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로슬라프 펠리칸: 예수, 역사와 만나다
- 책 밑줄긋기/책 2023-26
- 2026. 4.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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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역사와 만나다 | 비아 만나다 시리즈 | 야로슬라프 펠리칸 - ![]() 야로슬라프 펠리칸 (지은이),민경찬,손승우 (옮긴이)비아 |
책을 펴내며 / 9
주후 2000년을 맞아 책을 다시 펴내며 / 11
서론: 진, 선, 미 / 21
1. 랍비 / 37
2. 역사의 전환점 / 65
3. 이방 사람들을 비추는 빛 / 93
4. 만왕의 왕 / 123
5. 온 우주의 그리스도 / 151
6. 사람의 아들 / 181
7. 참된 형상 / 209
8.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 / 237
9. 세상을 다스리는 수도사
10. 영혼의 신랑
11. 참 하느님과 참 인간의 표상
12. 완전한 인간
13. 영원하신 분을 비추는 거울
14. 평화의 왕
15. 상식의 교사
16. 영혼의 시인
17. 해방자
18. 온 세계에 속한 이
찾아보기
17 이 책의 마지막 장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나온 책들을 쓰면서 나는 이른바 정통 그리스도론이 아닌 다른 그리스도론들, 제퍼슨과 에머슨, 톨스토이 같은 이들의 그리스도 이해에 눈과 귀를 닫지 않았다. 예수, 역사와 만나다 초판 출간 이후 15년 동안 일부 현대 신약학자들은 자신들의 추정과 가설에 근거해 예수 그리스도를 진술함으로써 그 어느 때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리스도교인들과 그리스도교 교회의 믿음, 가르침, 고백과 학문적 진술 사이에 커다란 괴리를 낳았다. 이는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나는 건강한 신앙과 건강한 학문은 서로 대립하지 않으며 서로를 보완한다고 굳게 믿기 때문이다. 이 책과 다른 저작들에서 나는 내가 오늘날 신약학의 흐름을 따르고 있다고 이야기하지 않았다. 나는 내가 연구하는 것이 '신약성서 각 구절의 본래 의미가 무엇이냐'가 아니라 '사람들이 신약성서 전체를 어떠한 의미로 받아들였냐'는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지난 15년 간 신약학계에서 논의된 방대한 방법들, 이야기들의 홍수 속에서 나자신을 지켜내고자 했기 때문이 아니다. 몇몇 독자들은 나에게 저 논의들, 몇몇 급진적 비평가들이 내놓은 이런저런 가설들을 평가해주기를 요구했다. 이러한 요구들에 대해 침묵하는 것은 그리스도교인다운 행동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역사학자로서 역사적 사건은 그 사건에서 더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더 분명하게 바라볼 수 있다는 원리에 근거해 20세기라는 시점과 예수가 활동했던 시기 사이에 놓인 수많은 세월에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도 예수에게 접근할 수 있다는 주장을 참을 수 없다. 내 책은 바로 그 '수많은 세월'을 되돌아보려는, 혹은 그 세월 속에서 흐르고 있는 것들을 꿰뚫어 보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나는 교회가 전례, 공의회, 신조를 통해 예수에 관한 올바른 이해를 지켜 왔다고 믿는다. 내 책을 읽는 이들(그리고 내 강연과 강의에 참석한 학생들)에게 이러한 내 생각과 믿음에 동의해달라고 강요한 적은 없으며 그럴 생각도 없다. 다만 나는 그들이 이를 진지하게 여겨주기를 바란다. 내 생각과 믿음을 거부한다 할지라도 말이다.
이제야 이 모든 이야기가 초판 서문 첫 문장, "나는 언제나 이런 책을 쓰고 싶었다"라는 말에 이미 담겨 있었음을 깨닫는다. 저 말은 일평생 내게 학문적인 영감을 주었던 사람, 동시에 신학적으로는 전혀 동의하지 않았던 사람이었던 아돌프 폰 하르낙Adolf von Harmack"이 지금으로부터 꼭 100년 전인 1899~1900년, 한 세기가 넘어가는 것을 기념해 '그리스도교란 무엇인가'라는 강의를 시작하며 했던 말과 뜻이 통한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언젠가 영국의 위대한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은 인류가 소크라테스scrates라는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좀처럼 기억하지 못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말한 적이 있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훨씬 더 중요한 사실은 한때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람이 인류 가운데 있었음을 인류가 여전히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이며, 앞으로 다가올 새 천 년에도 그러하다.
229 당신을 보이는 형태로 담아내려는 종교 예술을 우상 숭배로 여겨 금하신 하느님은 이제 앞장서서 보이는 형태로, 은유나 기념의 방식이 아니라 인간의 모습으로, 말 그대로 육신을 입으심으로써 당신을 드러내셨다. 형이상학적인 것이 역사 속으로 들어왔다. 영원 전부터 성부의 참된 형상이었던 우주적 로고스가 이제 시간의 일부가 되어 구원사를 이루는 사건들을 일으켰다. 인간은 이제 이를 신적이면서도 인간적인 인격을 지닌 형상으로 그려낼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건은 두 번째 아담인 예수와 두 번째 하와인 마리아의 등장을 예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때문에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를 그리는 것은 인류에게 나타난 하느님의 참모습을 그리는 일이 되었다. 물론 누군가가 예수상을 그린다는 것은 특수한 개인이 예수라는 독특한 인격을 그린다는 것을 뜻하지 어떤 추상적인 인간성을 그린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성상을 통해 묘사되는 예수의 인간성, 여기서 유래한 성인들, 예수 안에서 살게 된 모든 이의 인간성은 신성으로 충만해진 인간성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성상이 담아낸 것은 '신성화'된 그리스도의 몸이다. 동방 정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허락된 구원을 '신화神化'라고 부른다.
262 안셀무스에 따르면 이러한 하느님의 딜레마를 해소한 것이 바로 십자가의 지혜다. 올바름을 위배하는 것이 죽음에 이를만한 일이라는 하느님의 정의는 죽음보다도 생명을 바라시는 하느님의 자비와 충돌한다. 죄를 범한 존재인 인간은 영원히 멸망하는 길 외에는 그 죗값을 치를 수 없다. 또한 용서하기를 원하시는 하느님은 우주의 도덕적 질서를 무너뜨리지 않고는 용서하실 수 없다. 이러한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의 자비를 이행하고 하느님의 정의가 요구하는 바를 이행satisfy 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됨으로써) 값을 치를 수 있되 (하느님이 됨으로써) 무한한 대가를 치를 수 있는 존재 뿐이다. 게다가 그렇게 대가를 치르는 활동은 자발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자기 때문에 빚진 자는 그 대가를 치를 수 없다. 그런 이의 경우에는 자기 이외의 사람들에게는 효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인간이 되셔야 했으며 이에 그치지 않고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했다. 그렇게 해야 하느님의 자비를 온전히 성취하면서도 하느님의 정의를 이행해 '올바름'을 지켜낼 수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에서 맞이한 죽음으로 인해 하느님은 '올바름' 안에서 인간을 용서하실 수 있다.
승리자 그리스도라는 은유를 다룰 때도 그랬듯 여기서 관심을 기울여야 할 부분은 안셀무스의 대속 이론doctrine of satisfaction이 신학적으로 타당한가 그렇지 않은가가 아니다. 여기서 관심하는 바는 그의 논의가 예수가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라는 이해의 문화적 의의와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살피는 것이다. 승리자 그리스도라는 은유가 문학과 예술에 극적인 영감을 주었다면,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라는 은유에는 중세 서방 세계의 구조와 관습에서 이어져 내려온 주제가 담겨 있다. 안셀무스가 십자가에서 예수가 이룬 것을 묘사한 '대속'이라는 말은 본래 고해라는 관습과 교회법에서 유래했다. 즉 죄인은 자신이 지은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고 그 죄를 고백하여 사함을 받아야 하며, 이에 그치지 않고 그가 지은 죄가 일으킨 손실을 갚아야 한다. 이는 온 인류가 우주적 차원에서 지은 죄도 마찬가지다. 그러한 면에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맞이한 죽음은 이에 대한 배상과 보상의 행위라 할 수 있다. 인간의 배상하는 행위hunmun axts of satisfaction는 이와 연관이 있다. 그뿐만 아니라 교회의 대속 이론은 세속법과도 관련이 있다. 이를테면 고대 게르만족의 '속죄금'wergid 제도에 따르면 어떤 사람이 죄를 저질렀을 때 이에 대한 보상은 피해자가 입은 손해에 부합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이러한 논리로 볼 때 하느님이 손해를 입으셨다면 이에 대해서는 하느님이자 동시에 인간인 이가 치른 보상금만이 적합하다. "마치 그리스도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이라는 상황을 가정함으로써 안셀무스는 '십자가의 지혜가 온 인류가 처한 상황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하느님의 계시를 통해서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이나 인간의 이성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는 말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께로, 우리가 하느님이자 사람이시며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고백하는 그분께로 나아간 것이다.
이렇게 서방과 동방을 막론하고 십자가라는 징표는 (문자적으로나 은유적으로나) 중세 문화의 모든 영역을 가득 채웠다. 예루살렘의 키릴로스가 한 말(이후 온 세상은 십자가의 조각들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이 역사적으로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지와는 무관하게 이 말은 현실이 되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키릴로스보다 먼저 태어나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가 남긴 (키릴로스의 말보다 한결 부드러운 듯하나 실제로는 훨씬 더 장엄한) 말도 마찬가지로 현실이 되었다. 22세가 되었을 때 처음으로 쓴 책의 첫 번째 단락에서 그는 말했다.
그리스도가 짊어진 십자가의 능력이 온 세상을 가득 채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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