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고전강의 | 09 모비딕 1

 

모비 딕 - 10점
허먼 멜빌 지음, 김석희 옮김/작가정신

 

강유원, '인문고전강의' 

일시: 2013년 2월7일 – 12월 5일, 매주 목요일 오후 7시30분 – 9시30분(총 40주)

장소: 과천시정보과학도서관

 

* 강의 목차

20131031 34강 모비딕

20131107 35강 모비딕

20131114 36강 모비딕

 

+ 강의에 사용된 교재가 아닌 열린책들에서 출간된 모비딕을 읽고 강의를 들으니 페이지와 번역이 다르다. 페이지는 맞춰서 따라가면 되지만 중요한 부분에서 번역이 다르게 되어있는 부분이 군데군데 보인다. 강의 정리 후 교재에 사용된 책을 구입해서 다시 읽을 예정이다.

 

 

20131031 34강 모비딕

모비딕은 1800년 후반에 나온 텍스트, 즉 현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1900년대를 역사학계에서는 현대를 잡는다. 당시 나온 텍스트 중에서 모비딕에 버금가는 정도로 괜찮은 텍스트가 플로베르의 부바르와 페퀴세[Bouvard et Pecuchet, 1881] 인데 미완성 텍스트. 1900년 초반에 나왔던 제임스 조임스나 훨씬 더 앞선 작품. 스케일에서 탁월함이 앞서며, 현대의 오뒷세이아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우리는 한반도에 사록 있기는 하지만 한국사람이라는 정체성을 갖기보다는 그림자 영(影)자를 써서 影國, 샤텐 다 베르트 Schatten da werd 그림자의 나라. 책이라고 하는 것으로 이루어진 책의 왕국, 그림자의 나라에 살고있다.

 

흔히 작품을 읽을 때 작가와 그의 시대, 캐릭터 분석, 구조적인 이해 이렇게 3가지 단계를 밟아가는데 멜빌의 작품을 읽을 때는 상대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을 것이다. 모비딕을 읽을 때는 작가와 그의 시대를 크게 생각할 필요가 없고, 필요한 만큼만 얘기를하겠다.

 

허만 멜빌은 1819-1891. 1800년대를 꽉채워 미국에서 살았다. 1800년대라고 하면 유럽보다는 미국이 더 역동적이었던 시대. 멜빌 시대에 있었던 주요한 사건들만 살짝 보면 중요한 사건으로 아편전쟁이 있다. 영국이 동아시아의 패권국 청나라를 쳐들어온 전쟁으로 현재 중국의 위정자들도 항상 아편전쟁을 떠올린다. 그 다음이 자본주의 사회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1860년 대에 만들어진 기술적인 혁신들이 기본 프레임이 되어서 지금 우리가 살고있는 세계의 기술들을 만들어내는것이다. 이때가 자본주의 사회의 날 것 그대로의 생 자본주의. 1928년 대공항이 일어난 다음에 수정노선을을 걷게되고 케인즈 이론 후에는 자본주의라고 말하기가 어려운 사실상 생 자본주의는 아니다. 그리고 1848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 1889 파리 산업박람회. 그보다 더 중요한 사건은 미국 사람이니 1861-1865 Civil War 미합중국 내전. 체제가 다르니까 내전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하다. 같은 체제 안에 있었는데 전혀 다른 체제로 나뉘어서 전쟁을 벌이면 내전. 한 체제 안에서 내란. 홍경래의 난. 진주민란.

미합중국 내전은 총력전은 아니었으나 이데올로기가 상당히 개입되었던 내전. 동시에 자본주의 사회가 가지고있는 산업의 문제, 계급의 문제가 개입된 전쟁. 미국사회를 이해하는데 있어 중요한 것이 미합중국 내전이다. 내전이 끝난 다음에 어떻게 변화해갔는가, 재건기에 대한 연구가 미국사 연구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허만 멜빌 인생에서도 영향을 미쳤고, 그의 작품 속에 반영되어 있다. 그 시대를 가지고 멜빌의 모비딕을 이해하는데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에 대해서  맥락적 독해 contextual reading에 대해서 생각해 봤는데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먹고사는데는 영향을 미쳤을지 몰라서 모비딕을 읽는데는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저자는 누구나 다 시대의 아들이기때문에 시대가 얼마나 스며들어가있나 보아야 하는데 상대적으로 모비딕은 그런 부분이 적다. 그걸 동원해서 읽을려고 하면 자꾸 비정합적 독해가 된다. 부분적으로는 가능할지는 몰라도. 시대에 맞물려있는 그런 저자들이 있다. 사르트르. 시대가 가니까 아무도 안 읽는다. 굉장히 시대와 맞물리는 부분이 있는가 하면 시대를 넘어서는 부분이 있다. 그래야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 그래서 당대에 사람들이 널리 읽는 것을 섣불리 읽지 말라는 것이다.

 

멜빌의 시대를 이정도 얘기하고 작품의 전개 과정을 살펴보겠다.

1891년에 죽기는 했지만 작품활동은 1850년 대에 거의 끝난다. 끝나고 세관에서 일을 하고 그냥 살아가다 잊혀졌다가 20세기에 발견된 사람. 모비딕이 나온게 1851년인데 1800년 대 나온 작품 중에 모비딕하고 비슷한 스케일을 잡아보려고 한것이 플로베르의 부바르와 페퀴세인데 미완성 작품일뿐만 아니라 1851년에서 30년이나 지난 1881년에 나온 것. 책도 독자가 있어야 읽힌다. 독자라고 해도 그림자의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이 없으면 못 읽는 것. 1800년대 후반 미합중국에 살고있는 독자는 확실한 물질성에 목을 매는 사람들. 그림자의 나라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멜빌의 작품은 10년 동안 작품활동을 했는데 6개 시기로 나눌 수 있다. 

먼저 탈색된 진리 unvarnished truth의 시기. 

색깔이 바랜으로 보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것, 어떤 프레임도 작동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사, 사실 기록을 추구하는 시대, 탈색된 진실 이렇게 보면 된다. 처음 내놓은 작품이 1841년 <타이피>. 섬 이름인데 출발점 자체가 대양에 있는 섬의 견문록으로 시작을 했다. 마르키 섬 계곡 원주민들하고 4 달동안 살아온 기록. 그 다음 작품이 1847년 <오무>. 이 두 작품을 묶어서 unvarnished truth 시대다. 발견의 서사 narrative of discovery. 멜빌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독자들에게 전해주려고 했다. 그런데 독자들은 그걸 읽고 화를 냈다. 너무 사실을 말했기 때문. 이 시대에 나온 narrative of discovery의 일반적인 형태가 신의 뜻을 이루었다, 교화되었다 이런 얘기를 했는데 멜빌은 그렇게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얘기를 했다. 선교사들이 벌이는 위선적인 형태. 고발문학이 아닌데 고발문학이 되어버리 것. 

 

제2번째 시기가 아나토미 시대다. 해부학의 시대라고 부르는데 이게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의과 대학의 해부학과는 관계가 없는 정신의 해부학이라는 것. 이 시기의 작품이 1849년에 나온 <마디>(<마르디>)

 

715 <모비딕> 역사 해설 부분 

주목할 작품이 하나 있다. 멜빌이 모험소설 작가에서 모비딕의 작가로 변모하는데 하나의 전환점이 된 소설이 있으니 그의 세번째 작품인 마디가 그것으로 라플레나 스위프트를 연상시키는 풍자와 환상, 토마스 브라운이나 새뮤얼 콜리지를 연상시키는 사색적 탐구가 자유자재로 담긴 야심작이다.

 

아나토미 시대를 이루는 작품이 <마르디>라는 작품인데 해부라고 하는 것은 자유자재가 아니라 엄격하게 하는 것. 육체의 해부가 아니라 정신의 해부. <마르디> 작품이 어떻게 해서 실패로 돌아갔는가. 이 작품은 두개의 파트로 구성되어 있는 혼성양식. 1부는 실제로 일어난 일을 다루고 있다. 즉 고래잡이를 떠난 소설 속의 화자가 있는데 소설 속에 말하는 사람이 1인칭 화자가 고래잡이를 떠나서 겪은 모험담을 제1부에 담고 있다. 그것은 앞에 나온 탈색된 진실 시기에 나온 똑같은 컨셉. 중요한 것은 그 1인칭 화자가 마르디 섬에 가서 일라라고 하는 여인을 만나고 그 다음에 거기서 3명의 현자를 만난다. 만나서 주고받은 이야기가 제2부에 들어있다. 사람들이 짜증을 확낸다. 다시말해서 이 사람이 모험을 겪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모험을 겪고 있는 자기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사람. 이 컨셉을 <마르디>에서 구축하게 된다. 정신의 해부가 들어간 것이면서 동시에 온갖 종류의 백과사전적 지식이 들어가게 된다.  <모비딕>을 읽을 때 왜 고래 이야기가 잔뜩 나오는지 보자. 73-105장까지가 고래 얘기. 모비딕을 끝까지 읽는 방법은 고래 이야기를 극복해야해한다. 고래라는 거대한 산을 넘어가야 에필로그를 보는 것. 욥에 나오는 리바이어던이 고래. <모비딕>에 고래 얘기가 그렇게 많이 나오는 이유가 백과사전식 지식을 집어넣기 위해서 그것의 의미는 좀더 아래에서 하겠다.

 

이중적 구성을 갖추었다고 하는데 어떤 의미에서 이중적인가. 인간이 실제로 겪었다고 하는 현실적인 모험담이 하나가 있고, 정신의 해부에 해당하는 것이 하나가 있어서 이중적. 그리고 이 모험을 겪고 있는 사람이 동시에 자기 얘기를 하고 있다고 하는 점에서 화자의 내면이 둘로 분열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중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백과사전적 온갖 지식이 들어가서 사람들을 혼란시럽게 하는데 이를 '파우스트적 욕구'라고 한다. 끊임없이 지식을 추구하려는 지식에 대한 갈증을 해결할 수 없어서 미친듯이 영혼을 팔아서라도 지식을 얻고자 하는 갈증이 있는것. 그게 백과사전적 지식을 집어넣는 것으로 나타난다.<모비딕>의 전조라고 할 수 있다.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오뒷세이아>를 보면 물론 시인이 시의 여신에게 부탁을 해서 <오뒷세이아>에 대해서 들려주는 것. 그런데 가끔보면 오뒷세우스 자신이 자기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오뒷세이아>에서 시인과 시의 여신을 빼면 <오뒷세이아>는 트로이 전쟁이 끝나고 오뒷세우스가 집에 돌아가는 이야기인데 자기가 자기 이야기를 한다. 이런 것을 우리는 '오뒷세우스적 자아'라고 한다. 겪는 사람이 동시에 자기얘기를 한다. 호메로스가 만들어놓은 인류사적 업적. 분열된자아. 겪는 이가 동시에 체험자가 동시에 말하는 이라는 것. 인간이라는 존재가 가지고 있는 가장 본질적인 모습. 고대적인 스케일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때는 규모가 방대하기 하지만 동시에 분열된 자아가 나타나기 때문. 그리고 <오뒷세이아>를 보면 저승 세계에 갔다오는 부분이 있다. 저승세계가 바로 그림자의 나라. 

 

제3번째 시기를 과자와 술의 시대라고 한다. 멜빌의 인생 자체가 이런 부침이 굉장한다. 대중소설로 들어가게 된다. 

1849년에 <레드번>을 쓰고 이어서 <하얀 재킷>. 그냥 여행담. 여전히 이 작품에서 유지되고 있는 특징을 보자면 1인칭 화자의 분열이라고 방식. 모두다 이중적 자아를 가진 1인칭 화자. 고래잡이를 나가서 모비딕을 쫒으면서 고통을 겪으면서도 동시에 계속해서 겪고 있는 자신을 따라가는 또다른 해석자라는 것을 함께 읽어야 한다. 모비딕을 읽을 때 그 점을 주의하지 않으면 온전히 안읽힌다. 

 

제4번째 모비딕의 시대는 1851년에 발표. 파우스트적인 앎을 추구하고 백과사전적 지식의 탐색이 나타나고 <마르디>에서 보였던 현실의 세계와 정신의 세계라고 하는 이중적인 세계가 <모비딕>에서는 감각적인 것과 관념적인 것의 대비로 나타나고 그러면서 이 모든 것이 통체적으로 통일될 때에야 비로소 진리에 이를 수 있다는 전체론적 진리관이 드러나는 작품.

 

좀 심하게 말하면 텍스트 전체가 일종의 지뢰밭이다. 그렇기 때문에 스토리를 따라서 읽으면 다 읽었다 말하기 어렵고 어떤 단어가 어떤 의미로 씌였는지 계속 생각을 해야 하고, 곰곰히 따져보면 굉장히 추상적인 관념적인 이야기를 해버리고 계속 리얼한 것과 아이디얼 한것이 계속 왔다갔다 한다.

 

이슈마엘은 창세기에 나오는 세상에서 추방당한 사람이다. 흔히 경계인이라는 말을 쓰는데 경계인이라는 말보다는 in between. 중간자라는 말이 딱 좋다. 향연을 읽어본 사람은 일라라는 사람을 보면 디오티마가 떠오를 것이다. 중간에 서 있는 자. 희랍어로 메탁쉬.

 

1850년에 나다니엘 호손의 <이끼>라는 작품에 대한 짤막한 서평을 발표한 적이 있는데 유명한 말이 나온다. 멜빌 문학 전체를 집약하는 말. Great Art of Telling the Truth 진리를 말하는 위대한 기술. 이 구절이 들어가는 문장을 보면 '진리라고 하는 것은 숲속의 있는 겁먹은 하얀 사슴처럼 쉽게 도망가버리기 쉬운 것이다... 마치 진리를 말하는 위대한 기예를 가진 세익스피와 다른 대가들에서처럼...' 진리를 말하려면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 어떤 것이 진리를 말하는 것이냐, 있는 그대로 사실을 객관적으로 말하는 것이 진리냐. 멜빌은 아니라고 하는 것. 해석도 진리를 구성한다는 것. 단순한 해석만을 가지고는 안되고 온갖 것들을 다 해석해야 한다는 것. 그래서 그 지루한 고래 얘기가 나오는 것이다. 우리는 진리라고 하는 것이 확실한 물질성을 가진 것만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시대에 산다. 하지만 멜빌은 그것이 진리의 전부가 아니라 그것에 대한 인터프리테이션 해석이 필요한 것이고, 너의 심성 속에서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서술해야 하는 것이고, 한 두개만 서술해서는 안되고 다해야 하는, 그래서 <모비딕>이 한없이 늘어진 것. 전체론적 진리관. <모비딕>을 쓰면서 단순히 소설을 쓴 것이 아니라 진리를 말하는 하나의 사례로서 쓴 것. <모비딕> 텍스트 자체가 진리 추구의 텍스트. 

 

인간의 정신이라고 하는 것이 나중 시대로 갈수록 계속 발전하는 것은 아니다. 고대적 스케일이라고 할때 스케일이 규모라는 뜻도 되지만 구도라는 뜻도 된다. 고대적 구도 속에서 살고 있던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의 진리성, 확실한 물질성이 가지고 있는 취약성을 분명히 감지하고 있었다. 지금 우리는 그렇지 않다. 정신은 오히려 쇠퇴한 것. 더군다나 1800년대 후반에 미합중국은 정신의 강력함을 강조할 수 있는 시대정신이 없었다. 그런 시대에 모비딕은 실패로 돌아간다.

 

제 5시기는 육지시대. 소설의 무대가 육지가 된다. 인간정신의 미묘한 움직임에 대한 것에 대해서 썼으나 역시 장사가 안되었다. 

제 6시기는 중단편 시대. 주제가 문제라는 것을 알고 난 후 1853-1856 사이에 많이들 읽히는 <필경사 바틀비> 그리고 <퍼트넘>, <이즈라엘 포터>, <광장 이야기> 썼다.

 

중요한 것은 <마르디>와 <모비딕>

서구 근대문학 작품이 서구 인식론과 거의 괘적을 같이 하고 있다. 경험론 그러면 외부세계 있는 something에게 진리값을 주는 것. 그것이 계속 확실한 진리를 줄 수 없다는 것으로 계속되면 의식의 흐름 수법으로 가는 것. 제임스 조이스. 뒤엉커 버리면 마술적 리얼리즘. 프랑스의 파트릭 모디아노가 쓴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이런 작품들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모비딕>처럼 더 리얼한 것, 목전의 현실하고 현실에 대해서 현실을 바라보는자의 의식을 서술해놓은 것. 이 두개가 동시에 나가면 독자들은 뚜렷하지 않다고 생각해서 귀찮아하는데 이게 현대 소설이 이렇게 가는 있다. <모비딕>이 잘보여주는 것.

 

목차를 보자.

피쿼드호를 타기 전이 첫번째 파트 1-22장. 승선 전. 핵심인물이 이슈마일와 퀴퀘그. 시간 순으로 서술이 되어 있고 시간을 끊고 들어가는 것이 고래학. 그 다음이 23장에서 배를 탄다. 23-45장까지가 두번째 파트. 에이헤브 이야기가 중심. 46-72장까지 바다에서 고래잡이 이야기가 나온다. 73-105장까지가 4번째 파트로 고래학. 고래와 고래잡이에 관한 백과전서. 106-135장까지가 5번째 그리고 에필로그. 모비딕의 수색과 추적.

 

에필로그를 보자.

욥기에 1장 13-19절까지 나와 있는 얘기가 하인이 욥에게 와서 욥의 아들, 딸들에게 이런일이 벌어졌습니다를 벌하는 장면.

저 혼자 살아남아 이렇게 소식을 전해드립니다.

퓨리탄들은 구약성서를 많이 읽었다. 멜빌은 요나서와 욥기를 많이 인용한다. 특히나 퓨티탄들이 좋아하던 텍스트가 요나와 욥기. 욥기라는 텍스트는 욥이라고 하는 사람의 신앙을 하나님이 시험하기 위해서 엄청난 고통을 주지만 욥은 결코 하나님에게 반항하지 않는다는 이야기. 엄청난 고통을 받으면서도 아 하나님의 섭리가 있겠지. 고통을 이겨내야해. 알수 없는 곳에서 내려오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성과 능력과 지혜의 한계가 있으며 고통을 받으면 받을수록 신의 섭리는 더욱더 뚜렷해진다는 태도를 가진 텍스트. 욥기와 대치되는 텍스트가 고대 문학에서 <길가메쉬 서사시>. 똑같이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나온 텍스트.

 

저 혼자 살아남아 이렇게 소식을 전해드립니다. 욥기 1장 13-19절에서 4번이나 되풀이 된다.

연극은 끝났다. the drama is done. 사실 모비딕에서 가장 멋진 문장을 꼽으면 바로 이 문장.

연극은 끝났다 라는 것이 굉장한 것을 함축. 이 거대한 고래잡이와 에이해브 선장의 온갖 난리가 이것이 드라마였다는 것. 드라마로 보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신. 신적 입장에 올라서서 말하는 것. 끝났으니까 회상하는 것. 지금까지 하는 이야기가 직접 겪으면서 하는 이야기인줄 알았는데 사실을 회상하는 것. 이 지점에서 체험자가 동시에 시의 여신이면서 동시에 시인이기도 한 지점. 

나는 느릿느릿 회전하는 동그라미 한복판에 단추처럼 박혀 부글거리는 검은 거품을 향해 익시온 왕처럼 빙글빙글 돌며 끌려 들어갔는데, 그 기운의 축에 이르렀을 때 검은 거품이 위로 솟구쳤다. 그러면서 교묘한 탄력으로 배에서 떨어져 나온 관 같은 구명부표가 엄청난 부력 덕분에 힘차게 솟구쳐 공중으로 날아올랐다가 떨어져서 내 옆으로 떠내려왔다. 

 

709 이 드라마를 읽는 몇가지 키워드가 있는데 이슈마일. 그렇게 자칭할 뿐 실은 본명을 알 수 없는 인물이다.

710 작가가 이 인물에게 본명을 부여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 있다. 그렇다면 번역도 작가의 뜻을 따라야 하지 않겠는가. 하여 그 유명한 첫문장 콜미이슈마일을 이슈마일이라고 해두자로 옮겼다... 이슈마일의 본질을 도망의 리힐리즘이라고 부른다면 선장 에이해브의 본질은 공격의 니힐리즘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 사람은 in between이기 때문에 이슈마일의 정체성을 작가가 확성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유념해야 할 것은 선장 에이해브도 니힐리즘이고 이슈마일도 니힐리즘. 그렇다면 니힐리즘의 두 측면. 그것을 조금 달리 말하면 이슈마일하고 에이해드하고 같은 사람의 두 측면. 주인공은 두명. 그런데 사실은 한명. 이슈마일-에이해브. 에이해브-이슈마일. 하나의 정체성의 두 측명. 드라마의 표면적 주인공은 두명이지만 사실은 그들은 하나의 정체성의 두 측면이기 때문에 어떤 때는 이슈마일-에이해브, 어떤 때는 에이해브-이슈마일. 책의 나머지 사람들은 한명의 이슈마일-에이해브에서 파생되어 나온 것. 

 

제 16장 제목이 the ship인데 이런 부분들을 중요하게 봐야한다.

피쿼드호에 대한 설명이 16장에 나오는데 피쿼드호가 바다 위의 배. 바다는 세계인데 세계가 바다로 표상된다면 바다로 표상되는 세계가 다시 피쿼드호라고 하는 배로 표상된다. 이슈마일, 에이해브,피쿼드 이 세가지 요소만 있으면 핵심적인 element는 다 나오는 것. 

 

<일리아스>부터 연대순으로 읽어야 후대의 작가가 앞에 있는 무엇을 배꼈는지 알 수 있다. 앞에 나오는 뭔가를 배끼고 있기 때문에 작품이 만들어 지는 것. 이것이 <일리아스>의 아킬레우스의 방패 부분. 방패를 헤파이토스가 만든다. 방패안에 세계가 새겨져 있다. 서사시적 기법. 방패를 보면 방패 안에 다가 세계를 집어 넣었다. 지금 피쿼드호가 배인데 이 배가 바다 위에 떠다닌다. 바다는 세계를 말하는 것. 그러니까 에이해브하고 이슈마일하고 피쿼드 이 세개가 모비딕을 읽은 가장 중요한 요소. 그래서 피쿼드의 항해경로를 보면 전세계를 다닌다. 사실은 세계의 축소판. 피쿼드호에서 일어나는 일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 

 

창세기 16장 12절을 보면 이슈마엘에 대한 설명이 있다.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와 대항해서 살리라 하니라

성서에 나온 사람을 주인공으로 잡았으니 일차적으로 이 사람의 성격은 성서 텍스트가 규정해주는 것. 그가 모든 형제와 대항해서 살리라 하니라라는 말은 그 사람이 방랑자이고 추방자이기는 하지만 도망다니는 사람은 아니다. 도망의 니힐리즘이라고 말하면 안된다. 주인공의 성격을 규정하려면 먼저 성서에서 체크하고 그것을 깔고 멜빌이 어떤식으로 변용시켰는가를 봐야하기 때문에 사실 '도망의 니힐리즘' 이라는 말은 논증할 수 없는 주장이다.

 

call me ishmael. 독자들에게 나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판단하라는 것. 나에 대해서 자세히 말해주지 않겠다. 독자에게 정체성을 추측할 것을 요구. 

 

다음 시간에는 첫번째, 두번째 파트를 읽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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