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클라크: 혁명의 봄
- 책 밑줄긋기/책 2023-26
- 2026. 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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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봄 - 전2권 | 크리스토퍼 클라크 - ![]() 크리스토퍼 클라크 (지은이),이재만 (옮긴이)책과함께 |
서론
제1장 사회 문제
제2장 질서에 관한 추측
제3장 대립
제4장 폭발
제5장 체제 변동
제6장 해방
제7장 엔트로피
제8장 반혁명
제9장 1848년 이후
결론
감사의 말
옮긴이의 말
주
도판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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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15 1848년 혁명은 또한 몇 가지 측면에서 전 지구적 격동, 또는 적어도 전 지구적 차원에 걸친 범유럽적 격동이었다. 파리에서 혁명이 일어났다는 소식은 프랑스령 카리브에 심대한 영향을 주었고, 런던 당국이 영국 본토에서의 혁명을 피하기 위해 채택한 조치는 영국 제국의 주변부 곳곳에서 항의와 봉기를 촉발했다. 라틴아메리카의 신생 국가들에서도 유럽 혁명들은 자유주의적 급진적 정치 엘리트들을 강하게 자극했다. 저 멀리 오스트레일리아에서도 2월 혁명은 비록 1848년 6월 19일이 되어서야 뉴사우스웨일스 식민지의 시드니에 유럽발 소식이 도착하긴 했지만, 정치적 물길을 일으켰다. 이는 오스트레일리아 역사가 제프리 블레이니가 언젠가 애석하다는 듯이 말한 '거리의 횡포the tyranny of distance'를 상기시키는 사례였다.
17 이 혁명은 범유럽적인 격동으로 경험되었지만 ─ 증거는 차고 넘친다 ─ 사후에 국유화되었다! 유럽 각국의 역사가와 기억 관리자들은 이 혁명을 저마다 개별 국가의 이야기에 집어넣었다. 실패했다고들 하는 1848년 독일 혁명은' 특수한 길'로 알려진 국가서사에 흡수되어, 독일이 근대성에 이르는 경로에서 이탈하여 결국 히틀러의 독재로 파국을 맞았다는 테제에 힘을 싣게 되었다. 이와 비슷한 일이 이탈리아에서도 일어났는데, 여기서는 1848년의 혁명 실패가 새로운 이탈리아 왕국으로 나아가는 권위주의적 이행의 단초가 되었고 그리하여 1922년 3월 무솔리니의 로마 행진과 뒤이은 파시스트 집권의 길을 닦았다고 보았다. 프랑스에서는 1848년 혁명 실패를 보나파르트파의 제2제국이라는 막간을 불러오고 훗날 드골주의의 승리를 예고한 사태로 보았다. 다시 말해 각국은 1848년 혁명의 실패에 중점을 둠으로써 혁명 이야기를 민족국가에 초점을 맞춘 복수의 병렬 서사에 끼워넣을 수 있었다. 근대의 기억에서 이 시기에 서로 연결되었던 격동들과 그 파편화만큼 역사 기록의 틀을 정하는 민족국가의 막강한 힘을 입증하는 사례도 없다. 우리는 오늘날에도 그 힘을 느끼고 있다.
17 1848년의 사태에는 세 단계가 있었다. 2월과 3월에는 격동이 마치 들불처럼 유럽 전역으로 번져나갔다. 그 불길은 도시에서 도시로 건너뛰었고, 그 사이에 있는 수많은 소도시와 마을에도 불티가 튀었다. 오스트리아 총리 메테르니히는 빈에서 달아났고, 프로이센군은 베를린에서 철수했으며, 피에몬테 - 사르데냐·덴마크·나폴리의 국왕은 헌법을 공표했다. 이 모든 일이 너무나 쉬워 보였다. 이때는 타흐리르 광장 같은 순간이었다(이집트 카이로에 있는 타흐리르 광장은 2011년 '아랍의 봄' 혁명의 중심 무대 중 하나였다). 이 순간에는 혁명 운동이 사회 전체를 아울렀다고, 누구나 희열감에 벅차 올랐다고 생각해도 무방할 것이다. 독일의 한 급진주의자는 이렇게 썼다. "나는 그저 혈기를 가라앉히고 심장 박동을 늦추기 위해 겨울 추위에 밖으로 나가 지칠 때까지 걷고 또 걸어야 했다. 심장이 전에 없이 방망이질을 쳐서 마치 가슴팍에 구멍이 뚫릴 것만 같았다." 밀라노에서는 생판 모르는 사람들이 거리에서 서로를 얼싸안았다. 이때가 1848년의 봄날이었다.
그러나 곧 격동 내부의 분열(이미 분쟁 초기부터 잠재해 있던)이 확연히 드러났다. 5월경 파리에서는 급진적인 시위자들이 2월 혁명으로 생겨난 국민의회를 급습해 전복하려 시도했고, 빈에서는 오스트리아 민주주의자들이 자유주의적 개혁의 더딘 속도에 항의하고 공안위원회를 설립했다. 6월에는 큰 도시들의 거리에서 자유주의(또는 프랑스의 경우 공화파) 지도부와 급진적 군중이 충돌해 폭력이 발생했다. 파리에서 이 충돌은 '6월 봉기'의 만행과 유혈 사태로 귀결되어 최소 3천 명의 반란자가 살해되었다. 마르크스가 고소하다는 투로 진단했듯이, 1848년의 길고도 뜨거운 여름은 혁명이 봄철의 순정함과 달콤한(하지만 기만적인) 만장일치를 상실하고 계급간의 격렬한 투쟁으로 넘어간 순간이었다.
1848년 가을의 상황은 더 복잡했다. 9월과 10월, 11월에 베를린, 프라하, 빈, 왈라키아에서 반혁명이 전개되었다. 의회가 폐쇄되었고, 반란자들이 체포되어 형을 선고받았으며, 군대가 도시의 거리로 일제히 돌아왔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혁명의 제2단계, 즉 각양각색의 민주주의자와 사회공화주의자가 좌우하는 급진적 봉기가 독일 중부와 남부의 국가들(특히 작센, 바덴, 뷔르템베르크), 프랑스 서부와 남부, 로마에서 발생했다. 11월 24일 교황이 피신한 이후 로마의 급진파는 마침내 로마 공화국을 선포했다. 독일 남부에서 제2물결의 격동은 프로이센 병력이 결국 급진적 반란파의 마지막 거점인 바덴의 라슈타트 요새를 함락한 1849년 여름에야 진압되었다. 그 직후인 1849년 8월에 프랑스 병력이 로마 공화국을 분쇄하고 교황령을 복원했는데, 한때 프랑스를 유럽 전역 혁명의 후원자로 우러러보았던 사람들은 이 결과에 분통을 터뜨렸다. 거의 같은 시기에 헝가리 왕국의 미래를 둘러싼 격전이 종결되고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병력이 헝가리를 점령했다. 1849년 늦여름에 이르러 혁명은 대체로 끝이 났다.
20 오늘날 우리가 1848년에 관해 애써 고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1848년의 혁명들은 사실 실패하지 않았다. 여러 나라에서 혁명은 신속하고도 지속적인 헌정 변화를 가져왔고 1848년 이후 유럽은 전과는 판이하게 다른 장소가 되었다. 이 범유럽적 봉기는 19세기 중엽의 입자충돌실로 생각하는 편이 더 흥미롭다. 각종 사람, 집단, 사상이 그 입자충돌실로 흘러들어 서로 부딪치거나 합쳐지거나 깨졌고, 뒤이은 수십 년에 걸쳐 새로운 실체들이 대거 등장했다. 사회주의와 민주적 급진주의부터 자유주의, 민족주의, 코포라티즘corporatism, 보수주의까지 다양한 정치 운동과 사상이 이 충돌실에서 검증을 받았고, 그것들 모두가 변화하여 유럽 근대사에 심대한 영향을 주었다. 또한 1848년 혁명들은, 이들 혁명을 '실패'로 보는 사고방식이 꾸준히 이어지는 와중에도, 대륙 도처에서 정치 및 행정관행의 심대한 변혁, 범유럽적 '통치의 혁명'을 가져왔다.
둘째, 1848년 반란자들의 문제의식은 아직도 그 힘을 잃지 않았다. 물론 예외는 있다. 더이상 우리는 교황의 세속권이나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문제로 골머리를 썩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우리는 정치적 또는 경제적 자유의 요구와 사회적 권리의 요구가 서로 충돌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여전히 걱정한다. 1848년의 급진주의자들이 지겹도록 말했듯이, 언론의 자유가 있다면 당연히 좋겠지만 너무 배가 고파서 읽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고상한 신문이 대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 문제를 간파한 독일의 급진주의자들은 농담조로 '읽을 자유Pressefreiheit'와 '먹을 자유Fressefreiheit'를 병치했다.
24 비非직선적인 혁명, 경련성 혁명, 간헐적 폭력과 변혁을 동반한 '미완의 혁명'이라는 점에서 1848년은 오늘날의 독자들에게도 흥미로운 연구 주제로 남아 있다. 2010~2011년에 많은 언론인과 역사가는 때때로 '아랍의 봄'이라 불린 어수선한 격동의 연쇄와 역시 '인민들의 봄날'로 알려진 1848년 혁명들 사이에 묘한 유사성이 있음을 알아차렸다. 아랍 국가들에서 일어난 격동들과 마찬가지로, 1848년의 혁명들은 여러 형태로 지리적으로 흩어져 전개되면서도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1848년 혁명들의 단연 두드러진 특징은 동시성이었다. 이는 당대인들에게도 수수께끼였고 그때 이후의 역사가들에게도 줄곧 수수께끼로 남았다. 동시성은 2010~2011년 아랍의 사건들, 저마다 깊은 뿌리가 있지만 분명히 서로 연결되기도 했던 사건들의 가장 수수께끼 같은 특징이기도 했다. 여러 면에서 카이로의 타흐리르 광장은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광장과 달랐고, 《포시세 차이퉁Vossische Zeitung》은 페이스북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양자는 서로를 연결하는 더 큰 사유를 불러일으킬 만큼 비슷하다. 중요한점은 전반적인 양상이다. 동시다발성, 수많은 세력의 예측 불가능한 상호작용이라는 면에서 19세기 중엽의 동란은 우리 시대의 혼란한 격동, 명확한 종점을 찾기 어려운 격동과 유사했다.
25 1848년 혁명은 의회들의 혁명이었다. 단원제 입법부인 국민의회로 나아갈 길을 닦은 파리 제헌의회, 헌법 제정을 목표로 하는 새로 운 법률에 따라 선출된 프로이센 제헌의회 또는 베를린 국민의회,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파울 교회의 우아한 원형 의사당에서 소집된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가 있었다. 헝가리 의회는 아주 오래된 기구였지만, 1848년 헝가리 혁명의 와중에 페스트시에서 새로운 국민의 회가 소집되었다. 나폴리, 피에몬테-사르데냐, 토스카나, 교황령의 혁명기 반란자들은 모두 새로운 의회 기구를 설립했다. 나폴리의 통치에서 벗어날 길을 찾고 있던 시칠리아의 혁명가들은 전원 시칠리아인으로 이루어진 자체 의회를 설립하고 1848년 4월 부르봉가의 나폴리 국왕 페르디난도 2세를 퇴위시켰다.
26 1848년은 단지 혁명가들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20세기와 21세기에 자유주의적 본능을 가진 역사가들은 근대 자유민주주의의 반복적인 요구사항들 ─ 결사의 자유, 언론출판의 자유, 헌법과 정기선거, 의회 ─ 을 내세웠던 사람들의 대의에 자연히 끌렸다. 그러나 나는 신문을 읽고 커피를 마신 자유주의자와 급진주의자에 대한 이런 친밀감을 공유하면서도, 반란자나 자유주의자의 관점에서만 당시 사태를 바라보는 서술은 1848년 혁명들의 드라마와 의미의 핵심을 놓치게 되리라고 생각한다. 이들 혁명은 구세력과 신세력 간의 복잡한 조우였으며, 구세력도 신세력 못지않게 혁명의 단기적· 장기적 결과를 형성했다. 게다가 이렇게 바로잡는 것으로도 부족한데, 혁명에서 살아남은 '구세력' 자체가 혁명으로 인해 바뀌었기 때문이다. 전반적으로 보아 대다수 역사가들이 흥미로워할 만한 방식으로 바뀐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미래의 프로이센 총리, 독일 정치가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1848년만 해도 아직 조연이었지만, 혁명을 계기로 자기 개인의 운명과 조국의 미래를 하나로 합칠 수 있었다. 일생 내내 비스마르크는 1848년을 한 시대와 다른 시대가 갈라진 파열의 순간으로 보았고, 그 변혁의 순간이 없었다면 자신의 경력은 생각할 수도 없었을 거라고 인정했다. 비오 9세의 교황령은 혁명으로 심대한 변화를 겪었고, 가톨릭교회와 근대 세계의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오늘날의 가톨릭교회는 여러 면에서 그 순간의 산물이다. 나폴레옹 3세는 스스로를 혁명의 분쇄자가 아니라 질서의 복원자로 여겼다. 국가를 물질적 진보의 선봉으로 자리매김하려던 그는 혁명에 의해 풀려난 세력들을 저지할 필요성이 아니라 그들을 계도할 필요성에 대해 말했다.
34 이 혁명의 놀라운 측면 중 하나는 수많은 핵심 행위자의 역사의식이 강렬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1848년 혁명과 18세기 프랑스 대혁명의 중요한 차이였다. 1789년 대혁명은 천만뜻밖이었던 데 반해 19세기 중엽 당대인들은 지난 대혁명이라는 원형에 견주어 당시 혁명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당시는 역사 개념이 엄청난 의미론적 무게를 획득한 세상이었다. 19세기 중엽의 사람들은 1789년의 남녀보다 훨씬 더한 정도로 바로 지금 역사가 펼쳐지고 있다고 보았다. 혁명의 온갖 우여곡절에서 그들은 역사의 움직임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래서 놀랍도록 많은 수가 회고록이나 각주를 빽빽하게 집어넣은 역사논고를 썼다. 어떤 이들은 1848년 사태를 회고하는 이런 경향을 프랑스 대혁명을 형편없이 패러디하는 격이라고 보았다. 이 견해를 가장 유창하게 옹호한 사람은 마르크스였다. 그렇지만 다른 이들은 오히려 그 반대라고 보았다. 다시 말해 1789년의 장대한 에너지가 풍자로 소진된 것이 아니라 대혁명 덕분에 갖출 수 있었던 역사의식이 쌓이고 깊어지고 더 널리 퍼져서 1848년의 사태를 의미로 가득 채운 것이라고 보았다. 칠레의 저술가, 언론인, 역사가, 정치인인 벵하민 비쿠냐 마케나는 회고록에 이런 함의를 담았다.
1848년의 프랑스 혁명은 칠레에서 강력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태평양 연안에서 살아가는 우리 가난한 식민지 주민들에게 역사상 그토록 칭송받은 1789년 혁명은 우리의 어둠 속에서 한차례 반짝인 섬광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반세기 후 그 쌍둥이 혁명은 눈부신 광채로 손색이 없었다. 우리는 그것이 오는 것을 보았고, 그것을 연구했고, 그것을 이해했고, 그것을 동경했다.
옮긴이의 말
1201 《혁명의 봄》은《강철왕국 프로이센》(마티)과 《몽유병자들》(책과함께)에 이어 국내에 세 번째로 소개되는 크리스토퍼 클라크의 주저다.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역사학 흠정교수인 클라크는 유럽 대륙 전역을 아우르는 특유의 거시적인 시각으로 근현대사를 조망해오고 있다. 《강철왕국 프로이센》에서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으로 출발한 유럽 변방의 작은 나라가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프로이센 왕국, 독일 제국, 바이마르 공화국을 거쳐 나치의 제3제국에 이르기까지 지정학적 변화를 주도하는 강대국으로 발돋움한 흥망성쇠를 따라간다. 《몽유병자들》에서는 역사상 가장 복잡한 위기로 꼽히는 1차대전 직전 7월 위기의 국면에서 전쟁이 '왜' 일어났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일어났는가에 초점을 맞추어 핵심 행위자들 간의 상호작용 연쇄를 면밀히 쫓아간다.
역사가로서 클라크의 돋보이는 점은 아주 넓은 시야로 수백 년의 시간축과 수천 킬로미터의 공간을 자유자재로 이동하면서 방원경과 돋보기를 적절하고도 능숙하게 겸용한다는 것이다. 《강철왕국 프로이센》에서는 14세기부터 20세기까지 프로이센 지방을 중심으로 장기간의 독일사를 통시적인 시각으로 조망한다면, 《몽유병자들》에서는 19세기 말부터 고조된 유럽의 양극화가 사라예보 암살사건을 계기로 비등점을 넘어 세계대전으로 치달은 단기간의 위기를 공시적인 시각으로 조망한다.
책의 주제에 어느 시각으로 접근하든 클라크는 인습적인 평가나 비판을 경계하고 행위자들의 역동성과 주체성, 고유성에 주목한다. 예를 들어 클라크는 독일의 근대화 과정이 프로이센 때문에 '특수한 길'을 걸었다거나 나치 독일의 전체주의와 권위주의, 폭력성이 프로이센의 유산이라는 식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또한 1차대전과 같은 역사적 파국의 책임을 어느 한쪽에 지우고 유책성의 순위를 따지는 식으로 역사의 선한 편과 악한 편을 가르는 이분법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런 평가의 문제는 무엇보다 당대 행위자들(좁게는 개인과 집단, 넓게는 사회와 국가) 자신의 이해관계, 판단, 감정, 신념, 정체성, 소속감, 야망 등을 경시하고 그들 외부의 시선, 또는 당대가 아닌 후대의 시선을 중시한다는 것이다. 그에 반해 클라크는 당대의 행위자들이 무엇을 경험했는가, 눈앞의 상황에 어떤 판단과 예측으로 대응했는가, 어떤 변화와 미래를 만들어가려 했는가에 중점을 둔다. 《혁명의 봄》은 《몽유병자들》과 비슷하게 공시적 시각을 택해 짧은 기간에 들불처럼 번져간 범유럽적 혁명의 불길을 쫓는다. 클라크가 강조하듯이 1848년 혁명은 단수의 '혁명'이 아니라 복수의 '혁명들'이었다. 이를테면 프랑스 혁명 따로, 독일 혁명 따로 발생한 일국적 현상이 아니라 혁명가들의 네트워크로 연결된 국제적 현상이었다. 혁명가들은 이주, 망명, 여행, 공동투쟁, 비밀결사 등을 통해 여러 나라와 장소에서 활동하면서 국제 공조를 추구했다. 그런 이유로 1848년 혁명의 무대로 익히 알려진 파리와 베를린뿐 아니라 스위스, 시칠리아, 나폴리, 이탈리아 북부, 로마, 독일연방, 오스트리아, 왈라키아와 몰다비아, 헝가리, 이베리아반도 등지에서도 연쇄적으로 정치적 동란이 일어났다. 용케 정변을 피한 곳일지라도 혁명의 강력한 영향만큼은 피할 수 없었다. 클라크의 평가대로 1848년 혁명은 진정으로 유럽 전역을 아우른 역사상 유일무이한 혁명이었다.
단기간에 광범한 영역에서 폭발하듯 일어나는 사건들의 동시다발성, 수많은 세력들의 예측 불가능한 상호작용, 원만한 이행이 아닌 갑작스러운 분열 등을 특징으로 하는 역사의 국면을 책의 주제로 삼는다는 점에서도 《혁명의 봄》은 《몽유병자들》과 닮았다. 역사가에게 이런 주제를 서술하는 것은 힘겨운 과제다. 클라크의 말대로 사건들을 선형적 연쇄로 추적하기가 불가능해지고, 하나의 물줄기처럼 흘러가던 서사가 둑을 터뜨리고 범람해 여러 갈래로 뻗어나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클라크는 그런 갈래들 각각을 다중 시점으로 따라가면서 전반적인 양상 안에 자리매김하는 대가다운 솜씨를 보여준다. 그 덕에 우리는 19세기 중엽에 수렴하고 발산한 혁명적 격동들을 명료한 파노라마로 바라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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