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완 윌리엄스: 신뢰하는 삶 ━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초
- 책 밑줄긋기/책 2012-22
- 2017. 6. 15.
신뢰하는 삶 - 로완 윌리엄스 지음, 김병준.민경찬 옮김/비아 |
사도신경
니케아 신조
서문
1. 누구를 신뢰할 수 있는가?
2. 위험을 무릅쓴 사랑
3. 온 세상과 시대를 짊어진 인간
4. 평화의 대가
5. 우애 가운데 함께 계신 하느님
6. 진실로, 사랑
옮긴이의 말
사도신경
나는 믿나이다.
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
하늘과 땅의 창조주를 믿나이다.
하느님의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성령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 잉태되어 나시고
본티오 빌라도 치하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묻히셨으며,
죽음의 세계에 내려가시어 사흘 만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하늘에 올라
전능하신 하느님 오른편에 앉아 계시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다시 오시리라 믿나이다.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모든 성도의 상통을 믿으며
죄의 용서와
몸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한 생명을 믿나이다.
아멘.
니케아 신조
우리는 한 분이신 성부 하느님을 믿습니다.
그분은 전능하셔서,
하늘과 땅과, 이 세상의 보이고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지으셨습니다.
우리는 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분은 모든 시간 이전에 성부에게서 나신, 하느님의 독생자이십니다.
그분은 하느님에게서 나신 참 하느님이시요, 빛에서 나신 빛이시요,
참 하느님에게서 나신 참 하느님이시며,
성부와 같은 분으로, 낳음과 지음 받은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분을 통해서 만물이 지음 받았습니다.
그분은 우리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늘로부터 내려오시어,
성령의 능력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
참 인간이 되셨습니다.
우리 때문에 본티오 빌라도 치하에서 십자가 형을 받아,
죽임을 당하고 묻히셨으나,
성서의 말씀대로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분은 하늘에 올라 성부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
그분은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입니다.
서문
17 이 책에서 다루는 모든 내용의 기본 전제는 그리스도교 신앙이란 진정으로 누구를, 그리고 무엇을 신뢰할 것인가에 관한 앎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여러분에게 제도에 이름을 등록하라고 요구하기 이전에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하느님을 신뢰할 것을 요구합니다. 실천적인 가르침, 교리의 원천은 일단 한번 신뢰의 발걸음을 내딛는 것입니다. 저는 이 점이 여러분에게 분명해지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교가 전하는 가르침은,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탐구하면서 성장해 왔기에 올바름과 이치에서 벗어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1. 누구를 신뢰할 수 있는가?
32 하느님은 어떤 것도 필요로 하실 수 없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그분은 모든 실재를 무한히 포괄하시기 때문에 하느님을 하느님이게끔 하는 것 곧 하느님 자신만이 당신의 활동을 '추동'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무엇을 하시는지'로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가 우리에게 드러납니다.
33 우리가 하느님에게 '기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을 받아들이는 데까지 우리는 반드시 나아가야만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아예 창조되지 않았더라도 여전히 하느님이셨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러야만 합니다.
33 하느님 자신 안에 있는 것이, 그분 자신의 행복을 위해 필요한 전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는 오직 그분의 무조건적인 호의 때문이라는, 껄끄럽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생각에 우리의 정신을 굽혀야만 합니다. 하느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 보여주신 사랑, 하느님이 세상을 빚어가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사랑에 그늘진 부분이란 없으며 당신 자신을 위한 부분도 없습니다. 그것은 완전히, 어떠한 제약도 없이 우리를 위해 주어졌습니다. 여기서 하느님이 자신을 위해 은밀한 방식으로 얻는 것은 전혀 없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영원한 본질에 대해 우리가 믿는 바와 맞지 않습니다.
37 '전능함'은 그리스어로 '만물의 통치자' 또는 '만물의 소유주'를 뜻합니다. 그리고 이 뜻은 우리가 '전능함'에 달리 접근해 보도록 권유합니다. 즉 '전능함'이란 하느님이 부재하거나, 힘을 발휘할 수 없거나, 그분과 무관한 곳은 어디에도 없음을 뜻합니다. 이 우주에서 일어나는 어떤 사태도 하느님과 세계의 관계를 끊을 수는 없습니다. 달리 말하면 하느님에게 기대고 있지 않은 사태란 없습니다.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하느님의 사랑에 있는 자유함은 그분의 사랑이 그 힘에 있어 결코 다함이 없음을 가리킵니다.
52 더디더라도 사람들이 "나는 믿습니다"라고 말하는 지점에 이르는 길을 향한 문은 여전히 열려 있습니다. 이때 "믿습니다"라는 말은 그저 나는 하느님이라고 불리는 무엇이 존재함을 믿는다를 뜻하지 않습니다. 이 말은 그 자체로는 UFO를 믿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나는 신앙인들이 실재하는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믿습니다'라는 말은 앞의 말보다는 옳은 방향을 향하고 있고 곁에 있는 신뢰할 만한 사람들의 존재와 연결되어 있습니다만, 여전히 그 뜻을 아우르지는 못합니다. 믿는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나도 그들이 있는 그 세계에 들어가 살기를 원합니다. 그들이 아는 것을 나도 알기를 원합니다. 그들이 마시는 샘에서 같은 샘물을 마시기를 원합니다"라고 결단하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진정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믿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나는 귀의합니다. 나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2. 위험을 무릅쓴 사랑
61 창조란 하느님과 하느님 아닌 것 사이에 관계를 세우는 하느님의 활동입니다. 영원의 관점에서 보자면 하느님만이 존재합니다. 하느님은 발전하시지도 퇴보하시지도 않습니다. 하느님이 이 세계에 존재를 부여하기 위해 말씀하셨을 때 바로 시간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느님은 당신과 다르면서도 당신 자신에게 의존하는 실체를 세우셨습니다. 이 세계는 매 순간 그 분께 의지하고 있으며 그분이 하시는 활동의 흐름을 따라 함께 움직입니다. 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것의 배후와 표면 아래에는 이 활동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64 범신론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총합이 하느님이라고 또는 하느님은 만물에 있는 보편적인 법칙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이에 반해 그리스도교는 존재하는 모든 것의 총합은 하느님의 활동과 의지에 의해서 지탱된다고 말합니다. 하느님은 그 모두를 지탱하고도 '다함이 없습니다.' 우주가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하느님은 전과 다름없이 하느님으로 계십니다.
80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은 천사에 관해 말하기를 꺼립니다. 여러분이 천사가 실제로 있다고 믿는 편이든 아니든 최소한 이렇게는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주적인 찬미의 노래에 둘러싸여 있으며, 이를 포함해, 온 우주에는 우리의 지각과 이해가 닿지 못하는 저편에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천사'는 이 모든 것을 쉽고 간단히 묘사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합리적으로 설명하여 해소하려 하면 하느님이 창조하신 이 우주라는 작품이 지닌 충만함과 풍요로움을 놓치게 됩니다. 하느님이 창조하신 이 우주는 그저 여러분과 제가 나름의 의견을 주고받기 위한 무대가 아닙니다. 이 우주는 우리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고 낯선 것들이 차고 넘치는 풍요로운 세계입니다.
84 사도신경과 니케아 신조 첫 문장은 단지 우주의 시작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이 신조들의 첫 문장은 우주의 현재 상태, 여러분과 저 그리고 우리 사회의 현재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문장은 하느님 안에서의 확신, 우리를 우리 자신과 하나를 이루게 하시고 이 세계와 하나를 이루게 하시는, 우리를 치유하시고 우리 안의 어둠을 거두시어 빛으로 나아가게 하시는 하느님을 향한 신뢰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3. 온 세상과 시대를 짊어진 인간
101 예수는 하느님의 절대적이고 영원한 사랑과 활동을 진정 몸으로 구현한 이입니다. 바로 내어 줌과 받음, 주도함과 의존함을 동시에 수반하는 저 신적인 삶,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교 신앙을 다른 여러 가까운 유사 종교들에서 결정적으로 분리하며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가장 혁명적인 것이면서, 가장 사람들의 예상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적인 삶은 다른 여러 존재 가운데서도 주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받는 존재, 주도하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의존하는 존재,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인 우리 인간이 우리를 우리이게끔 만드는 그 모든 면을 통해 하느님의 생명을 비출 수 있음을 뜻합니다.
104 아들, 성자 예수는 어떤 조건도 부족함도 없이 하느님의 본성에 자리한 살아있는 불꽃을 나누어 가집니다. 그는 빛에서 나신 빛입니다. 그는 성부와 '한 본체', 성부와 같은 분입니다. 그의 속성과 본질은 성부의 그것과 똑같이 규정됩니다. 이 세계는 전적으로 이 영원한 관계 때문에 존재합니다. 우주가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하느님은 언제나 관계를 맺으시고 베푸시는 하느님이기 때문입니다.
110 신조가 예수의 탄생을 바라보는 이 두 가지 관점, 예수의 탄생이 성령을 통해서 그리고 마리아를 통해서, 양자 모두에게서 긍정 받아야 했다고 말할 때 이는 우리가 예수의 삶을 단지 인간의 역사가 빚어 낸 결과, 이 세계에서 일어난 하나의 사건으로 생각할 수 없음을 말해 줍니다. 이 사건에서 세계를 지탱하시고 생명을 불어넣으시는 하느님의 활동은 반드시, 특별히 세계의 표면에 아주 가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을 내는 것은 인간의 역사입니다.
110 정말로 중요한 요점은 하느님이 숨을 불어넣으실 때 인간의 받아들임, 인간의 동의가 사건을 만들어내는 계기의 한 축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역사를 갈아엎지 않으십니다.
113 신뢰 안에서 성숙하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녀를 바라보고 그녀의 "예"를 묵상하며 기도 가운데 그녀의 우정을 구하는 일은 전혀 별나거나 어리석은 일이 아닙니다.
4. 평화의 대가
124 히브리 성서에 따르면 희생은 하느님과 더불어 평화를 이루는 선물입니다. 윤리적인 혹은 종교적인 잘못 때문에 당신이 하느님에게서 소외될 때 그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그 대가가 값비쌀 수도 있음을 생각하면서 당신이 무엇을 내어 놓아야 하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예수를 자신의 존재와 행함으로 하느님께 그 대가를 치러 세상과 우리의 화해를 이루는 희생 제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138 우리가 마지막 심판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은 그것이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며 그것이 언제 일어날지 우리는 모른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든지 온전한 진리와 마주하기 위해 끊임없이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의 마지막이 내일 오든 300만년 뒤에 오든 우리가 이 다음에 해야 하는 일에는 전혀 차이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비추는 진리의 빛 안에서, 당장 지금을 사는 법을 배워야만 합니다. 마지막 심판은 절대로 우리가 그 자체로 선한 일을 등한시한 것에 대한 알리바이가 될 수 없습니다.
5. 우애 가운데 함께 계신 하느님
148 교회는 그 누구도 고립되지 않으며 누구도 저 홀로 성장하지 않으며 누구도 홀로 고통을 겪게 하지 않는 가운데 평화를 이루고 평화를 지키기 위해 실천하는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속한 삶의 모토는 '타자와 함께'입니다. '너'없이 '나'는 있을 수 없으며 '우리'없이 내가 있을 수 없습니다. 이는 교회의 정체성이 '무리'의 정체성, 집단 안에 모든 이의 개성이 가려지는 정체성임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156 '거룩한 백성 사이의 나눔'은 하느님이 자신을 입양하셨음을 깨닫고 이를 표현하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관계 맺는 것을 뜻합니다. 그들이 함께 모여 그리스도의 숨을 들이 마실 때, 예수와의 관계 안에서 그들이 누구인지를 말과 행동으로 실천해 보일 때, 이 나눔의 관계는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구체적인 것이 됩니다.
156 교회는 예수의 삶에 압도된 사람, 예수의 삶에 '깊이 잠긴'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세례를 받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랑이라는 물속으로 사라져 들어갔다가 다른 사람으로 다시 나타납니다. 그의 머리 위에 물이 차오르면 성서의 가장 첫 장에서 혼돈으로 가득 찬 물에서 세계가 생겨나듯 새로운 세계가 생겨납니다. 세례를 베풀며 교회는 사람들에게 교회가 무엇인지, 교회에 속한 사람들이 어떤 종류의 삶을 살아가는지를 말합니다 세례는 '거룩한 백성들 사이의 나눔'이 세상에 드러나는 사건이자 교회가 진정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157 세례와 성찬례 안에서 교회는 그 자신의 본질을 낱낱이 우리에게 드러냅니다. 교회란 무엇입니까? 간단하게 말하면 예수의 삶과 생명에 젖어든 이들, 그 삶에 깊이 잠긴 이들, 예수와 함께 먹는 자리에 초대받은 이들, 함께 아버지를 향해 기도하는 이들입니다.
158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되게 하고 서로를 알아보게 하는 핵심적인 활동으로 보는 것은 성찬례입니다. 구약성서에서 하느님과 하느님의 백성 사이의 결속을 공고히 했던 희생 제물과 관련된 식사처럼 신약성서는 성찬례를 '언약'을 맺는 식사로 소개합니다.
168 성서가 하느님의 말씀인 이유는 그것이 인류 역사에서 하느님에 대한 가장 중요하고 중심적인 증언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러한 증언에 해당하는 이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서가 하느님의 말씀인 이유는 성서에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가장 중요한 증언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인들의 공동체에서 성서를 읽을 때 성령은 성서를 통해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부르심을 일깨웁니다.
170 그러나 이제 시급한 것은 성서를 공동체 안에서 여럿이 함께 읽어야 한다는 감각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성서는 그저 어디에서든 집어 들어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닙니다. 당신의 백성을 빚어내시는 하느님의 활동을 경배하기 위하여 모인 집단을 깨우치는 데 있어 성서는 고유한 역할을 지니고 있습니다. 사적이고 개인적인 성서 읽기는 그 다음이며 이것에 의하여 형성됩니다. 나 혼자 성서를 읽을 때조차 그것은 시대를 초월하여 이미 나보다 앞서 성서를 읽어 온 수많은 독자로 이루어진 공동체 안에서 함께 성서를 읽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6. 진실로, 사랑
189 신조가 우리에게 선언하도록 요구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영원한 생명'이나 '불멸성'이 아닙니다. 사도신경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우리가 "몸의 부활"을 믿는다고, 좀 더 원문에 충실하자면 "육체의 부활"을 믿는다고 고백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종교를 '죽음 이후의 삶'을 믿는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한다면 그리고 여기서 마치 어릴 적 만화에 나오듯 죽은 이가 다시 살아나 하늘로 떠올라가는 장면을 막연하게 떠올린다면,이 구절은 충격적으로 다가옵니다.
190 성서는 하늘에서 하느님과 함께하는 영원한 생명을 거의 말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성서는 마지막 책에 나오듯 창조 세계의 갱신,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해 더 많이 이야기 합니다. 하느님과 함께하는 영원한 삶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와 무언가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듯합니다.
192 복음은 육신을 입은 구세주의 이야기가 전하는 핵심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예수가 죽음을 맞이한 후 부활하여 승천하는 이야기에서 물질로 이루어진 구세주의 살과 뼈는 지상에 남겨지지 않습니다. 부활을 통하여 변모한 예수는 여전히 살과 뼈를 지니고 있으며 죽음 이전의 자신이 지녔던 모습과 완전히 다르면서도 동시에 연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192 무엇을 주장하든 예수의 부활 및 하느님과 더불어 맞이하는 영원한 생명이 전하는 희망의 핵심은 결국 하나의 약속, 그리고 이 약속을 신뢰할 근거입니다. 즉 하느님은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구원이란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 존재하기를 중지하는 것, 공동체와 나름의 관계를 맺으며 나름의 사연을 만들어 온 자신의 삶에서 완전히 단절되어 전혀 다른 정결한 무엇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구원은 그런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죽음 속에서도 우리를 붙잡고 계시는 하느님은 특별히 보존되는 우리의 '불멸하는' 부분 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이루는 그 모든 면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붙잡고 계십니다.
194 그리스도교는 영혼의 불멸을 믿지 않는다고 말하면 충격을 받을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서와 전통은 '불멸하는' 삶을 말하면서 우리의 어느 한 부분만을 보존하는 불멸의 존재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194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소멸할 수밖에 없는 물질적인 관계 안에 있는 우리의 삶은 고스란히 하느님과의 미래 안으로 수렴됩니다. 죽음이라는 단어의 어원적 의미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다'입니다. 그러나 '죽음'의 머나먼 저편이라 할지라도, 그 어떤 것도 유실되지 않습니다.
200 종교개혁 이후 연옥은 교회 안에서 매우 논쟁적인 주제이며 초기 개신교인들은 당시 연옥에 관한 대중적인 통념에 노골적인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중세 후기에 교회가 제도화된 성사를 통해 '로비'를 벌임으로써 연옥에 있는 영혼들에게 은총을 확보해 줄 수 있다는 식의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진 사업들은 차치하더라도, 빚을 갚아서 천국에 들어가기에 더 합당한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덜 합당한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신약성서가 말하는 근본적인 희망과 잘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을 처음에 추동한 것은 하느님과 맞닥뜨렸을 때 복잡하고 자기기만적인 존재인 우리가 어떤 차원의 고통에 놓이게 될 것이라는 인식이었습니다.
204 우리는 하느님이 건네는 말씀에 귀를 열지 않습니다. 지옥에 관한 가장 적절한 이미지는 하느님이 영원히 들어오지 못하도록 우리 스스로 문을 걸어 잠근 채 열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일 것입니다.
205 제 할 일을 하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자신을 뉘우치고 돌이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그러하듯 하느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고 질문하는 가운데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만 회개를 촉구하는 오만함을 잠재웁니다.
205 참회하는 공동체, 자신의 부족한 사랑과 신앙을 날마다 인식하면서도 실패를 마주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는 심원에서 우러나오는 깊은 희망을 증언하게 됩니다. 이것은 기적입니다. 교회는 한결같이 성공과 덕행을 거듭하며 복음을 전하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하느님을 가리키기를 주저하지 않는 가운데 복음을 전하는 곳입니다. 교회는 참회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208 이 세계 모든 것이 내어 주고, 받으며 함께 기쁨이라는 맥락으로 수렴되는 것, 이것이 거룩한 삼위일체의 삶입니다. 영원으로 들어가기 위한 최선의 준비는 내어 주고, 받고, 함께 기뻐하는 가운데 주어지는 선물과 기쁨에 익숙해지는 것, 그 비전에 우리 자신을 여는 것입니다.
209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영원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순전한 실재 안에서 누리는 기쁨입니다. 영원은 어떤 궁극적인 '절대'안으로 흡수되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은 인격적인 관계에 있으면서도 동시에 다른 어떤 관계와도 다른 상태에 있는 것을 뜻합니다. 그때 우리는 삼위일체 안에서 일어나는 삶과 기쁨이 교차하는 핵심 안에 놓입니다. 영원하기 위해서는 관조해야 합니다. '관조'라는 단어는 가끔 그리스도인들을 당황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관조는 우리를 빛으로 이끕니다. 관조는 진실로 사랑에 익숙해지는 과정에 들어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관조가 뜻하는 전부입니다.
215 "우리 아버지"라고 말할 때, 그저 안전하고 편안한 느낌에 안주하게 하는 그 모든 것을 우리 자신에게서 단호히 몰아내는 가운데 예수의 말을 우리의 입술에 담아, 우리 존재의 깊은 곳에 예수의 영을 모시고 하느님께 나아올 때, 진리를 향해 한 발 더 내디딜 때, 그리하여 "나는 믿습니다"가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게 될 때, 그때 우리는 17세기 시인 헨리 본이 하느님의 '빛나는 어둠'이라 불렀던, 그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까지 고양된 온전한 인간이 되는 도정에 들어섭니다. 이 길은 온 생애에 걸쳐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이지만 우리 힘으로 얻은 것이 아니며 결코 얻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은총으로, 이 길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옮긴이의 말
216 「신뢰하는 삶━그리스도교 신앙의 기초」 Tokens of Trust: An Introduction to Christian Belief는 로완 윌리엄스가 캔터베리 대주교로 활동하던 2005년, 그의 나이 56세 때 캔터베리 대성당에서 사도신경, 니케아 신조로 대표되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을 강연한 내용을 바탕으로 쓴 신경/신조 해설서다. 평신도 청중을 대상으로 한 강연 원고를 바탕으로 쓰였다는 사실,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초' An Introduction to Christian Belief라는 부제를 보면 짐작할 수 있듯 이 책은 기본적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에 들어서는 이들을 위해 쓴 신앙 입문서이다. 그러나 칼 라너의 「그리스도교 신앙 입문」 Grundkurs Des Glaubens이나 칼 바르트의 「개신교 신학 입문」 Einführung in die evangelische Theologie과 같은 저작이 단순한 입문서가 아니듯이 저작 또한 초신자만을 위한 신앙 입문서는 아니다. 대개 신학자들이나 교회에서 지도하는 위치에 서 있는 이들은 신학과 신앙의 여정이 무르익었을 때 사도신경, 니케아 신조와 같은 그리스도교 공통 고백을 해설함으로써 자신의 신학적 견해와 신앙을 표명한다. 그러므로 「신뢰하는 삶」은 성직자, 신학자로서 이력의 정점에 이른 이가 "예수의 부활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공공의 증인"으로서 "교회가 무엇을 생각하고 기도해야 하는지"에 관한 생각을 담아 낸 저작으로도 볼 수 있다. 로완 윌리엄스는 신경/신조의 언어를 빌어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과 그 핵심에서 도출되는 실천을 하나의 전체로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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