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커스 J. 보그: 새로 만난 하느님
- 책 밑줄긋기/책 2023-26
- 2026. 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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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만난 하느님 | 마커스 보그 - ![]() 마커스 J. 보그 (지은이),한인철 (옮긴이)한국기독교연구소 |
서문
- 서론 처음으로 다시 만난 하느님
1. 하느님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내가 처음 만났던 하느님
왜 범재신론인가?
2. 하느님의 이미지 그리기
왜 그리고 어떻게 이것이 중요한가?
예수와 하느님
3.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
하느님에 대한 개방 : 영성의 마음
하느님의 꿈 : 함께 아파하는 삶의 세계를 향한 정치
구원 : 이 땅위에서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261 이 장 초반에 언급했던 것처럼, 나는 어렸을 때 구원은 예수와 기독교를 믿음으로써 천당에 가는 것인 줄 생각했다. 물론 지금은 더 이상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다시 내세의 문제로 돌아가고자 한다. 나는 내세에 관해 많이 아는 것도 없고, 그에 관한 어떤 신념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나는, 전문적 용어를 빌자면, 내세에 관한 “불가지론자”(an agnostic)이다. “불가지론”(agnostic)은 지식을 가리키는 그리스어 gnosis에서 온 것으로, 그 앞에 부정을 나타내는 접두어 a를 붙인 것이다. 즉, 불가지론자는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나는 내세에 관해 아는 것도 없고 어떤 신념을 갖고 있는 것도 없다고 말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없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죽음에 거의 가까이 다가간 경험들을 모은 자료들은 흥미롭기도 하고 합리적으로 압도해온다. 하지만 너무 많은 것이 주장될 필요는 없다. 죽음에 거의 가까이 다가간 경험들은 내세를 입증하지 못한다. 그 경험이 우리에게 무엇을 폭로해주건 간에, 그것들은 단지 임상적인 죽음 이후의 처음 몇 초 혹은 처음 몇 분 동안에 일어난 것에 관해 말해 줄 뿐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암시적이다. 환원주의적 세계관이 그 경험의 몇 가지 전형적 양상들을 설명해주는 것은 가능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대체적으로 이러한 경험들은 그러한 세계관의 적절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특별히 육체의 바깥에서 죽음 후 일어난 것을 보는 육체 바깥 측면에서의 경험(과 그 때 보여진 것이 종종 다른 관찰자들에 의해 후에 확인되는 경험)은 의식이 아주 짧은 순간 육체로부터 분리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다시 말하건대, 이것은 죽음 후에 사람이 오랜 기간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것은 죽음 후의 삶에 대한 현대 회의주의의 주요 기초가 되는 유물론적 세계관에 철저히 의문을 제기한다.
그러므로 나는 죽음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매우 일반적인 긍정을 넘어서서, 어떤 구체적인 신념을 갖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첫 번째 이유는, 나는 사람들이 이러한 것들을 어떻게 알 수 있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믿음으로써 이러한 무지의 상태를 해결할 수도 없다. 즉 어떤 것이 참이라는 것을 믿는 것은 그것이 참이냐 아니냐 하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두 번째 이유는, 기독교 전통 그 자체 안에는 내세에 관한 다양한 신념들이 있어서, 수많은 내세의 질문에 답할 수 있는 표준적인 기독교 입장을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내세는 죽는 순간 시작되는가, 아니면 종말의 때 즉, 최후의 심판 때에 시작되는가? 기독교인들은 이 두 가지를 모두 믿어왔다. 기독교 발생 후 대략 처음 1000년 동안 기독교의 지배적인 신념은, 죽은 사람은 최후 심판 때까지만 죽은 상태로 있다는 것이었다. 중세 초기에 이 신념은, 심판은 죽음 직후 개인별로 일어난다는 신념으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내세에는 은혜로 들어가는가, 아니면 어떤 요구조건이 있는가? 만약 우리가 행하거나 믿어야만 할 어떤 요구조건이 있다면, 이것은 기독교가 (은혜라는 말을 그렇게 많이 사용하면서도) 정말로 업적의 종교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 아닐까? 만약 은혜로 들어가는 것이라면, 천당에는 누구나 들어가는 것인가? 그리고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하느님이 일부 사람들을 천당에 (그리고, 명시적으로든 암시적으로든, 다른 사람들은 지옥에) 가도록 예정해 놓았기 때문인가? 이 난관은 "자유의지" 개념을 개입시킨다 해도 해결될 수가 없다. 만약 내가 내세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 내가 자유의지로 하느님에게 응답한 것에 의존하는 것이라면, 이 때의 나의 구원은 내가 행한 어떤 것에 달려있는 셈이 된다. 물론 이것은 상당히 설득력 있는 것이고, 아마도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그렇게 믿어왔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구원은 단순히 은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어떤 요구조건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같은 맥락에서, 영원한 삶은 은혜에 의해 얻어지는 것인가? 아니면 업적에 의해 얻어지는 것인가?
또 하나의 연관된 질문은, 천당은 오직 기독교인에게만 해당하는가 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내세에 구원받기 위해서는 기독교인이 되어야만 하는 것인가? 기독교의 많은 신조들과 전례들은 오랫동안 이것을 암시해왔다. 또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선교 활동의 중요한 동기가 되어 왔다. 하지만 어떤 기독교인들에게는 이러한 생각이 장애물이 되기도 했다. 수많은 사람들은 기독교에 대해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을 텐데 단순히 기독교에 대해 듣지 못했다는 이유 때문에, 혹은 기독교 메시지가 제대로 잘 전달되지 않아 바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이유 때문에, 혹은 비기독교인이 자신의 종교전통에 깊이 만족하고 있다는 것 때문에, 우주의 창조자께서 그 수많은 사람들을 영원한 형벌(혹은 영원한 허무)에 처하신다는 것이 과연 공정한 것일 수 있을까?
이에 연관된 질문이 또 하나 있는데, 그것은 내세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수가 많은가 아니면 적은가 하는 것이다. 성서는 두 경우 모두를 뒷받침하기 위해 인용될 수도 있고, 기독교인들 또한 두 가지를 동시에 믿어왔다. 일부 기독교인들은, 궁극적으로 하느님의 의지를 거스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근거에서, 혹은 은혜의 논리때문에, "보편적인 구원" (universal salvation)을 믿어 왔다. 즉 만약 영원한 구원이 하나의 선물이라면, 하느님이 일부는 선택하고 일부는 선택하지 않았다는 모순에 빠지기를 원하지 않는 한,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졌어야만 했다. 그 반대 극단에서는, 지극히 일부의 사람들만이 영원히 구원받게 될 것이라고 믿는 일부 기독교인들이 있었다. 20세기의 한 소종파 운동에 따르면, 예를 들어, 요한계시록 7:4에 대한 문자적인 해석에 기초하여 계산된 오직 144,000명만이 구원될 것이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아마도 이 두 극단 사이의 어디엔가 있을 것이고, 둘 중 어느 입장에도 동조하지 않는 것으로 만족할 (나도 바로 그런 것으로 보인다) 것이다.
내세는 단지 천당과 지옥만을 포함하는가, 아니면 연옥(purgatory)의 가능성도 있는가? 역사적으로 개신교인들은 대개 천당과 지옥의 양자택일만을 인정했으나, 기독교 역사에 나타난 대다수 기독교인들은 연옥도 믿고 있었다. 종교개혁 이전에는 이것이 거의 보편적인 기독교 신앙에 속했고, 가톨릭 교인들은 지금도 이것을 확신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연옥은 어떤 짧은 기간의 지옥으로 간주되어 주로 형벌과 연결 지을 필요는 없다고 하는 것이다. 오히려 영어의 purgation(정화)의 의미가 암시하는 것처럼, 연옥은 죽음 이후에도 더욱 정화하고 더욱 변화할 기회에 해당한다.
연옥은 이러한 이해를 넘어서서, 사람들이 살아 있는 동안 충분히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지 못하여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영원히 살지 못하는 것이라는 관점을 반영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연옥은 천당이 극소수에게 제한되는 것을 막기 위해, 죽음 이후에도 계속 성결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한다. 그러므로 기능 면에서 보면, 연옥과 환생(reincarnation)은 동일한 것이다. 양자는 우리가 충분히 아픔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도록 한 번 이상의 기회를 제공한다. 중요한 차이는 이것이 "어디에서" 발생하느냐 하는 것이다. 환생은 이 세상에서 또 한 번의 삶의 기회를 얻는 것을 의미하고, 연옥은 삶의 또 다른 차원에서 발생한다. 그러나 내세에 대한 기독교 신념의 다양성의 문제로 돌아가서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이것이다. 즉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연옥을 믿어야 할 것인가, 믿지 말아야 할 것인가? 전통은 분명한 대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267 그러나 더 이상의 숙고는 여기서 멈추자. 지금까지 내 삶에 있어 최고의 순간들을 생각해 보면, 그것들은 내가 경험에 완전히 몰두하여, 경험을 하고 있는 사람이 나라는 인식이 내게 전혀 없었던 순간들이다. 즉, 나의 최고의 순간들은 구체적인 한 인간으로서의 나에 대한 인식이 경험의 대상이 되지 않았던 순간들이었다. 이렇게 놓고 본다면, 내세에서 자기 정체성에 대한 인식이 보존된다는 것은 과연 중요한 일로, 심지어는 바람직한 일로 보이게 될까?
내가 내세에 관한 이러한 다양한 신념들과 골칫거리 문제들을 언급하는 것은 내세의 관념을 무너뜨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왜 내가 내세의 구체적인 문제들에 관해 불가지론자가 되었는지를 간접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확실한 대답을 안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거니와, 이렇게 혹은 저렇게 믿기로 한다 해도 그것은 내세의 실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우리는 알지 못하는 문제를 믿는 것으로써 해결할 수는 없다.
루터는 내세의 상세한 내용들에 대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특별히 재치있는 한 유비로써 표현했다. 우리는 이제 막 태어나려고 출생의 길을 나선 태아가 자신이 들어가려고 하는 세상에 대해 아는 것만큼 죽음 이후의 삶에 관해 알 수 있다. 그러면 알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될까?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이 유비는 이 여행의 끝에는 무언가 있다는 것을 확신한다.
이러한 불확실성 속에서, 우리는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다. 우리가 죽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없는 것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로 들어간다. 확신이라는 뜻의 영어 confidence는 "신앙과 함께 가는 것"(con=with, fides = faith)을 의미한다. 하느님에 대한 신뢰로서의 신앙은 바울의 다음 말들 속에 드러난 확신을 포함한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해서 살고,
죽더라도 주님을 위해서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도 주님의 것이고,
죽어도 주님의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다른 곳에서 표현하고 있는 것과도 동일한 확신이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생명도, 천사들도, 권세의 천신들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능력의 천신들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의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나타날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구원이 이 세상에서의 삶 속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다. 구원에 대한 성서적 이해의 중심에 있는 것은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과 관계를 맺는 것이고, 그 은사들(gifts)은 자유, 기쁨, 평화, 그리고 사랑이며, 그 열매는 함께 아파함(compassion)이고 정의이다.
하느님과의 이러한 관계,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모든 것은 바로 기독교적 삶의 목적이다. 기독교 복음은 우리의 치유와 온전한 삶을 가능하게 하는 이 관계, 우리의 상처를 치유함으로써 우리를 변화시키고 지금 여기에서의 우리의 삶을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으로 만드는 이 관계로 우리를 초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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