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지이 다케시: 파시즘과 제3세계주의 사이에서
- 책 밑줄긋기/책 2023-26
- 2025. 1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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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과 제3세계주의 사이에서 | 역비한국학연구총서 34 | 후지이 다케시 - ![]() 후지이 다케시 (지은이)역사비평사 |
서론
제1부 족청계의 기원들―1930년대 동아시아와 민족주의
제2부 족청계의 모태: 해방 정국과 조선민족청년단
제3부 족청계의 태동: 분단국가, 전향, 일민주의
제4부 족청계의 활동: 자유당 창당과 당국 체제의 형성
제5부 족청계의 몰락: 부산정치파동과 냉전 체제의 국내적 완성
결론
부록 1. 조선민족청년단 이사 / 2. 조선민족청년단 전국위원 / 3. 대한민족청년단 제5차 임시확대전국위원회 선언
4. 신당발기취지서(초안) / 5. 자유당선언 / 6. 자유당 당헌 / 참고문헌 / 찾아보기
459 이상 족청계의 기원과 형성, 그리고 그 활동상과 몰락 과정을 살펴보았다. 이승만 정권 초기에 이승만의 중요한 동맹자로 활동하면서 주로 이데올로기 생산을 담당한 이들은, 자본주의의 위기 속에서 파시즘이 세계적으로 확산되던 1930년대에 그 사상을 형성했으며 동아시아에서 냉전 구조가 굳어지는 1950년대 중반에 몰락했다는 점에서, 세계 질서 재편 과정에서 나타난 과도기적인 흐름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의 사상은 파시즘의 자장 속에서 형성된 것이었지만, 주변부에서 발현된 모습은 제3세계주의적인 것이기도 했다. 세계적으로 파시즘이 패배한 1945년 이후에, 그리고 세계적으로 제3세계주의가 발흥하는 1960년대 이전에 활동한 그들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파시즘과 제3세계주의 사이에 위치한 존재였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성격을 띤 족청계가 보여준 역사적 궤적을 다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족청계의 사상적 기원은 대체로 1930년대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이범석은 1930년대 말에 장제스가 개설한 중앙훈련단에서 훈련을 받으면서 '민족주의·군사화·지도자 숭배'로 요약할 수 있는 장제스의 파시즘 사상을 익히게 되었다. 항일전쟁 과정에서 체계화된 장제스의 파시즘적 사상은 국공합작 상황 속에서 국민총동원을 위해 제기된 '국가지상 민족지상'이라는 구호로 집약될 수 있는 것이었는데, 이것이 이범석의 사상의 바탕을 구성하게 되었다. 청계의 대표적 이데올로그의 한 사람이었던 안호상은 1920년대 독일에서 인종주의적인 경향을 띤 철학자의 지도를 받으면서 칸트와 헤겔의 영향을 받았는데, 칸트식의 규율의 중요성과 헤겔식의 민족의 절대적 규정성을 핵심으로 한 그의 철학은 1930년대에 동양철학과 교차되면서 장제스가 중요시했던 양명학의 '지행합일'이라는 이념에 접근해갔으며, 성리학의 전통 속에서 헤겔적인 '전체'를 찾아내려고 했다. 족청계의 또 하나의 대표적 이데올로그인 양우정은 1920년대 후반부터 프롤레타리아문학운동을 통해 사회주의운동에 참여하다가 1931년에 검거된 뒤 1934년에 전향하게 된다. 전향을 하면서 양우정이 공산주의에 대치시킨 것이 가족이었는데, 이 '가족주의'는 일본 파시즘과 그 논리를 공유하면서도 민족주의와도 연결될 수 있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족청계 핵심 인사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의 사상은 파시즘과 관계를 가지면서 형성된 민족주의였다.
이들의 사상은 해방 이후에 본격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데, 그 중심이 1946년에 조직된 조선민족청년단(청)이었다. 족청은, 좌우합작을 추진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 친미적인 청년들을 양성할 의도를 가진 미군정의 전면적인 후원을 받고 조직되었는데, 미군정의 의도와 달리 족청의 훈련 방식은 중국의 중앙훈련단을 거의 그대로 이식한 군사주의적인 규율을 중심으로 한 것이었으며, 그 이념 역시 파시즘적인 경향이 강한 민족주의였다. '비정치, 군사, 비종파'를 내세운 족청은 폭력적인 대공투쟁을 일삼던 기타 청년단들과 달리 훈련을 통한 조직 확장에 치중했으며, 그 가운데 좌익(출신)들을 적극적으로 포섭하는 모습을 보였다. 강한 민족주의로 좌익까지도 포섭하려는 경향은 당시 대한독립촉성국민회에서 '공생민족주의' 계열과 '민족사회주의' 계열의 동맹으로 미군정이 추진하는 좌우합작에 맞설 것을 주장했던 우정과도 공통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민족주의를 내세우던 이들은 단독정부 수립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1948년의 5.10 선거에 대한 참여를 결정하면서 족청은 내부적인 갈등을 겪기도 했지만, 선거 결과 적지 않은 국회의원을 배출했다. 국회로 진출한 족청 출신들은 파시즘적인 논리로 노동자 보호를 강조하고 국방력 강화를 주장하기도 했는데, 족청의 특성을 더 잘 보여준 것은 정부에 진출한 이범석과 안호상이었다. 대통령으로 선출되면서 한국민주당과의 동맹 관계를 깬 이승만이 새로운 동맹자로 족청을 선택한 결과, 이범석은 국무총리 겸 국방부 장관으로, 안호상은 문교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국무총리로서는 뚜렷한 개성을 발휘할 수 없었지만 국방부 장관으로서 이범석은 국방부에 정치국을 설치해 중국의 국민혁명군에서 그랬듯이 반공 군대 건설을 위해 군인에 대한 정치 교육을 실시하려고 했으며, 안호상은 민주적 민족교육이라는 이름 아래 개인주의와 국제주의를 배격하고 인종주의적인 민족주의를 고취했다. 이들의 이러한 정책은 미국 측의 경계를 사게 되었는데, 족청 해산을 둘러싼 이승만과 이범석 사이의 갈등과 맞물리면서 이범석은 국방부 장관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이범석이 스스로의 기반으로 삼고자 했던 국군을 잃게 되고 족청이 해산 당하면서 새로이 활용하려고 한 것이 일민주의였다. 일민주의 미군 철수가 결정되어 정부로서 독자적 반공 체제 확립이 시급했던 1949년 4월에 국민보도연맹이 결성되는 데 맞추어 좌익을 전향시키고 포섭할 목적으로 본격적으로 체계화되기 시작한 이념 체계였으며, 그와 같은 일민주의의 체계화를 주도한 인물이 양우정이었다. 양우정이 체계화한 일민주의는 국내의 계급모순을 국제적인 민족모순으로 치환시키는 파시즘적인 민족주의의 특성을 강하게 지닌 것이었는데, 당시 일민주의가 보여준 '반제국주의적' 성격은 미국이 '공산 진영'을 분열시키기 위해 구상한 민족주의의 적극적 활용 방안(쐐기 전략)과도 공통적인 것이었지만 무엇보다도 민족주의를 통한 좌익 포섭이라는 방식은 과거 족청에서 취했던 방식과 동일한 것이었다. 더욱이 장제스를 모델로 삼았던 이범석에게 삼민주의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는 일민주의는 꼭 필요한 것이었다. 그 결과 이범석은 일민주의보급회를 장악해 이를 전국적인 기반으로 삼으려 했으며, 그와 동시에 안호상에 의해 일민주의가 재정립되게 되었다. 양우정도 이 움직임에 합세하면서 일민주의를 매개로 족청계가 형성되었다. 하지만 국무총리와 문교부 장관과 같은 관직을 이용해 일민주의보급회를 확대하려 했던 그들의 의도는 이범석이 1950년 4월에, 안호상이 5월에 각각 해임되면서 일단 좌절하고 만다.
하지만 1950년 6월에 발발한 한국전쟁은 족청계에 부활의 계기를 제공했다. 전쟁이라는 상황 자체가 군인인 이범석에게 호기일 수 있었지만, 미대사관 측의 방해로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자 이범석은 장제스와의 관계를 통해 부활의 기회를 노리고자 대만으로 가게 되었다. 이범석이 활용하려 했던 미군의 롤백이 실행되지 않아 그의 원래 의도는 달성되지 않았지만, 대만에서 지낸 결과 이범석은 중국국민당의 개조를 통한 장제스 체제의 공고화를 목도하게 되었다. 대만에서 귀국한 이범석은 당시 구상되기 시작한 신당 조직에 참여하게 되는데, 그때 신당의 모델로 활용된 것이 개조된 중국국민당이었으며 이것은 국회를 누르기 위한 대중 조직이 필요했던 이승만의 뜻에도 맞는 것이었다. 이렇게 원외자유당 탄생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결과 이범석은 원외자유당 부당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다시 이범석이 이승만을 이은 제2인자 자리를 확보한 것이다.
원외자유당을 통한 족청계의 활동은 국회에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폭력적으로 강요한 부산정치파동에서 절정에 달했다. 족청계는 '지방 대표'들을 통한 '민의 동원 등에서 그 힘을 과시했지만, 그 결과 미국 측에서 부산 정치파동의 주동 인물로 이범석을 지목하게 되었다. 미국 측의 공작과 이승만 지지 세력 내부의 갈등이 맞물리면서 이범석은 또다시 이승만의 경계 대상이 되었으며, 그 결과는 부통령 선거 낙선이었다. 일단 수세로 밀린 족청계는 1953년 봄부터 휴전 반대운동이 대대적으로 전개되는 가운데 다시 공세를 펴 자유당, 농총, 국민회 등을 거의 장악하게 되지만, 이범석이 외유를 나가고 없는 사이에 이승만은 족청계 제거를 명령해 휴전 체제 성립과 때를 같이해서 족청계는 권력 중추부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족청계가 보여준 이와 같은 궤적은 파시즘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전유되는 방식과 그것이 냉전 질서와 충돌을 일으키게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들의 사상은 말할 것도 없이 반공주의였지만 그 핵심을 이룬 것이 민족주의였다는 점에서 미국에서 생각하는 반공주의와는 거리가 있었다. 미국에 서도 한때 민족주의의 적극적인 활용을 모색하기도 하지만, 공화당 아이젠하워 정권의 등장으로 냉전 전략 가운데 경제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극단적 민족주의는 미국의 반공 전략을 저해하는 요소로 분명하게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또한 청계가 보여준 대중 동원형 정치 형태 역시 한국 내정의 안정을 원했던 미국의 입장과 배치될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이 족청계의 성쇠는, 민족해방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던 대중 동원의 정치 공간이 한국전쟁 휴전과 더불어 사라지게 되는,'해방8년'의 한 측면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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