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커스 J. 보그, 톰 라이트: 예수의 의미
- 책 밑줄긋기/책 2023-25
- 2025. 1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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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의미 | 마커스 보그 외 - ![]() 마커스 J. 보그 (지은이),김준우 (옮긴이)한국기독교연구소 |
1부. 예수에 관해 어떻게 알 수 있는가?
2부. 예수는 무엇을 하였으며 무엇을 가르쳤는가?
3부. 예수의 죽음
4부. "하느님이 예수를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셨다"
5부. 예수는 하느님이었는가?
6부. 예수의 출생
7부. "그는 영광 중에 다시 오실 것이다"
8부. 예수와 기독교인의 생활
29 예수라는 이름은 다음 두 가지를 가리킨다. 예수는 한편으로 과거의 인물(human figure of the past), 즉 1세기 갈릴리의 유대인이었던 나자렛 예수를 가리킨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라는 이름이 기독교 신학과 기도 예배에서는 현재의 신적인 존재(divine figure of the present), 즉 부활하여 살아계신 그리스도이며 하느님과 한 분이신 분을 가리킨다.
이 둘은 그 동안의 예수 연구에서 다양하게 불려졌다. 전자는 흔히 "나자렛 예수" 혹은 "역사의 예수" 혹은 "역사적 예수"(historical Jesus)라 불려진다. 후자는 흔히 "신앙의 그리스도"(Christ of faith) 혹은 "성서적 그리스도” 혹은 "정경의 예수”라고 불려진다. 내가 선호하는 용어는 "부활절 이전의 예수" (pre-Easter Jesus)와 “부활절 이후의 예수"(post-Easter Jesus)이다.
부활절 이전의 예수는 물론 그의 역사적 생애 동안의 예수, 즉 1세기 갈릴리의 유대인 농민으로서 과거의 살과 피가 있는 인물을 뜻한다. 이 예수는 죽어서 사라졌다. 이 말은 부활절을 부인하는 말이 아니라, 예수의 "원형질"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을 단지 인정하는 말이다.
부활절 이후의 예수는 그의 죽음 이후에 체험된 예수, 즉 기독교 전통과 체험의 예수를 뜻한다. 여기서 두 개의 명사, 즉 전통과 체험 모두가 똑같이 중요하다. 기독교 전통의 예수는 발전하는 기독교 전승의 예수, 즉 정경 이전(pre-canonical) 단계, 정경(canonical) 단계, 그리고 마침내 신조(creedal) 단계의 예수를 포함한다. 기독교 체험의 예수는 예수가 죽은 후 계속해서 그의 추종자들(1세기와 그 이후)이 살아 계시고, 영적이며, 궁극적으로는 신적인 실재로 체험하는 예수이다. 부활절 이후의 예수는 기독교적 체험의 예수로서, 단순히 믿음의 한 조항만이 아니라 체험적 실재(an experiential reality)다.
212 부활절의 핵심적 의미 가운데 첫째는 이제까지 말한 것, 즉 예수는 살아 계시다(Jesus lives.)는 점이다. 그가 죽은 이후에도 사람들은 계속해서 그를 체험하였다. 그러나 그 의미는 단순히 부활절이 일차적으로 죽음의 정복과 내세(afterlife)에 대한 약속인 것처럼 "예수가 살아 계신다"는 것만은 아니다.
신약성서에는 부활절의 두 번째 중요한 의미가 나타나 있는데, 그것은 예수가 주님이시다(Jesus is Lord)는 점이다. 주님은 물론 주인(master)으로서 그에게 충성을 바쳐야만 하는 분이다. 복음서들과 성서 전체에서는 주님이 때로 이런 의미로 사용된다. 그러나 주님은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도 있다. 즉 주님은 하느님을 가리키는 단어들 가운데 하나로서, 때로 신성(divinity)을 뜻한다. 주님이라는 말은 이 두 가지 모두의 의미에서 부활절 이후의 예수를 가리킨다. 이미 신약성서 자체 안에서도 기도와 찬송을 마치 하느님에게 드리듯 예수에게 드리고 있다.
"예수는 주님이시다"라는 주장은 부활한 그리스도에 대한 초기 기독교인들의 체험에 관해 더욱 많은 것을 암시한다. 이러한 체험들은 우리의 돌아가신 부모님이나 배우자를 체험하는 것과 똑같은 범주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체험으로부터 우리는 우리의 부모님이나 배우자가 주님이라는 단정을 내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예수의 제자들은 그런 단정을 내렸다. 나는 그 주장이 부분적으로 예수가 죽기 이전부터 예수에 대한 그들의 체험 속에 근거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예수가 살아 있는 동안에 이미 그를 매우 비범한 존재로 체험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또 다른 요인은 예수가 죽은 후 그들이 예수에게서 하느님의 특성을 체험했던 것이다. 즉 예수는 하느님처럼 영적인 실재였으며, 하느님처럼 그는 어디에서나 체험될 수 있었다. 따라서 "예수는 주님이시다."
"예수는 주님이시다"는 것과 연관된 신약성서의 고전적 은유는 예수가 "하느님의 오른편에 계신다"(raised to God's right hand)는 구절이다. 나는 사실상 "하느님의 오른편에 계신다"는 것이 "죽은 사람들로부터 부활했다"는 말의 핵심적 의미라고 생각한다. 예수는 살아 계실 뿐 아니라 주님이시다. 하느님의 오른편은 영예와 권위의 자리이며, 하느님의 권능과 존재에 참여하는 위치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하느님의 오른편으로 올려지셨다"고 말하는 것과 "예수는 주님이시다"라고 말하는 것은 같은 말이다. 즉 예수는 하느님과 하나가 되었으며, 그의 제자들의 삶 속에서 주님으로서 기능을 수행한다는 말이다. 도마(Thomas)가 부활한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체험 이야기에서 외친 말, "나의 주님이시며 나의 하느님이시여!" 라는 말은 이런 사실을 분명하게 표현한 것이다.
부활절은 이처럼 "예수는 주님이시다"는 뜻이다. 이 선언은 이것이 상식이 되어버린 전통에서는 쉽게 깨닫기 어려운 깊은 의미를 갖고 있다. 예수가 주님이다. 로마가 주님이 아니다. 지배체제가 아니다. 관습적 지혜의 대가(大家)가 아니다. 만일 예수가 주님이라면, 우리의 생활에서 모든 그럴싸한 주인들은 주님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 부분을 마무리하며 톰 라이트와 나 사이의 차이점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우리 모두는 예수의 부활을 주장하며 그것이 신약성서의 핵심적인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우리는 이 주장의 배후에 있는 역사적 사건 혹은 역사적 근거를 서로 다르게 이해한다. 나의 입장은 부활한 그리스도를 계속적인 현존(continuing presence)으로 체험함으로써 "예수는 살아 계시고 주님이시다"라고 선언하게 되었으며, 이런 체험을 통해 “하느님이 예수를 죽은 자들로부터 다시 살려내셨다"는 선언과 빈 무덤의 이야기가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보는 입장이다. 톰 라이트의 입장은 빈 무덤과 출현의 사실이 "예수는 살아 계시고 주님이시다"는 선언을 만들어냈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이 선언을 확증한다. 이것이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예수가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220 긍정적인 측면에서는 "예수가 희생제물이다"는 선언이 하느님의 철저한 은총과 우리가 아무런 조건 없이 받아들여졌다는 것에 대한 은유적 선언이다.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처럼, 예수가 죄를 속죄하기 위해 "한 번에다"(유일회적으로, the once for all) 바쳐진 희생제물이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분리된 이유에 대해 우리가 생각하는 것들이 무엇이 든 간에 하느님이 이미 처리하셨다는 뜻이다. 즉 우리 자신의 죄의식, 무가치함, 혹은 실패 때문에 우리가 하느님에게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처럼 생각되면, 이것은 우리가 하느님이 이미 그런 것들을 처리하셨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바울이 지적하였던 것처럼, "그리스도는 율법의 끝이다"라는 말은 필요조건 체제(system of requirements), 즉 하느님에게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일정한 필요조건이 있고, 그 필요조건을 채우지 못하면 받아들여지지 못하던 체제는 이제 끝이 났다는 뜻이다. 물론, 우리가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의 생활에서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이것을 이해하면, 우리 자신과 하느님과의 관계는 극적으로 변화하게 된다.
예수의 죽음에 대한 이런 이해와 예수 자신의 지혜적 가르침 사이에는 놀라운 일치성이 있다. 예수는 지혜의 교사로서, 관습과 전통, (종교적) 기관과는 별도로 하느님에게 직접 접근할 수 있음을 가르쳤다. 그의 죽음이 죄를 위한 유일회적 희생제물이라고 선언하는 것은 그의 가르침과 똑같은 것, 즉 하느님은 (종교적) 기관을 통한 매개 없이도 접근할 수 있다는 사실을 주장하는 것이다.
나는 이 부분의 결론에서 "예수가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선언을 서로 매우 다르게 이해하는 두 가지 방식에 대해 지적하고자 한다. 일부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그 선언은 기독교 믿음 체계의 본질적인 교리적 요소로 간주된다. 이런 이해방식에서는 그 선언이 교리적 필요조건이 된다. 즉 우리는 예수가 희생제물임을 믿음으로써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게 된다는 식이다. 즉 여기서는 필요조건 체제가 그대로 남아 있으며, 예수를 믿는 것이 새로운 필요조건이다. 그러나 그 선언을 하느님의 철저한 은총에 대한 은유적 선언으로 간주할 경우에는 매우 다른 이해를 갖게 된다. 즉 "예수가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이 그 필요조건 체제를 없애버렸다는 뜻이지, 새로운 필요조건 체제를 확립했다는 뜻이 아니다.
226 비록 나의 대답이 회피하는 것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나의 의미는 매우 분명하다. 예수가 스스로를 신적인 존재라고 생각했다고 나는 생각하는가? 아니다. 예수가 하느님의 정신(a divine mind)을 지녔다고 생각하는가? 즉 그가 당시와 이제까지 살았던 모든 사람들보다 더욱 많이 알고 있었던 이유는 그가 인간의 정신(a human mind)에 덧붙여 하느님의 정신을 지녔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하는가? 아니다. 그는 하느님의 권능을 가졌다고 나는 생각하는가? 예를 들어, 마태오 26:53에 기록된 것처럼, 그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천사들 12개 군단을 불러 내릴 수 있었는가? 아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부활절 이전의 예수와 부활절 이후의 예수를 구분한다면, 나의 대답은 “그렇다. 부활절 이후의 예수는 신적인 실재(a divine reality)이며 하느님과 실제로 한 분이다"가 될 것이다. 또한 부활절 이전의 예수에 대해서는 "그는 하느님의 육화, embodiment) 혹은 성육신(肉身, incarnation)이다”라고 말할 것이다.
229 예수를 하느님의 성육신으로 이해하는 두 번째 방식은 범재신론(panentheism) 혹은 변증법적 유신론(dialectical theism)의 틀 속에서 이해하는 방식이다. 즉 하느님은 "저 바깥"에 계신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계시며 또한 지금 여기 이상으로서, 초월적이며 동시에 내재적이다. 하느님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영(encompassing Spirit)으로서, 그 영 안에서 우리는 살아가며 존재하고 있다. 이 입장에서는 영의 사람으로서의 예수가 하느님의 현존에 개방되어 있었다. 영성에 관한 저술가들은 때때로 심리적 "비움" (emptiness) 상태가 하느님에 의해 채워질 수 있는 조건이라고 말한다. 어떤 이유들(유전적 요인, 사회화, 영적인 수련 등) 때문이든 우리는 이런 점에서 예수가 그토록 빈 상태여서 영에 의해 채워질 수 있었다고 상상할 수 있다. 따라서 나는 예수가 어느 곳에나 현존하는 하느님의 육화와 성육신이라고 이해한다. 그러나 그는 외계로부터의 방문자, 즉 "저 밖에 계신 하느님에 의해 이 세상 속에 보내진 방문자는 아니다.
238 초기 기독교가 발전하면서, 부활절 이후의 예수는 점차 그 공동체 안에서 신적인 실재(divine reality)로서의 기능을 갖게 되었다. 심지어 복음서들이 기록되기 전부터 사람들은 마치 하느님에게 기도하듯 예수에게 기도했으며, 예수를 신적인 존재로 찬송하게 되었다. 2세기 초엽에 이그나티우스는 "우리의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할 정도였다. 이것은 일종의 수수께끼를 만들어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부활절 이후의 예수를 신적인 실재로 체험하고 그에게 헌신한 것과 그들의 유일신 사상에 대한 결단을 어떻게 조화시켰는가? 이 수수께끼의 해결책이 궁극적으로 니케아 신조에 표현된 삼위일체였다.
나 자신의 개인적 입장을 밝히자면, 나는 니케아 신조를 고백하는 일에 아무런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나는 그것이 초기 기독교의 신학적 발전을 요약한 것이며 동시에 토착화(indigenization)시킨 것이라고 본다. 그 신조는 특정한 시간에 그 발전하는 전승을 요약한 것이며, 또한 특정한 문화 속에서 성서적 언어를 그리스 철학에서 끌어온 범주들과 결합시킨 것이기도 하다. 토착화란 말은 니케아 신조가 초기 기독교의 본질적으로 성서적 언어를 4세기의 보다 큰 지중해 세계의 범주 속에 조화시킨 산물이라는 뜻이다. 예를 들어, 삼위일체 교리와 신조 속에 사용된 본체(substance)와 위격(persons)이라는 용어들은 모두 그리스 사상에서 유래된 것들이다. 그것들은 문화적으로 상대적인 용어들로서, 성서의 언어들과 마찬가지로 상대적이다.
242 예수가 하느님의 결정적인 계시임을 확증한다고 해서 예수만이 하느님의 계시, 혹은 예수만이 하느님의 유일하게 적절한 계시임을 확증할 필요는 없다. 사실상 신약성서의 몇몇 구절들은 그렇게 암시하고 있다. 즉 요한복음의 예수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고 말한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는 예수에 관해 "이 분을 힘입지 않고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이름은 이 이름밖에는 없습니다"라고 말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 구절들이 당시 1세기의 상황에서 어떤 의미를 지녔던 간에, 예수(혹은 기독교)만이 구원의 유일한 길(the only way of salvation)이라는 뜻으로 이해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우리는 이 구절들과 예수가 "유일한 길"이라는 기독교인들의 진술)을 예수를 통해 자신의 구원을 찾은 기쁨을 반영하는 것이며, 예수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헌신이 얼마나 강렬한자를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구절들은 교리가 아니라 탄성(聲)으로 "헌신의 시(詩)와 고조된 가슴"(the poetry of devotion and the hyperbole of the heart)으로 볼 수도 있다. 예수가 그처럼 결정적인 계시였다고 해서 "유일한 계시라고 볼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 주장은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예수가 하느님의 결정적인 계시로서, 하느님으로 충만한 삶이 어떤 것인지를 게시한 분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나는 이것이 우리를 다른 종교인이 아니라 기독교인으로 만드는 특성이라고 본다. 만일 우리가 토라(Torah)나 코란(Koran)에서 하느님의 결정적인 계시를 찾았다면, 우리는 유태인이거나 회교도일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인이란 "예수 안에서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가장 분명하게 본다"는 것을 확증하는 것이다. 이런 확증은 우리 자신의 가슴 전체로 확증하는 것이면서도 또한 하느님이 다른 (종교) 전통들 속에서도 알려지고 있음을 확증하는 것이다.
신약성서 자체는 매우 간략한 그리스도론적 정수를 포함하고 있는데, 즉 "예수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형상(image of the invisible God)이다"라는 것이다. 예수는 하느님의 형상이다. 즉 예수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본다. 형상이라는 말의 그리스어는 '아이콘'(icon)인데, 이 말은 또 다른 뉘앙스를 덧붙인다. 아이콘은 성스러운 이미지이다. 더 나아가, 아이콘의 목적은 성스러움을 매개하기 위한 것이다. 하느님의 형상과 아이콘으로서의 예수는 우리에게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보여줄 뿐 아니라, 성스러움을 매개한다. 하느님의 말씀, 하느님의 지혜, 하느님의 아들이었으며 지금도 그러한 그 분은 또한 하느님의 성례전이다.
360 우리가 믿음에 몰두하는 이유는 오늘날 기독교의 핵심적 가르침들 가운데 많은 것들이 의문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의 생활을 일차적으로 하느님, 성서, 예수를 믿는 것에 관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현대적 오류이며 중대한 결과를 초래하였다. 즉 믿음은 우리의 생활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별로 없다(Beliefs have little ability to change our lives). 즉 모든 옳은 것을 믿으면서도 여전히 망나니로 남아 있을 수도 있다. 성자들이 이단으로 몰렸던 반면에 옳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잔인한 억압자와 무자비한 박해자였다. 오히려 기독교인의 생활은 그 전통이 가리키는 하느님과의 관계에 관한 것이(Rather, the Christian life if about a relationship to the God to whom the tradition points.) 중요한 것은 관계인데, 그 이유는 관계가 우리의 생활을 변화시킬 수 있고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그 학생의 유비로부터 내가 끌어내고 싶은 두 번째 요점은 성서를 렌즈로 본다는 점이다. 성서라는 렌즈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을 본다. 그리고 성서가 단지 하느님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그 렌즈를 통해 우리는 또한 하느님과 함께 하는 우리의 생활도 본다. 이 은유를 기독교 전통 전체에 확대하면, 성서, 예수, 성서 이후의 중심적 전통들은 그것을 통해 우리가 하느님을 보고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보는 렌즈이다. 중요한 것은 그 렌즈를 믿는 것이 아니라 그 렌즈를 통해 보는 것이다.
367 예수가 메시아라는 기독교적 확신은 내가 보기에 예수가 자신을 메시아로 생각했다는 개연성 판단에 근거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오히려 고백적 진술(confessional statement)이다. 즉 예수 안에서 나는 메시아(하느님의 아들, 하느님의 지혜, 하느님의 말씀, 세상의 빛, 육체가 된 길 등)를 본다는 고백적 진술이라는 말이다. 이런 확증은 예수에 관한 사실들, 예수가 자신을 누구로 생각했는지에 관한 사실로 이해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이런 확증은 예수와 같은 사람 속에서 하느님의 결정적 계시와 하느님으로 충만한 삶이 어떤 것인지를 보겠다는 결단(commitment)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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