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바르트: 개신교신학 입문


개신교신학 입문 - 10점
칼 바르트 지음, 신준호 옮김/복있는사람


머리말


01 ‘개신교신학‘이란 무엇인가?


I 신학의 자리

II 신학적 실존

06 놀람

07 당황

08 의무

09 믿음


III 신학의 위기

10 고독

11 의심

12 시험

13 희망


IV 신학적 작업

14 기도

15 연구

16 봉사

17 사랑


옮긴이의 글




머리말

6 이것은 내가 개신교 신학의 영역에서 5년간 학생으로, 12년간 목사로, 그 후 40년간 신학 교수로 온갖 여정과 우여곡절을 겪으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근본적으로 추구했고 배웠고 주장했던 것에 대한 숙고다. 어쩌면 나는 오늘의 젊은 세대에게 '철학과 혼합된 신학'에 대한 나의 대안을 개관하려는 숨은 의도를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신학은 요즘 많은 사람에게 마치 새로움 중 가장 새로운 것처럼 강력하게 등장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나는 이 강의를 어떤 "신조"의 연속, 혹은 "개요" 혹은 비슷한 "총론"의 형식에 맞추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안내하는 입문의 형태를 택했는데, 이것은 우리 바젤 신학부에서는 이미 오래 전에 사라진 교수법이다.


01 ‘개신교신학‘이란 무엇인가?

8 신학이란 예로부터 "학문"이라 불러 온 인간적 시도들 중의 하나다. 신학은 한 특정한 대상 혹은 그 대상의 영역을 대상 자체가 지시하는 방법을 통해 먼저 현상적으로 인지하고 그 의미를 이해한 후, 그 대상의 존재적 영향력을 언어로 표현하려고 시도한다. 그리고 "신학"이라는 단어는 자신의 주요 과제가 "하나님"이라는 대상을 인지하고 이해하고 언어로 표현하는 것임을 나타낸다. 그래서 신학은 특수한 (그것도 대단히 특수한!) 학문이다.


10 올바른 신학은 반드시 자신만이 올바르다고 여기고 그렇게 주장해야 한다. 올바른 신학은 그 유일무이한 올바름을 증명해 주는 영과 영적 능력의 인도하심을 받으면서 자신의 그러함을 반드시 확증해야 한다. 그러나 만일 그 신학이 그 자격을 스스로 사칭하고 또 선포하려고 한다면, 바로 그 점에서 자신이 그 유일무이하게 올바른 신학은 아니라고 폭로하는 셈이 된다.


10 우리가 소개하려는 신학은 "개신교신학"이다. "개신교적" 혹은 "복음적"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닌 "evangelisch"라는 독일어 형용사는 신약 성서와 16세기 종교개혁을 생각나게 한다. 그래서 여기서 전개될 '개신교(복음적)신학'과 관련해 다음 두 가지가 고백된다. 첫째, 그 신학의 근원은 먼저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 은폐되어 있었다가 신약성서의 저자들, 사도들, 예언자들의 문서 안에서 명확하고 밝게 드러났다. 둘째, 그 근원은 그 후 16세기의 종교개혁에서 재발견되고 재수용되었다. 그러므로 "개신교적"(복음적)이라는 표현은 어느 한 교파만을 배타적으로 지칭할 수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그 표현은 모든 교단이 어떤 방식으로든 존중하는 성서를 우선적·결정적으로 가리키기 때문이다.


11 개신교 신학은 복음의 하나님을, 즉 복음 안에 서로를 알리시고 인간에게 말씀하시며 인간들 사이에서 인간에게 행동하시는 하나님을 (바로 그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방법에 의해!) 인지하고 이해하고 언어로 표현한다. 바로 그 하나님이 인간적 학문의 대상이 되시는 곳, 바로 그분이 그 신학의 근원과 규범이 되시는 사건이 발생하는 곳, 그곳에 개신교 신학은 존재한다.


I 신학의 자리

02 말씀

21 신학의 "자리"는 여기서는 단순히 신학에게 내부로부터 지시되고 신학의 대상에 의해 필연적으로 지정되는 출발점[말씀]을 뜻한다. 신학 그리고 신학의 모든 각론은 ━ 성서신학, 역사신학, 조직신학, 실천 신학 등은 ━ 바로 그 출발점으로부터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 자리는 신학이 언제나 걸어야 할 길의 '법칙'이며, 군대식으로 말하자면 신학자가 (신학자 자신 혹은 동료에게 어울리든지 아니든지) 반드시 이동해야 하는 진지이며, 그리고 대학에 있든지 어떤 카타콤에 있든지 관계없이 어떤 상황에서도 사수해야 하는 진지다.


29 개신교신학이 들어야 하고 응답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전체의 말씀이다. 전체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와 결합된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서 혹은 이스라엘의 역사와 결합된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 안에서 말해진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을 외면한 인간, 그러나 (그를 위한 하나님의 개입에 힘입어) 다시 하나님을 향하게 된 인간과 맺은 계약의 말씀이다. 만일 개신교신학이 한편으로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인간의 불충 사이의 갈등에만 관심에 두고 제한적으로 진술한다면, 그때 신학은 전체로서의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하지 못하는 셈이 될 것이며, 말씀의 진리는 그 신학을 비켜가게 될 것이다.


03 증인들

32 그들의 탁월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그들의 특수한 역사적 정황 때문이며, 그들이 부르심을 받고 전투적으로 대비했던 특수한 봉사 때문이다. 그들은 말씀의 증인들이다. 좀 더 상세히 말하자면 그들은 최초의 증인들이다. 그들은 말씀 자체를 통해 그 말씀이 직접적 인지로 부르심을 받았고,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그 말씀을 확증하도록 파송되었던 증인들이었다.


33 예언자들과 사도들은 자신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행동하시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에 의해 다음과 같이 규정, 선택, 선별되었다. 즉 그들은 그들의 시대에 발생한 하나님의 행동을 보는 자 그리고 그 역사 안에서 말해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가 되었으며, 그들이 보았고 들었던 바로 그분에 의해 이제는 말하라고 부르심을 받고 능력을 얻었다.


34 신학이 주목해야 할 초점은 물론 신약성서의 사도들이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다. 이 역사가 이스라엘 역사의 목적이며, 그리고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말해진 하나님의 말씀의 목적이다. 사도들이 보았고 들었고 만졌던 것은 '계약의 완성'이었으며, 이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유일한 인간적 파트너의 실존과 등장 안에서 완성되었다. 그 인간적 파트너는 주님이셨으며, 불순종하는 자의 자리에서 종으로서 사셨고 고난 당하셨고 죽으셨으며, 인간들의 모독 행위를 폭로하셨지만 그러나 또한 덮으셨으며, 그들의 죄를 짊어지심으로써 제거하셨으며, 인간들을 신적 파트너와의 결합으로 인도하시고 그분과 화해시키셨다.


04 공동체

44 우리가 흔히 "교회"라고 부르는 것은 루터가 말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모이고 근거를 얻고 질서를 갖춘 공적 단체, 곧 "성도들의 공동체"다. 성도들은 예언자들과 사도들의 근원적인 증거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도달하고 적중해서 그 말씀의 진술과 부르심을 더 이상 벗어날 수 없게 되었고 더 나아가 그 말씀을 수용할 수 있는 능력, 의지, 자유를 획득한 사람들이며, 자신들의 삶, 사고, 언어가 '이차적 지위의 증인'들로 사용되도록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에 위탁한 사람들이다.


46 진리 질문은 다음과 같다. '공동체는 위의 사건들 전체와 함께 말해진 말씀이 진리라는 것을 올바르게 언어로 표현했는가?' 다시 말해 '공동체는 그 말씀을 순수성 안에서, 그 말씀에 적절한 정직함 안에서 이해했으며, 근본적으로 철저히 사고하고 분명한 개념들로 표현했는가? 그래서 공동체는 이차적 지위의 증거라는 책임을 선한 양심으로 수행 할 수 있었는가?'


47 공동체는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 성서적 증거의 해석, 그리고 자신의 고유한 믿음에 있어서 반쯤 혹은 그 이상 잘못된 이해를 하거나 편향되고 곡해된 사고 혹은 지나치게 과장되거나 우둔한 주장에 빠질 수 있다. 그때 공동체는 세상 안에서의 하나님의 일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방해만 하게 될 것이다,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공동체는 매일 깨어 기도해야 하며, 가장 진지한 작업과 함께 자신의 몫을 행해야 한다. 이 작업은 바로 신학적 작업이다.


47 이제 다음이 불가피해진다. 신학은 그 자체로써 근본적으로 공동체에게 더 나아가 그리스도교 전체에게 필연적 사명으로 부과된 작업이다.


47 그들 각자의 삶이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나 또한 '증거'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각각의 그리스도인은 증언에 관련해 저 진리 질문의 책임을 지기 때문에, 그들 각각은 이미 신학자로 부르심을 받고 있다.


48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의 담당부서에 속한 어떤 직분자가 때때로 안심하고 어떤 다른 사람에게 양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세상 안에서 깨어 있어 자신의 사명과 과제를 의식하는 공동체는 필연적으로 신학에 관심을 가진 공동체가 된다. 공동체의 지체들 중에서 특별한 사명을 지닌 사람들에게 신학이 그보다 더 높은 관심사여야 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51 성서는 1세기의 공동체가 그들에게 예언자적·사도적 증거들로 주어졌던 많은 문서들 중에서 최종적 합의에 의해 완성되고 분류된 문서들이다. 이 문서들이 바로 '성서'라는 사실, 이것을 조상들은 그때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의 믿음 안에서 인식하고 고백했으며, 이후 수백 년의 공동체는 그 인식과 고백을 오늘까지 계승했으며, 공동체는 그 인식과 고백에 관해 대체로 좋은 경험을 해왔다. 바로 이 전승된 정경이 신학이 우선 단순하게 감행하는 작업가설이다.


05 성령

56 그 명제들은 자연과 인간을 혹은 인간 정신과 역사를 지향하는 어떤 일반적 학문의 결과들을 전면에 갖지 않으며, 배후에 어떤 철학적 기초도 갖지 않는다. 그 명제들 각각 또는 전체는 히브리서의 멜기세덱처럼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다.


57 순전히 개신교 신학의 자리를 서술하기 위해 감행된 그 명제들은 모두 순수하게 신학적 내용만을 가지며, 오직 신학적으로만 보증될 수 있으며, 오직 신학적으로만 주장되고 이해될 수 있다. 신학이란 무엇인가? 지금까지 신학의 자리를 서술했던 명제들에 따르면, 신학은 오직 신학적으로만 정의될 수 있다. 신학은 하나님의 사역 안에서 선포된 저 하나님의 말씀을 인식하려는 학문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성서적 학교의 학문이자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부르심을 받은 공동체에게 피할 수 없이 주어지는 진리 질문을 힘써 추구하는 학문이다. 오직 그러한 학문으로서 신학은 신적 로고스에 대한 인간적 논리인 자신의 개념들을 완성한다. 오직 그러한 학문으로서 신학은 자신의 근거, 정당성, 목적을 갖는다. 신학적 실존의 권능은 저 명제들 안에 은폐되어 있는 권능이다.


60 그 권능은 임마누엘 역사의 발생 안에서, 예언자와 사도들 안에서, 공동체의 모음, 건립, 파송 안에서, 주귄적으로 일했고 또 지금도 일하고 있다. 그 권능은 그렇게도 주권적인 권능이며, 우리가 앞의 세 강의에서 감행했던 모든 것을 서술하고 설명하는 신학적 명제들 안에 은폐되어 있는 권능이다. 그 권능이 외부로부터 볼 때는 아마도 확실한 보증을 외치고 요구하면서 공중에 떠있는 것 같이 보이는 것은 놀라운 일은 아니다.


II 신학적 실존

06 놀람

71 일반적으로 놀람은 한 사람이 이전에 그에게 "일어난 적"이 없어서 현재로서는 이상하고 낯설고 새로운 어떤 정신적 혹은 자연적 현상과 마주치는 곳에서 발생한다 그는 그 현상을 그가 지금까지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상상의 한계선 내부에 보관할 수가 없고, 그래서 그 현상의 기원과 본질을 계속해서 질문하게 된다.


73 "놀람"은 "기적"으로부터 온다. 신학을 시작하게 된 사람이 첫 걸음부터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기적과 관계한다는 것은 필연적이다. 다시 말해 근본적·결정적으로 '동등하게 병렬 될 수 없는 사건' 의 현재와 작용과 관계한다. 기적의 설명이 신학의 전부인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신학은 필연적으로 기적도 말해야 한다. 신학은 자신의 대상인 기적을 반드시 취급해야 한다. 만일 신학이 그렇게 하기를 부끄러워한다면 그리고 그와 함께 주어지는 신학적 문제를 거부한다면, 그때 신학은 신학이기를 그쳐야만 한다.


74 사람들은 흔히 역사가와 함께 소위 "역사적"으로 생각하고 말하면서, 기적의 이야기들에 사기 혹은 전설이라는 꼬리표를 붙이려 든다. 그러나 신학은 성서적 증거가 펼치는 경륜사Oekonomie 안에서  〔역사가와〕 마찬가지로 역사적으로 사고하면서도 〔역사가와는 달리〕 기적의 이야기들에서 결코 박탈될 수 없는 기적의 필연적 기능을 논증해야 한다.


77 새로움은 성서적 증거에 따라 한 마디로 말하자면, 이스라엘의 역사를 종결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다. 그분 곧 구원자께서 여기 계신다! 본래적·결정적으로 그분이 기적(모든 기적들 중의 기적)이시다! 신학에 관계되고자 하는 자는 불가피하게 그분을 대면해야 한다. 그분은 무한하게 경이로우신 분이시다. 이것이 인간에게 알려지고 인간이 그것을 인식할 때. 그는 가장 깊은 근원에서 철저하게 영원히 유일회적으로 놀라움에 사로잡힌 인간이 된다.


78 우리는 극히 최소한도라도 자기 자신에 대해 놀라고 또다시 놀라지 않는다면 자기 자신이 수수께끼와 비밀이 되지 않는다면. 신학자가 될 수 없다.


07 당황

85 최변방의 주변 과목에 종사한다고 해도, 다만 이마추어적으로 서툴게 종사하면서 그 대상과 대면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그중 어떤 신학자도 그냥 보잘것없지만은 않다. 그 대상은 그들 모두의 머리 위에서 지켜보고 계시며 그 객체는 주체에 대해 끊임없이 우위를 점하며, 그래서 주체는 스스로의 힘으로 객체를 소유할 수 없지만 객체는 그를 소유 하신다. 그 사람은 이제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대단히 확실하게 그 대상에게 매료되었을 뿐만 아니라, 바로 "그 대상과 마주쳐 당황한" 사람이 된다.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다!


08 의무

95 그의 놀람에서 시작하고 그의 당황하는 실존과 밀접하게 연결된 '의무 부과'는 총체적인 일이다. '의무 부과'는 그의 현존재 전체를 포괄한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에 집중한다. 그의 실존은 그의 특수한 기능에 의해 어떤 의무를 지게 된 실존, 다시 말해 어떤 특수한 자유를 선사 받아 그 자유의 특수한 사용을 요청 받는 실존이다. 우리의 관심은 어떤 점에서 그가 그의 학문 안에서 대상에 의해 의무를 지는 인간이 되는가이다. 그는 특정한 종류의 인지, 연구, 사고, 진술을 하도록 자유롭게 되었고 또 요청을 받는다는 점에서 의무를 진다. 이 특정한 종류의 인지, 연구, 사고, 진술은 그 자신이고 고안하거나 선택한 것이 아니며, 오히려 그가 신학적 주제를 수용 할 때 저절로 나타난 것들이다. 그가 신학적 주제에 계속해서 충실하려면, 그는 그 특정한 종류의 성격을 체득해야 하고 충분히 연습해야 하며 또 기억하려고 노력해서 저절로 기억되도록 해야 한다.


97 신학적 학문의 대상은 모든 각론들에서 충만함 안에 계신 하나님의 사역과 말씀이며, 또한 그 충만함 안에서도 오직 하나인 사역과 말씀이다. 그 대상은 바로 세상의 구원자가 되신 유대인의 왕이신 한분이시며 인간들 사이에서 한분 하나님을 대변하시고 또 인간들을 한분 하나님 앞에서 대변하시는 분이시며, 기대되셨고 오셨으며 이제야 비로소 올바르게 기대되시는 종 그리고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101 우리는 첫 강의에서 신학의 특성 중 하나로 자유로운 학문을 말했다. 신학은 인간적 인지력, 판단력, 언어 능력을 어떤 전제된 인식론의 조건 없이 다만 순종 안에서 사용한다는 점에서 자신의 자유를 예증한다. 이때 순종은 신학의 대상이 즉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살아 계신 성령의 생명력 안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지금 여기서 신학에게 요청하시는 것이다. 비이성적인 것, 게으르고 떠도는 사고, 예를 들어 "불합리하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는 식의 불합리성에 대한 왜곡된 욕망 등은 신학의 대상에 가장 합당치 않은 것이며, 신학에 허용될 수 없는 것들이다.


101 신학의 대상은 신학자의 이성의 권리를 취해 가시는 고유한 방법을 갖고 계신데, 그것은 우리에게 익숙한 것일 수도 있지만, 간혹 대단히 이상하게 보이는 방법일 수도 있다. 어떻든 하나님께서 작은 신학자들을 돌아보셔야 할 의무는 없다. 오히려 신학자들이 그분을 향해야 할 의무가 있다. 신학자의 신학적 통각보다 앞서시는 대상의 우선성은 진정한 신학적 앎, 즉 '믿음의 지성'에 대한 둘째의 중요한 기준이다.


09 믿음

107 신학의 대상이 그에게 지시하는 도상에서 운동하게 되는 일은 어떻게 그에게 발생하는가? 그것은 어떤 사건인가? 우리는 그곳에서부터 계속 소급해서 질문할 수 있다. 어떻게 한 인간은 그 대상에 의해 심각하게 당황한 사람이 되는가? 어떻게 그는 그 대상에 의해 진지한 놀라움에 사로잡힌 사람이 되는가? 바로 이 현상의 근원은 무엇인가?


107 하나님의 말씀의 비밀은 오직 자유로운 영의 비밀이었으며, 그 비밀 안에서 예언자들과 사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인지하고 증거했고, 하나님의 말씀은 공동체를 근거, 유지, 통치한다고 생각되었다.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우리는 어떤 체계를 취하려는 모든 시도를 포기해야 하며, 오직 저 사건만을 가리켜야 한다. 그 사건은 신학자적 실존이 신적 그리고 인간적 자유 안에서 무전제적이고 파악될 수 없이 또 설명될 수 없이 발생하는 사건이다. 즉 신학의 대상이 어떤 사람을 취하고 놀라게 하고 당황하게 만들고 의무를 부과함으로써, 그가 실제로 신학자로서 살고 연구하고 사고하고 읽고 실존할 수 있도록 만든다. 바로 이 사건이 믿음이다. 대단히 보잘것없는 사람의 대단히 적은 양의 믿음이다.


109 그다음에 그 사람은 그 다른 사람들이 알았던 것으로 보이는 것을 이제는 마치 자기 스스로 아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렇게 하면서 그는 그 명제들과 교리들의 권위를 참된 것으로 간주하고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시도한다. 이러한 행위는 바른 믿음일 수 없다.


109 그것은 확실히 진리 질문으로부터의 태만한 도피다. 그러한 맹목적 신앙의 결단과 행동은 "지성을 찾는 믿음"이 아니라 지성을 희생시키는 믿음의 모양이며, 신앙이 아니라 불신앙의 냄새를 풍긴다.


111 믿음은 신학에 없어서는 안되는 필수조건이다! 또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믿음의 사건이 없다면, 한 인간은 그에게 본래적으로 있을 수 있는 다른 모든 좋은 가능성과 속성들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그리스도인은 될 수가 없고, 그래서 또한 신학자가 될 수 없으며 신학자로서 존재할 수도 없다. 믿음은 그런 사건, 그런 역사다.


115 어떻든 깊은 신앙심이란 위의 모든 혹은 그와 비슷한 항목들에 있어서 아직 믿음은 아니다. 믿음은 어떤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간과할 수 없는 사도신경의 표현에 따르면, 오히려 어떤 것 안에서 믿는 것이다. 즉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신 복음의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을 믿는다. 이제 그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위에서 나열된 긴 항목들 그리고 더 많은 다른 것들과 불가피하게 마주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각각의 항목에 대한 소위 "깊은 신앙심"이 아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그 모든 서술어들의 주체이신 그분을 바로 하나님 자신을 믿는 것이다.


116 그는 성령의 부르심과 조명에 의해 자기 자신은 이해하지 못하면서, 그래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최고로 놀라면서, 또한 그 자신 안에서 지속적으로 진행되고 고개를 쳐드는 불신앙과 직면하면서, 다만 그 '믿는다는 것'을 행할 뿐이다. 그는 "나는 믿는다"를 오직 "주여, 믿음없는 나를 도와 주소서!"의 간구와 함께 말할 뿐이다. 그러므로 그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지 않으며, 오히려 광야의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매일 아침 새롭게 믿음을 얻게 되기를 희망한다.


III 신학의 위기

10 고독

126 우리는 겉으로는 비정상적인 듯이 보이는 다음 사실을 지금 여기서는 어쩔 수 없이 정상적인 것으로써 인정해야만 한다. 신학적 인식, 사고, 진술은 일반적인 것이 아니며, 일반적 인식, 사고, 진술은 결코 신학적인 것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다른 학문들과의 관계에서 신학의 특수성과 상대적인 고독은 비록 많이 고통스럽다고 해도 수용되어야만 한다.


127 신학은 탄식하면서 혹은 흐르는 눈물과 함께 웃으면서 고독에 참여할 수밖에 없다. 신학은 고독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신학은 고독을 자신에게 이유가 있어서 주어지는 위협들의 한 형태로 여기고, 품위를 갖추고 즐겁게 참고 견뎌야 한다.


128 한 인간을 신학자로 만드는 가장 본질적 요소인 믿음은 그리스도교적 공동체의 믿음이며, 그리스도인들 전체에게 선사된 자유, 즉 하나님의 말씀을 긍정하고 전적으로 신뢰하고 전적으로 순종할 수 있는 자유의 사용이다.


11 의심

143 그는 자신의 의심의 문제를 결코 해결하지 못했음을 의심해서는 안된다. 이것을 의심하는 것은 그가 불쌍하고 잘해야 겨우 불에서 건져 냄을 받은 죄인임을 의심하는 것과 같다.


143 우리는 의심한다는 이유에서 자기 자신을 특별히 진실되고 깊이 생각하고 멋지고 고상하다고 여겨서는 안된다. 우리는 불신앙도 의심도 미화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자신을 오직 진심으로 수치스럽게 여겨야 한다.


12 시험

145 신학을 위협하는 공격은 밖으로부터*고독). 안으로부터(의심) 오지만, 또한 위로부터도 온다. 신학 작업은 시험 안에서 발생한다. 다시 말해 나무, 풀, 짚의 작업결과들은 하나님의 의로우신 진노의 타오르는 불꽃에 의해 시험을 받아야 한다.


146 신학에게 주어지는 "시험"은 다음의 사건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이 착수하고 진행시키는 그 작업으로부터 떠나버리시는 사건이며,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행위 앞에서 그를 외면하고 얼굴을 감추시는 사건이며, 하나님께서 그에게 (뒤따라 오는 그의 모든 결과물들에게도) 성령의 현재와 행하심을 허락하지 않으시는 사건이다.


155 신학은 자신에게 가장 본질적인 과업의 관점에서도 비난 받을 수 있고 하나님의 시험을 당할 수 있다. 신학이 사실상 교회를 알맞게 인도해서 세상 안에서 교회의 봉사를 촉진시켰던 것이 몇 번이나 되는가? 오히려 신학 자신이 성서의 학교 안에 머물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성서에 접근하는 것을 막음으로써, 오히려 신학 자신은 알지도 못한 채 저 시대적 늑대들과 함께 울부짖거나, 혹은 자의적 및 독단적으로 대처해서 한 무리의 늑대들은 내쫓지만 다른 무리에게는 대문과 현관 문까지 활짝 열어줌으로써, 얼마나 자주 교회를 잘못 인도하고 교회의 봉사를 방해했던가?


157 진정한 신학적 위기는 잠재적으로 항상 그리고 모든 곳에서 신학 위에 드리워지는 위기다. 그러므로 신학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에 의해 살아갈 수밖에 없으며, 하나님의 심판을 경험하면서 올바르고 쓸모 있게 만들어져 가는 수밖에 없다.


13 희망

161 신학은 모든 내용에서 하나님의 사역의 현실성 그리고 신학 자신보다 철저히 우위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바라보며 작업한다. 말씀의 진리는 신학에게 주어지지만 신학보다 철저히 앞서면서 주어지고, 그래서 언제나 어디서나 신학의 미래가 되며, 신학의 손에 잡히지 않으며, 신학적 사유와 진술의 처리 능력 안에 들어오지 않으며, 그래서 신학자가 그 진리를 마음대로 처리하거나 위탁 받을 수 없다.



162 신학이 쓸모 있게 될 때는 오직 다음 경우다. 즉 신학이 다른 모든 인간의 작업들과 함께 자신의 작업도 하나님의 심판 아래 세우며, 오히려 무전제로 그 시험에 넘기고 굴복시키며, 주어진 위협에 몸을 사리거나 반항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 시험의 정당성을 인정하며, 그것을 기뻐하며, 시험의 돌입을 참고 견디는 경우다. 바로 이것을 행할 때, 신학은 (자신의 대상과 학문적 근거인) 하나님의 사역 및 말씀과 자신과의 만남이 현실적이고 참된 것임을 예증하게 된다.


169 신학의 근거 및 대상이신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신학을 가능하게 하고 다스리고 유지하시는 그분은 다름이 아니라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이시다. 신학자가 이것을 굳게 붙든다면, 그때 신학은 십자가의 신학으로서 동시에 영광의 신학일 수 있다.


IV 신학적 작업

14 기도

172 바로 앞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분명히 했다. [1] 모든 신학 작업은 오직 저 거대한 핍박 안에서만 착수되고 실행될 수 있다. 이 핍박은 신학의 안팎으로부터 오지만, 그러나 가장 집약적, 결정적으로는 바로 신학의 대상으로부터 온다. 심판과 죽음이 없다면 신학 안에는 어떤 은혜도 생명도 없을 것이며, 겸허가 없다면 용기도 없을 것이며, 굴복 없이는 일어섬이 없을 것이며, 여기서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하면 어떤 용기 있는 행동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2] 그러나 신학 작업이 힘차게 착수 될 수 있는 것은 (신학 안에서 발생하지 않을 수 없는) 그 큰 핍박 안에 그보다 더 큰 희망과 신학적 추진력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심판 안에서 은혜가 활동하며 선사된다. 죽음 안에서 생명이 일깨워지며 살아난다. 겸허 안에서 당연히 및 마땅히 용기가 취해져야 한다. 굴복하는 자만이 당연히 및 마땅히 여기서 일어설 수 있다.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앎 안에서 우리는 당연히 및 마땅히 용감하게 행동하게 된다. 신학이 자신의 대상에게 충실하게 향할 때, 양자[핍박과 희망]의 진지한 수용은 거부 될 수 없다.


183 성령의 오심 안에서 성령의 위로부터 아래로 그리고 아래로부터 위로의 운동 안에서 그러하다. 그러므로 신학 작업은 성령의 오심의 간구로부터 그리고 그 간구 안에서 살아간다. 그래서 신학의 모든 질문, 연구, 숙고, 명제들은 다만 그 간구의 형태들일 뿐이다. 신학 작업이 총체적인 위협과 하나님의 자유로운 은혜에 대한 총체적인 의존 안에서 실패하지 않고 쓸모 있고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구원에 봉사하는 작품이 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그 간구를 들으실 때 뿐이다.


15 연구

184 기도 안에서 수행되는 신학 작업은 아래에서 위로 수직으로 진행하는 인간의 내적인 영의 운동이다. 그러나 연구하는 신학 작업은 외적이고 수평으로 진행되며, 인간의 정신 그리고 (육체적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영혼과 몸의 운동이다. 신학 작업은 오직 양쪽 구성 요소의 분리 될 수 없는 통일성 안에서만 수행 될 수 있다. 연구없는 기도는 공허하다, 기도없는 연구는 눈먼 것이다. 우리는 이제 신학 작업을 연구라고 이해할 수 있다.


185 연구자와 다른 사람들에게는 성서가 증거하는 그리고 (모든 시대와 지역의 성도들의 공동체 안에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사역과 말씀이 제시되며, 그에게는 복음을 통한 한 특정한 앎의 과제가 제시된다. 그 앎의 과제가 그에게 제시되지 않았다면 혹은 그가 그 과제를 다른 사람들의 과제, 예를 들어 철학자, 역사가, 심리학자의 것과 혼동하거나 호환한다면, 그는 어떻든 연구자이기는 하지만 신학의 연구자는 될 수 없다. 또한 그가 연구자가 아니라면, 즉 위에서 열거했던 특징적인 내적 동인을 가지고 저 과제로 향하지 않는다면, 이때도 그는 신학의 연구자가 아니다. 게으른 연구자는 신학자로서도 전혀 연구자일 수 없다.


189 신구약성서란 예수 그리스도의 공동체가 하나님의 사역과 말씀에 대한 근원적이고 독특한 증거의 목소리를 그들의 삶과 가르침에 대해 예로부터 전해진 원천과 규범으로 인지하고 선포했던 문서들의 모음이다. 그러나 공동체는 독창성, 다양성, 통일성 안에 담긴 그 목소리를 매 시대마다 새롭게 인지해야 하며, 저 본문들을 매 시대마다 새롭게 읽어야 한다. 그 본문들에서 너무도 많은 것이 부정확하게 더 나아가 거꾸로 들려졌을 수도 있었으며, 또 전적으로 간과되었던 적도 있다. 그러므로 성서신학적 학문은 그 본문들 안에 기록된 것 그리고 그 기록된 것들이 말하는 것을 언제나 새롭게, 선입견 없이, 세심하게 밝혀야 한다.


16 봉사

197 신학 작업은 봉사다. 봉사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정의한다면 한 사람이 자기 일이나 자기 계획의 관점이 아니라 타자의 관점에서, 타자의 필요와 재량권에 맞추면서 그의 지시에 따라 행하는 의지, 활동, 행위를 가리킨다. 이 행동의 자유는 그 타자의 자유에 의해 제한되고 규정되며, 또 이 행동의 행위자의 명예는 그 행동이 자기 것이 아니라 타자의 명예를 더 크게 할수록 그만큼 더 커진다. 그렇게 봉사하는 행동이 신학자의 작업이다. 그 작업은 다시 일반적으로 정의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봉사"다.


198 '교회의 선생' 즉 신학자에게는 복음에 따르면 모든 경우에 다음이 권장될 만하고 더 나아가 필수적이다. 그는 첫째 자리로부터 속히 말째 자리로 옮기며, 다른 모든 사람들을 위한 봉사자. 시중드는 자, 곧 '디아콘'이 되는 것이 좋다.


201 신학의 대상인 하나님의 말씀은 신학 안의 이러저러한 관점에서 알려지고 숙고되고 묵상되기를 원할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신학 안에서 섬김의 봉사 즉 '디아코니'를 원하신다.


17 사랑

214 "에로스", 혹은 그와 비슷한 단어가 바울과 그 밖의 신약성서 안에서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사랑"에 대한 신약성서적 단어는 "아가페"다. 그리고 이 단어가 등장하는 맥락들에 따르면, 그것이 에로스의 운동과 정확하게 정반대 방향으로 운동한다는 것은 명확하다. 아가페의 사랑도 또한 타자를 향한 총체적 추구다. 그러나 아가페의 사랑에 있어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의 근원은 결코 자신의 고유한 필요성이 아니며 오히려 자유다. 이 자유는 그에게 다만 선사될 뿐이며, 그 자신에게 근원적으로 낯선 것이며, 어떤 전적으로 새로운 자유 곧 그 타자를 향한 자유다.


216 신학 작업의 대상은 하나다. 그 대상은 신학이 온갖 가능한 깊고, 높고, 넓은 곳에서 방황하고 흩어지는 것을 금지한다. 또 그 대상은 분열을 금지하며, 실제로 너무도 자주 발생했던 것처럼, 신학이 한때는 하나님과 더 친해져서 이쪽으로 다른 때에는 인간과 더 친해져서 저쪽으로 반응하면서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을 금한다. 신학의 대상은 한 분이 신 참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그 하나님은 즉자성 혹은 고립성 안에 계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저 한분 참 인간과의 결합 안에 계신다. 또 신학의 대상은 한분이신 참 사람이다. 그분도 고립되어 계시지 않으며, 오히려 저 한분 참 하나님과 결합되어 계신다. 신학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 다시 말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계약 성취의 역사다.


219 저 사랑은 오직 그분 안에서 신적 그리고 인간적으로 참되고 현실적으로 존재한다. 바로 그분으로부터 이제 다음이 실현된다.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며, 그는 저 소나기를 맞으면서 혹은 맞지 않으면서 약속 아래서 살고 일하고 기도하고 연구하고 봉사하고 인식하고 사고하고 말하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죽게 될 것이다. 저 완전한 사랑은 그것이 그에게 열려 있든지 혹은 가려져 있는 것으로 보이든지 상관없이 그의 머리 위에 펼쳐져 있는 하늘이다.

219 이 완전한 사랑이 올바른 신학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조건'임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우리가 아무리 그 사랑에 못 미쳐서 탄식하게 된다고 해도 그것을 모르는 것보다는 낫다. 그 사랑을 아는 것은 ━ 우리의 신학 작업은 모든 경우에 그 사랑을 궁극적으로 알기 위한 것이다 ━ 하나님 찬양에, 자신이 바로 사랑이신 하나님 곧 계약의 하나님의 찬양에 저 잘 알려진 옛 교회의 예식문을 통해 함께 참여함을 뜻한다.


옮긴이의 글

228 교회의 위기는 신학의 위기에서 온다. 신학이 신학답지 못할 때, 말씀에 근거한 선포는 바로 설 수 없으며,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려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 의해 왜곡되고 변질된 말로 들려질 수밖에 없다. 교회의 위기는 변질된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로부터 오며, 이것은 신학이 바로 서지 못하는 데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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