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카츠카 아키라: 1894년, 경복궁을 점령하라
- 책 밑줄긋기/책 2012-22
- 2017. 6. 16.
1894년, 경복궁을 점령하라! - 나카츠카 아키라 지음, 박맹수 옮김/푸른역사 |
목차
머리말
7 1994년은 청일전쟁이 일어난 지 정확히 100년이 되는 해였다. 2000년은 일본을 비롯한 여덟 나라 열강의 군대가, 중국의 의화단 봉기를 진압한 의화단 진압전쟁 ― 일본에서는 북청사변이라고 한다 ― 이 일어난 지 100년, 그리고 2004년은 러일전쟁이 일어난 지 100년이 되는 해이다.
일본의 학교에서는 지금도 청일•러일전쟁으로 시작된 '한국병합' 시기, 곧 메이지明治 후반기를 '일본의 국제적 지위가 향상된' 시기라고 가르치고 있다. 일본은 이때 불과 10여 년 동안 세 번의 전쟁을 치르며 동양의 소국에서 세계 제국주의 열강의 하나로 나섰으니, '국제적 지위가 향상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청일전쟁이 일어난 지 정확히 50년, 러일전쟁이 일어난 지 40년이 되던 1945년에, 일본은 2차세계대전에서 패배•항복했다. 국제적 지위가 향상되었다던 일본은 왜 불과 반세기도 지나지 않아 패배했을까? 아시아 여러 나라와 태평양의 섬들에서 2천만 명이 넘는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고, 일본이 희생자만도 310만 명을 낸, 역사에서 그 예를 찾아보기 힘든 비극을 빚은 뒤 참담한 패전을 맞아야만 했을까?
지금 '국민 작가'로 이름을 날리고 있던 시바 료타로를 비롯한 많은 일본인들은 청일•러일전쟁까지는 지도자들이 똑똑해서 나라를 그르치지 않았는데 만주사변 이후 태평양전쟁 시기에는 지도자가 무능력해 패전의 쓰라림을 맛보았다고 생각한다. 태평양전쟁에서의 파탄은 '메이지의 유산'이 아니라 '좋은 시대였던 메이지에 대한 배신'의 결과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이같은 역사관은 과연 정당한 것일까?
8 나는 청일전쟁이 일어난 지 100년이 되는 1994년 봄, 후쿠시마 현립 도서관 <사토문고>에서 청일전쟁 발발과 관련된 진귀한 기록을 발견했다. <사토문고>는 후쿠시마 현 코리야마 시의 실업가 사토 덴키치(1887~1967)가 군사•전쟁과 관련된 방대한 서적•사료•사진 등을 수집한 문고인데, 거기에 구일본 육군참모본부가 기록한 <「일청전사」 日淸戰史>의 초안 일부가 소장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 속에서 일본군이 청일전쟁의 첫 번째 단계로 감행한 무력행사, 곧 조선왕궁인 서울의 경복궁 점령(1894)에 관한 상세한 기록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런데 더욱 놀란 것은 <「일청전사」> 초안이 같은 참모본부가 공식적으로 펴낸 청일전쟁의 전사(戰史), 즉 <메이지 이십팔년 「일청전사」>(제1권은 1904년 간행, 이하 <공간전사>라 함)와 조금도 닮은 곳이 없다는 사실이다. 즉, <공간전사>는 단지 간략할 뿐 아니라 완전히 '꾸며낸 거짓말'이 었음을 이 초안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다. 구일본 육군참모본부가 조선왕궁점령 전말을 상세하게 기록하면서, 진실을 덮어버리고 그 자리에 조작된 이야기를 채워넣은 것이다. 공권력이 '역사를 위조한' 사실이, 다름 아닌 바로 그 참조본부의 기록을 통해서 입증된 셈이다.
9 "모든 권력은 과거를 자기 정당화에 이용하려고 한다. 정당화에 어울리지 않는 과거를 억압하며, 잘 어울리는 과거만을 문맥에서 떼어내 과장하고, 역사를 허구로 바꾸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권력이 행하는 이러한 과거 재단(栽斷)에 대해 역사가는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할 것 인가. 권력의 정당화에 봉사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지 모른다. 사실, 이제까지 역사가는 자신의 의지로 또는 강제로 '사관(史官)' 역할을 해 왔다. 그러나 학문으로서의 역사에 걸맞은 공헌은, 정치적 정당화를 위해 왜곡되어진 역사적 진실을 복원하고, 나아가 권력의 역사적 정당성을 물어 권력을 초월하는 통찰을 미래를 향해 제기함으로써, 권력으로부터 독립된 역사 감각과 비판 정신 등이 뿌리내릴 수 있게 힘을 보태는 일일 것이다." - 타니우치 유즈루, <소비에트사의 새로운 세대>
제1장 100년 만의 발견
30 일본 정부의 공식 견해는 오토리 공사가 보낸 공식전문 내용대로 관철되었다. 곧 조선왕궁점령은 먼저 발포한 조선 병사와의 우발적인 충돌에서 시작되었고 일본군은 어쩔 수 없이 왕궁으로 들어가 국왕을 보호했으며 소규모 충돌사건에 지나지 않았다라는 식으로 시종일관했던 것이다.
제2장 조선왕궁점령의 실상
70 7월 23일 왕궁점령사건은 결코 '한일 양국 병사의 우연한 충돌'이 아니며 일본 공사관과 일본 육군의 혼성여단이 하나가 되어 사전 주도면밀하게 준비한 작전계획에 근거하였다는 사실, 그리고 그 작전은 왕궁과 그 주변 서울의 중추 지역에 대한 전면적인 점령이었다는 사실이 기록에 의해 명백히 밝혀졌다.
75 그들이 말을 듣지 않자 대대장이 즉각 칼을 빼들고 군대를 지휘하여 질타하면서 문안으로 돌입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크게 놀라 대대장의 요구를 받아들여 국왕의 재결을 얻을 때까지 미루기를 청하였고, 잠시 후 문을 나와 조선 병사의 무기를 내주었다.
제3장 위조되는 역사
111 노무라는 "태평양전쟁 전 일본 육해군의 수뇌부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 전쟁은, 1차세계대전보다도 러일전쟁이었다"라며, 그러나 "태평양전쟁에 이르는 일본의 정책 결정과 그 전쟁에 관여했던 일본육·해군인 중 그 최고 수뇌급만이 러일전쟁에서 초급사관으로서 약간의 실전 경험을 가졌을 뿐, 대부분은 러일전쟁의 실태를 참모본부와 해군본부가 편찬한 《공간전사》를 통해 배웠을 따름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제4장 통제된 보도, 만들어진 상식
157 청일전쟁을 비롯한 전쟁을 정당화하는 목소리가 천황의 위광(威光)과 결부되어 한층 높아져 교육의 장에서 강요되었다. 학교교육을 비롯한 모든 장소에서 허구를 바탕으로 '조작된 이야기'만이 '국민적 상식'으로 통용되었다. 이리하여 일본국민은 역사적 사실로부터 멀어지게 되었을 뿐 아니라, 정치·군사 지도자들 자신도 객관적인 사실과 그 추이를 통해 정책을 결정하는 근거를 잃어갔던 것이다.
제5장 끝나지 않은 역사의 위조
170 원래 당국이 이와 같이 남방에 뜻을 둔 것은 단지 이번 전쟁에서의 작전상 문제 때문이 아니라 크게 보아 영원한 국시(国是)로 고려해야 할 바였기 때문이다.
제7장 역사 위조가 남긴 후유증
226 "타민족을 억압하는 국민은 자기자신도 해방시킬 수 없다"
그렇다면 천황제 지배하의 일본은 어떠했던가. 앞에서 얘기한 것과 같이 청일전쟁 당시 신문은 신문지조례와 육군성령•해군성령 등에 의해 엄격히 기사를 제한당하였고, 발매금지라는 쓰라림을 자주 맛보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조선왕궁점령에 관한 것이라면, 기자들이 보고 들은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한 정부와 군에 대한 비판을 전혀 담지 않은 기사라 할지라도 예외 없이 문제삼았다. 사건의 진상에 조금이라도 접근하는 것을 두려워한 일본 정부는 1894년 8월 1일 '칙령 제134호'를 긴급발표, 그 다음날부터 신문•잡지 등의 출판물의 사전 검열을 실시하여 신문의 움직임을 봉쇄한 것이다. 이 칙령은 같은 해 9월 12일 폐지되기는 하지만, 그 뒤에도 천황제하 일본의 언론•출판은 결코 자유를 얻지 못했다.
일본의 국민 ― 당시는 국민이 아니라 천황의 '민초' '신민'이었다 ―은 '타이쇼 데모크라시'의 여운이 남아 있던 쇼와 초기에도 출판법•신문지법•치안경찰법•치안유지법•행정집행법 등에 의해 언론의 자유를 구속당하고 있었다. 심지어 이들 법을 비판하면서 "언론 자유의 존중은 현대에서 최대의 특권이며, 또한 동시에 정치의 운용을 원활하게 하는 안전판이었다"라고 쓴 <메이지 타이쇼사 언론편> 조차도 "국민의 행복을 위협하고 국가의 안녕을 어지럽히는 언론에 대해서는 부득이 단속할 수밖에 없다"라고 쓰고 있다.
군사•외교 기밀에 저촉되는 문제를 세상에 널리 알리는 일은 굉장히 어렵다기보다는 불가능했다고 하는 것이 옳다. 형무소행을 각오하던지, 아니면 생명을 걸 각오를 하지 않으면 누구도 감히 공표할 수 없었다. 신문과 잡지 등은 자연히 천황제 지배에 순응하는 보도밖에 할 수 없었고, 일본이 조선과 중국을 침략한 사실은 계속 은폐되었다. 더욱이 그 거짓 역사는 학교 교육을 통해 일본인들에게 일상적으로 주입되었다.
미국의 베트남 반전운동과 같은 운동은 당시 일본에서는 일어날 수도 없었다. "타민족을 억압하는 국민은 자기자신도 해방시킬 수 없다"는 엥겔스의 말을, 천황제 아래 일본이 그림으로 그린 듯이 입증했던 것이다.
236 최근 일본에서는 패전 후 반세기 이상이 지났음에도 근대일본에 대한 객관적인 역사의 성찰을 대수롭지 않게 보아넘기고, 마치 일본의 전쟁 희생자가 일본의 평화를 위해 자발적으로 생명을 바친 것처럼 말하는 언동이 지방자치체의 의회 결의를 비롯하여 여러 형태로 각지에서 버젓이 횡행하고 있다.
일본에서 역사에 다시 없는 수많은 희생자를 만들어낸 전쟁의 역사적 원인을 따지지 않고 책임을 선반 위에 올려놓은 채 "전몰자를 애도한다"고 하는 것은 도리어 죽은 자에 대한 모독이다.
애국을 말하는 듯하면서도 실은 "애국을 사칭하는" 후지오카 노부카츠 등의 역사관은 섬나라 일본에서는 어느 정도 통용될는지 모르겠지만, 한 걸음 국외로 나가면 그 어떤 나라에서도 상대해주지 않는다. 일본이외에서 통용되지 않는 역사관이라는 점에서 '팔굉일우(八紘一宇], <일본 서기>에서 유래한 말로 15년 전쟁기에 일본의 아시아침략과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된 용어)'와 똑같다.
이러한 독선적인 역사관이 다시 일본을 뒤덮는다면 그것은 곧 망국으로 이어질 것이다. 백년 동안의 거짓을 끝낼 것인지, 아니면 거짓 위에 다시 거짓을 덧칠할 것인지, 패전 반세기를 지난 지금 일본인의 역사 인식에 다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그것에 어떻게 답할 것인가. 그 점을 우리 일본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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