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역사연구회: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

 

 

1. 궁궐 안 사람들
2. 관료와 양반의 일생
3. 백성들의 좌절과 열망
4. 소송과 범죄
5. 가치관과 세계 인식

 


무과 급제자로 살아가기
107 충무공 이순신(1545~1598)은 1576년(선조 9)에 무과에 급제했다. 나이 32세였다. 이순신은 그해 겨울에 첫 근무지로 함경도의 동구비보 권관으로 발령을 받았다. 권관은 지역 방위 체계의 최하위에 있는 종9품 무관직이다. 그 뒤 정읍현감으로 부임한 해가 1589년이었다. 무과에 급제한 지 13년 만이었다. 이순신이 출세가도를 달리지 못했으나 그나마 이때는 무과에 급제하고서 오래지 않아 첫 발령이라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는 사정이 달랐다. 노상추는 무과에 급제한 뒤 1년 8개월 동안 실업 상태였다. 무과에 급제하면 무관직에 임용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하지만 원칙일 뿐이었다. 장원 급제자에게는 바로 6품의 문관직에 임용되는 특전이 주어졌지만 나머지 급제자들은 기약이 없었다. 한평생 미관말직조차 나가지 못한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그래서 이들을 구제하기 위해 관련 부서에 임시직으로 파견하는 '분관'을 운영했는데, 이 임시직을 권지라 했다. 조선 전기에는 별시위와 훈련원에 배치했고, 조선 후기에는 훈련원만 남았다. 

조선 전기에 무관직 수는 3.828자리였다. 조선 후기에는 더 줄어서 노상추가 살던 18세기 후반에는 2,731 자리에 불과했다. 더구나 무과의 선발 인원이 많다 보니 문과에 비해 벼슬자리 얻기가 더 힘겨웠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선발한 문과 급제자는 1만 4,682명으로 추산된다. 이에 비해 무과 급제자는 조선 후기(광해~고종)에만 대략 12만 명 정도였다. 이 수치만 단순 비교해도 무과 급제자가 대단히 많이 배출된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110 노상추의 인척으로 정달신이라는 사람이 있다. 무과에 급제한 그가 17년만에 첫 관직으로 사산참군(정7품)으로 발령을 받은 것도 금군을 대상으로 한 특별 시험에서 1등을 한 덕분이었다. 노상추 역시 나중에 같은 시험에서 3등을 차지하면서 첫 관직으로 무겸선전관에 임용될 수 있었다. 이처럼 본인과 주변의 경험을 통해서 활쏘기의 중요성을 잘 알았기에 활쏘기 연습을 게을리할 수 없었다. 

노상추는 근무를 마치고 나오는 날이면 자주 활터로 나갔다. 그곳에서 무과를 준비할 때 못지않게 활쏘기 연습에 매진했다. 그래서 고향에 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고 여겨진다. 실제로 노상추는 2년 3개월 만에 고향을 다녀온 직후에 매달 실시하는 활쏘기 시험에서 좋지 못한 성적을 받았다. 고향을 다녀온 후유증이었다. 다른 동료들도 성적이 나빠서 다행히 처벌은 면했으나 앞으로 규정대로 거행하겠다는 정조의 엄한 지시가 내려왔다. 노상추는 바로 그날 오후부터 활터로 나가 다시 활쏘기 연습에 들어갔다. 

활쏘기 실력은 무관의 정체성을 높이고 무관으로 생존하기 위한 토대였다. 노상추의 서울 생활은 겉으로 볼 때에 단순했으나 그 안에는 승진을 향한 치열한 노력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한동안 고향에 가지 못할 정도로 관직생활에 진력하면서 활쏘기 연습에 매진한 이면에는 경쟁을 뚫고 승진의 기회를 잡기 위한 절실한 바람이 있었다. 

113 양반도 사정이 이렇다 보니 양반이 아닌 무과 급제자가 관직을 얻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신분이 낮다 보니 선조의 후광이 있을 리 없고 본인을 밀어줄 후원 세력도 없었다. 대부분 홍패만 자손대대로 기념품처럼 물려줄 뿐이었다. 그나마 운 좋게 관직 진출의 기회를 잡더라도 말단직이거나 한 번에 그쳤다. 1790년에 무과에 급제한 최필주는 황해도 개성 사람으로 아버지의 신분은 양인이었다. 개성부 읍지인 <중경지>의 무과 조에 그의 이름이 올랐으나 경력은 빈칸이다. 그가 이력 하나 없이 이름만 올라 있는 것은 관직 진출에 실패했음을 뜻한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