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니안 스마트: 종교와 세계관
- 책 밑줄긋기/책 2023-26
- 2026. 5.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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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세계관 | 신화 종교 상징 총서 4 | 니니안 스마트 - ![]() 니니안 스마트 (지은이),김윤성 (옮긴이)이학사 |
재판 머리말
제3판 머리말
서론
제1장 종교 연구의 세계관 분석
제2장 세계관의 종류
제3장 경험적 차원
제4장 신화적 차원
제5장 교리적 차원
제6장 윤리적 차원
제7장 의례적 차원
제8장 사회적 차원
제9장 20세기의 대한 성찰
후기 : 세계관 분석의 탐험 계속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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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불교와 유대교 같은 종교나 마르크스주의와 휴머니즘 같은 이데올로기를 연구하는 것은 현대 학문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더욱이 우리가 매일의 삶에서 부딪히는 문제들을 놓고 볼 때 세계관에 대한 이해는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우선, 모든 문화는 언제나 일정한 세계관과 밀접하게 얽혀 있다. 그 세계관을 믿느냐 안 믿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서양 문화는 가톨릭이나 개신교와 밀접한 관계에 있고, 마찬가지로 스리랑카 문화는 불교와 현대 서양 문화는 휴머니즘과, 중동 문화는 이슬람교와, 러시아 문화는 정교회와, 인도 문화는 힌두교와 각각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다음으로, 종교적 가치 그리고 좀더 넓게 말해 세계관들이 제시하는 가치는 인문학 안에서 진지하게 논의되고 있다. 인간이 추구하는 가치에 대해 생각해 보려는 사람이라면, 종교들이 제시하는 가치를 어느 정도는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종교들에 관한 지식이 조금이라도 있어야 한다.
현대에 이루어지고 있는 세계관 연구는 지속과 변화의 동력이 되어 온 다양한 전통적 세계관과 세속적 세계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세계관에 대한 연구는 감정과 관념을 탐구하고, 사람들의 머릿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를 이해하고자 한다. 사람들이 무언가를 믿고 있다면, 그것이 진실이든 아니든 간에 그 무인가는 바로 실제의 중요한 측면을 담고 있는 법이다. 그런데 불과 50년 전만 해도 종교나 이데올로기는 그 자체로 연구된 적이 없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다른 사람의 종교와 이데올로기에 대해서는 적대감과 비난으로만 가득 찬 서술이, 그리고 "우리의 종교일 경우에는 호감으로만 가득 찬 시술이 전부였다. 물론 당시에도 인류학은 낯선 종교들에 대해 어느 정도 객관적인 설명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의 인류학은 종종 다른 문화들을 미개하고 열등한 것으로 취급했다. 한편 어떤 이들은 종교들을 비교함으로써 낯선 신앙들에 대한 서술을 시도하기도 했으며, 때로는 기독교 선교사들도 다른 종교들에 대해 호의적인 설명을 하기도 했다.
현대 인문학과 사회 과학에서 제기된 가장 중요한 개념 가운데 "에포케epoche", 즉 판단 중지라는 개념이 있다. 판단 중지란 무언가를 좀더 사실적으로 서술하기 위해 타자(다른 문화, 다른 집단, 또는 다른 사람)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잠시 접어 두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타자에 대해 서술할 때 오직 자기 자신의 관점에서만 서술한다면 그것은 전혀 사실적이지 않다. 사실 그것은 우리 자신에 대한 서술일 뿐 결코 타자에 대한 서술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에포케를 행하는 것은 현상학적 작업을 뒷받침하는 주요한 힘이다.
종교와 이데올로기에 대한 연구는 "세계관 분석"이라고 부를 수 있다. 우리가 이를 통해서 하려는 것은 인간 의식과 사회의 구조를 형성하는 데 영향을 끼쳤던 상징이나 신념의 역사와 성격을 서술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현대 종교학의 핵심이다. "세계관 분석"이라는 말은 객관성에 대한 추구를 함축한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세계관 분석이라는 것 자체는 비교적 현대적인 현상이다. 물론 그 뿌리는 좀더 멀리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적어도 일반 대학에서 세계관 분석을 가르치고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이후부터로 이제 겨우 30년밖에 되지 않는다. 비교 종교학comparative study of religion의 뿌리는 19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당시의 주된 작업은 다양한 종교의 경전들을 번역하는 일이었다. 한편 19세기에는 성서에 역사학적인 방법을 적용한 연구가 시작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변화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서구에서 이루어진 종교 연구의 대부분은 전통적이고 신학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물론 이는 다른 문화권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더욱이 종교와 관련된 것들을 연구하는 것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나 어울리는 일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17 인류 역사의 대부분의 기간 동안 인간은 다른 사람의 신념과 가치에 대해 극히 초보적인 지식만 갖고 있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문화나 신조 안에 갇혀 다른 사람들의 사상이나 가치를 살펴볼 생각을 거의 하지 않았다. 또한 대개 다른 사람들의 종교를 진지하게 연구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식민지 시대가 열린 18세기 이후, 스페인, 포르투갈,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러시아 등이 그들의 제국을 확장하면서 사람들은 피정복 국가의 언어와 문화를 연구하는 데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서 19세기 후반에 비로소 비교 종교학이 탄생했다. 당시 비교 종교학은 부분적으로 진화론의 영향을 받고 있었으며 비교 동물학을 그 학문적 모델로 삼고 있었다. 비교 종교학은 종교가 선사 시대에서 시작하여 고등 종교로 진화해 왔다고 보았으며, 특히 종교 개혁 이후의 기독교가 가장 세련된 고등종교라고 여겼다. 이런 식의 연구는 대개 낯선 신앙들을 업신여겼다. 서구인들은 너무 쉽게 다른 신앙들을 원시적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사회 과학이 성장하면서 19세기 후반에는 종교사학, 인류학, 사회학 같은 다양한 학문의 역사를 조합한 현대 종교학이 출현했다. 좀더 넓은 맥락에서 바로 이런 연구를 세계관 분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 우리의 세계가 밀접하게 얽혀 있다는 사실은 어디에서 위기가 발생하더라도 이것이 주변에 파장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이 점이 설교가 아닌 이해를 강조하는 현대 종교학이 중요해지는 한 가지 이유이다. 아무리 서로의 생각이 다르고 또 일부 잘못된 정치 체제가 눈에 띈다 하더라도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정신을 이해해야 하며, 적어도 무지에서 서로를 공격하지는 말아야 한다. 현대 종교학에서는 바로 이런 메시지가 매우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것은 또한 삶의 모든 영역에서 존중되어야 하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이제 현대 종교학, 또는 세계관 분석에 무엇이 포함되어야 하는지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우선, 현대 종교학은 종교와 세계관을 인간 삶의 한 측면으로 살펴보고자 한다(그 삶 안에는 경험, 윤리, 신념, 의례, 제도 등의 요소들이 들어 있다). 그것은 정치학과 비슷하다. 정치적 행위는 정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삶의 전 영역에 걸쳐 있다. 그것이 삶의 전부는 아니지만 삶의 일부인 것은 틀림없다. 이것은 종교도 마찬가지이다.
다음으로 종교학은 다양한 학문을 활용한다. 그것은 다학문적이다(또는 다원 방법적이라고 불러도 좋다). 종교학은 역사학, 현상학(이 분야가 특히 중요하다), 사회학, 인류학, 철학, 고고학, 예술사, 사상사 등을 활용한다. 이렇게 볼 때 현대 종교학은 관점주의적이고 다학문적이다.
따라서 세 번째로 현대 종교학은 경제학이나 정치학 같은 다른 관점주의적 학문과 겹치는 경향이 있다. 나는 우리 모두가 어느 정도는 종교적이라고 생각한다(물론 이는 종교 외에 다른 세속적 세계관도 포함한다는 전제 아래 하는 말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우리 모두가 똑같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어떤 사람들은 매우 돈독한 신앙심을 갖고 있고, 주교나 승려 그리고 종교화를 그리는 화가 같은 사람들은 종교를 통해 그들의 삶을 영위하기도 한다. 그리고 착실한 신자이기는 하지만 그리 경건하지는 않은 사람들도 있다. 반면 거의 종교적이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아예 종교를 혐오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어느 정도는 정치와 관련이 있는 것처럼,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는 종교와 관련이 있다.
네 번째로 종교학은 반드시 비교 문화적이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종교학은 불교, 기독교, 유대교, 마르크스주의 등과 같은 세계의 다양한 세계관들을 다루어야 한다. 물론 모든 세계관을 다 포용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종교학은 우리에게 동양 종교들, 아프리카 종교들, 서구 종교들을 비롯한 다양한 종교들에 대해 알려 주어야 한다. 여기서 흔히 비교가 중요한 방법으로 사용된다. 비교를 통해 우리는 서로 다른 종교들 간에 비슷한 요소들이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힌두교에서 신에 대한 헌신적 숭배를 뜻하는 박티bhakti는 다른 종교들은 물론 심지어 (마오쩌둥이 거의 신격화되었을 때의) 마오쩌둥주의 같은 세속적 세계관들에서도 다른 형태로 반복해서 나타난다. 이러한 비슷한 요소들을 이해하면 우리는 종교들 사이에 왜 벽이 쌓이는지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차이점을 발견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는 점이 분명히 강조되어야 한다. "비교"는 차이를 파악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유사성과 차이점을 모두 살펴보아야 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종교의 다양한 모습을 고찰할 수 있다.
다섯 번째로 종교학은 경계가 없다. 다시 말해 종교를 정의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종교학 역시 일정한 테두리를 갖지 않는다. 정의를 내리게 되면 종교적 영역들 중 일부를 배제할 수도 있기 때문에 종교학은 세속적 세계관들까지도 포괄하려고 한다. 종교의 정의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영국 철학자인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1889~1951)이 제시한 가족유사성family resemblance 개념에 기반을 둔다. 예를 들어 게임을 생각해 보자. 혼자서 하는 카드 놀이의 일종인 페이션스는 여럿이서 하는 카드 놀이의 하나인 브릿지와 비슷하고, 브릿지는 테니스와 비슷하다. 또 테니스는 하키의 일종인 라크로스와 비슷하고 라크로스는 필드하키와 비슷하다. 그 러나 페이션스와 필드하키는 전혀 다르다. 어쨌든 종교학의 연구 대상을 서구인들이 정의 내려 온 종교에 국한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불교나 유교를 (또는 마르크스주의를) 종교라고 부르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은 늘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무엇을 종교나 세계관으로 볼 것인가에 대해 유연한 입장을 취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여섯 번째로 현상학을 이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시 말해 제대로 된 지식에 근거한 감정 이입을 수반하는 방법과 다른 사람의 세계관을 판단할 때 자신의 신념을 접어 두는 방법. 이 두 방법을 모두 사용해야 한다. 이처럼 자신의 신념을 접어 두는 판단 중지를 에포케라고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믿음과 판단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지 말고 에포케를 통해 그들의 낯선 믿음과 감정을 이해해야 한다. 이는 어떤 경기를 관람할 때는 그 경기의 규칙에 따라 관람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축구를 보러 가서는 야구를 생각하며 "저 친구 투수맞아?" 하고 묻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 축구와 야구의 경기 규칙은 전혀 다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나는 이런 에포케에 근거한 현상학을 제대로 된 지식에 근거한 감정 이입이라고 부르기를 선호한다. 종교학에서 "현상학"이라는 용어는 "형태론morphology"이라는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형태론은 종교영역 안에 있는 현상들을 과학적으로 분류하는 것이다. 그래서 현상학은 비교 연구의 결과들을 활용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많은 문화권에서 지고신에 대한 관념을 발견할 수 있다. 지고신은 다른 신들과 완전히 구별되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는 신이다. 이런 지고신은 그리스의 제우스와 로마의 주피터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또 베다 시대 인도의 인드라와 일본 고유 종교인 신도의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또 다른 예로 우리는 모든 문화권마다 (장례식을 비롯한) 다양한 통과 의례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것들이 모여서 종교학이 추구하는 형태론을 구성한다. 이 밖에도 신비 경험, 예배, 초월자 개념 등에서도 종교 간에 서로 겹치는 부분이 있다. 이렇게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현대 종교학은 관점주의적이고, 다학문적이며, 교차 문화적이고, 비교 방법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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