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츠라 쇼류,이나미 마사히로: 인식론과 논리학 - 시리즈 대승불교 9

 

인식론과 논리학 | 시리즈 대승불교 9 | 가츠라 쇼류 외 인식론과 논리학 | 시리즈 대승불교 9 | 가츠라 쇼류 외 - 10점
가츠라 쇼류,이나미 마사히로,후나야마 토루,이와타 타카시,오노 모토이,가타오카 케이,모리야마 신야,타니 타다시 (지은이),박기열 (옮긴이)CIR(씨아이알)

 

제1장 불교논리학의 구조와 그 의의 가츠라 쇼류
제2장 존재론-존재와 인과 이나미 마사히로
제3장 인식론-지각의 이론과 그 전개 후나야마 토루
제4장 논리학-법칭의 논리학 이와타 다카시
제5장 진리론-프라마나란 무엇인가 오노 모토이
제6장 언어철학-아포하론 가타오카 케이
제7장 전지자 증명, 윤회의 증명 모리야마 신야
제8장 찰나멸 논증-시간 실체에 대한 도전 다니 타다시


51 '있다', '존재한다'는 말은 어떤 것인가? 또한 진실로 존재하는 것은 무엇인가? 무아 · 무상을 설한 석존은 사물에 고정적인 본체를 보고 취하는 입장을 거부하고 모든 것은 다른 것과의 관련성을 기반으로 일시적으로 성립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간파했다. 우리 인간을 포함한 이 세계는 다섯 가지 요소(5온)로 분석할 수 있고, 자아 등의 영원하고 절대적인 본체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고 설했다.  

초기불교의 분석적 사고를 더욱 발전시킨 설일체유부의 아비달마 철학에서는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근본요소로서 75가지의 다르마에 실재성을 인정한다. 또한 특정의 다르마는 특정의 현상으로서는 순간적인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과거 · 현재 · 미래 3세에 걸쳐 존재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 다르마들은 '6인45과' 등의 개념이 보여주는 것처럼 각종의 인과관계로 결합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복수의 요인들이 일시에 만나면 결과를 낳는다는'원인 총체'에 대한 생각이나 순간적인 존재가 인과적으로 결합하여 연속체를 형성한다는 '상속'의 개념도 이 아비달마의 체계에서 나왔다. 

아비달마 시대의 범주론적 실재론에 대한 반성을 바탕으로, 대승반야경전의 공사상을 배경으로 등장한 나가르주나 Nagarjuna(용수 150-250년경)는 본체를 가진 존재를 인정하는 것을 철저히 거부했다. 일체의 것은 그 자체, 무자성, 공이고, 우리의 언어, 개념에 의해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두 허망이다. 5온이나 75법의 다르마도 예외가 아니다. 또한 이 무자성, 공은 사물은 단지 다른 것과의 관련성(연기)에 기초하여 성립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관련성 자체도 실제시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며, 무자성, 공이다. 아무튼 그것이'있다'고 집착하는 것 자체가 부정되는 것이므로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존재론 그 자체가 그 기반을 잃어버리게 된다. 

93 인도불교에서 바른 인식(지식)이란 무엇인가? 그것을 획득하기 위한 수단은 무엇인가? 하는 주제로 성립 발전한 분야가 있었다. 그것은 현대 연구자들 사이에서 널리 불교지식론으로 불린다. 또는 불교논리학, 불교논리학·인식론, 불교의 프라마나 전통등으로도 불린다. 이것들은 어느 것이나 현대 연구자에 의한 명명이고, 이 이론을 담당했던 사람들은 학파라는 관점에서 보면 경량부Sautaritika와 유가행파Vijinavadin(유학파)의 학설을 기초로 하는 사람들이었다(중관학파도 일부 관여했다). 그 의미에서 불교지식론학파(불교논리학파)는 경량유가행종합학파라고도 많이 불린다. 

불교지식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대상 세계를 바르게 알기 위한 유효한 지식 수단으로서, 지각과 추리라는 두 종류만 의의가 있다고 인정하고, 그 두가지에 대한 철저한 탐구를 통해 객관적인'존재'와 주관적인'우리'의 진실한 형태를 알고 최종적으로는'깨달음'에 도달하고자 하는 지식의 체계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지식론의 근본과제는 지각이란 무엇인가? 추리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아는 것이다. 이들의 정의, 종류, 거기에서 배제되는 것(유사각, 잘못된 추리) 등에 관해서 불교 이외의 사람들도 포함하여 활발하게 논의되고, 많은 중요한 문헌이 편집되었다. 

239 붓다는 어떻게 일체를 알 수 있는가? 그 원인으로 생각되는 것은 지각 또는 추리이다. 그러나 지각은 전지의 원인이 될 수 없다. (1) 만일 단일의 지각수단에 의해서 일체를 안다고 한다면 그는 눈에 의해서 맛을 알게 되어, 인식 수단과 대상의 대응관계(눈에 색, 혀에 맛 등)가 무너진다. (2) 또한 아무리 탁월한 감각기관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 감각기관에 의해서 그것에 대응하는 대상 영역을 넘어선, 다른 대상 영역(귀에 색 등)을 알 수 없다. (3) 따라서 지각은 현존하는 것을 대상으로 하는 이상, 미래의 것을 지각에 의해서 알 수 없다.  

여기서 쿠마리라가 염두에 두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불교도의 주장은 주석자 움베카Umbeka가 인용하는 것처럼 아함경에서 종종 언급된다. 즉 붓다가 명상수행의 끝에 획득한 신적인 시각에 의한 중생의 과거세. 미래세에 관한 지각일 것이다. 다시 말해서, 경전에서는 "비구들이여, 나는 천안에 의해서 (중생의) 선취·악취를 본다"라고 설해져, 붓다의 신적인 시각이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다.  

267 적어도 불교의 문제는 1인칭 자기 자신의 죽음(소멸)을 직시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여기에서 직시란 어떤 생명체의 '생체에서 사체로의 변화'를 타인과 같이 객관적 · 과학적 또는 문헌학적으로 대상으로서 관찰하는 것이 아니다. 타자의 시체를 볼 수 있으며, 또한 그 사람의 죽음. 비존재를 "그 또는 그녀는 죽었다."라고 말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나의 죽음을 상정하여 말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나는 나 자신의 죽음을 절대적으로 경험할 수 없고, 자신의 시신을 보는 것도, 또 "나는 죽어있다."라고 말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왜냐하면'나그 자체'가 죽었기 때문이다. 텍스트 · 문헌에서 '말할 수 없는 것'이란 자기 자신의 죽음이다. 이 대상화할 수 없는 1인칭의 죽음을 '절대적 부정으로서의 비존재 · 무'로 부르는 것으로 한다. 이것에 대해서 대상화된 시체나 사후의 존재는'상대적. 정립적 부정으로서의 비존재 · 무'로서 구별되어야 할 것이다. 이 '생'과'사'는 통상의 논리에 기반을 두고 '대립 · 모순하는 두 항목의 상대성'을 가지고 말한다. 여기서 사는 생을 배제하는 언어의 대상으로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죽음은 대상화할 수 없기 때문에 죽음을 언어의 지시 대상으로서 쓸데없이 말하는 허구가폭로된다. 철학·종교 레벨의 나의 삶(존재)이 처음부터 1인칭의 자기 자신의 죽음(소멸)을 내장하고 있다는 근본적 모순(일체개고)을 통찰해야만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절대적 무 · 비존재로서의 죽음을 전제로 살고 있다. 

270 현실의 무상 앞에서 우리의 생존하고자 하는 욕망은 철저히 해체된다. 따라서 '무상'은 죽음의 공포, 슬픔과 고뇌를 초래하는 원인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이 의미에서 무상은 부정되고, 극복되어야 하는 것이다. 거기서 '무상'과 '무상하지 않는' 세계를 상정한 것을 바탕으로 무상의 세계를 현상으로 보고, 실존하는 무상하지 않은 세계로 도피하는 시나리오는 알기 쉽다. 

그러나 석존은 다름 아닌'그 무상' 자체에서 '각성으로서의 전환을 통찰했다. 일체가 무상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죽음의 공포. 슬픔. 고뇌를 초래하는 원인을 단절할 수 있다. 항상된 것은 단절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무상이라는 동일한 키워드 그 자체에 서로 모순되는 의미가 들어가있다.'고뇌를 초래하는 원인으로서의 '무상'과 고뇌를 소멸시키는 원인으로서의 무상'이다. 석존이 통찰한 무상 · 찰나멸은 그 자신의 말인 동시에 그 언어의 지시 대상이 자기동일성을 부정하는 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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