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테파니 펭크: 아틀라스 서양미술사
- 책 밑줄긋기/책 2012-22
- 2013. 10. 14.
아틀라스 서양미술사 - 슈테파니 펭크 지음, 조이한.김정근 옮김/현암사 |
들어가는 말
선사시대
초기 고대 문명
고대 그리스 로마 문명
비잔틴 시대
로마네스크 시대
고딕 예술
르네상스
바로크
18세기
19세기
20세기
옮긴이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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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저작권
비잔틴 시대
078 비잔틴이라는 현대적 개념은 기원전 660년경에 건립된 그리스 식민도시 비잔티온이라는 명칭에서 나왔다. 콘스탄티누스 1세가 325년에 로마 제국의 수도를 보스포루스 해협으로 옮기면서 이 도시를 콘스탄티노플이라고 불렀는데, 그는 도시를 가장 화려하게 증축하라고 지시했다. 로마제국을 계승한 비잔틴 제국의 영역은 처음에는 도서로는 유프라테스 강에서 이베리아 반도, 남북으로는 브라타니아에서 북아프리카에까지 미쳤다. 그러나 수백 년이 지나면서 제국은 점차 축소되었다. 민족 대이동의 혼란이 있었고, 북아프리카∙이집트∙팔레스타인시리아를 아랍에게 빼앗겼다. 서부에서는 노르만족이, 동부에서는 셀주크 투르크왕조가 생겨났으며, 발칸 반도에서는 슬라브족의 침공 위협으로 영토가 축소되었다. 1204년에는 베네치아 상인들이 주도한 4차 십자군 원정 부대가 이 도시를 정복하고 약탈했다. 그로 인해 수많은 예술 작품이 서유럽으로 옮겨져 중세 예술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1261년까지 존속했던 보스포루스 해협의 라틴 제국이라는 휴식기가 지난 후에 비잔틴 제국은 필라이올로구스 황제 통치하에 다시 한 번 때늦은 전성기를 구가했다. 이 전성기는 1453년 오스만 투르크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함으로써 종말을 맞이했다.
로마네스크 시대
090 1050년에서 1200년 사이의 유럽 예술을 가리키는 로마네스크라는 명칭은 19세기 초에 붙여졌다. 19세기는 위에 언급된 기간 동안 교회 건축술이 의식적으로 고대 로마의 건축물을 지향했다는 사실을 인색했던 시기다. 고딕 양식도 로마 건축을 지향했지만, 그 정도는 훨씬 덜 했다. 앞선 여러 시대에서도 고대 로마 황제 시대에 사용했던 소재와 기법을 계속 받아들였다. 기독교, 민족 대이동, 로마 점령 그리고 이후의 새로운 정치적 질서 같은 역사 발전 과정의 여러 사건들 때문에 이 같은 사실은 미술사의 개념이 형성되고 나서야 비로소 의식되는 것이다.
고딕 예술
120 유럽에서 전성기 중세와 후기 중세 시대의 양식을 나타내는 고딕이라는 개념은 15세기에 조르조 바사리가 만들었다. 그는 고대와 르네상스 사이에 야만적 중세가 있으며, 중세를 시작한 사람은 고트족이라고 생각했다. 이 개념은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에 부정적 의미를 함축한 상태에서 벗어나 로마네스크와 르네상스 사이에 있었던 예술 양식을 가리키는 중립적인 용어로 사용되었다.
고딕 건축과 조각의 기원지는 1130년경부터 파리를 중심으로 한 역사적으로 중요한 일 드 프랑스 지역이다. 고딕 양식은 이곳에서 시작해 인접한 유럽의 여러 나라들로 퍼져갔다. 고딕 양식은 지역적으로 서로 다른 편차를 보이면서 발전했는데, 이 때문에 초기∙중기∙후기 고딕이라는 양식 발전의 연도로 지역마다 달랐다. 대략 1400년경에 파리∙프라하∙아비뇽∙부르고뉴의 궁정에서 시작된 양식을 '국제적 고딕'이라는 통일된 형식언어로 지칭하게 되었다. 여기서 이탈리아는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왜냐하면 이탈리아에서는 고딕을 아주 제한적으로만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158 19세기 쥘 미슐레와 야콥 부르크하르트가 15,16세기 유럽 문화를 가리키는 시대 개념인 '르네상스'라는 단어를 만들어냈는데, 이 말은 재생을 의미하는 이탈리아어 리나시타에서 파생했다. 이 단어는 1550년 바사리의 책에서 중세 예술을 대체하는 예술의 재탄생으로 해석되었다. 이로 인해 르네상스는 이탈리아에서 출발한 혁신의 정신을 가리키게 된 것이다. 위대한 발견과 발명의 시대, 점차로 세속화로 이루어지고 신앙이 분열된 시대에 생긴 새로운 세계관은 가장 먼저 예술 분야에 반영되었다. 15세기 예술 생산의 중심지는 교역으로 부유해진 이탈리아와 네덜란드의 여러 도시였다.
바로크
240 바로크란 르네상스 예술에 토대를 두고 계속 발전한 양식을 의미한다. 바로크라는 개념은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어 다양한 형태로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간 예술이다. 각 나라마다 독특한 정치적, 역사적 상황 때문에 지역이나 나라마다 다른 모습으로 발전했다. 이탈리아에서는 대략 1650~1780년 사이에, 프랑스에서는 대략 1660~1715년 사이에, 네덜란드에서는 대략 1610~1670년 사이에, 독일에서는 대략 1650~1780년 사이에 바로크가 지속되었다. 시대를 가리키는 이 개념은 아마도 일그러진 진주를 뜻하는 포르투갈 단어 바루카에서 유래했다고 보는데, 규칙을 어긴 기이한 형태라는 의미로 쓰였다. 18세기 중엽에는 부정적인 함의를 지닌 채 의고전주의적 원칙에 부합하지 않는 건축물을 가리키기 위해 쓰였다가 19세기 중엽부터 긍정적인 의미로 변해서 모든 예술 분야에 적용되었다.
바로크 양식은 전과는 다른 역사, 정치, 종교 상황으로 제한된 1570년대 이후의 예술을 지속적으로 발전시키고, 새롭게 해석하면서 이루어졌다. 이 예술을 지탱한 사람들은 반종교개혁과 절대주의의 세력가였다. 즉, 건축, 조각, 회화, 장식과 예술 공예, 도시와 정원 조성 등 모든 예술 분야의 상호 작용과 연극적 연출을 목표로 삼은 바로크 양식의 작품은 지배자의 절대 권력을 찬양하고 정당화하는 데 이용되었다. 반종교개혁의 척도는 1545년부터 1563뇬까지 지속된 트리엔트 공의회였다. 이 공의회는 종교개혁 운동으로 분열된 교회를 다시 통일하려고 했지만, 교황이 지상에서 하느님의 대리자 지위를 가진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으로 끝났고, 오히려 건설적인 해결책을 방해했다. 가톨릭주의를 촉진시키고 옹호한 집단은 예수회 교단이었다.
18세기
278 18세기 미술사는 하나의 시대 개념으로 요약할 수 없는 여러 가지 다양한 발전을 담고 있다. 최종 단계에 다다른 절대주의 왕정 체제와 계몽주의가 겹쳐진 세기이고, 시민 계층과 혁명적 변혁의 세기이기도 했다. 다양한 정신적, 사회적 배경이 조형예술이 담당할 영역의 의무와 내용을 결정했다. 한편으로는 후기 바로크가 17세기의 여러 전통을 이어갔고, 다른 한편으로는 로코코의 섬세한 정신이 바로크의 열정을 폭넓게 대체하기도 했다. 이런 변화는 17세기 말엽부터 양식 발전과 취미 형성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떠맡았던 프랑스에서 가장 먼저 일어났고, 유럽으로 퍼져나갔다.
로코코는 1720~1770년 사이에 성했했던 바로크 양식 후기 단계를 가리킨다. 이 명칭은 널리 사용되었던, 가냘프고 불규칙한 조개 모양 장식을 의미하는 단어 로카유에서 유래했다. 프랑스 궁전에서 생겨난 이 장식 양식은 특히 독일 남부 지역의 교회 예술에서 널리 수용되어 보급되었다. 조각과 회화에서 발견되는 로코코 양식의 특징은 거의 모든 유럽 지역으로 퍼져나갔으며, 우아함과 섬세함을 뜻했다.
19세기
304 개인적 삶과 공적인 영역 모두에서 생긴 여러 가지 중대한 변화가 19세기의 모습을 결정했다. 정치적 혁명이 대부분의 유럽 국가를 뒤흔들었다. 산업혁명은 대규모 생산과 분업으로 이어졌다. 수공업의 전통은 내몰려 자리를 잃었다. 과학자와 발명가도 사고 전환에 일조했다. 다윈의 진화론, 첫 번째 선로의 개통, 전신과 전화의 발명 등 혁신은 시간∙공간∙인식에 대한 사람들의 이해를 변화시켰다.
이 같은 변화는 미술과 미술가에게도 해당되었다. 종교적, 신화적 주제를 구제하려는 갖가지 시도가 있었으나 그런 주제는 무의미해졌다. 신문을 통해 발전한 미술 비평이 항상 미술가와 관중 사이를 중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상호 불신을 부채질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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