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니얼B.클린데닌: 동방 정교회 신학
- 책 밑줄긋기/책 2023-26
- 2025. 12. 26.

|
동방 정교회 신학 | 대니얼B.클린데닌 - ![]() 대니얼B.클린데닌 (지은이),주승민 (옮긴이)은성 |
서문
제1부 예배로서의 신학: 성찬예배와 성례전
제1장 지상의 천국
제2장 성례전
제3장 이콘의 의미와 내용
제4장 성모 마리아와 성인들
제2부 전승으로서의 신학: 공의회와 교부들
제5장 동방 정교회 관점에서의 신학 연구
제6장 고대 교회에서 전승의 역할
제7장 고대 공의회들의 권위와 교부들의 전승
제8장 본질적 전승과 비본질적 전승들
제3부 만남으로서의 신학: 하나님, 그리스도, 인간
제9장 부정의 신학과 삼위일체 신학
제10장 정교회의 삼위일체 신학에서 성령의 발현
제11장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
제4부 선교 신학: 정교회와 서방교회
제12장 정교회 전통에서의 선교 명령
제13장 정교회에서 진리의 중요성
94 정교회는 성모 마리아를 “그룹 천사보다 고귀하며 스랍 천사보다 영광스러운 분”, 모든 피조물보다 뛰어나신 분으로 숭배한다. 교회는 한 분이신 중보자를 대치함이 없이 모든 인류를 위해 자기 아들에게 중보의 기도를 올리는 하나님의 어머니를 마리아 안에서 본다. 우리는 그녀에게 중보의 기도를 드려 달라고 쉬지 않고 기도한다. 동정녀 마리아에 대한 사랑과 숭배는 정교회 전체를 따뜻하게 해주고 활력을 주는 심장이요, 정교회 신앙의 핵심이다.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이나 마리아 숭배를 포함하지 않는 신앙은 정교회와 관계없는 다른 신앙이요 다른 기독교이다. 개신교는 이상하게도 하나님의 모친에 관한 감정이 결여된 입장을 취하는데, 이것은 종교개혁 시대로부터 비롯된 상태이다. 동정녀 숭배의 결여라는 면에서, 개신교는 정교회나 가톨릭 교회와는 다른 태도를 지니며, 그렇기 때문에 성육신에 대한 개신교의 이해는 그 풍부함과 힘을 상실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의 완전한 연합은 인간 본성의 성화 및 영화와 직접 연관되며, 따라서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어머니와 연관된다. 이 개념이 없으면, 성육신은 단순히 표면적이고 신성 포기적인 것, 하나님 앞에서 인류의 칭의를 확보하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로서 인간의 본성을 취한 자발적인 자기 비하가 될 뿐이다. 여기서의 성육신은 죄 때문에 절실하게 필요하게 된 구속을 이루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따라서 동정녀 마리아는 성육신을 위해 불가피하지만 외면적인 도구, 일단 그 필요가 충족된 후에는 버려지고 잊히는 도구에 불과하다. 개신교에서는 동정녀 마리아에게 사려 깊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며, 마리아가 요셉에 의해 다른 자녀들을 낳았다거나 심지어 동정녀 탄생 자체까지 부인하는 극단적인 입장을 보이기도 한다. 정교회는 결코 어머니와 아들을 분리하지 않는다. 성육하신 성자에 의해서 동정녀도 성육하였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경모하면서 그의 모친을 경모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모친에게서 인성을 받았으며, 마리아 자신이 인성을 완전하게 대표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마리아 안에서 타락 이후의 인류가 접근할 수 있는 성성(sanctity)이 획득된다. 구약 시대 교회의 목적은 성령을 받기에 합당한, 즉 수태고지에 합당한 거룩한 인성의 고양, 보존, 그리고 준비였다. 그런데 거룩한 인성은 동정녀 안에서 획득되었다. 그러므로 마리아는 단순히 도구가 아니라 인간적인 면에서 성육신의 직접적이고 긍정적인 조건이었다. 그리스도는 인간 본성에 위배되는 어떤 기계적인 과정에 의해서는 성육되실 수 없었을 것이다. 바로 그 본성 때문에 가장 순수한 인간이 스스로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 1:38)라고 말해야 했던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순간에 성령이 그녀에게 임했다. 수태고지는 동정녀의 오순절이었다. 성령은 그녀를 완전히 성화시키고 그녀와 함께 거하셨다.
정교회는 1854년에 결정된 가톨릭의 교리, 즉 동정녀 마리아가 태어날 때부터 원죄가 없이 태어났다는 의미를 지닌 성모무흠수태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러한 교리는 동정녀를 인류에게서 분리할 것이며, 그렇게 되면 그녀는 자기 아들에게 인성을 전해줄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정교회는 지극히 순결한 동정녀 안에 어떤 개별적인 죄도 용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모친의 권위에 합당치 못하기 때문이다. 동정녀 마리아와 그 아들 사이의 연관은 아들의 탄생과 더불어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인성과 신성이 뗄 수 없이 결합되어 있는 한 지속된다. 주님의 지상 사역 기간 동안 동정녀 마리아는 표면에 나타나지 않고 겸손하게 뒤에 머물러 있었으며, 골고다의 십자가 가까이에서 주와 함께 하기 위해서만 표면에 등장하여 아들의 고난에 동참했다. 그녀는 주님의 부활에 참여한 첫 인물이기도 하다. 동정녀 마리아는 보이지는 않으나 진정한 사도 교회의 중심이었다. 그녀 안에 원시 기독교,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있을 때에 마리아에게 아들로 주신 요한이 기록한 복음서의 비밀이 감추어져 있다. 교회는 마리아가 자연사 했으나 썩지 않고 아들에 의해 일으킴을 받아 영화된 몸으로 천국에서 그리스도의 우편에 살고 있다고 믿는다. 그녀 안에서 세상 창조 안에 있는 하나님의 지혜의 사상, 그리고 피조된 세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지혜가 실현되었다. 그녀 안에서 하나님의 지혜가 정당화되므로, 성모 마리아 숭배는 거룩한 지혜(Holy Wisdom) 숭배와 혼합된다. 동정녀 마리아 안에는 거룩한 지혜와 피조 세계의 지혜, 성령과 인간적 본질이 연합되어 있다. 그녀의 몸은 완전히 영적인 몸이며 변화된 몸이다. 그녀는 창조의 칭의요 목적이요 의미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녀는 세상의 영광이다. 그녀 안에서 하나님은 이미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신다.
98 정교회 신앙에서는 성인 숭배가 상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성인들은 천국에 있는 우리의 중보자요 보호자이며, 따라서 전투적 교회의 살아있고 적극적인 지체이다. 그들은 그림이나 성유물을 통해서 교회 안에 임재한다. 그들은 기도의 구름,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으로 우리를 에워싼다. 이러한 증거의 구름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서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에게 더 가까이 가게 해주고 그분과 연합하게 해 준다. 성인들은 하나님과 인간들 사이의 중보자가 아니라(이것이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와 함께 기도하고, 우리의 기독교적 사역과 그리스도와의 교제 안에서 우리를 도와주는 친구들이다. 때때로 성인 숭배는 이교의 신격화된 영웅 숭배와 흡사한 것처럼 여겨지거나 다신론과 동일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비교는 실제로 겉으로 보이는 것만큼 부자연한 해석이 아니다.
279 신화(theosis)! 이 심오한 단어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영역으로 고양되는 것, 하나님의 영역으로 올라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의 연합을 의미한다. 그것이 본질적으로 신화의 의미이다. 그러므로 인간적 성품은 영화를 향해 움직여야 하며, 그 과정에서 물질주의는 파괴되고 붕괴되어야 한다. 인간 영혼이 현재의 둔함에서 벗어나 빛나는 영성으로 변화되기 위해서 영혼은 연마되어야 한다. 그것이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이 하나의 실체가 되는 방식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모습으로 변화된다. 그러나 이 연합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본질의 변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본성적이고 윤리적인 것이며, 은혜와 조화를 이룬다. 그것은 하늘나라의 무한한 행복이신 하나님과 전인(人)의 연합이며, 인간의 본성은 신의 성품의 생성물이 된다. 그것은 원래의 아름다움으로 재형성되며, 새로운 생명으로 재탄생한다. 그것은 신적 양자됨을 통해서 재창조된다. 시나이의 아나스타시우스(Anastasius of Sinai)는 신화를 훌륭하게 정의했다
"신화는 우리의 본성이 열등한 것으로 쇠퇴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인간적 성품의 본질적인 변화도 아니다. 그것은 보다 선한 것으로의 고양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행하신 계획, 하나님에 의한 엄청난 차원의 자발적인 겸양이다. 하나님에게 속하는 것은 원래 자신의 본성이 변화됨이 없이 보다 큰 영광으로 고양되어졌던 것이다."
289 신화(Theosis). 하나님과의 연합. 성령을 받음. 어떻게 해야 우리가 이것을 현실화할 수 있는가? 그곳에 이르는 길은 무엇인가? 그 대답은 오직 하나, 기독교적 삶이다. 기독교적 삶은 성례전 및 순수하고 거룩한 동기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덕행인 거룩한 사역들과 더불어 존재한다.
이 점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많은 기독교인들은 선행과 덕행이 우리를 구원하며 하나님과 연합시켜 준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기독교적 삶의 목적, 우리의 노력과 분투의 목적은 선행이나 덕행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들 자체는 우리에게 신화를 부여해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적 삶의 참 목적은 성령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그렇게 되면 성령은 우리의 존재를 신화시키신다. 기도, 금식 등 모든 기독교적 수행과 훈련들은 선한 것이지만, 그것들 자체는 기독교적 삶의 목적을 반영하지 못한다. 그것들은 그 목적 성취에 필요한 수단에 불과하다. 금식, 철야, 기도, 구제 등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선행들은 우리로 하여금 항상 동일한 목적─성령을 받아 우리 자신의 것으로 삼는 것, 즉 신화─에 도달하도록 도와주는 수단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선행만이 우리에게 성령의 열매들을 줄 수 있다. 예수의 이름으로 행해진 것이 아닌 선행(비기독교인이나 그리스도로부터 분리된 독립된 선이 있다고 가정하는 기독교인들이 행하는 선)은 우리가 내세에 상급을 받는 일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 또 그것들은 현세에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제공하지도 못한다. 기독교인들을 위한 독립된 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며 우리를 하나님과 연합시키는데 도움이 되는 행위, 그리고 우리를 인도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개인적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행위는 선한 것이다. 다시 한 번 이 점에 주의를 기울여 보자. 모든 기독교인에게는 덕행, 선행, 기독교적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들 자체가 목표는 아니다. 그것들은 수단, 또는 기독교적 삶의 외적 표현이다. 목적은 오직 하나, 즉 성령의 은혜를 받아 우리 자신의 것으로 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의 문제가 있다. 우리는 언제 성령을 받는가? 우리가 먼저 선행을 하고 고결하게 된 다음에 상급으로 성령을 받는가? 아니면 먼저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고결한 사람이 되도록 감동하시는가? 신학자들은 이 문제에 많은 시간을 보내왔다. 왜냐하면 그것이 은혜와 자발적 결정 능력(또는 자유의지)이라는 주제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자발적 결정 능력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유로운 선택을 하게 해주는 능력이요 행위이다. 은혜는 인간에게 주어진 성령의 신령한 은사이다. 동방정교회의 전승과 가르침에 따르면, 은혜와 인간의 자유는 공동으로 표현되며 서로 분리하여 이해될 수 없다. 그것들은 두 개의 분리된 요소로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이 내면적으로 자유로이 기독교적 삶과 선을 위한 결정을 내리는 순간,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여 그를 강건하게 해 준다. 이 은혜가 주어지는 순간, 그는 자유로운 선택을 한다. 닛사의 그레고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구원을 피하여 도망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지 못한다. 또 은혜를 받지 못한 영혼들을 참된 삶의 차원으로 들어올려 줄 수 있는 자체적인 능력을 지닌 인간의 덕이란 존재하지 않는 다. 그러나 의로운 행위와 성령의 은혜가 동시에 영혼에 임할 때에, 그것들은 영혼을 복된 삶으로 채울 수 있다."
결국, 은혜는 인간 의지에 따른 덕행에 대한 상급이 아니며, 역으로 자유의지에 따른 덕행들의 원인도 아니다. 여기에서 문제는 덕이나 협력에 관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것은 두 개의 의지, 즉 하나님의 은혜인 신적 의지와 우리의 자발적 결정 능력인 인간적 의지의 협력에 관한 것이다. 우리의 자유의지의 협력이 있기 때문에 우리 안에서 신적 은혜가 증가할 수 있다. 그것은 인간의 인격을 점유하며 선을 구체화하기 위해서 그 인격을 강건하게 해 준다. 각 사람이 자유로이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받는 데 비례하여 그만큼 더 기독교적 삶은 은혜로 충만하고 완전해지며, 기독교적 선행이 증가하고 덕이 진보한다. 이것은 기독교인이 신화의 길을 걸어가면서 은혜로 말미암아 힘을 얻어 점점 선행과 덕행을 증가시킨다는 의미이다.
'책 밑줄긋기 > 책 2023-26'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이리에 아키라: 하버드-C.H.베크 세계사 : 1945 이후 (0) | 2025.12.26 |
|---|---|
| 레셰크 코와코프스키: 마르크스주의의 주요 흐름 3 ─ 황혼기 (0) | 2025.12.26 |
| 니콜라스 스타가르트: 독일인의 전쟁 1939-1945 (1) | 2025.12.18 |
| 마커스 J. 보그, 톰 라이트: 예수의 의미 (0) | 2025.12.18 |
| 펠리페 페르난데스아르메스토: 생각의 역사 (0) | 2025.12.18 |
| 후지이 다케시: 파시즘과 제3세계주의 사이에서 (1) | 2025.12.11 |
| 리하르트 바그너: 니벨룽의 반지 세트 (1) | 2025.12.11 |
| 조반니노 과레스키: 돈 까밀로의 양떼들 - 신부님 우리들의 신부님 6 (0) | 2025.12.11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