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 책 밑줄긋기/책 2023-26
- 2026. 4.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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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 세창클래식 17 |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 ![]()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지은이),이서규 (옮긴이)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차 례
옮긴이의 말
1판 서문
2판 서문
3판 서문
1권 표상으로서의 세계 첫 번째 고찰
근거율에 의존하는 표상: 경험과 학문의 대상
2권 의지로서의 세계 첫 번째 고찰
의지의 객관화
3권 표상으로서의 세계 두 번째 고찰
근거율에 의존하지 않는 표상: 플라톤적인 이념, 예술의 대상
4권 의지로서의 세계 두 번째 고찰
자기인식에 도달했을 때의 살려는 의지의 긍정과 부정
쇼펜하우어철학 해제
쇼펜하우어철학 해제
619 이 책 3권에서 쇼펜하우어는 근거율에 의존하지 않는 표상에 대해서 언급한다. 이 부분은 쇼펜하우어의 미학 또는 예술형이상학을 설명해 주고 있다. 그는 앞서 1권에서 표상의 세계를 다루었고 그리고 2권에서는 의지의 세계를 다루었는데, 이제 이러한 표상과 의지의 세계 사이에 위치한 이념에 대해서 언급한다. 물론 표상, 이념, 의지는 의지의 객관화로 연결되지만, 각각의 존재특성은 다른 것이다. 먼저 표상은 근거율에 의해 제약된 세계이며 인식주관이 근거율을 통해 파악한 세계이다. 표상의 세계란 인식주관인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라는 점에서 우선적으로 우리에게 중요한 세계이다. 그러나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표상세계가 실제로는 의지의 현상일뿐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즉 표상세계는 의지의 측면에서 보자면 다른 것이 아니라 의지가 객관화된 세계이며, 의지의 객관화의 가장 높은 단계에 있는 인간이 인식작용을 통해 파악한 세계일 따름이다. 다양한 개체들로 이루어진 표상세계에서 우리는 근거율을 통해 세계를 의미 있게 파악하려고 하지만 여전히 세계에 대한 피상적이고 유한한 해석만을 얻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근거율은 우리가 경험하는 표상으로서의 세계가 실제로는 의지의 현상일 뿐이라는 것을 확인해 줄 수 없기 때문이다. 근거율은 끊임없이 생성하고 소멸하며 개체들의 삶을 갈등상태로 이끌어 가는 의지의 본모습을 간파하게 하지 못하고 모든 개체의 존재가 일시적이며 상대적이라는 점을 통찰하지 못하게 한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추상적인 개념에 근거한 학문의 작업은 이러한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유일한 세계로 간주하며, 이러한 표상세계의 본질과 기원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려고 하지 않는다.
623 이 책 4권에서는 의지로서의 세계를, 의지의 객관화와 관련하여 다루었던 2권에서와는 다르게 고찰하는데, 여기에서는 주로 의지를 긍정하는 것과 의지를 부정하는 것이 지닌 의미를 논의한다. 쇼펜하우어는 이 4권에서의 논의가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보는데, 왜냐하면 이 부분은 인간의 삶과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 부분은 쇼펜하우어의 의지형이상학이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드러내 준다. 그는 여기에서 삶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리고 맹목적인 의지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논의하고 있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모든 개체는 살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 의지의 객관화 단계에서 시간과 공간, 즉 개체화원리에 의해 서로 구분된 개체들은 각각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고 보전하기 위해 노력하는데, 이런 점에서 개체들의 삶은 맹목적인 충동에 불과하다. 무기체, 식물, 동물 그리고 인간 모두가 이러한 살려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개체들은 태어나서 죽는 순간까지 삶을 의욕하는데, 여기에서 자신들이 존재하기 위해 다른 존재를 소멸시켜야만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한 개체는 다른 개체를 그리고 다른 개체는 또 다른 개체를 거리낌 없이 파괴한다. 따라서 앞서 말한 살려는 의지는 한 개체를 유지하게 하면서 동시에 다른 개체를 파괴하게 하는 원리가 된다. 이처럼 자연은 갈등적이고 파괴적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는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살려는 의지가 실제로는 개체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의지 자체를 위한 것이라는 점이다. 살려는 의지는 개체의 안녕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특정한 개체를 파괴해서라도 의지인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려고 한다. 의지의 긍정, 즉 살려는 의지의 긍정은 세계와 삶 속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의욕을 충실하게 실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지의 긍정은 각기 다른 다양한 개체와의 갈등을 야기하며 맹목적인 충동으로 드러난다. 그렇기 때문에 의지의 긍정은 특정한 개체에게는 만족을 가져오지만 다른 개체에게는 고통을 가져온다. 그러나 이러한 의지의 긍정이 도달하려는 종착점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개체는 끊임없이 의욕해야만 하는 고통스러운 상황에 내던져지게 된다.
626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의지의 부정은 금욕을 통해서 드러난다. 금욕은 모든 종류의 의욕을 거부하는 것, 즉 의지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는 것인데, 이러한 금욕의 삶은 진정한 그리스도교인, 힌두교인, 불교도들이 실천하였다. 그러나 의지 부정의 상태는 지속적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속적인 금욕이 필요하다. 금욕은 지속적으로 의지의 부정을 이어가기 위한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쇼펜하우어는 고통에 대한 단순한 인식을 통해 주어지는 금욕을 가리켜 좀 더 좁은 의미에서 좋은 것을 거부하고, 고통스러운 것을 의도적으로 찾는다는 의미에서 고행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고행은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단호하고 철저한 의지의 부정을 실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지속적인 고행이 가져오는 고통을 통해 살려는 의지에 이끌린 욕망들은 정화되어 삶에 대한 애착이 사라지고 살려는 의지는 부정된다. 이러한 고행은 우리로 하여금 체념의 상태에 이르게 한다. 그러나 이때의 체념은 소극적인 것이 아니라 고통과 죽음이 맹목적인 의지의 긍정이 가져온 결과에 지나지 않다는 점을 통찰하게 하고, 의지가 가져온 개체로서의 삶이 종말에 도달하는 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게 한다.
이처럼 동정심, 금욕, 고행에 이르게 하는 의지의 부정은 우리의 존재로 하여금 초월적인 변화를 겪게 하고 고통스러운 삶에 대한 완전한 체념이나 성스러움에 도달하게 한다. 여기에서는 의지의 모든 현상들이 덧없는 것이며, 실제로는 이 모든 것이 동일한 의지의 작용이라는 점이 간파된다. 그러나 쇼펜하우어는 살려는 의지를 부정하는 것이 결코 자살을 뜻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오히려 자살은 살려는 의지의 다른 표현일 뿐이며 자신의 새로운 존재를 위한 새로운 욕구일 뿐이라고 비판한다. 즉 자살은 우리의 삶을 고통스럽게 하는 의지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의지의 요구를 강하게 긍정하는 것이다. 자살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지금의 상황을 받아들이지 않고 보다 나은 삶을 원하기 때문이다. 보다 나은 삶을 의욕했다는 점에서 여전히 살려는 의지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따라서 자살하는 사람은 의지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의지가 드러난 지금의 개체상태를 부정하는 것이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의지의 부정은 살려는 의지의 지배를 받는 개체에게서는 모순적인 행위이지만 한편으로는 이를 통해 우리로 하여금 무를 경험하게 한다. 그러나 이때에 무는 텅 비어 있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근거율과 개체화원리에 의해 파악되지 않는 세계의 참된 모습을 드러내 준다. 즉 의지의 부정과 폐기를 통해 우리가 경험하는 무의 세계는 개체화원리, 근거율을 벗어나 있기 때문에 주관과 객관도 폐기되고, 의지가 없으므로 표상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이다. 살려는 의지는 이러한 무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거부하지만, 완전한 자기인식에 도달한 채 살려는 의지를 자발적으로 부정하는 사람에게는 맹목적인 의지의 지배를 받는 자신의 신체와 함께 모든 존재가 소멸해 버리는 무의 세계를 경험하게 된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이러한 무의 경험을 인도인들은 브라흐마로 합일한다거나 불교도는 니르바나에 도달한다고 말하는데, 진정한 종교에서 말하는 성자들의 삶은 다른 것이 아니라 이처럼 무의 세계에 진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의지를 부정한 사람에게는 더 이상 개체들의 갈등과 의욕의 소용돌이가 존재하지 않고 고요하고 평온한 무의 상태가 주어진다. 의지의 부정을 통해 이러한 무의 세계를 경험하는 것이야말로 쇼펜하우어의 철학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궁극적인 목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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