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 인문학 | 06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


걸리버 여행기 - 10점
조너선 스위프트 지음, 박용수 옮김/문예출판사


2012년 CBS 라디오에서 진행하였던 강유원 선생님의 '라디오 인문학' 강의를 녹음파일을 듣고 정리한다.
팟캐스트 주소: https://itunes.apple.com/kr/podcast/jumal-nyuseusyo-bagmyeong/id576954501


2013-06-22 34회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 1

책 앞에서 소인국, 대인국 이야기가 있을 때는 예전에 읽은/본 기억에 의지해서 읽어나가면 별로 어려움 점이 없는 데 갑자기 3부에 들어서면서 딱딱해지고 어떤 상상력으로 이런 이야기를 썼을까 싶을 정도로 흥미가 솟아나기도 할테니까 그런 조금은 서로 어긋나는 이율배반적인 것을 기대하면서 읽는 보는 것도 이런 책을 읽는 흥미라고 하겠다. 그냥 상상력에 의한 책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내용이 심오한데 특히 4부 말의 나라가 그렇다.


몇가지 핵심적인 내용을 미리 짚어서 유념해야 할 것들을 보자.

먼저 저자의 생몰연대가 1667년에서 1745년. 뜻밖에도 옛날 사람. 동화책의 저자치고는 굉장히 옛날사람이다. 동화라는 장르가 없을 때 얘기. 영국사람이아니라 아일랜드 사람. 흔히들 영국사람이 쓴 우화=재미있는 이야기 라고 알고 있는데 이를테면 우리가 윤동주 시인이 있다고 할 때 시인이 활동하던 시기의 국적이 공식적으로는 일본. 그런데 우리는 조선사람이라고 얘기한다. 똑같은 상황으로 이해하면 된다.

영국이 당시 식민지통치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화책 버전으로 우리가 걸리버 여행기를 알고있지만 동화책을 쓰기에는 좀 옛날 사람이다. 동화책이 어떠해야 하는가는 잘 모르겠지만 이런 정도의 내용을 동화책으로, 아동에게 읽히기 위해서는 각색을 해야할 텐데 상당한 정도로 단순화하고 유형화를 했을 테고 그럴려면 책을 이해하는데 요구되는 필수적인 내용이 생략되었을 것이다. 거친단어들이 이른바 순화되는 것인데, 그게 이 책 자체를 훼손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어떻게 생각하면 본인은 걸리버여행기 동화책은 읽히면 안된다는 생각도 가지고 있다. 전체 내용이 왜곡된 사태라고 볼 수 있다. 


1667년에서 1745년 이때 유럽이라는 상황을 생각해보면 1648년에 30년 전쟁이 끝난지 얼마 되지 않은 때로 굉장히 혼란한 시대이다. 잉글랜드는, 영국이라는 말을 쓰게되면 굉장히 무차별적으로 식민지들을 포괄해버릴 수 있다. 아일랜드를 식민지 처럼 지배하고 있었고 스위프트는 바로 이시기에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에서 태어났고 자신의 식민지 지배 상황을 깊이 느끼게 된다. 걸리버 여행기를 쓸 때는 아일랜드를 위해서 가장 강력한 투쟁을 전개할 때고, 그 투쟁의 일환으로 나온것으로 보는게 정확하다. 그런데 의아하게도 아일랜드 사람 스위프트가 영국 국교회 성공회 사제였다. 영국 국교회가 아일랜드 안에서는 소수파 종교. 가톨릭, 프레테스탄트 장로교가 다수파를 점하고 있다면 소수파인 국교도를 옹호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아일랜드에 얽힌 종교문제는 아직까지도 복잡. 굉장히 과격한 무장단체도 있다. 반면 영국 국교회는 굉장히 광용적인 종교. 아일랜드는 그때나 지금이나 잉글랜드와 사이가 좋지 않고, 소수파를 옹호하는데 앞장섰다. 영국사람이라고 말하지 말자. 식민지 지배를 받던 아일랜드 사람.


걸리버가 출판업자 리처드 심프슨에게 보내는 편지

책 맨 뒤를 보면 "걸리버가 출판업자 리처드 심프슨에게 보내는 편지"가 나오는데, 스위프트가 보낸 편지겠지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보낸 사람이 걸리버, 즉 소설의 일부다. 오히려 편지라는 게 사람들이 앞의 얘기를 잘 못 알아들었을까바 걱정되서 붙인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사실은 스위프트 이야기 처럼 읽힌다. 영국에 대한 비판, 그가 살았던 그 시대에 대한 문제의식이 나와있다.


17세기 중반부터 18세기 중반까지 살았던 유럽의 지식인들이라면 누구나 벗어나지 못했던 유럽의 30년 전쟁아는 종교전쟁. 거의 모든 나라들이 휘말려들어서 30년 동안 싸웠는데 이때 또 중요한 논쟁 중에 하나가 17세기 일반위기 라는 말을 흔히 이때 역사학자들이 쓰는데, 스위프트가 초기에 쓴 작품 중에 <책들의 싸움> 이라는 것이 있다. 스위프트는 고전기 시대에 참입하고 근대의 17세기 막시작된 과학시기 혁명을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이러한 내용이 걸리버 여행기에도 나온다. 이게 바로 라퓨타 라는 나라를 여행하는 대목에서 17세기 자연과학에 대한 비판 대목. 첨예한 논쟁중 하나. 스위프트가 대표적인 고전파. 고전파와 과학파. 오늘날 우리가 보기에는 모두 양립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는데 그 당시로서는 심각한 문제였다. 


정리하자면 아래와 같다.

1. 조너선 스위프트는 아일랜드 사람. 당시에 아일랜드는 영국의 식민지나 다름없는 통치를 받고 있엇다.

2. 걸리버 여행기는 동화책이 아니라 당대의 사회에 대한 첨예한 풍자와 비판을 담겨 있는 텍스트이다. 

3, 이 풍자와 비판은 소설 전반에 걸쳐있기는 하지만 3부,4부에서 좀더 두드러지고 있다.




2013-06-29 35회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 2

3부 "라퓨타, 발니바비, 럭나그, 글럽더브드립, 일본 여행기" 부터 같이 읽어 보자.

라퓨타가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물론 소인국 이야기도 관리등용 방법이라든지 따져보면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기는 하지만 생략하고 3부부터 읽는다. 


돌아온 걸리버가 다시 항해에 나선다. "전에 많은 고생을 겪기는 했지만 다시한번 넓은 세상으로 나가고 싶은 욕망이 간절한 상태였다"로 시작한다. 17세기의 작가가 이런 식으로 썼다는 것은 당시의 조너선 스위프트가 염두해었던 독자에게 넓은 세상이라는 것이 낯선 얘기가 아니라는 뜻. 넓은 세상을 나가보고 싶은 욕망, 데카르트라는 철학자가 쓴 <방법서설> 을 봐도 넓은 세상을 배우려고 결심했다라는 것이 나온다. 이러한 개념이 근대 물질문명을 만들어낸 원인이기도 할거라는 심정이 있다.


이런 욕망에 이끌려서 항해에 나선 걸리버는 항해 도중 해적을 만난다. 해적에게 잡힌 뒤에 표류하도록 버려지고 그래서 어떤 섬에 도착해 있는데 거대한 물체가 하늘에서 내려온다. 바로 라퓨타.

 

여기까지가 3부 1장. 3부는 촘촘하게 읽을 필요가 있는데 3부 2장 첫 머리에 떠다니는 섬 위로 걸리버가 들어 올려졌다. 첫머리에 그 동네 사람들을 묘사하고 있다. 

>> 고개를 모두 오른쪽으로나 왼쪽으로 돌리고 있었고, 한쪽 눈은 위쪽으로 올라가 있으며  다른 쪽 눈은 속으로 푹 들어가 있었다. 

외계인들을 상상해서 놓은 것 같은 묘사인데 왜그랬을까? 당시 자연과학이 굉장히 발전하기 시작한 시대였다. 스위프트가 자신과 같은 시대에 살고 있던 과학자나, 수학자, 천문학을 연구하는 사람을 풍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한쪽 눈이 위로 올라가 있었다 = 한쪽 눈으로는 하늘만 쳐다본다. 천문학에 대한 관심

다른 쪽 눈은 속으로 푹 들어가 있었다 = 자신의 내면만 들여다 본다는 것. 데카르트를 떠올릴 수 있다. 우리는 '철학자' 데카르트라고 말하는데 사실은 수학자이기도 하다. 그 당시 철학자 그러면 스콜라 철학을 말하는 것이었고, 스콜라 철학은 헛소리와 괴변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데카르트에게 물었으면 철학자가 아닌 수학자라고 대답했을 것. 자기 내면만을 들여다 보는 사람. 


이어서 라퓨타의 사람들이 입고 있는 옷에 대해 묘사가 바로 나오는데 그걸 보면 뚜렷해 진다. 

>> 의복은 태양과 달과 별의 모양이 장식되었으며 그 사이사이로 바이올린, 플루트, 하프, 트렘펫, 기타 그리고 그 이외 유럽에서는 볼 수 없는 이상한 악기의 모양이 그려져 있었다.

악기의 모양 =  천상의 조화를 다루는 천문학과 관계가 있는 것.

여기에 사는 사람들은 눈앞의 현실은 무시하고 하늘과 내면만 바라보는 것을 풍자하며, 떠다니는 섬 설정 자체가 땅에 뿌리내리지 못하는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당대 과학자들에 대한 풍자이기는 한데 그렇다고 해서 오늘날의 과학일반을 이해해서는 안된다.


스위프트를 철저한 반과학주의자로 이해해서는 안되고 그 당시 17세기, 그때의 자연과학이라고 하는 것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인 위신, 위력,지위가 오늘날하고는 많이 달랐다. 지금은 과학이라고 가지고 있는 일종의 크레딧이 굉장히 크다. 그런데 그렇게 과학이 확실한 지식이라는 자리에 올라서게 된 것은 그때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300년 정도에 걸친 아주 복잡다단한 역사적 과정이 있기 때문이다.


걸리버가 궁전으로 들어가서 왕을 만나게 된다. 왕 앞에 놓인 큰 책상에 지구의, 천구의 기구 들이 놓여있다. 앞서 얘기했던 천문학에 관한 것이 여기에 뚜렷히 나오게 된다. 그 부분에 이어서 식사 코스가 재미있다. 두 코스로 나뉘어서 나오는데 각 코스마다 세가지 요리가 나온다. 첫번째 코스가 정삼각형으로 자른 양 앞다리, 마름모꼴로 자른 쇠고기, 원형으로 자른 푸딩. 두번째 코스가 오르 두마리를 바이올린 모양으로 만들고.. 빵을 잘라서 주는 데 원추평, 원통형... 


기하학과 음악 이것만이 이들의 삶을 이끌어가는 원리이고, 먹는 음식에까지 적용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음식을 어떤 모양으로 만든다는 것, 재미있는 풍자의 발상이 아닌가.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제사 지낼때 제사상을 어디에다 놓는가, 하늘에 위치에 근거하고 사람들이 합의를 했기에 수행되는 일인데, 원리가 바뀌는 것이 아닌가. 기하학의 원리에 따라 한다. 그렇게 이상해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풍자이기는 한데 단순한 풍자가 아니라 사회를 운용하는 중심원리 이런 것이 기하학의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냐,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어떤 원리에 근거를 두고 있느냐에 따라 다른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식사를 마친다음에 왕의 명을 받고 그 나라 말을 가르치러 온 사람이 천체와 음악에 대해서 가르쳐 주는 부분이 나온다. 그것이 그 나라의 교양. 어떤 나라의 기본 교양이 무엇인가 그게 바로 그 사회 사람들의 합의에 따라 만들어지는 것이고 또 우리는 언제나 이것에 대해서 논란을 벌인다. 중고등학교에서 필수로 국사를 넣어야 하냐 말아야 하나... 이런 것.


걸리버가 생각하기에 또는 스위프트가 생각하기에 수학과 음악에 많은 것을 의존한 나머지 이것을 거의 전체주의적으로 관철하려고 한다는 것. 그래서 순순하게 근본주의적인 원리주의적인 행태가 발생시키는 부작용이 얼마나 심각한가 이것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이것이 스위프트가 말하고자 하는 것.


집짓는 부분을 보자.  

>> 그들은 집을 아주 보기 흉하게 지었고 어느 방도 직각으로 된 면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실용적인 기하학에 대해서는 멸시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것을 저속한 것이라고 멸시했다. 자, 연필, 콤파스를 이용해서 종이에 무엇을 그리는 일은 잘하지만 일상적인 행동에서는 어색하고 둔해보였으며, 수학과 음악을 제외한 다른 분야에서는 이해력이 아주 부족했다.

스위프트가 본격적으로 당대 지식인을 비판하는 부분. 실용적에 대해서 무시했다는 것. 


>> 여러가지 뉴스나 정치적인 사한에 대해 크게 관심을 보이고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논쟁을 일삼기는 하는데 그게 유럽의 수학자들도 그런 성향이 있다는 점을 알았다.

직접적으로 당시 과학자들을 비판한 부분.


이론적 지식과 실천적 지식을 일단 나눠서 생각해본다면 이론과 실천 사이에는 거리가 있다. 그리고 거리가 있다는 것을 전제해야만 교양있는 사람이다. 실천을 보면 '내가 해봐서 아는데..' 경험독단주의는 이론독단주의 못지 않게 심각한 것이다. 두 사이를 오고 갈수 있는 것이 넓은 의미에서 지혜. 그런 지혜는 수학이나 과학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것이 아니라 스위프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고전적인 것들을 통해서 얻을 수 있다.




2013-07-06 36회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 3


지금까지 라퓨타라는 섬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에 대해 얘기했고, 그런 이야기가 스위프트의 풍자라는 것까지도 확인.

곧바로 이어서 그 사람들의 심리 상태에 대해 얘기한다.

>> 그들은 늘 불안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따라서 한순간도 마음의 평화를 누릴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들의 불안감이라는 것이 그 나라들이 아닌 인간들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도 않는 것에서 기인하는데 그 특이 성이 있었다. 그것은 천체의 어떤 변화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었다.

천문학에 대해서 너무 아는게 많다보니 그것에 의해 생기는 걱정, 기우. 그러다보니 그들이 일상생활이 엉망이 되었다는 것이 나온다. 학문이 삶을 지배할 경우 흔히 생길 수 있는 문제가 아닐까... 


서양에서 서기 천년무렵에는 종말에 대해 걱정이 있었다.  서기 천년이 되었을 때 사람들이 지구의 종말이 오고 심판이 올까봐 다들 아무것도 안하고 처박혀서 기도만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뭘 알고 있다는 것 종교를 믿고 있다는 것 이것이 불안의 원인인데 그렇다 해서 일상 생활을 살면서.. 옳다고 확신해서 행하는 이런 일들이 참으로 틀림없는가 의심하는 것이 이성적인 사람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이라든가 또는 확신이라든가를 틀림없다고 여기지 않고 항상 그것을 음미하면서 사는 것. 이것이 이성적인 삶이다. 삶을 음미한다는 것, 플라톤 <소크라테스의 변론>에서 법정에선 소크라테스가  '음미하는 삶은 삶이 아니다an unexamined life is no life'를 떠올려 보자. 


그래서 이제 걸리버는 라퓨타 섬을 떠나기로 했다. 3부 4장 첫머리를 보자.

>> 그들이 내가 높이 사는 두 가지 학문에 뛰어나는 것은 사실이지만 한편으로는 너무나 지나치게 명상에만 잠겨있어서 상대하기가 까다로웠다. 그래서 내가 머무는 두 달동안 얘기를 나눈사람들은 여자들이나 상인들이나 떼리께이꾼, 궁정하인들 뿐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멸시를 받았지만 나의 질문에 대해서 대답을 해준 사람들은 그들밖에 없었다.

스위프트가 당대 학문에 천문학이나 수학에 존중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것이 얼마나 우리 일상생활에서 떨어져 있는지를 풍자하는 부분이라 할 수 있겠다. 이를테면 사람들이 철학자들이 쓴 에세이 이런것을 읽으면서 삶의 지혜를 얻을 수 있을거라 생각하는데 .. 그런 에세이를 쓰는 사람은 만나 보면 얼마나 많은 지혜를 담고 있는지 의문스럽다고 생각할 때가 많다. 우리 인생이라는 것이 에세이 한권에 나오는 그럴듯한 문장 몇 개로 정리할 수 있을만큼 간단하지 않다. 보통의 삶이라는 것도 굉장히 위대한 것. 


라퓨타 섬을 떠나서 땅으로 내려온다. 그곳은 발리바비 수도인 나가도. 이 땅에서 목격한 사건들을 길게 설명하기 시작한다. 발리바비는 라퓨타 사람들에 의해 일종의 통치를 받고 있는 곳으로 라퓨타 섬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비웃음이 들어가 있다.

>> 대략 40년 전에 그땅의 몇몇 사람들이 볼일이 있어서 하늘에 있는 라퓨타로 갔다가 약 다섯 달이 지난 후에 수학에 대한 지식을 조금 얻어서 돌아왔다. 

그런데 그것이 허공에서 얻어온 허무맹랑한 지식었다는 것. 수학의 원리를 가지고 와서 지극히 추상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지금까지 땅에서 전해 내려오는 모든 것을 허물고 새롭게 만들려고 한다.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동안에 어느 하나 성공한 것이 없고 그 나라가 전체가 가난해지고 황폐해지고 집은 폐해가 되었다. 그런데 이를 설명해준 '귀족'은 자기는 진취적이지 못해서 옛날 방식을 유지하고 있었고, 조상들이 살던 방식 그대로 살아가면서 그래서 남들에게는 기술 혁신의 이단자라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스위프트가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은 당시의   베이컨이나 뉴턴, 데카르트, 윌리엄 하비와 같은 자연 과학자들이 새로운 세계를 바라보는 힘을 갖게 되는 그런 것과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학문과의 대립 사이에 날카로운 지점을 짚어내는 것이 있다. 물론 스위프트는 자연과학을 굉장히 경멸하는 입장에 서서있다. 이것을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고 이런 부분을 읽으면서 17세기 유럽의 상황에 대해서 우리가 여러가지 생각을 해봐야 하는 것이 걸리버여행기 자체가 17세기 유럽의 산물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되겠다.


3부 5장에 나오는 황당한 얘기들을 이런 관점에서 읽으면 된다. 이를테면 인간의 배설물을 분류하고, 색깔을 제거하면서 냄세를 없애고 원래 음식으로 되돌리는 것, 쟁기와 소를 이용하지 않고 돼지를 이용하여 땅을 일구는..과학에 대한 풍자로 읽으면 된다. 인간들이 대화하는 방식을 개량하는 것에 대해 연구를 하는 부분도 나오는데 스위프트 생각이 굉장히 재미있다.




2013-07-13 37회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 4

발리바비라는 나라의 연구소들에 대해서 더 얘기해 보도록 하자.

머리가 좋은 의사 이야기. 이 부분부터 본격적으로 거의 직설법으로 조너선 스위프트가 당대 정치사회에 대한 비판을 하는 부분이 나온다. 인간 역사를 읽어보면 부패나 무능이 없던 나라는 없다. 그렇다고 장려하는 것은 아니고, 있다는 것은 인정하되 개선하고 한꺼번에 완전히 다 없앨 수는 없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본래적인 의미에서 보수주의. 동물은 태어난 본능대로 살아가지만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니까 본래 인간이 어떤 존재로 태어나는지를 우리가 알 수도 없고 어떻게 살아가는지도 예측하기 어려우니까 혼자 있을 때와는 달리 여러 사람이 모이면 또 집단 의식이라는 것이 있고, 집단의 개인과 따로 떨어져 있는 개인과 다르다. 앞에 말한 의사 이런 살마들이 화끈한 해결책을 찾고 있는 사람인데 이 의사의 궁리를 잘보면 될 것 같기도 하다.


이 의사는 한 사람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 영국 의회 집단들 전체를 놓고 생각하는데 상원 의원들은 다혈질이고 여러 질병이 생겨나고 그러니까 이들을 수술을 해서 만장일치가 이루어 지도록 하며 토론을 간결하게 하고 항상 아무말도 하지 않는 의원들을 말문을 열게 만들고 떠벌리는 사람의 입을 닫게 만들고.. 나이많은 의원들은 독선을 갖지 않게 하고 잘난체 하는 의원들은 겸손하게 만들도록 처방을 하도록 한다. 의회에 있는 국회의원들을 고치겠다는 것을 가능하게 하려면 상원에서 활동하고 있는 의원들의 신체와 국가 기관 사이의 유사성이 있다는 것을 전제해야하는데, 이것 이 바로 신체 정치라고 하는 것. 당시 정치사상가들이 이렇게 생각하는 일이 많았다.  토마스 홉스라고 하는 정치 철학자의 <리바이어던>을 보면 왕의 몸 전체가 개개인의 신민들로 그려져 있는 표지 형태.. 그게 국가를 상징하는 것.


이 당시에는 왕이 죽으면 신체를 잘라서 심장은 어디에 보관하고 다리는 어디에 보관하고 왕이 살아 있을 때 미리 정해놓는다. 심장을 안치하는 곳이 평소에 아끼고 사랑하는 곳.. 국토 전체가 왕의 신체라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사들 얘기를 17세기 정치사상의 맥락에서 읽어보면 흔히 말하는 뻘소리는 아니다. 왕의 신체가 국가의 부분하고 상응한다는 생각은 이 당시 지배적이었던 것.


>> 양측 정당의 지도자급 인사들을 100명씩 선택하여 머리크기가 같은 사람들을 짝을 지어놓고서 솜씨좋은 의사들로 하여금 머리를 두쪽으로 쪼개어 절반을 서로 상대방의 머리에 갖다가 붙인다. 매우 정밀한 작업을 요구하긴 하지만 일단 성공적으로 수행되기만 하면 효과는 의심할 게 없다. 그런데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가 뭐냐면 정당의 지도자들의 두뇌 크기나 질에서의 차이점은 의사의 자기경험에 따르면 거의 없다고 확신 했다.


이 의사의 생각에는 이런 것이 있다.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가 그 개체 하나하나가 따로 떨어져 있어서 개체의 뇌 일부를 고치고 달리 작동 시키면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인간은 사실 살아가고 있는 환경 맥락하고 보이지 않게 붙어 있다. 뇌를 바꾼다 이렇게 얘기 해보면 그 사람이 살아가고 있는 환경과 맥락을 따로 떼버리고 이렇게 다른데다가 붙여도 가능하다는 것. 하지만 환경을 바꿔야지 뇌를 바꿔봤자 소용없다는 것이 생각이 든다.


이런 의사나 영국 사람하고 얘기하는 가운데 직접적으로 잉글랜드에 대한 불만을 얘기한 부분이 나오는데 '잘못된 행정에 대해서 바로 잡겠다고 자기가 공헌을 하지만 대중의 불만을 억압하거나 다른데로 돌려버리고 대중의 벌금으로 자신들의 부를 늘리고 국채가격을 자기들의 이익이되도록 올리거나 내리고..' 앞서 나온 부정과 부패 이런 것들이 그대로 설명이 되어 있다.


그런 다음에 이제 잉글랜드로 돌아가기 위해서 발리바비 왕국을 떠나서 말도나다에 도착하지만 거기에 배가 없어서 글럽더브드립에 머문다. 여기에도 재밌는 내용이 나온다. 책을 보면 마법사의 섬을 뜻을 가지고 있고 이 나라의 족장은 죽은 자를 불러내서 24시간 동안 자기 시종을 들게 할 수 있다, 만나 볼수 있다는 얘기.. 그래서 걸리버가 평소 만나보고 싶었던 사람들을 여기서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우리는 조너선 스위프트가 역사를 어떻게 평가하는가를 알 수 있다. 시저와 부르투스가 있는데 '부르투스를 보는 순간에 존경심이 우러나왔고, 훌륭한 인품이나 나라에 대한 애국심등을 외모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 로마 공화정 편이라는 것. '시저는 자기가 일생동안 한 훌륭한 행실이 브루투스가 자기를 죽여버린 것에 비한다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했다' 아주 딱 한마디로 잘라서 말해서 로마 제국에 대해서는 안 좋게 생각하는 것. 1600년 대인데 이 때 벌써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대한 평가가 찬반양론이 있엇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다음에 브르투스하고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이 나오는데 토마스 모어 경도 나온다. 토마스 모어에 대한 평가가 사실 걸리버 여행기와도 관련이 있다. 


그리고 이어서 아리스토텔레스와 데카르트, 카센디를 만나서 서로 대화하게 하는 장면도 나온다. 스위프트가 그 당시에 형이상학에 대한 관심도 있다는 것을 일 수 있다. 데카르트와 카센디, 이 사람들의 철학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하고는 서로 대립되는 입장. 철학과에서 항상 시험에 나오는 문제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의 문제와 데카르트의 운동의 문제를 비교 논술하시오.(>아리스토텔레스는 목적론적 운동론, 데카르트는 기계론적 운동론) 그리고 당대 과학적 지식에 대해서도 '현재의 지식인들이 믿는 인력설 그러니까 뉴턴의 만류인력 쓸모없게 된다는 것을 이야기'와 '자연 현상에 대한 모든 현상은 일시적인 유행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도 한다. 과거 사람들을 불러다가 특히 아리스토텔레스를 불러오는 이유가 당대 과학에 대한 비판을 하고 싶어서이다.


죽음에 관한 생각도 있다.

럼락이라는 나라에는 영원히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스트랄드브러그라고 불리운다. 걸리버는 영원히 살면 얼마나 좋겠다고 말하니까 그 사람들은 '당신의 그런 착각은 모든 인간이 갖는 것이고 당신의 잘못은 아니다. 영원히 살면 좋다는 것은 사실 젊음이 영원히 지속되고 건강이나 활기가 영원히 지속된다는 것을 전제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육체를 과연 그렇게 쇠로 만든 기계도 60년 버티지 못하는데.. 이 나라에선 영생인으로 태어난 사람은 80세가 되면 보통의 노인들이 보이는 약점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죽을 수 없다는 절망감으로 인해서 80세가 되면 법적으로 사망한 사람으로 간주된다'. 우리가 이제 한번 생각해볼게 죽지 못한다는 것, 건강하지 못한 신체로 오래 산다는 것, 이런 것에 대해서 생각해볼만한 기회를 가지면 좋겠다.



2013-07-20 38회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 마지막회



르네상스의 마지막 날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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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핸킨스 지음
출판사
글항아리 | 2011-02-11 출간
카테고리
과학
책소개
수량화와 재현성에 의한 근대과학의 탄생 18세기 과학사로 안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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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유럽의 형성 16 18세기

저자
주경철, 이영림, 최갑수 지음
출판사
까치 | 2011-08-30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이 책은 근대 유럽의 역사를 다양한 관점에서 서술함으로써 근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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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나라는 인간을 닮은 야후와 후이넘이라고 부르는 말이 주인 노릇을 하는 나라.

저자인 스위프트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고지 곧대로 전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책의 맨 마지막에 나오는 말이 있는데 이게 말의 나라에서 전하고 싶은 메세지인 동시에 이 책 전체를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


'이성에 따라 행동하는 후이넘들은 그들이 소유한 훌륭한 덕성에 대해서 자랑하지 않는다. 마치 내가 팔다리를 가졌다고 해서 자랑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팔다리가 없다면 아주 불행한 일이 되겠지만 우리는 그것이 있다고 해서 자랑하지 않는다. 내가 이 주제에 관해서 이처럼 장황하게 늘어놓는 이유는 하나의 야후에 불과한 나 자신이 살아가는 이 사회를 조금이라도 더 살만한 것으로 만들려는 소망때문이다. 그리고 악의 기미가 있는 사람은 나의 앞에 나타나지 않았으면 간절히 바란다.'


이것이 실질적으로 걸리버 여행기의 맨 마지막 문장이고 총괄하는 내용. 이 구절을 읽을때마다 씁쓸한게 사람은 이성적 존재다라고 하는데 그런데도 너무나 당연한 건데.. 악의 기미가 있는 사람은 나의 앞에 나타나지 않았으면 간절히 바란다...


걸리버가 또다시 여행을 가고 다시 낯선 나라에 도착하게 되고, 자신과 닮은 존재들을 만나고 말을 걸려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야후라고 불리는 동물. 걸리버의 표현에 따르면 '그 역겨운 짐승이 인간의 형태를 모두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때 내가 받은 충격이나 공포심을 어떻게 표현할 수 없었다' 말의 나라에서 어떤 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될지 실마리. 인간 존재에 대한 한없는 비탄 이런 것.


말들을 가리키는 말이 휴이넘. 휴이넘의 어원이 자연의 완성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무서운 표현인데 자연이라는 말이 네이처라는 단어에서 번역한 것인데 본성이라는 뜻도 있으니 본성의 완성이라고 번역도 가능. 본성이라고 하는 것이 완성되면 야후는 사악하게 되지만 후이넘이라고 불리는 말은 굉장히 덕성스럽게되는데 그러니까 스위프트가 휴이넘이라는 단어를 자연의 완성이라는 뜻으로 썼을까 인간의 타고난 본성이 사악하고 쓴 것 같지는 않다. 그러니까 야후라는 타고난 본성은 선한데 여러가지 문명의 장치때문에 사악해진 것이 아닐까.


다른 나라에 갔을 때는 쓰지 않았던 표현이 '나의 주인'. 동물 한테 나의 주인이라고 표현한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기존의 나라에 가서는 경멸하거나 승복하지는 않았다. 심지어는 말의 나라를 떠날 때 떠나야 하는 상황에서 애통해 하고 기절하기도 한다. 이 나라에서 휴이넘들이 보여주는 형태야 말로 스위프트가 진정으로 원하는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참다운 존재의 모습, 그것을 이제 야수나 다를바 없는 야후와 대조적으로 보여주는 것. 문명이 가진 좋지 않은 측면들을 너무 부각한 것 아닌가도 생각 할 수 있다. 17세기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생각이라기보다는 대립되는 생각들. 스위프트보다 후대 사람인 루소는 인간은 선한 존재였는데 문명사회가 되면서부터 인간이 사악해졌다고 이야기한다. 루소가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삼는 사람의 모습을 가리켜서 말할 때 '고귀한 야만인'이라고 쓴다. 그래서 17세기에는 인간이 본래 어떤 존재였는가에 대한 궁금증이 많았고, 이후 믿음이 흔들리는 시대가 되니까 인간 존재가 본래 어떤 것인가에 대한 탐색을 하고 홉스는 '인간은 인간에 대한 본래 늑대' 어떻게 보면 야후라든가 이런 등장하는 존재들이 여러가지 견해들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이 부분을 지나치게 과잉 해석할 필요는 없는데 어쨋든 탐욕이라고 하는 문제가 애매한 문제. 17세기 인간 탐욕의 문제가 심각한 주제였다. 탐욕이 있었기 때문에 자본주의 시스템이 전개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탐욕에 대한 생각을 찬양할 것인가 하는 것들이 본성이냐 아니냐 하는 것에 대해 논쟁이 있었다. 이러한 통찰이 아주 강력해 보이기도 한다. 다음주에 얘기할 유토피아도 같은 주제를 얘기하고 있다.


걸리버 여행기에는 물질적인 욕망이 없는 휴이넘들이 덕을 갖춘 존재라고 말하고, 그래서 이런 말을 한다. '고상한 휴이넘들은 덕성을 지향하는 성격을 천성적으로 갖추었고 악이라는 것을 모르는 이성적인 동물이다. 그들의 신조는 이성을 고양시키고, 이성을 지배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성은 그들에게 우리처럼 난해한 문제가 아니다. 그 나라에서는 이성이 논쟁의 여지를 주지 않는다. 감정이나 이해관계에 의해서 이성이 흐릿해지거나 퇴색되지 않는다.' 이성하고 본성을 결합시킨다. 지금 우리는 네이처라는 단어를 자연이나 본성으로 보는데 17세기에는 네이처를 굉장히 다양한 의미로 쓰였다. 그런데 그 중에 하나 이성이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었다. 자연권이라고 하면 타고난 권리, 이성법이라는 뜻도 된다. 


'그들이 하는 대화는 주로 우애심이나 자비심, 질서나 가정, 자연의 이치, 옛날부터 전해내려오는 풍습, 미덕, 이성의 법칙, 다음에 회의에 결정할 내용 이런 것들이었다.' 이상적인 대화가 오고 가는 나라. 


걸리버가 자기 나라로 되돌아온 다음에도 재미있는 상황이 나온다. 말의 나라에서의 습관들이 배어있어서 힘들어하는 상황. 사람들이 야후로 보이니까 아내하고 식사를 하면서도 코를 막는다든지하는...


시대적인 상황에 대해 조금 더 궁금한 분을 위한 책. 흔히 17,18세기를 도식적으로 얘기할 때는 과학혁명과 계몽주의라고 해서 희망으로 가득찬 시기로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실제로는 야후처럼 서로 다투던 시기. 대체로 역사학자들은 '17세기 일반위기'라고 말을 한다. 과학혁명과 계몽주의는 그 시대가 가지고 있었던 긍정적인 측면만 얘기하는 것. 그것만 보면 균형잡힌 시각을 가지고 있지 못하는 셈이다. 먼저 17세기 이전 바로 앞세기를 다룬 책으로 시어도어 래브 <르네상스의 마지막 날들>, 그 다음이 피터 디어의 <과학 혁명>, 그 다음이 토머스 핸킨스 <과학과 계몽주의>, 이 모든 책들의 바탕에 근대 세계를 아우르는 역사책인 이영림 , 주경철 , 최갑수 <근대 유럽의 형성>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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