 실천적인 지식 역시 이 객관종교에 속할 수 있지만, 그런 점에서 이 실천적 지식은 활용할 수 없는 지식에 불과하다. 객관종교는 머릿속에서 배열될 수 있으며, 하나의 체계로 정립될 수 있고, 책으로 서술될 수 있으며, 말로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될 수 있다. 이에 반해 주관종교는 감응과 행위 속에서만 드러난다. 내가 어떤 사람에 대해 '그는 종교를 가지고 있다'라고 말할 경우, 이 말은 그가 종교에 대한 많은 인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이 신의 행위, 신의 기적, 신의 임재를 느끼며, 자신의 본성이나 인간의 운명에서 신을 인식하고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신에게 복종하며, 그에게 감사하고, 행위할 때 신을 찬양한다. 그리고 행위할 때 그는 단순히 '그것이 선한 것인가 아니면 영민한 것인가'에만 주의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 그는'그것이 신에게 합당한 것인가, 신이 그 행위의 작용 근거인가' 하는 문제도 고려한다. 그리고 종종신은 가장 강력한 작용 근거로 고려된다. 그리고 어떤 것을 즐기거나 행복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 그는 동시에 신을 바라보면서 그에게 감사한다. 주관종교는 생동적이며, 존재의 내면에서 작용하며, 밖으로 향해 활동한다. 주관종교는 개인적인 어떤 것이다. 객관종교는 추상이다. 주관종교는 자연이라는 살아 있는 책이다. 자연에서는 식물, 곤충, 새와 동물들이 서로 맞붙어서 각자 살아가며, 즐긴다. 그들 모두는 섞여 있으며, 도처에서 모든 종류의 생물이 함께 모여서 살아간다. 이에 반해 객관종교는 자연 교사의 조그마한 생물 진열장이다. 자연 교사는 곤충들을 죽이고 식물을 말리며, 동물들을 박제하거나 화주 속에 보존하여 자연 안에 분리되어 있는 모든 것을 분류하여 단 하나의 목적에 따라 배치한다. 이때 자연은 무한하게 다양한 목적을 단 하나의 친숙한 끈으로 얽어맨 체계가 된다.
59 순수한 이성종교에서 사람들은 정신과 진리 안에서 신에게 기도하며, 덕만이 신에 대한 예배로 정립된다. 이에 반해 물신신앙은 선한 의지와는 다른 것을 통해 신에게 아첨할 수 있다고 믿는 신앙이다. 그런데 '이성종교와 대립하고 있는 물신신앙은 아무런 값어치도 없으며', '양자는 서로 완전히 다른 종류의 신앙이고', '물신신앙을 점점 더 이성종교로 인도함으로써 그 신앙을 배제하는 것이 인류를 위해 아주 중요하다'고 할 만큼 순수한 이성종교와 물신신앙은 큰 차이가 있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 즉 '정신적 보편교회는 이성의 이상에만 머무는지', 그리고 '물신신앙의 가능성을 제거하는 공공종교의 확립이 가능하기라도 한지'라는 질문이 제기된다. 이는 마치 a)부정적으로는 문자와 관례에 가능한 한 매달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리고 b)긍정적으로는, 민족이 이성종교로 이끌려 이 신앙에 대한 감수성을 얻게 하기 위해서 민중종교가 세워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154 한계 지을 수 없는 순수한 이성은 신 그 자체이다. 따라서 세계의 전체 설계도는 이성에 따라 배열되었다. 이성이 종종 어둡게 되기는 하지만 결코 소멸되지는 않는다. 암흑천지에서도 이성의 가느다란 빛줄기는 나타나기 마련이다. 인간이 그런 고귀한 존재임을 다시 일깨우기 위해 세례 요한이 유대인들 가운데 나타났다. 이 고귀함은 그들에게 낯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자신 안에 간직하고 있는 것이며, 그들의 참다운 자아 안에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고귀함은 혈통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며, 지복을 추구하는 욕망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고, 존경받는 위대한 자에게 예배드리는 데서 찾아지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 오히려 그것은 그들 자신이 분유하고 있는 신적인 섬광을 계발함으로써 가능하다고 한다. 이 섬광은 숭고한 의미에서 그들이 신에게서 기원하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따라서 이성의 계발은 진리와 평안의 유일한 원천이다. 그래서 요한 자신만이 또는 몇 사람만이 이 평안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자기 안에서 발견할 수 있다.
350 관습법의 관점에서 유일한 도덕적 동기는 그 법을 만든 입법자 자신의 주체 속에서만 발생될 수 있다. 이 법은 그 입법자의 내면으로부터 발생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도덕 법칙이 우리의 외부에 있는 것, 주어진 어떤 것이라고 선언하며, 따라서 다른 방식으로 그 법칙에 권위를 부여하지 않을 수 없다. 실정종교의 개념 속에는 도덕 법칙을 외부로부터 주어진 것으로 여기도록 하는 특징이 있다. 만약 그 도덕 법칙이 미리 주어져 있다면, 덕은 매우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예술이 되고 만다. 이는 분명히 문제를 즉석에서 결정할 수 있는 순수한 윤리적 감정과 대조된다. 왜냐하면 그 윤리적 감정은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복잡한 도덕 예술은 모든 종류의 기교와 기술을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도 학습될 수 있다고 여겨진다.
353 실정적 신앙은 특정한 종류의 종교적 교리의 체계인데, 실정적 신앙에 따르면 이 계율들은 우리가 믿을 것인지 말 것인지 주저해서는 안 되는 어떤 권위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우리가 진리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다. 이러한 실정적 신앙이라는 개념에는 무엇보다도 다음과 같은 종교적 교리의 체계, 또는 진리의 체계가 포함된다. 즉 우리의 의지와는 독립적으로 진리로 여겨지고 받아들여져야 하는 진리, 아무도 알지 못하고 아무도 진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해도 계속해서 진리였던 진리, 그래서 종종 객관적인 진리라고 불리는 진리의 체계가 이 개념에 포함된다. 이 진리는 이제 우리에게 대해서도 진리이어야 하며, 주관적 진리이기도 하다.
458 유대의 진정한 조상인 아브라함과 더불어 유대 민족의 역사는 시작된다. 이 말은 그의 정신이 그의 후손의 모든 운명을 제어하는 통일체이자 영혼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정신은 다양한 세력에 대항하여 투쟁함에 따라서 상이한 형식으로 출현한다. 또는 이 정신은 무력과 유혹에 굴복하고 낯선 존재를 받아들여 더럽혀지는 경우에도 다양한 형태를 띠면서 나타난다. 따라서 무장과 투쟁의 형식 속에서, 또는 강자의 족쇄를 지고가듯 그의 정신은 계속 출현한다. 이러한 계속되는 출현 형식이 곧 운명이다.
490 예수가 유대 민족 가운데 출현했을 때 유대 민족은 아주 혼란한 상태에 처해 있었다. 그들의 상황은 그 이전 시기나 이후 시기에 성공했던 혁명과 동일한 조건에 의해, 그리고 동일한 일반적 특성들에 의해 유지되고 있었다. 한 민족의 정신이 그들의 체제와 법에서 빗나가서 이 정신이 그 체제와 법에 더 이상 일치하지 않게 될 경우, 사람들은 어떤 다른 것을 찾고 추구하게 된다. 새로운 것을 찾고 추구하는 그러한 행위는 각자에게 서로 다르게 나타나며, 이를 통해 교육, 삶의 양식, 요청, 그리고 욕구 등이 다양한 방식으로 산출된다. 이런 것들이 이후 점점 더 크게 분리되어 더 이상 서로 양립할 수 없게 될 경우, 그것들은 결국에 폭발하게 되고, 인간의 새로운 보편적 형식에 따라 새로운 인간 집단에 따라 새로운 규정을 얻게 된다. 이 집단의 유대가 느슨하고 서로 통일되어 있지 않을수록, 그 속에는 새로운 불평등과 미래의 폭발의 씨가 더 많이 내재하게 된다.
523 주인에 대한 단순한 복종만을 강요한 명령들, 기쁨도 즐거움도 사랑도 없는 직접적인 노예 상태, 복종의 상태, 즉 신에 대한 예배만을 강요하는 무의미한 명령들, 바로 이러한 유대의 정신에 대항하여서 예수는 그것과는 정확히 대립되는 것, 즉 인간의 충동, 욕구를 내세웠다. 종교적 행위들은 가장 정신적이고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그 행위는 사태가 전개되어 가는 과정 속에서 필연적으로 분리되어야 했던 것을 다시 통일하고자 갈구하며, 현실에 더 이상 대립되지 않은 완벽한 통일체를 이상 속에서 서술하고자 한다.
577 인간에 대한 사랑은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서로 대면하지도 않았으며, 따라서 어떤 관계도 갖지 않은 사람들에게까지 확장될 수 있는데, 이런 보편적 인류애는 특정한 시대의 김빠진, 그러나 특징적인 발견물이다. 이 시대는 사유물에 대립한 덕들, 즉 이상적인 요구를 제시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시대의 현실이 너무 빈약하여서 덕을 사유된 대상 속에서나마 화려하게 드러내고자 하기 때문이다. 가까운 이웃들에 대한 사랑은 우리 각자가 접촉하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다. 사유물은 사랑의 대상일 수 없다. 물론 사랑은 명령되어질 수 없으며, 그것은 파토스적이며 성향이다. 그러나 누구도 사랑의 위대함을 손상시키지 않으며, 사랑의 본질이 낯선 것에 대한 지배가 아니라는 사실로 인해 사랑을 평가절하하지는 않는다. 어떤 것도 지배하지 않으며, 타자에 대항한 적대적인 힘이 아니라는 사실이 사랑의 위대함인데, 그것은 사랑이 의무와 권리 아래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랑은 승리한다'라는 말은 '의무는 이긴다' 즉'의무가 그 적을 복종시켰다'라는 말과 똑같은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사랑이 적대성을 극복했다는 의미이다. 사랑이 명령된다는 것, 즉 생동적인 정신인 사랑이 이름으로 불린다는 것은 사랑에 대한 모독이다.
648 비개인적인 살아 있는 아름다움 속에서 안식을 발견한다는 것은 기독교의 본질적 특성과 대립된다. 그리고 교회와 국가, 예배와 삶, 경건함과 덕, 정신적 행위와 세속적 행위가 결코 하나로 통일될 수 없다는 사실이 기독교의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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