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역사연구회: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2
- 책 밑줄긋기/책 2023-26
- 2026. 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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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2 |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2 | 한국역사연구회 - ![]() 한국역사연구회 (지은이)현북스 |
1. 농업과 시장교환
2. 문화와 놀이
3. 전쟁과 재난
198 조선시대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체 몇 끼를 먹었을까? 지금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세 끼를 먹는 것이 보편화되어 있지만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하루 두 끼를 먹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므로 식사를 '조석'이라 불렀다. 18세기 후반 이덕무는 <청장관전서》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침저녁으로 5홉(지금의 1.5홉)을 먹으니 하루에 한 되를 먹는다고 하였다. 그러면 점심을 안 먹었단 말인가? 점심이란 말은 이미 조선 초기에 등장한다. 태종 때 대사헌 한상경은 서울 5부 학당의 교수·훈도들이 하루 종일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점심도 없으니 지방의 향교만도 대우가 못하다고 지척하였다. 이처럼 점심은 먹을 수도 있고 안 먹을 수도 있는 간식 정도의 식사를 가리키는 말이다. 본래 '점심'이란 중국의 스님들이 새벽이나 저녁 공양전에 간단히 먹는 음식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점심'은 마음에 점화한다는 뜻으로서 허기가 지면 정신도 가라앉기 마련인데 이때 흐릿한 정신에 불을 반짝 붙일 만큼만 조금 먹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200 하루끼니 수는 계절에 따라 달랐다. 19세기 중엽 이규경이 지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대개 2월부터 8월까지 7개월 동안은 하루에 세 끼를 먹고, 9월부터 이듬해 정월까지 5개월 동안은 하루에 두 끼를 먹는다고 하였다. 18세기 후반 성균관에서는 음력 2월 봄 석전제를 지낸 뒤부터 음력 8월 가을 석전제까지만 점심을 먹는데, 이때 점심이란 것도 쌀밥 몇 숟갈과 미역 몇 조각 정도였다고 한다. 즉 해가 긴 여름에는 간단한 점심을 포함하여세 끼를 먹고 해가 짧은 겨울에는 두 끼를 먹었다는 말이다.
201 우리 선조들은 끼니 때마다 무엇을 먹었을까? 잘 알려져 있듯이 우리나라 식단은 주식과 부식이 확연히 구분되어 밥을 주식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밥이라 하더라도 모두 쌀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밥 짓는 재료로 쓰이는 곡물은 우선은 지역에 따라 달랐다. 서유구가 지은 <임원경제지》(1827)에서는 "남쪽 사람은 쌀밥을 잘 짓고 북쪽 사람은 조밥을 잘 짓는다."라고 하여, 남북의 주식이 달랐음을 시사하고 있다. 북쪽의 주식이 조였음에는 별다른 이론이 없다. 그러나 남쪽에서는 어느 정도의 경제력만 있으면 쌀밥을 먹었다. 물론 농촌에서 춘궁기부터 추수 전까지는 보리밥이나 잡곡밥을 많이 먹었겠지만 쌀밥이 일부 부유층의 전유물만은 아니었다.
205 고추가 등장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중미 멕시코가 원산지인 고추는 '남만초'나 '왜겨자''라는 이름으로 16세기 말 조선에 전래되어 17세기부터 서서히 보급되다가 17세기 말부터 가루로 만들어 김치에 쓰이게 되었다. 고추는 19세기에는 향신료로서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 결과 후추는 더 이상 고가품이 아니었으며, '산초'라고도 불리는 천초는 지금은 간혹 추어탕에나 쓰일 정도로 되었다. 우리나라 고추는 다른 나라 고추 품종과 달리 매운 맛에 비해 단맛 성분이 많고, 색소는 강렬하면서 비타민C 함유량이 매우 많다고 한다. 더구나 고추는 소금이나 젓갈과 어우러져 몸에 좋은 효소를 만들어 내며, 몸의 지방 성분을 산화시켜 열이 나게 함으로써 겨울의 추위를 이기게 하는 기능이 있다. 고추가 김장 김치에 사용되기 시작한 것도 이 때문이라고 한다.
206 조선 후기에는 여러 가지 식품이 조선에 들어왔다. 중남미 지역의 신대륙을 점령한 스페인, 포르투갈 등이 동아시아로 진출하여 중남미 원산의 여러가지 식품을 중국, 일본에 전했고 17세기부터 19세기 사이에 조선에도 이 새로운 식품들이 전해지기 시작했다. 고구마, 감자, 옥수수, 호박, 토마토등이 전해졌는데 이 가운데 특히 고구마와 감자는 재배 방법이 까다롭지 않고 가뭄에도 잘 견뎌 새로운 구황 식품으로 각광받았다.
206 우리나라 식생활에서 특이한 것은 숟가락과 젓가락을 모두 사용한다는 점이다.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맨손으로 음식을 먹는 인구가 약 4할, 나이프와 포크로 먹는 인구가 약 3할, 젓가락을 사용하는 인구가 약 3할이라 한다. 그러나 처음에는 어느 민족이나 모두 음식을 손으로 집어 먹었다. 유럽도 마찬가지였다. 동로마제국의 비잔티움에서 10세기경부터 식탁에 등장한 포크는 16세기에 이탈리아 상류사회로 전해져 17세기 서유럽의 식생활에 상당한 변화를 일으켰으나, 신분이나 지역에 관계없이 전 유럽에 보편화된 것은 18세기에 이르러서였다. 15세기의 예절서에서 음식 먹는 손의 반대편 손으로 코를 풀라고 했던 것이나, 16세기의 사상가 몽테뉴가 너무 급하게 먹다가 종종 손가락을 깨물었다는 기록으로도 당시에 포크가 아니라 손가락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207 우리는 숟가락을 사용하고 있을 뿐 아니라, 지금도 숟가락을 밥상 위에 내려놓는 행위로 식사를 마쳤음을 나타낼 정도로 숟가락은 식사 자체를 의미하였다.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숟가락이 사라지지 않은 것은 물기 있는 음식이 많고, 또 언제나 밥상에 오르는 국이 있었기 때문인 듯하다. 일본에서 도국을 먹지만 국이라기보다는 국물에 가까워서 손으로 국그릇을 들고 입을 대어 마시므로 숟가락을 쓸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의 국은 국물을 마시는 것도 있으나 대개는 건더기가 많고 밥을 말아 먹는 국이다. 미역국, 된장국, 해장국 등 거의 모든 국이 그러하다. 찌개류나 '물 만 밥도 숟가락이 필요한 음식이다. 게다가 고려 후기에는 몽골풍의 요리가 전해져 고기를 물에 넣고 삶아 그 우러난 국물과 고기를 함께 먹는 음식이 생겨났다. 특히 국밥은 애초부터 밥을 국에 말아 놓은 것인데 이런 식생활 풍습은 아주 특이한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젓가락 숟가락을 모두 사용하여 식사를 하는 유일한 민족이 되었다.
209 우리는 원칙적으로 사람마다 각기 다른 상을 차렸다. 즉 한 식탁에서 여럿이 같이 먹는 것이 아니라 혼자서 상을 받았다. 중국이나 서양은 그렇지 않았다. 여럿이 한 식탁에서 식사를 하면서 접시를 두세 사람이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개인용 접시가 사용된 것은 17세기에 가서야 정착되었다. 서양에서 식사 때의 청결이 강조되고 식사 예절이 까다롭게 발전한 것은 초기에는 여럿이 한 식탁에서 맨손으로 집어 먹고 국자와 접시도 공동으로 사용했던 전통이 있었기 때문이다.
209 우리는 신분에 관계없이 모두 혼자서 상을 받았다. 지금은 집안에서 잔치를 할 때 교자상을 쓰고 있지만 예전에는 잔치 때에도 독상을 받았던 사실이 당시의 기록이나 그림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러므로 집집마다 작은 소반을 몇 개씩 마련해 놓고 있었다. 일상생활에서도 어린이들은 어린이들끼리 상에 모이거나 간혹 할아버지와 겸상을 받기도 하였지만 성인 남자는 혼자 상을 받는 것이 원칙이었다. 다만 서민층의 주부들은 그렇지 못해서 부엌의 부뚜막에서 간단히 먹거나, 방바닥에 밥주발과 국 대접을 놓고 먹는 일이 흔했는데 이런 풍습이 사라진 것도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 또한 혼자 상을 받으므로 개인별로 정해진 그릇과 수저를 사용했다. 그래서 아기돌잔치에는 아기 몫의 밥주발, 국 대접과 아울러 숟가락, 젓가락을 마련해 주는 것이 관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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