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팔라 외: 농업과 세계사 1 - 대륙별 구석기 문화 | 케임브리지 세계사 3

 

농업과 세계사 1 | 케임브리지 세계사 3 | 마리아 팔라 외 농업과 세계사 1 | 케임브리지 세계사 3 | 마리아 팔라 외 - 10점
마리아 팔라 외 (지은이),그레이엄 바커,캔디스 가우처 (엮은이),류충기 (옮긴이)소와당

CHAPTER 1 서론: 농업 이후의 세계
CHAPTER 2 고유전학
CHAPTER 3 언어학적 근거를 통해 본 농업의 기원
CHAPTER 4 농업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고생물학을 통해 본 건강과 음식
CHAPTER 5 공동체
CHAPTER 6 목축
CHAPTER 7 농업과 도시화

 


31 농업은 자연 경관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을 뿐 아니라 도시화와 복합적 사회 구조 및 불평등을 초래했고, 이후의 역사를 완전히 압도했다. 플라이스토세에 약 600만 명에 불과하던 인류가 오늘날 70억 명까지 늘어난 것도 농업 때문이었다. 

 

32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서 "agriculture"는 "땅을 경작하는 과학과 기술, 곡물의 수확과 가축의 사육 포함"으로 정의되고, "farming"은 “토지를 경작하고 가축을 기르는 사업"으로 정의된다. 

32 옥스퍼드 영어 사전은 또한 "pastoralism(목축)"을 특히 "산업화되지 않은 유목 사회"에서 "양, 소, 기타 초식 동물을 기르는 일"이라고 정의한다. 이는 식량의 대부분을 가축(즉 사육종 동물)에 의존하는 생활 경제를 의미하며, 곡물 기반 사회에 대립되는 개념이다. 곡물 기반 사회에서는 가축 사육도 곡물 재배와 잘 결합되어 있으며, 흔히 가축 사육이 보조적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다.  

33 선사 시대 세계의 생태 환경은 매우 다양했는데, 왜 어디서나 결국은 농업을 더 유리한 생활 경제로 받아들였을까? 얼핏 단순해 보이는 이 질문은 지금도 여전히 연구자들을 당황케 하는 문제로 남아 있다. 

40 농업의 기원과 관련해서는 대중적으로뿐만 아니라 학계에서도 흔히 받아들여지는 강력한 전제가 하나 있었다. 즉 수렵채집에서 농업으로 이행하는 과정이 "일방통행"이었다는 가설이다. 

40 우연한 기회에 포레이징에서 출발하여 한 걸음씩 체계적인 농업으로 나아가는 방향이었다. 이는 1872년에 호더 웨스트롭이 제시한 가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관점이었다. 

42 세계적으로 식물 재배 및 곡물 생산이 먼저 시작되고 나서 나중에 가축 사육이 시작된 경우가 많았으나, 아프리카에서는 이 순서가 정반대로 나타났다. 

42 농업의 발전은 철저히 인간 중심적인 여정이었다. 그 과정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결과가 상충되는 경우가 많았다. 홀로세에 와서는 인간과 자연환경의 관계가 플라이스토세의 균형에서 벗어나, 지구상 다른 모든 존재의 희생을 딛고 오직 인간의 생존과 인구 확장에 유리한 방식으로 바뀌었다. 농업이 등장한 이후의 세계는 인류에게 자연계에 대한 종주권과 주도권을 안정적으로 보장해주었지만, 이외에 지속 가능한 지구의 건강과 관련된 모든 것은 불안해졌다. 대표적으로 선택된 동식물의 산업적 개발 및 이와 관련된 인구 증가 문제가 있다. 농업이 등장한 이후 발전을 거듭한 결과, 세계의 역사는 곧 인간의 역사가 되고 말았다. 

49 예상치 못한 모든 부정적인 결과에도 불구하고 농업은 많은 사회에 안정적인 기반을 제공했다. 시간이 갈수록 응집되고 체계화된, 소수의 자원에 기반을 둔 사회가 늘어났다. 하나의 사회 형태로서는 이런 사회가 상당히 안정적인 모델이었다. 

79 mtDNA는 인류의 계통 발생을 재구성하고 진화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데 유전학서 mtDNA가 결정적 역할을 하는 또 하나의 주제가 있다. 바로 유전적(발생론적) 시간측정 분야다. 1960년대부터 이른바 "분자시계(molecular clock)"라고 하는 이론이 제기되었다. 

126 개별 언어들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곧 그들이 공통의 조상, 즉 과거 어느 시점에 사용되었던 하나의 조어(祖語, protolanguage)로부터 갈라져 내려온 후손이라는 의미다. 후손 언어는 분열된 세포와 같다. 단 세포 생물이 세포 분열을 하듯이, 조어는 여러 개의 파생 언어 (daughter language)로 갈라진다. 

127 언어 계통수의 구성(언어학적 층서학)은 관련 언어들 사이의 관계도를 그리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 언어 사용자들의 공동체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분화되어왔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127 시간에 따른 언어의 변화를 알려주는 핵심 열쇠는 바로 어휘(lexicon)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특정 사물이나 행위를 일컫는 단어의 변화, 새로운 단어의 추가, 기존 단어의 쇠퇴나 소멸 등이다. 

129 또 하나의 측면으로 문화적 현출성(cultural salience) 또한 고대 어휘의 역사적 해석과 관련이 있다. 어떤 대상이 과거 어느 사회의 문화적 맥락에서 대단히 돌출된 의미를 지녔다면, 역사학에서 그러한 맥락은 두 가지 경우로 해석될 수 있다. 첫째, 어떤 대상이 문화적으로 크게 대두(현출)되었을 경우, 그 어휘는 쉽게 사라지지 않고 오래도록 전해질 가능성이 크다. 또한 그러한 대상을 다른 어휘로 지칭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둘째, 문화적으로 대두(현출)된 대상과 연관 지어 언급 혹은 설명하는 보조적 어휘들이 많이 등장하게 된다.  

201 수렵채집인 집단에 따라 채식과 육식의 비율은 매우 크게 달라진다. 

201 그들의 식생활은 "농업인의 식생활"에 비해 균형이 잘 잡혀 있고, 섭취하는 영양소가 다양하며, 단백질의 비율도 더 높다.

202 수렵채집인에게는 유당 분해 효소도 드문 편이다. 인간이 유당 분해 효소를 가지게 된 것은 역시 농업 이행 과정에서 진화한 결과였음을 알 수 있다. 

207 수렵채집인의 생활 양식이 오히려 인간의 신체 진화에 걸맞음에도 불구하고 농업이 시작되면서 "구석기 방식의 식생활"을 포기했다는 사실이다. 농업 도입 이후 결과적으로 인간의 진화와 식생활이 일치하지 않는 문제가 발생했다. 이는 오늘날의 우리에게까지 남아 있는 문제다. 우리도 여전히 정주적 생활 방식을 고수하고 진화를 거스르는 곡물을 먹는다. 

238 수렵채집인과 수렵채집인-농업인이 뒤섞인 대가족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민속학 연구를 참조하자면, 이러한 주거지에서는 구성원끼리 저장시설을 공유했다. 농업 의존도가 높아질수록 핵가족이 특징적 주거 단위로 대두되었다. 이들은 서로가 별개의 집에 살면서 창고를 각자의 집에 두었다. 이는 곧 농업의 이점을 누리는 동시에 위험성을 감수할 주체가 집단 차원에서 핵가족 차원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플래너리에 의하면, 초기 농업 공동체에서 공유가 갈수록 제한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농업은 토지 생산성을 높여주었지만, 동시에 평균 생산량의 차등이 발생했다. 둘째, 공유를 제한함으로써 균형 잡힌 상호 교환을 확인하기가 더 쉬워졌고 '속임수"를 방지할 수 있었다. 셋째, 공유의 축소, 토지 보유의 제한, 가정 단위의 사적인 저장으로 경제적 판단이 더욱 유연해졌다. 

239 집단이란 공동 거주를 하는 가족에서부터 공동 작업을 하는 무리, 공동 의례에 참여하는 "회중", 그리고 더 넓은 네트워크까지 포함된다.  

243 경작을 위한 잡초 제거, 작물 재배, 수확물 처리, 소비 등이 모두 집단 작업과 관련되어 있다. 

243 "공공" 건물이 존재했다면, 이는 곧 가정 단위를 넘어서는 협력 관계가 있었다는 의미다. 물질문화의 측면에서 가정과 정착지(마을)의 유사성과 차이점을 살펴보면 공동 거주의 범위를 넘어서는 사회적 집단의 면모가 드러날 것이다. 장례 풍습은 고고학에서 사회적 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기회를 제공한다. 

267 신석기 시대 유물 가운데 서유럽 대서양 연안을 따라 있는 무덤 유적은 자못 충격적이다. 무덤을 조성한 재료는 바위, 작은 돌, 흙, 목재 등 다양했다. 그곳은 수십 명에서 수백 명까지의 유골을 모아두는 납골당이었다. 

279 서유럽에서 발달한 집단 무덤과 달리 한반도의 고인돌에는 한 사람만 묻혔다. 이는 당시 갈수록 강화되던 사회적 불평등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342 식량 생산과 농업(그리고 목축) 잉여 생산물 처분은 특히 문화 및 자연환경적 맥락에서 이루어졌다. 이는 결국, 전 세계적 연구를 통해 확인되는 바 (산업화 이전의) 도시발달로 이어졌다. 또한 도시의 규모와 인구 밀도 등 인구압이 커지면서 도시민(그리고 새로운 사회·정치적 제도)은 농업의 혁신을 촉진했고, 그에 따라 다양한 농업 관련 기술과 재배 방식이 개발되었다. 

342 고고학적으로 초기 도시를 비교 연구하는 데 핵심은 식량 생산을 둘러싼 복잡한 관계(어디서, 누구에 의해, 누구를 위해, 관련 상징 등), 잉여 생산물의 처분, 교환, 운송 관련 결정, 그리고 식량과 농산물을 둘러싼 권력(power-authority) 등이다. 

343 도심에서 볼 수 없는 정직과 경건함이 (목가적) 농촌의 특징이라고 했다. 이런 개념 때문에 점차 타락한 도시 엘리트라는 이미지도 만들어지게 되었다. 억압받는 민중은 그들에게 농업 잉여 생산물을 빼앗기고, 이를 기반으로 그들의 더러운 압제가 유지된다는 담론이다. 이러한 담론의 대표적 사례가 야훼 숭배주의(Yahwism)였다. 그들의 성서 해석에서는 농촌도시 담론이 암묵적으로 끈질기게 유지되었다. 

344 야훼 숭배주의자들은 도시화 과정에서 신과의 약속을 통한 신과 인간의 관계도 빼앗겼다고 말한다. 위계질서는 도시의 근본적 전제 조건이다. 

345 야훼 숭배주의에서는 이상화된 목가적 경건함이 긍정적 가치로 평가되며, 도시 거주민의 타락한 생활은 저주를 부른다.

346 야훼 숭배주의 전통에 따른 유대-기독교식 경건함의 가르침은 역사학에서 청동기 시대 레반트 지역을 해석하는 데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당시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악하고 타락한 지중해 연안 도시들에 대항하여 봉기를 일으킬 때였다. 

347 야훼 숭배주의자들의 해석에 따르면, 도시 생활은 곧 절대 복종, 군주에 대한 절대 충성이었다. 군주의 권위는 전제 군주와 도시의 신격 사이의 배타적이고 개인적인 관계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막스 베버가 말한 왕권신수설의 전조였다. 

358 사실 결정적 요인은 어떤 농업 시스템이든 이를 가능케 하는 사회·정치·경제적 의무 시스템이다. 그래서 의사 결정에 필요한 자연환경 요인, 기술적 요소, 사회적 제약을 검토해야 하고, 정보의 활용 능력이나 문화적 규범의 유연성이 다양한 요소들을 얼마나 강화했는지 혹은 얼마나 제한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365 아테네와 로마는 지속 가능한 농업 시스템을 유지했다. 그래서 그 주변의 농토에서는 지금도 농사를 짓고 있다. 지속가능한 생산의 차원에서 본질적인 문제는 문화적 관습과 목표가 근본적으로 농업의 방식을 결정한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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