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셰크 코와코프스키: 마르크스주의의 주요 흐름 3 ─ 황혼기

마르크스주의의 주요 흐름 3 | 레셰크 코와코프스키 마르크스주의의 주요 흐름 3 | 레셰크 코와코프스키 - 10점
레셰크 코와코프스키 (지은이),변상출 (옮긴이)유로서적

서문
제1장 소비에트 마르크스주의의 첫 단계
제2장 1920년대 소비에트 마르크스주의의 이론논쟁
제3장 소비에트 국가이데올로기로서의 마르크스주의
제4장 2차 세계대전 이후의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결정화
제5장 트로츠키
제6장 안토니오 그람시 : 공산주의적 수정주의
제7장 지외르지 루카치 : 교조에 봉사하는 이성
제8장 칼 코르쉬
제9장 루시엥 골드만
제10장 프랑크푸르트학파와 ‘비판이론’
제11장 허버트 마르쿠제: 마르크스주의-신좌파의 전체주의적 유토피아
제12장 에른스트 블로흐: 마르크스주의-미래파의 신비적 직관
제13장 스탈린 사후 마르크스주의의 발전

에필로그
에필로그에 부쳐
참고문헌

 


제4장 2차 세계대전 이후의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결정화
242 마르크스의 의도와 관련해서 말하자면, 비록 그의 저작에서 모든 것을 유보하는 입장을 볼 수 있지만 그는 사회주의 사회가 완전한 통일의 사회가 될 것이며, 이 사회에서는 사적 소유의 경제적 토대가 소멸되는 것과 동시에 이해관계의 갈등이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믿었던 것만큼은 분명하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이 사회는 (대중에게 소원한 관료주의를 유발하는 것이 불가피한) 대의 정치기구나 시민의 자유를 제한하는 법규와 같은 부르주아 제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소비에트 전제정치는 이러한 교의를 실현하려 했던 시도였으며, 여기에는 사회통합이 제도적 장치들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신념이 내포되어 있었다. 

245 집단적 소유자가 기존 체제에서 종신을 의미하고, 어떤 경쟁자로부터도 합법적 도전을 받지 않는다면, 생산수단의 통제는 소유권과 본질적으로 다를 것이 없다. 소유권이 집단에게 있으므로 개인 상속은 없고, 누구도 정치적 신분의 특정한 지위를 자식에게 물려줄 수 없다. 그러나 사실 ─ 여러 번 지적했듯이 ─ 소비에트국가에서 특권은 체계적으로 상속되었다. 분명 지배집단의 자녀들은 기회의 측면에서 특혜를 받았으며, 한정된 여러 편의시설을 이용할 수 있었다. 이 집단은 스스로 상층부로 생각했던 것이다. 정치독점과 생산수단의 배타적 통제는 상호 분리되지 않고 서로 보완작용을 일으킨다. 지배집단의 고소득은 착취기능의 자연스러운 결과이지만 착취 자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착취란 공공의 어떤 통제도 받지 않고 바로 공공이 만들어낸 잉여가치 일체를 마음껏 처분하는 권리를 가진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공공은 자원이 어떤 비율과 어떤 방식으로 투자와 소비로 배당되어야 하며, 생산된 상품이 어떤 방식으로 처분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권리를 갖지 못한다.  

248 소비에트 착취계급은 다소 동양 전제정치의 관료, 즉 한편으로는 봉건 귀족계급과 다른 한편 낙후한 나라들의 자본주의 식민지 정복자를 닮아있는 새로운 사회적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 지위는 정치적·경제적·군사적 권력의 절대적 집중과 이러한 권력을 합법화하는 ─ 예전에 유럽에서 거의 볼 수 없었던 정도의 ─ 이데올로기에 의해 결정된다. 그 구성원들이 소비영역에서 누리는 특권은 그 사회적 역할의 자연스러운 결과다. 마르크스주의는 이 계급이 자신의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걸치고 있는 카리스마의 아우라(Aura)이다. 

263 스탈린주의 이데올로기와의 단절의 시기 프랑스 마르크스주의의 발전은 1940년대 일었던 헤겔주의와 실존주의의 물결에 영향을 입었다. 프랑스 독자들에게 헤겔, 특히 『정신현상학』을 소개한 주요 인물로는 전쟁 이전에 헤겔의 철학을 설명하고 해설한 알렉산드르 코제브(Alexandre Kojève)와 장 이폴리트(Jean Hyppolite)가 있다. 이들은 마르크스주의자도 공산주의자도 아니었지만 마르크스의 이념에 공감하는 관심을 보였으며, 헤겔의 도식에서 마르크스의 사상에 영향을 미친 요소들을 강조하면서 마르크스의 이념을 신중하게 분석했다. 코제브와 이폴리트는 프랑스 철학을 그 전통적 지류와 이해관계로부터 이탈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특히 그들은 이성이 역사의 과정에서 구현된다는 이념을 유포시켰다. 이는 반데카르트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데카르트는 역사를 본질적으로 우연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이 우연의 영역은 철학의 도달 범위 밖에 있기 때문에 데카르트가 허구적 세계(fabula mundi)라고 부르는 의식적인 허구의 인위적 구성없이는 합리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세계이다.  

264 이폴리트는 이성이 마르크스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헤겔의 경우에서도 역사과정과 무관한 자체 법칙을 지닌 세계에 대한 초월적 관찰자가 아니라 그 자체가 역사의 요소이자 표현이라는 점, 합리성'을 지향한 인류의 진보는 기성의 사유법칙을 점진적으로 동화하는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 의식을 높이고 합리성을 지각하는 문제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러한 목표를 위해 인간은 상품으로서 기능하는 일을 중단하는 것이 필요하며, 이것이 마르크스의 중요한 메시지라는 것이다. 

264 전후 수년 동안 프랑스에서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철학은 그 형식에서 마르크스주의와 화해 불가능했다. 사르트르는 인간 실존이 자연적 결정인자들에 의해 지배되는 활력 없는 낯선 세계 속에 들어 있는 절대적 자유의 진공상태에 있다고 주장한다. 이 자유는 버텨내기 힘든 짐이며, 인간은 이를 벗어버리고 싶어 하지만 선의를 버리지 않고서는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의 자유가 절대적이고 무제한적이라는 바로 이 사실 때문에 나는 어떤 행위에 대해 어떤 변명도 할 수 없고, 내가 한 일에 대해서는 나 자신이 백퍼센트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자유가 발현되게 하는 나의 항구적인 자체-기대가 시간의 동력이며, 이 동력이 인간 실존의 진정한 형식이자 자유와 마찬가지로 우리 각자의 독자적 특질이라는 것이다. 사르트르의 경우 집단적 · 공동체적 시간과 같은 것은 없으며, 개인이 끊임없이 창조해 가는 과정에서 자연적. 절망적. 억압적 필연을 벗어난 어떤 다른 자유 같은 것도 없다.  

266 서유럽 국가들에서 표현된 마르크스주의 글의 스타일과 내용은 각기 나름의 전통을 반영했다. 프랑스 마르크스주의에는 연극적 수사법과 감성적인 인도주의적 문체가 가미되어 있어 혁명적 웅변이 뿜어지기도 했다. 인상주의적이어서 논리적으로 명확하지는 않았지만 문학적 관점의 효과가 있었다. 영국 마르크스주의는 경험적 전통 같은 것을 보존하고 있어 훨씬 더 생동감이 있었고, 철학적 '역사주의'를 선호하기보다는 역사 자체에 좀 더 근거를 둔 논리적 설득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 공산주의는 매우 취약했기 때문에 노동계급을 포함한 대중적 지지를 얻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영국 공산주의는 다른 몇몇 서유럽 국가들의 경우처럼 순수 지적 운동이 아니었으며, 항상 노동조합과의 연대를 ─ 비록 미약하긴 했지만 ─ 지지했다. 

267 프랑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인도주의적 문체를 강조했던 반면에 영국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경험적 합리주의적 논거에 방점을 찍었고, 이탈리아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체 전통에 충실하게도 '역사주의'를 부각시켰다. 스탈린주의 말년의 시대에도 이탈리아 마르크스주의 철학은 레닌주의 및 스탈린주의 규범으로부터 멀리 서 있었다. 그러나 국제적 사건으로서 파시즘이 붕괴한 이후 이탈리아 공산당은 20년 동안 보였던 무기력과 침체성을 즉시 떨쳐버리고 여타 나라의 동지들 못지않게 소비에트 노선에 충실했다. 이후, 말하자면 1956년 이후 팔미로 톨리아티는 공산주의 지도자들 가운데 가장 '온건' 하고 모스크바로부터 가장 독자적인 노선을 걸었다는 명성을 얻었지만, 그의 이런 명성이 스탈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어떤 근거도 없다. 

268 1947-9년, 그람시의 『옥중수고Note from Prison』의 출판은 이탈리아 공산주의 역사의 한 이정표이자 당의 지성들이 훨씬 더 유연한 마르크스주의 틀을 받아들이도록 고무한 원천이었다. 사실 마르크스주의는 레닌주의의 교범이 허용하는 범위에서만 받아들여져 왔던 것이다. 50년대 초엽의 탁월한 저자들로는 갈바노 델라 볼페(Galvano della Volpe: 1896-1968)와 안토니오 반피 (Antonio Banfi: 1886-1957)가 있다. 이들은 그들의 인생에서 상당히 늦은 시기에 마르크스주의자와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새로운 신념을 이탈리아의 보편적 인문주의 정신으로 해석했다. 

268 요약하자면, 이론적·역사적 저작들을 두고 말하자면 서구 유럽의 스탈린주의 말년은 전혀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가치 있는 몇몇 책들조차도 (이 책들도 오늘의 경우 대부분 읽을 가치가 없게 되었지만) 세계의 모든 공산주의 지성들이 예외 없이 관련되어 있다고 비난받는 조직적인 정치적 날조의 강물에 빠져 익사상태에 있었다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대체로 이 시기에 공산주의운동에 가담했던 프랑스나 이탈리아 노동자들은 소비에트체제나 세계혁명의 전망에 대해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들이 공산당을 지지했던 것은 당이 그들의 직접적 요구와 이해를 강하게 대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와 공산주의를 보편적 교의로서 받아들였던 지식인들은 당시의 운동이 완전히 모스크바에 의해 장악되어 소비에트의 정치적 목적에 종속되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 운동을 지지했으며, 소비에트 사회체계의 진정한 성격을 폭로했던 (서구에서 발행된 도서들과 동유럽 국가들에서의 직접적 체험을 통해 쉽게 납득되었던) 정보들을 무비판적으로 부정했다. 그들은 어떤 사건이 발생하든 관계없이 소비에트 사회체제를 찬양하면서 말과 행동으로, 그리고 공산당에 대한 소속감을 근거로 해서 그 체제를 지지했던 것이다. 그들 모두가 광대놀이와 같은 '평화운동에 가담했지만, 이 운동은 오웰의 제목에서처럼 냉전시대 소비에트 제국주의의 필수도구가 되었다. 그들 모두는 미국이 한국전쟁에서 세균전을 수행하고 있다는 광적인 비난의 소문을 천연덕스럽게 받아들였다. 소비에트체제의 완벽성에 대해 의심을 품었던 사람들조차도 '아무튼' 공산주의는 파시즘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하면서도 가장 효과적인 보루이기 때문에 주저할 것 없이 백퍼센트 수용되어야 한다고 말했던 것이다. 이런 자발적인 자기기만의 심리학적 계기들은 다양하다. 세계의 누군가가 보편적 인간애라는 인류의 오랜 염원을 실현해야 한다는 믿음은 그러한 계기들 가운데 절박한 욕구의 하나인 것이다. '역사 진보'에 대한 지식인들의 환상, 민주적 '제도'에 대한 경멸, 이는 두 세계대전을 경험했던 서구 유럽의 여러 나라들로부터 철저한 불신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역사와 정치의 비밀을 포함한 세계의 모든 비밀을 풀 수 있는 만능키에 대한 동경, 승리의 편에서 역사의 물결을 타고 싶은 야망, 특히 지식인들의 경향인 힘에 대한 숭배, 이러한 것들도 자기기만의 심리학적 계기들에 포함되었다. 지식인들이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억압받고 빼앗기는 사람들과 같은 바리케이드 쪽에 서 있고 싶어 했지만, 그들은 가장 억압적인 정치 체제의 전도사가 되어 이 체제가 권력을 확장할 때 써먹었던 거대한 효율적인 기만의 도구를 위한 자발적인 대리인이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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