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인 A. 믹스: 그리스도는 질문이다

 

그리스도는 질문이다 | 비아 제안들 시리즈  | 웨인 A. 믹스 그리스도는 질문이다 | 비아 제안들 시리즈 | 웨인 A. 믹스 - 10점
웨인 A. 믹스 (지은이),김경민 (옮긴이)비아

들어가는 말
1. 답변과 질문
2. 누구 내 예수 아는 분 있나요? - 교리와 낭만주의 사이에서
3. 기억과 고안 - 예수 그리스도의 형성
4. 함께 생각해 볼 이야기 - 십자가 처형에서 은유로
5. 성서는 유리를 통해 어둡게 …을 가르친다
6. 예수가 마지막 말씀인가?

옮긴이의 말

 


27 초기 그리스도교 변증가들은 하느님의 궁극적 계시를 역사적 특정 시점에 형성된 기억의 사건에서 찾는 이 '걸림돌'이야말로 그리스도교의 주장이 그리스 및 로마의 신들에 관한 '우화, '신화'와 다른 지점이라고 주장했다. 고전 철학 학파들에게 훈련을 받았던 다음 세대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은 열정을 가지고 보편성과 특수성을 통합하는 난해한 문제를 해결하려 애썼고, 이성과 계시, 자연과 은총을 섬세하게 종합하는 데 성공했다. 계속해서 다시 검토해야 하기는 했지만, 적어도 중세 후기에 이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레싱의 시대에는 점점 더 많은 서유럽 사상가들이, '이교도'만 신화를 만들 수 있는 존재가 아님을 지적했다. 그리스도교인들도 때때로 이런 우화를 만드는 죄를 범했다.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자들은 교황이 자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우화'와 '신화'를 도입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그리고 18세기에 이르자 사람들은 성서의 저자들도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신화를 사용했다고 감히 말했다. 

167 바울에게 십자가의 로고스는 단순히 예수의 십자가 처형에 관한 이야기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에 사로잡힌 이들에게는 현실의 논리 자체가 바뀌었다는 것을 뜻한다. 십자가의 말씀은 새로운 창조다. 이 변화는 간접적으로, 은유를 통해서만 표현할 수 있다. 

바울의 핵심 이야기는 단순하면서도 놀라웠다. 하느님의 아들이자 기름 부음 받은 사람은 바로 그 예수였다. 그는 가장 수치스럽게 십자가에 못 박혔고, 죽었고, 땅에 묻혔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되살리시고 하늘에서 자신의 보좌와 이름을 나누도록 높이셔서, 만물이 그에게 굴복하고, 하느님만이 의로움 가운데 모든 백성과 창조물을 통치하실 때까지, 주님으로서 하느님의 우편에 앉게 하셨다. 회심한 바울의 생애는 이 이야기가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며 사는 삶에 대한 그의 관념을 산산조각 내고 다시 창조했다는 깨달음에서 시작된다. 또한, 바울은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백성으로 세상에 존재하는 근본 이유 또한 자신과 똑같다고(산산조각 나고, 다시 창조되었지만, 보존된다고) 생각했다. 

226 우리 그리스도교인들이 섬세함을 요구하고, 위험을 감내해야 하는 대화를 나누어야 하는 이유는, 바울이 옳다면, 우리는 아직 무질서한 이 인류라는 피조물을 정의와 평화, 사랑의 습관으로 인도하시려는 하느님의 계획에서 마지막 놀라움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바울이 옳다면, 성서의 하느님은 자신이 하느님의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을 계속해서 놀라게 하실 것이다. 하지만 그분은 당신의 이야기를 신뢰하는 이들을 결코 배신하지 않으실 것이다. 하느님께서 알려주셔야만 알게 될 그 궁극적인 이야기에는 '로고스 투 스타우로, 즉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이야기와 비유, 논리가 포함될 것이다. 하지만 그 밖에도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많은 것이 포함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 이야기의 마지막 장이자, 예수의 정체성의 궁극적인 모습인) 종말을 어떻게 상상해야 할까? 갑옷을 입고, 정복한 이교도의 목에 발을 얹고 서 있는 예수의 모습을 상상해야 할까? 지옥으로 끌려가는 이교도와 이단들, 죄인들로 구성된 고뇌에 찬 무리를 회피하는, 시스티나 성당 천장에 그려진 미켈란젤로의 예수를 상상해야 할까? 아니면 아브라함의 아들들이 그의 나라에 합류하기 위해 동방과 서방에서부터 오는 뜻밖의 일에 미소 짓는 예수를 상상해야 할까? 그 나라는 이제 불가해한 하느님께 넘겨질 것이며, 그곳에 모인 이들이 서로의 모습을 보고 놀라워할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가? 마지막 심판 때에 보좌에 앉은 인자가 왼편의 염소뿐 아니라 오른편의 양까지도 깜짝 놀라게 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가? “주님, 우리가 언제 당신을 보았습니까?..." 

해 있는 곳마다 예수께서 통치하시리.
그리고 그 여정 계속되리라.

이 찬송을 부를 때마다 우리는 순교자 유스티누스의 독특한 시편 95편(70인역) 읽기를 기억해야 한다.

주께서는 십자가에서 다스리십니다. (첫째 호교론 41:4)

즉, 하느님 아들의 승리는 승리주의에 사로잡힌 교회가 꿈꾸는 승리가 아니라 사랑으로 가득한, 불가해하며, 아이러니한 하느님의 마음을 드러내는 승리다. 이 역설적인 통치가 중심이 되는 이야기는 마지막 적인 죽음이 정복되고, 아들이 만물을 하느님에게 넘길 때 절정에 이른다. 바로 이 이야기를 우리는 “복음"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복음은 규칙서가 아니다. 복음은 일련의 교리가 아니다. 무엇보다도 복음은 구원 비용 청구서가 아니다. 

복음은 사랑을 담은 편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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