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엄 바커,캔디스 가우처: 농업과 세계사 2 - 대륙별 구석기 문화 | 케임브리지 세계사 4

농업과 세계사 2 | 케임브리지 세계사 4 | 그레이엄 바커.캔디스 가우처 엮음, 류충기 옮김 농업과 세계사 2 | 케임브리지 세계사 4 | 그레이엄 바커.캔디스 가우처 엮음, 류충기 옮김 - 10점
그레이엄 바커,캔디스 가우처 (엮은이),류충기 (옮긴이)소와당

CHAPTER 8 서남아시아의 초기 농업
CHAPTER 9 요르단의 아인 가잘 유적
CHAPTER 10 남아시아의 초기 농업
CHAPTER 11 파키스탄의 메르가르 유적
CHAPTER 12 중국의 초기 농업
CHAPTER 13 중국의 흥륭구 유적
CHAPTER 14 일본의 초기 농업
CHAPTER 15 일본 나라 분지의 논
CHAPTER 16 동남아시아와 태평양의 초기 농업
CHAPTER 17 뉴기니 쿠크 스왐프의 농부들: 뉴기니 고산 지대의 초기 농업
CHAPTER 18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초기 농업(기원후 500년경 이전)
CHAPTER 19 서아프리카 사헬 지대의 티치트 문명
CHAPTER 20 아메리카 대륙의 초기 농업
CHAPTER 21 페루의 난촉 밸리
CHAPTER 22 유럽의 초기 농업 사회
CHAPTER 23 폴란드의 초기 농부들

 


37 고든 차일드가 '신석기 혁명(Neolithic Revolution)"이란 말을 만들어냈을 때, 이 말이 그렇게 오래 사용될 줄은 본인도 몰랐을 것이다. 그는 수렵채집 경제로부터 농업 기반 경제로 넘어가는 전환기를 "신석기 혁명"이라 표현했던 것인데, 사실 그 "혁명은 인류 역사상 가장 심오하고 혁신적인 변화였다." 
37 그것이 생활 경제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은 틀림없다. 야생 식량 자원을 사육 혹은 재배하는 것, 그리고 항구적 정착 공동체를 수립하는 것이 이 개념에 포함되어 있다. 
38 식량을 어떻게 바라보고 또한 이용하는지, 그 관점의 문제라고 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는 기술적 및 사회적 혁신도 함께 요구되었다. 이 모두를 하나로 묶어서 "신석기 패키지"라고 한다. 
49 켄트 플래너리는 "광범위한 식량 수급 모델(broad spectrum subsistence model)"을 제시했다.
76 재배 및 사육, 그리고 마을의 정착 생활이 시작되면서 사회적 관계도 새롭게 바뀌었다. 신석기 시대에 시작된 몇몇 사회적 관념의 변화는 이후 시기의 변화를 이끄는 기반이 되었다. 즉 의례, 가족 및 공동체 구조, 횡적·종적 사회관계, 축제 등의 행위가 이때 모두 고도화되었다. 
77 나투프 문화에서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증거는 거의 발견된 것이 없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신분의 차이는 존재했던 것 같다. 
78 심지어 이 시기 교역 네트워크는 키프로스섬까지 연결되는 해상 교역망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79 PPNB 사회가 평등한 사회였는지, 아니면 위계질서가 있는 계층 구조의 사회였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80 재배 및 사육 경제와 마을의 정착 생활은 이 시대에 이미 확고히 자리 잡은 상태였다. 
81 대규모 공동체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PN 시대의 사회 조직은 아직 가정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초보적 단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211 중국 대륙은 굉장히 넓어서 극단적으로 서로 다른 생태 환경들이 공존한다. 
211 양자강은 쌀, 황하강은 조와 기장이었다.
218 세계의 다른 지역들과 비교해서 동아시아가 놀라운 점은, 토기가 매우 이른 시기부터 발견된다는 사실이다.
219 반면 서남아시아의 토기 사용은 상대적으로 늦은 약 8500년 전에 시작되었다.
219 중국은 수준 높은 토기를 제작하여 식재료를 삶거나 찌는 도구 혹은 담아 먹는 그릇으로 사용했다.
219 유라시아 서부에서는 글루텐 단백질이 함유된 곡물로 빵을 만들었고, 동아시아에서는 끈끈한 전분 성분이 함유된 다양한 작물들, 예컨대 쌀이나 기장 등이 선택되었다. 
220 동아시아 요리에서 선호하는 곡물의 성질은 차진 끈적임이 핵심이다. 찹쌀과 찰기장이 대표적이다.
220 "끈적이는 배유 전분(glutinous endosperm starch)" 문화권이라고도 한다.
227 서남아시아에서 초기 농업이 시작된 유적지의 지형 조건도 충적토였다는 점은 어떤 공통점을 짐작케 한다. 연구자들은 이러한 패턴을 가리켜 "지리적 기회 포착(geological opportunism)" 혹은 "저수지 농법 (catchment farming)"이라 했는데, 이는 중국 북부의 기장농업과 관련해서도 적용될 수 있는 개념이다. 
230 신석기 시대 사람들이 오직 기장만 먹고 살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신석기 중기를 지나면서 새로운 사육종 및 재배종 자원이 식생활에 등장했다. 예를 들면 돼지, 콩, 대마 씨 등이다. 
231 돼지는 중국에서 특히 이른 시기부터 사육된 동물이었다. 
232 야생 멧돼지라면 결코 이런 정도로 기장을 섭취할 수 없었을 것이다. 돼지가 기장을 섭취했다는 것은 곧 돼지를 울타리 안에 가두어 사육했고, 인간의 부엌에서 나오는 음식물 쓰레기 혹은 기장을 먹은 인간의 분변이 돼지 먹이로 제공되었음을 의미한다. 
235 최근 식물고고학 연구를 통해 분명하게 밝혀진 것처럼 벼농사는 수렵채집인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들은 다양한 견과류, 특히 도토리나 수상 식물의 열매를 채취하는 가운데 벼농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러한 견과류를 채집하여 저장하다가 점차 정주 생활을 하는 사회가 형성되었고, 이들이 습지의 가장자리 물이 얕은 지역을 관리하면서 그곳에 다년생 야생벼를 심기 시작했다. 
238 양자강 중류 유역에서 생산성이 향상되고 벼의 비중이 증가하면서 인구가 성장했다. 
240 양자강 유역에서 신석기 후기에 벼농사가 확고히 자리 잡으면서 이를 기반으로 더 남쪽으로 복건, 광동, 광서까지 농업이 전파되었다. 
241 두 종류의 기장류 작물이 상호 보충적 관계였던 중국 북부와 달리 남부에서는 기본적 주식 작물을 대체할 보조 작물이 존재하지 않았다. 
241 특히 지금으로부터 4000년 전 이후로 양자강 유역이 황하강 유역에서 출현한 국가 체제에 편입되면서 밀과 콩 같은 곡물이 남쪽으로 전래되기에 이르렀다. 
243 기원전 2000년경에 청동기 야금술이, 기원전 1200년 경에 말, 바퀴, 전차(수레) 기술이 전해졌다.
244 확실한 시기는 기원전 1000년경이다. 이는 식재료 세계화의 초기 에피소드로, 유라시아의 동부와 서부의 곡물이 서로 교환되었던 역사다. 
245 중국은 곡물 생산량에서 세계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주로 쌀, 기장, 조, 밀, 보리, 옥수수, 감자, 땅콩을 생산한다. 이러한 작물들은 그 자체로 구대륙과 신대륙의 전 지구적 교환 체계에 따른 결과물이다.
246 다양한 곡물과 관련된 텍스트 자료는 안양에서 출토된 상 나라의 갑골문에 처음 등장한다.
247 전설 속의 "오곡"이 실제 유적으로 확인된다. 최근 중국 최초 왕조(하 나라)의 수도로 추정되는 이리두 유적에서 기장, 조, 벼, 콩, 밀, 대마가 탄화된 상태로 발굴되었다. 

275 식량 자원이 어떻게 생산, 처리, 분배되었는지, 사회적 지위 혹은 부를 창출하기 위해 이를 어떻게 조정했는지를 살펴보려는 것이다. 
277 이러한 차이는 곡물 생산의 사회적 과정에서 모종의 변화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청동기 시대에 속하는 하가점하층 문화에서는 도정 작업이 주로 집 안에서 이루어졌고, 아마도 소규모로 조금씩 도정을 해서 먹었던 것 같다. 
278 이 시기의 집 안 구조에는 주거지와 저장 공간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저장 공간은 돌로 벽을 쌓아 만든 좁은 공간이었다. 그 사이에 식량 자원을 보관했으므로 가정의 구성원들만 접근이 가능했다.
278 요약하자면 당시 생산과 소비의 기본 단위는 가족 단위였다. 여기에 비해 홍륭구 I 구역에서는 생활의 면모가 사뭇 달랐던 것 같다. 보다 큰 규모의 공동체가 함께 작업에 참여했던 것이다. 곡물 도정이 완벽하게 이루어진 상태로 발굴된 것으로 보아, 도정 과정은 주거지 핵심 구역이 아닌 외부의 어딘가에서 실시되었다. 

285 일본 열도에서 최초로 국가적 차원의 사회 구조가 발달하면서 대규모 농지 조성과 농업 생산물에 대한 중앙 집중식 통제도 이루어졌다. 
285 7세기에 최초의 중앙 집권 국가가 수립되었을 때, 남성 인구를 기준으로 논을 분배하고 세금은 쌀로 거두었다.
285 동물 사육은 일본 농업에서 별로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다.
287 논과 선사 시대 주거지가 함께 발굴된 것은 20세기 중엽이 최초였는데, 그곳이 바로 시즈오카현 도로 유적이었고, 시기는 야요이 후기였다. 
289 일본 고고학은 대개 야요이 시대부터 논의를 시작했다. 기존에는 야요이 시대의 시작을 기원전 300년경으로 보았지만 최근에는 기원전 제1천년기로 수정되었다. 이 무렵 벼농사가 시작되었고, 나중에 신토라고 불리게 될 문화 및 신앙이 구체화되었으며, 고문헌에서 일본이라는 명칭도 최초로 등장했다. 또한 같은 시기에 새로운 도래인이 일본으로 건너가 기존의 조몬인과 뒤섞였으며, 오늘날 대부분 일본인의 조상이 바로 그들이었다. 
291 벼농사에 기반을 둔 야요이 문화는 기존의 수렵채집 문화, 원주민 문화, 조몬 시대의 문화를 대체했다. 전통적으로 야요이 이전의 문화는 오늘날 일본인의 직접적 조상이 아니라고 보았다. 
293 조몬 시대의 생활 방식은 이미 농업의 "사전 적응" 단계에 가 있었다. 
301 지구 기온이 내려가는 시기에는 한반도 지역의 생산력에 문제가 생겨 이동을 촉진했다고 보았다. 엘리트층의 매장지 발굴 자료로 보아, 당시 한반도에는 이미 상당 규모의 정착지가 발달하고 사회적 분화가 진행되어 있었다. 이주 시기는 기후 조건이 심각하게 악화된 기원전 850~700년으로 추정되는데, 규슈 지방에서 발견되는 문양이 없는 유스식 토기와 관련이 있다. 
314 기원후 5세기에 이르러 농업의 잉여 생산물 저장과 통제 방식에 변화가 있었다. 오사카현 호엔자카 유적과 와카야마현 나루타키 유적에서 중앙 집중식 대규모 저장 시설이 발견되었다. 
317 5세기에는 새로운 대규모 공공 건설 프로젝트도 시행되었다.
318 벼농사는 대규모 인구 증가를 뒷받침했다. 
318 논농사는 고도의 사회적협력과 공동체의 단결 및 상호 의존을 필요로 했다. 이는 사회 내부적으로 발달하던 위계질서와 상충되는 요인이 되었다. 이런 갈등은 야요이 시대 말기까지 지속되었다. 
319 벼농사는 작업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세계관을 바꾸어놓았을 뿐만 아니라 사회 조직의 변화를 가져오기도 했다. 차별의 세습이라는 측면에서 사회적 분화가 최초로 나타났는데, 이를 촉진한 것이 벼농사였다. 
319 야요이 시대 말기부터 이 지역의 엘리트 계층은 별도의 매장지 혹은 고분에 매장되었다. 엘리트의 권력은 경쟁과 전쟁을 통해 드러났겠지만, 농업의 성공은 주로 사회적 단결과 협력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320 바로 이러한 긴장 관계가 야요이 사회에 내재되어 있었다. 고도로 밀집한 인구가 서로 가까이 살게 되었고, 토지와 자원 및 물건을 두고 점차 경쟁이 심화되었으며, 갈등이 언제나 평화적으로 해결될 수는 없었다. 고고학적으로 폭력의 증거도 드러났다.  
329 일반적으로는 벼농사가 규슈 북서부에 처음 도입된 시기를 기원전 제1천년기로 본다. 한반도를 통해서 전래되었거나, 혹은 중국 남부 지역에서 직접 전해졌을 가능성도 있다. 벼농사는 처음 도입된 발판을 딛고 불과 몇 세기 안에 여러 곳으로 퍼져 나갔다. 제대로 조성된 논과 그에 부속되는 관개 시설이 홋카이도를 제외한 일본 열도 전역에 등장했다. 벼농사는 금속 도구(청동기와 철기) 및 직물과 함께 등장했다. 새로운 기술들이 도입되는 복합적인 과정에서 상당한 정도의 인구 변화도 일어났다. 이주민이 대륙으로부터 건너왔고,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일본어가 그때 형성되었다. 농업 때문에 지역 내에서 위계질서에 입각한 사회가 만들어졌다. 새로운 엘리트 계층이 새로운 사회를 이끌었다. 그들은 일련의 의례 행위를 통해 권력을 정당화했고, 의례에는 농업과 사냥 및 전쟁에 근거한 새로운 상징체계를 반영했다. 

672 농산물 관리 못지 않게 미래, 현재, 과거를 관리하고자 하는 사고방식은 새로운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공동체 안의 일부 가구가, 혹은 일부 공동체가 더 좋은 땅을 차지했다면 생산량도 더 많이 얻었을 것이다. 대가를 기대하지 않는 선물이나 관대함도 사회의 불균형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더욱 존경을 받는 사람들이 있었고, 공동체의 필요에 따른 공동 노동을 소집할 때 그들은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위치에 가까이 가 있었다. 분쟁이 있을 때면 그들을 찾아가 조정을 요청했을테고, 그런 일에 익숙한 그들은 능숙하게 간극을 메워주었을 것이다. 최근 거의 전 세계적인 조사 결과에 따르면, 사회적 불평등이 발생한 경로는 오랜 시간에 걸쳐 매우 다양했다. 물론 불평등이 심화될수록 내부적 저항도 당연히 존재했다.  
674 그러한 가운데 어떤 주도적 인물이나 우월적 가문의 계보를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이 당시에는 그리 새로운 현상만은 아니었다. 집단과 공동체 조직화의 증거는 이미 그 이전 세대에게도 낯설지 않은 일들이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에게는 신석기 시대에 관하여 더욱 복합적이고, 상세하고, 분명하고, 지역적으로 특화된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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