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젠슨: 종교개혁의 표어들

 

종교개혁의 표어들 | 비아 시선들  | 로버트 젠슨 종교개혁의 표어들 | 비아 시선들 | 로버트 젠슨 - 10점
로버트 젠슨 (지은이),권헌일 (옮긴이)비아

1. 표어에 관한 문제
2. 믿음에 의한 칭의 - 행위의 문제
3. 믿음에 의한 칭의 - 믿음의 문제
4. 모든 신자는 사제다
5. 율법과 복음의 구별
6. 십자가의 신학
7. 오직...
8. 실제 현존
9. 유한은 무한을 담을 수 있다
10. 오직 성서
11. 의인인 동시에 죄인
12. 연결하기

부록:
나의 신학 여정에 대하여 - 시작부터 오늘까지
로버트 젠슨 저서 목록


73 '오직'sola이라는 말로 시작하는 세 문구가 있다. '오직 은총'sola gratia,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성서'sola scriptura. 이 세 문구는 종종 하나의 표어처럼 묶여 종교개혁의 핵심을 요약하는 말로 쓰인다. 실제로 이 문구들은 종교개혁의 주요 주제들을 꽤 많이 담아내고 있다. 하지만 '오직'이라는 말이 반복된다는 이유만으로 세 문구가 같은 논리를 공유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어떤 면에서는 세 문구를 하나의 묶음으로 쓰는 것 자체가 오용이라 할 수도 있다). 이 표어들을 올바로 쓰기 위해서는 먼저 이들을 하나로 묶지 말고 따로 다루어야 한다. 저 세 문구에서 '오직'이라는 말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종교개혁 신학에서 은총과 믿음은 모두 우리를 의롭게 하므로 둘은 서로 연결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성서 그 자체나 성서의 내용을 믿는다고 의롭게 되지는 않는다(이 부분에 대해서는 뒤에서 따로 다룰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성서는 다른 두 표어와는 전혀 다른 맥락에 속하며, 그 중요성과 여러 쟁점을 고려할 때 별도로 다루어야 한다. 하지만 또 다른 차원에서는 '오직 은총'과 '오직 믿음'도 구분해야 한다. '오직 은총'이라는 표어는 '은'이라는 개념을 도입하는데, 이 개념은 우리가 다루는 다른 표어들과는 전혀 다른 신학 틀에 속해있다. 반면 '오직 믿음'은 앞에서 다룬 '우리는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라는 표어의 변형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 장에서는 '오직 은총'을 집중해서 살펴보려 한다. 그렇다면 '은총'이란 무엇인가? 멜란히톤은 성서의 용례phrasin scripturae를 따른다고 주장하면서 은을 '하느님의 호의 'The favor of God로 정의했고, 더 넓은 의미로 이 말을 쓰는 것은 오류라고 강력하게 비난했다. 이후 멜란히톤의 정의와 다른 견해에 대한 그의 논박은 루터교 전통에서 사실상 교리에 가까운 역할을 했다.  

109 '오직 성서'라는 표어는 종교개혁 시기에 나온 표어 중 오늘날까지 모든 개신교 교파가 가장 즐겨 쓰는 표어일 것이다. 그렇기에 가장 문제가 많은 표어라고 할 수도 있다. 내 생각에 이 표어를 유의미하게 쓸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문제는 바로 '오직'이라는 말에 있으며 오용 가능성(어쩌면 가능성이 아니라 필연에 가깝다)이 이 말에 들어 있다. 이 장의 대부분은 이 부분에 관해 이야기할 것이다. 불필요한 혼동을 막기 위해 먼저 '성서I''ssccriptura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성서'라는 말은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에서 생겨난 개념이지만, 특정 공동체가 자신들의 삶과 신앙을 유지하기 위해 권위 있는 문헌을 가지는 현상은 거의 모든 종교에 공통으로 나타난다. 그러한 면에서 성서가 무엇이냐는 문제는 엄밀히 말해 그리스도교 신학의 주제라기보다는 종교 현상학phenomenology of religion의 주제에 더 가깝다. 

성서, 경전이란 종교 공동체라 불릴 만한 공동체가 오래 존속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본문을 말한다. 이 본문은 오래 보존할 수 있는 매체에 새겨지는데 매체는 비문일 수 있고, 책일 수도 있으며 훈련받은 기억일 수도 있다. 성서가 공동체 내에서 작동하는 방식은 종교마다 다르다. 예를 들어 브라만교의 경전인 베다The Vedas는 대부분 의식 절차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 의식들은 이미 수백 년 동안 실제로 행해진 적이 없다. 브라만교가 베다에서 중시하는 요소는 (외부인이 예상하듯) 그 본문의 의미가 아니다. 그 경전이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면서 아리안족이라는 뿌리와 현재 브라만교 신자들을 이어주는 증거가 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다. 이와 정반대편에는 히브리 성서의 일점일획까지 정확히 해석하는 일을 중시하는 정통 랍비 유대교가 있다. 이런 다양성을 이해해야 우리는 '오직 성서' 중 '성서' 부분에서 생길 수 있는 혼란을 피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의 성서는 두 권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교회가 이 두 권을 똑같은 방식으로 중시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아주 엄격하게 정의하면 교회의 성서는 오직 이스라엘의 성서, 곧 '구약'old Testament뿐이다. 교회는 '신약'없이도 100년 넘게 존속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성서는 교회에 있어 당연한 전제였다. 교회는 이스라엘 성서를 '채택하거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스라엘의 성서가 교회를 세웠다고 보는 게 적절하다. 최초의 그리스도인들이 부활 사건을 겪기 전부터, 혹은 그 사건에 대한 믿음과는 무관하게 이스라엘의 성서는 그들에게 권위 있는 문서였다. 그 성서 속에서 살아갔기 때문에 그들은 부활을 이해할 수 있었다.  

여러 주장이 나오곤 했다. 가장 위험한 주장, 그리고 명백한 오용은 "우리에게 성서가 있으니 신경은 필요 없다"는 주장일 것이다. 이 표어가 나오자마자 가톨릭 교회는 반문했다. "오직 성서라고? 최소한 (사도 신경이나 니케아 신경과 같은) 신경은 있어야 하지 않는가?" 이에 대해 주류 종교개혁가들은 "아니요,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건 그런 뜻이 아닙니다"라고 대답해 왔다. 다시 가톨릭 교회는 반문했다. "그렇다면 무슨 뜻인가?" 종교개혁의 후예들은 신경(신조)을 '성서의 요약'이라고 말함으로써 '오직'이라는 말의 공격에서 신경을 지키려 했다. 하지만 사실 신경은 성서의 요약이 아니다. 창조에서 예수의 탄생으로, 그리고 예수의 탄생에서 바로 예수의 죽음으로 건너뛰는 등 신경은 성서 내용의 대부분을 생략하고 있다. 어떤 교회나 집단은 자신들에게는 신경이 없으며 성서만 따른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실제로 그들이 따르는 가르침을 살펴보면 신경에 담긴 가르침과 거의 똑같다. 게다가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은 자신들이 붙잡은 가르침을 완고하고 단순하게 해석해 매주 신경을 고백하는 전통 교회들보다 오히려 덜 유연하고 더 경직된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때때로 '오직 성서'라는 표어는 성서 외 교회에서 작동하는 다른 권위를 배제하는 도구로 쓰이기도 했다. 일부 개신교인들은 '오직 성서'를 지키려면 주교 제도나 그와 비슷한 직분에 의한 교회 운영을 거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기에는 문제가 있다. 앞서 말했듯 신약성서 정경과 주교제는 역사에서 거의 같은 시기, 동일한 위기에 대응하면서 함께 등장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주교제가 먼저 자리를 잡았고, 교회는 주교들의 지도 아래 정경을 확정했다. 그렇다면 어째서 성서는 받아들이고 주교제는 거부해야 하는가? 신약성서가 교회사 속 중요한 시기에 성령께서 주신 선물인데도, 그 선물을 받아들인 주교제는 성령의 선물이 아니라는 말인가? 이처럼 '오직 성서'를 교회의 오래된 제도와 구조를 부정하는 근거로 사용하는 것은 명백한 오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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