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스 스타가르트: 독일인의 전쟁 1939-1945
- 책 밑줄긋기/책 2023-25
- 2025. 1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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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인의 전쟁 1939-1945 | 니콜라스 스타가르트 - ![]() 니콜라스 스타가르트 (지은이),김학이 (옮긴이)교유서가 |
지도
서언
편지와 일기의 주요 주인공들
프롤로그
제1부 방어전: 1939년 9월~1940년 봄
제1장 독일인들에게 환영받지 못한 전쟁
제2장 대오의 균열을 막아라
제3장 극단의 조치들
제2부 유럽의 주인: 1940년 5월~1941년 여름
제4장 진격
제5장 승자와 패자
제3부 1812년의 그림자: 1941년 여름~1942년 3월
제6장 독일의 십자군 전쟁
제7장 첫 패배
제4부 교착상태: 1942년 초~1943년 3월
제8장 비밀의 공유
제9장 유럽의 약탈
제10장 전사자에게 쓰는 편지
제5부 독일에 도착한 전쟁: 1943년 3월~1944년 여름
제11장 폭격과 복수
제12장 버티기
제13장 빌린 시간
제6부 완전한 패배: 1944년 여름~1945년 5월
제14장 참호가 된 나라
제15장 붕괴
제16장 종말
에필로그: 심연을 건너서
약어 | 주 | 역자해설: 형언할 수 없는 전쟁범죄와 내면의 성찰
참고문헌 | 찾아보기
17 이 책은 내가 지난 20년 넘게 2차대전 동안 독일에 살았거나 독일 점령하에 살았던 사람들의 경험을 이해하려고 노력한 결과물이다. 원래 나는 이 책을 쓰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2005년에 전쟁의 증인들: 나치 치하 어린이들의 삶을 발간한 뒤, 나 자신과 그리고 내 이야기를 들으려 하던 다른 이들에게 이제 더는 어린이, 홀로코스트 혹은 나치 독일에 대하여 쓰지 않겠다고 약속했었다. 이 책은 2차대전에서 독일인들이 무엇을 위해 싸웠는가에 대한 짤막한 논문으로 시작되었다.
18 이번 책 『독일인의 전쟁 1939-1945』에서 나는 다른 문제를 제기했다. 나는 승자와 가해자를 출현시킨 사회의 공포와 희망을 드러냄으로써 독일인들이 그 전쟁을 스스로에게 어떻게 정당화했는지 질문했다.
24 나치 제3제국의 특징 한 가지는 그 정권이 독일 사회의 모든 도덕적·물리적 힘을 소비하고 소진한 끝에 1945년에 자기 자신의 '총체적인 패배'에 스스로 마침표를 찍었다는 사실이다. 일본인들조차 도쿄 왕궁의 문 앞에 이를 때까지 적과 싸우지는 않았다. 그와 달리 독일인들은 베를린 제국총리청 코앞에서까지 싸웠다.
25 현재 독일의 극우는 독일 정치의 주변에 자리잡고 있고, 그 도발 행위조차 1950년대 서독에서 부각되었던 편협한 민족주의와도 거리가 멀다.
63 독일 개신교의 관보들이 전쟁 발발에 즉각 반응했다. '우리는 지금 이 시간 우리 인민과 하나가 되어 지도자, 제국, 독일군 전체, 그리고 국내에서 조국을 위한 의무를 수행하고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 신께 간구합니다.' 하노버 주교는 기도문을 작성했다.
63 가톨릭 주교들의 반응은 1914년과 달랐다. 당시 쾰른 대주교는 '독일 군대를 축복하소서. 우리를 승리로 이끄소서'라고 기도했고, 개신교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민족의 영적인 부활을 외쳤었다. 그러나 1939년 그 쾰른 대주교는 교구교회들에게 행정 지침과 일련의 전시용 기도문을 발송하는데 그쳤다.
77 가톨릭 신자였던 빌름 호젠펠트는 교회의 그런 태도 때문에 더욱더 자기만의 도덕 기준에 따라야 했다. 그는 1938년 11월의 유대인 포그롬에 경악하기도 했었다. 호젠펠트는 폴란드인들에 대한 폭력이 현지의 독일인 혈통들이 당했다고 말하던 폭력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점을 곧바로 인식했다.
82 루터파 교회는 압도적으로 프로이센-독일 민족주의에 입각하여 사태를 바라보았다. 프로이센 개신교연합회는 폴란드 지역 개신교 회의와의 공식 만남에서 가톨릭 폴란드의 개신교 신자들이 민족의 품으로 귀환했다고 환영했다.
122 알트하우스가 그들과 달랐던 것은, 그가 그러한 주장에 1차대전 이후의 시간성을 부여했다는 점이다. 그가 주창한 '창조 신학'에 따르면, 기독교 보편주의는 개별적인 민족들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으며, 각 민족에게는 고유한 성격과 정체성이 부여되어 있고, 그 민족들은 역사적 투쟁을 통해서 민족에게 부여된 신의 뜻을 인식할 수 있다. 알트하우스는 민족주의가 자연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신성한 의무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리고 칼뱅주의의 예정설과 달리 독일 루터파 판본의 예정설은 실패의 도덕적 위험성을 반복해서 강조했다. 알트하우스는 그 섬세한 신학적 주장과 급진 민족주의적 군사 언어를 혼합하고 이를 1차대전의 야전 설교에서 갈고 닦았다. 그 덕분에 그는 1920년대 '루터 르네상스'의 강력하고 중심적인 인물로 부상했다.
123 민족적 개신교의 독일 구원론은 1918년의 '그the' 재앙을 극복하려던 반자유주의적이고 반민주주의적인 문화의 한 판본이었다. 보수주의자들은 역사의 순환성에 입각하면서도, 실패의 반복을 피하기 위해서는 그 순환의 경로에 강력하게 개입해야 한다고 믿었다.
124 1933년의 나치 집권이 '민족의 부활'로 의미화되면서 뒤집혔다. 가톨릭과 개신교의 지식인들은 이제 나치 '민족혁명'이 영적인 부활로 이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197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성장한 세대의 독일인들은 프랑스를 경멸하되 프랑스 문화는 존경하도록 배웠다. 독일인들은 전격전의 승리 덕분에 프랑스의 군사적 덕성에 대한 공포는 씻어냈다. 그러나 프랑스 문화에 대한 호기심과 존경심은 여전했다.
241 전쟁이 선언된 첫날 오후와 저녁의 많은 보고서들은 사람들이 정부가 러시아의 "배반 행위"에 대하여 군사력 외에 다른 방법으로는 대응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믿는다'라고 강조했다.
243 나치는 '볼셰비즘'에 대한 심층의 공포를 동원함으로써 1914년에 '야만적인 러시아'를 혐오하는 데서 하나가 되었던 것과 똑같은 넓은 공감대를 확보할 수 있었다. 과거의 사민당 투표자로부터 보수적인 민족주의자에 이르기까지 여론의 그 연합 전선은 심원한 그리고 공리적인 중요성을 가졌다. 1939년에 많은 가톨릭 주교들은 영국과 프랑스에 대한 전쟁에 대하여 삼가는 투의 지지를 보냈었다. 그들은 리벤트르포-몰로토프 조약이 국내에서 반성직주의의 물결을 개시하는 것은 아닐지 우려했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1941년 여름까지 발생하지 않았다. 국내에서 과격 나치와 갈등을 벌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주교들은 소련에 대한 공격을 열성적으로 지지했다. 그들은 소련 침공을 '신을 모르는 볼셰비즘'에 대한 '십자군 전쟁'으로 축성했다.
321 소련군의 반격이 시작되기 1주일 전인 1941년 11월 29일 프리츠 토트가 히틀러를 찾아가서 말했다. '이제 전쟁은 전투만으로는 승리할 수 없습니다.' 쉽게 들을 말이 아니었다. 토트는 군수부장관이었기에 독일의 군수품 사정에 대하여 가장 잘 아는 인물이었다.
321 '내가 어떻게 전쟁을 끝내야 하겠소?" 토트가 답했다. '오직 정치적으로만 끝낼 수 있습니다.' 히틀러에게 토트는 미국이 영국에게 군수물자를 공급하고 대서양을 통제하는 단계로부터 직접적인 참전의 단계로 넘어가면 어떤 심각한 결과가 초래될지 경고했다. 히틀러는 그 건전한 충고를 따르기는커녕 그로부터 2주일 뒤, 미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355 독일군이 1941년 겨울에 나폴레옹의 위대한 군대처럼 바스러져버렸다면, 그리고 그래서 제3제국이 평화를 읍소했다면, 2차대전에서 사망한 군인과 민간인 대부분은 죽지 않았을 것이다. 독일 도시와 농촌의 인프라도 폭격을 면했을 것이다. 이번 전쟁도 1차대전과 마찬가지로 독일 바깥에서 벌어지고 거기서 끝났을 것이기 때문이다.
369 학살 소식에 대한 독일인과 유대인이 보인 반응의 비대칭성은 여기서도 확인된다. 유대인의 경우에는 임박한 죽음이 전쟁의 나머지 모든 측면에 대한 이해를 규정했다. 독일인들의 경우에는 전쟁이 유대인 학살에 대한 반응을 규정했다. 그들을 분리한 것은 사건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관점이었고, 그 관점은 권력의 막대한 비대칭성 그리고 공감의 비대칭성을 특징으로 했다.
502 독일어 단어 희생Opfer은 비자발적인 (피해) 희생victim과 적극적인 (자기) 희생acrifice의 이중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그 단어는 독일 민족주의자들과 민족사회주의자들의 전사자 숭배의 핵심이었다.
506 가톨릭 주교들이 사람들의 복수 강박을 밀어낼 수 없던 것과 똑같이 독일인들의 공포와 무기력을 집단적인 저항 의지로 변모시키려던 나치당의 노력도 헛수고였다.
526 북부와 서부 독일의 피란민들이 폭격 경험을 독일의 남부와 동부 주민들에게 설명하면 어디서건 그들은 '테러 폭격'은 '유대인의 복수'라고 말했다. 나치가 폭격의 배후에 독일 민족을 근절시키려는 런던과 워싱턴의 유대인 로비가 있다고 선전한 것도 그 발상의 한 원인이었다.
541 독일인들은 독일의 전쟁에 대한 기본적 정당성을 의문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라를 휩쓸던 그 어떤 정치적 희망과 공포의 물결만큼이나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교회도 나치당도 대량 죽음에 유의미한 해석을 공급하지 못하자, 사람들이 삶과 죽음의 의미를 개인적으로 찾기 시작한 것이다.
566 민족공동체 이념이 개인적인 주장을 펼칠 틀이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 공동체에 유대인, 폴란드인, 여타의 외국인은 배제되어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불평의 격렬함과 갈등 소재의 사소함은 독일인들이 감정적인 '민족공동체'를 구축했다기보다 하나의 포위된 민족이었다는 점을 말해준다.
571 슈테판 게오르게는 1차대전 이전에 이미 신비주의적이고 배타적인 자신의 서클에서 애국자로서의 휠덜린 숭배를 시작했다.
572 나치가 튀빙겐의 축제와 병행된 강연에서 '횔덜린을 최초의 친위대원'으로 선언했다.
579 함부르크 재난 이후 독일인들의 위기의식은 많은 독일인들에게 유대인 학살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묻도록 했다. 그러나 그것은 외적인 쇼크와 몰락의 예감에 따른 정치적 셈법이었다.
580 함부르크 폭격 이후의 쇼크와 패닉은 사라졌다. 폭격과 유대인 정책의 상호적 가속화를 역전시키고자 하는 소망, 유대인 학살을 없었던 일로 만들면 폭격도 멈추리라는 소망도 사라졌다.
656 독일인들은 연합군의 폭격을 유대인 학살과 등치시키면서 그들 스스로를 희생자로, 그 두 가지 모두를 자신들이 당하는 고통의 원인으로 바라보았다.
754 독일인들의 첫번째 반응은 반역이기보다 자기연민이었다. 사람들이 자주 입에 올리던 경구는 '우리는 이런 재앙에 끌려들어갈 그런 사람이 아니다'였다. 그러한 정서는 반나치라기보다 자기정당화다. 모든 계급의 사람들이 '전쟁의 과정에 대한 모든 책임에서 자신을 면제시켰고', '전쟁과 정치에 대하여 책임질 사람은 그들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죄'의 문제는 최악의 재앙을 이끈 자들에게 전가되었다.
757 제3제국의 후계 국가 세 나라인 서독, 동독, 오스트리아가 1949년에 창설되었을 때 그 모든 나라에서 독일이 희생자였다는 감정이 독일에 희생당한 사람들에 대한 책임감을 압도했다.
784 독일어 '희생 피해Opfer'는 적극적인 '희생sacrifice'과 수동적인 '피해victim'의 이중적인 의미를 결코 상실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전사자'라는 단어가 여전히 적극적이고 애국적인 희생의 메아리를 전달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에 대한 추모는 병사들을 비자발적이고 수동적이며 죄 없는 피해자로 바라보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786 전형적이게도 목가적인 가족의 경제적 토대를 마침내 확보하자 그들은 부모로서 자식들에게 해줄 말이 없었다. 그들은 여전히 그들의 과거 행동이 정당했다고 믿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많은 가족 안에 세대 간 침묵의 장벽이 새로이 세워졌다. 다음 세대가 당시 독일인들이 왜 세계를 상대로 그러한 재앙을 가했냐고 묻기 시작한 반면 윗세대는 그들 스스로도 고통당했던 그 재앙에 결박되어 있었다.
역자해설
867 정말 좋은 책이다. 이 책은 2차대전중에 독일인들이 저지른 전쟁범죄에 대하여 세계 역사학계가 지난 20~30년간 수행한 연구를 총합한 책이다. 2015년에 영어로 출간된 이후 이 책은 독일어, 프랑스어, 네덜란드어, 이탈리아어, 중국어, 스페인어, 체코어, 러시아어, 폴란드어로 번역되었다. 한국어판은 열번째 판본이다. 번역되어 출간된 나라의 다수가 2차대전에서 독일의 전쟁범죄에 강타당했던 것으로도 이 책이 희생자들에게 많은 몫을 할당했음을 알 수 있다.
894 나치즘과 나치 전쟁범죄에 대한 역사학의 학문적 연구를 추적해온 독자들은 잘 알겠지만 세계 역사학계의 연구는 두 방향으로 나뉘어 있다. 하나는 '기능주의'라 불리고 다른 하나는 '의도주의'라 불린다. 기능주의는 나치 독일의 전쟁범죄를 나치 체제의 작동과 과정으로 설명하고 의도주의는 나치의 이념과 의지로 설명한다. 현재는 의도주의가 대세다. 역자인 나는 기능주의에 속한다.
895 나치의 절대악은 현대 산업사회의 문제에 대한 해결 방식의 사악한 버전이었다는 것이다. 의도주의는 나치는 자신들이 지닌 이념의 실현 가능성을 믿었고 따라서 유토피아적인 것이 아니었으며, 나치는 그 이념을 나머지 독일인들에게 각인시키는 데 상당히 성공하였기에 절대악을 자행했다고 설명한다. 말하자면 악이 악을 효과적으로 실천했다는 것이다. 기능주의는 관료제적 정치 구조와 사회에서 출발하고 의도주의는 문화와 이데올로기에서 출발한다.
904 읽기가 너무 힘들지만 그렇다고 손에서 놓을 수는 없는 책. 고통스럽고 풍부하고 때로는 아름답기까지 한 책, 무엇보다도 전쟁은 절대로 안 된다는 절규가 그 휴머니즘이 내내 울려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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