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고전강의 | 08 파놉티콘 2


파놉티콘 : 제러미 벤담 - 10점
제러미 벤담 지음, 신건수 옮김/책세상



+ 이것으로 2013년 인문고전강의에 대한 정리를 끝냈다.


강유원, '인문고전강의' 

일시: 2013년 2월7일 – 12월 5일, 매주 목요일 오후 7시30분 – 9시30분(총 40주)

장소: 과천시정보과학도서관


* 강의 목차

20131017 32강 파놉티콘(1)

20131024 33강 파놉티콘(2)




존 듀이, 《철학의 재구성》

폴 라파르그, 《게으를 수 있는 권리》

요시다 유타카, 《일본의 군대》

미셀 푸코, 《말과 사물》


존 듀이의 <철학의 재구성> 서평: 플라톤·마키아벨리가 21세기에 살아남으려면…



20131024 33강 파놉티콘(2)

23페이지를 보자.

23 이 감옥의 본질적인 장점을 한 단어로 표현하기 위해, 진행되는 모든 것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하는 파놉티콘 panoptique / panopticon 이라고 부를 것이다.


오늘날 진행되는 모든 것을 한눈에 파악하는 시도를 Panopticism이라고 한다. 오늘날 감시사회와 같은 말할 때는 쓰이는 용어이다. 감독을 하긴 하는데 어떻게 하는가. 벤담이 살았던 세계와 지금 우리가 살아는 세계는 본질적으로 같다. 테크놀로지가 개입되었다는 것. 그 테크놀로지는 얼핏보면 가치중립적이고 선악과는 무관해 보이지만 누구의 손에 의해서 통제 없이 사용되는가, 어떤 규제를 받고 있는가에 따라서 테크놀로지의 위력이 달라진다. 벤담의 시대가 산업혁명 시대인데 벤담 이전 시대를 보면 불의 발견, 신석기 농업혁명, 그리고 산업혁명 이 세가지가 인류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산업혁명 의미는 무엇인가. 인간은 테크놀로지를 통해서 즉 기술과 도구를 가지고, 도구를 작동시키는 눈에 보이지 않는 기술적인 힘을 통해 인간의 육체적 한계를 뛰어 넘을 수 있게 한 것.  플라톤의 《국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모두 탁월한 정치철학적인 아이디어를 갖고 있지만 그것을 오늘날 그대로 쓰기 어려운 것은 그들은/그 시대는 테크놀로지에 대한 감각이 없는 것. 그 부분에 대해서 탁월하게 통찰한 사람이 바로 미국의 존 듀이이다. 《철학의 재구성》이라는 책이 있다. 미국식 실용주의라고 무시할 게 아니다. 책 내용이 어렵다면 프레시안에 올려놓은 서평이 있으니 참조할 것. 실용주의, 미국의 프라그마티즘 pragmatism이 있는데 이게 사실은 근본에 있어서 테크놀로지에 대한 철학성 반성이 개입되어 있다. 이게 미국 철학이 가진 힘. 테크놀로지에 대해서 많이 생각한다. 그래서 오늘날 말하는 혁신이 일어나기도 하는 것. 테크놀로지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 것은 사실상 현대 사회에서 학문하는 사람들에게 굉장히 심각한 것. 그래서 《파놉티콘》이라는 게 현재의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게 한다. 


그 다음에 두 번째 부분인 "파놉티콘의 관리에 대하여"를 보면 36페이지에 고통 완화의 원칙, 엄격함의 원칙, 경제성의 원칙이 있다. 이게 왜 중요한 말이냐 하면 그 당시에 감옥이라고 하는 것은 《레미제라블》의 장발장을 보면 빵을 훔치고도 굉장히 심한 벌을 받는데, 어떤 것이 심각한 범죄 인지 여부는 시대의 정신이 결정하는 것. 산업혁명이 시작되면서 유럽사회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것이 소유권 개념을 사람들에게 확보하고 심어주는 것. 그래서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이 살인죄 못지 않게 중범죄였다. 개개인의 소유권이 확립되어가는 과정에서는 엄벌을 하는 것. 그런 것들이 근대사회를 만들어 가는 핵심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은 정신적인 질환이 있다고 여겼고, 감옥에 수용해서 노동을 통해 교화를 함으로써 재산권 개념을 확고하게 심어줘야 한다고 생각했고, 더 나아가 학교에서 훈육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병원, 감옥, 학교가 같은 맥락에서 다뤄진다. 감옥을 어떻게 운용할 것인가에 대해서 다양한 종류의 논의들이 나왔는데 벤담이 제시한 《파놉티콘》에 대해서는 여기서 3가지를 말하는 것.


[두 번째 부분―파놉티콘의 관리에 대하여]

36 고통 완화의 원칙

장기간의 강제 노동을 선고 받은 수감자의 일상적인 상황이 건강 혹은 생명에 해를 끼치거나 치명적인 신체적 고통을 동반해서는 안 된다.


엄격함의 원칙

[수감이라는] 모욕적인 처벌을 당하는 것이 가장 불우한 계층의 사람만인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생활, 건강, 신체적 편안함 외에, 수감자에게 죄 없고 자유로운 가난한 사회 구성원보다 더 좋은 조건을 제공해서는 안 된다.


경제성의 원칙

생활, 건강, 신체적 편안함, 필요한 교육, 수감자의 미래 소득 외에, 경제성은 관리에 관한 모든 대상 중에서 가장 먼저 고려되어야 한다. 공공 비용을 지출해서는 안 되며 어떤 목적을 위해 가혹함이나 관대함을 이용해서도 안 된다.


고통 완화의 원칙은 너무 죄수들을 괴롭혀서 치명적인 신체를 고통을 주면 안되다. 활용해서 노동을 통한 이윤생산이 불가능해지기 때문. 그 다음에 엄격함의 원칙은 너무 내버려두면 안 된다는 것. 제일 중요한 게 경제성의 원칙인데 《파놉티콘》은 경제성 원칙을 가지고 기억하는 것이 좋다. "관리에 관한 모든 대상 중에서 가장 먼저 고려되어야 한다. 공공 비용을 지출해서는 안 되며" 아주 쉽게 말하면 민영화 해야 한다는 것. 벤담을 비롯한 공리주의자들은 벤담이 한 말 중에서 벤담의 일생을 가장 축약하고 있는 말이 '내 인생은 모든 순간이 계산되어 있다'는 말. 굉장히 야망에 가득 찬 말. 모든 순간 순간에 손해와 이익을 계산한다는 것. 


철학적 급진주의radicalism라는 것이 과격한 폭력 혁명과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머릿속에서 계산 가능하다고 하는 것을 철저하게 현실세계에서 실현하려고 하고 사회적인 제도와 법률로 만들려고 한 것을 가리킨다. 이 전통이 굉장히 강력하다. 벤담이 말하는 경제성의 원칙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말로 그대로 옮길 수도 있다. 오늘날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벤담의 논리에 빠져있다. '내가 왜 돈 안 되는 일에 돈을 쓰지'라고 고민을 하는 것 자체가 이미 공리주의를 깔고 있는 것. 이미 우리 삶에 있어서 어렸을 때부터 몸에 배에 온 것이다. 이런 것들을 법률적인 것으로 만들고 사회적인 제도로 해서 사람들의 심성을 바꾸는 데에는 굉장히 놀라운 정도로 짧은 시간이 걸렸다. 인류에게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이익 중심으로 모든 것을 생각할 수 있게 해준 것이 공리주의 밖에 없다. 그래서 무서운 것. 벤담이 철학적 깊이는 없을지언정 철학적 급진주의 사람들이 인류에게 끼친 영향은 굉장하다. 그 이전까지 인간 세계를 지배한 것이 영성spirituality인데 이 것을 무너뜨리는데 굉장히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그게 바로 36페이지의 경제성의 원칙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감옥의 경제성에 주의를 기울이고자 한다면 사적 이익에 맡겨야 한다는 말은 오늘날에도 계속 나오고 있다. 그래서 39페이지를 보면


39 권력에 대한 애정은 잠에 빠지는 것을 피할 수 없으나 금전적 관심은 결코 잠을 자지 않는다. 공적 정신은 느슨해지며 새로움은 사라져버린다. 그러나 금전적 이익에 대한 관심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치열해진다.


벤담의 《파놉티콘》은 크게 두 가지의 전제를 가지고 있는데 명시적인 명제는 감시inspection.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지만 《파놉티콘》을 떠받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인간에게는 잠들지 않는 금전적 관심이 있다는 것. '경제성의 원칙'으로 포장되어서 나오지만 이 텍스트의 두 개 기둥 중에 하나이다 이것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것이 유용한 노동과 연결된다. 


인간이 노동하는 것은 금전에 대한 관심을 깔고 있다. 이것이 노동을 재촉한다. 그리고 노동이 이익을 만들어낸다. 그런데 인간의 노동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인간의 활동을 전반적으로 가리킬 때 쓰는 말. 책을 읽는 것. 또는 명상을 하는 것. 내가 즐거워서 노래 부르는 것 모두를 노동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벤담은 그런 것들이 금전적인 이익을 만들어내지 못하면 노동이라 할 수 없다는 것. 다시 말해서 벤담이 노동이라는 말을 쓸 때는 금전적인 이익을 항상 산출해내는 일종의 유용한 노동의 개념으로 쓰인다. 즉, 노동의 개념이 축소되어 사용되고 있다. 그러니까 금전적인 성취를 이루는 노동이 소중한 것. 


이게 바로 '노동 가치설'이다. 노동가치설은 벤담이 처음으로 내놓은 것이 아니라 스코틀랜드 학파인 데이비드 흄이 추상적인 원리를 제시하였고, 흄과 절친한 친구였던 아담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명시적으로 이야기했다. 근대 정치경제학에 있어서 노동가치설을 만들어낸 사람들이 바로 흄과 아담 스미스이다. 그러니까 노동가치설은 좌파인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을 충실히 이어받아서 급진화하고 제도화해서 파놉티콘과 같은 것을 적용하자고 한 사람이 제레미 벤담, 제임스 밀, 죤 스튜어트 밀과 같은 철학적 급진주의자. 그렇다면 마르크스는 무슨 얘기를 한 것이었나. 《자본론》을 읽어보면 마르크스가 겨냥했던 상대는 제레미 벤담, 존 로크와 같은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마르크스가 문제삼은 것은 이런 의미의 노동가치설이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하는 활동은 금전적인 이익을 산출해내는 활동만이 유의미한 게 아니라 인간은 전인적 존재라는 것. 그래서 《게으를 수 있는 권리》와 같은 책이 사실은 마르크스가 가진 생각의 핵심이 여기에 들어있다. 레닌, 스탈린, 이런 사람은 마르크스 핵심사상과 별로 관계없고 그냥 권력의 화신. 


인간을 금전적인 것을 산출해 내는 존재로 국한시켜버리면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의 모든 측면을 다 발휘할 수 없게 된다. 그것을 회복하자는 것이 마르크스의 본래 의도. 그런데 인간이 왜 그 모양이 되었는가. 그러니까 자기가 만들어낸 자본주의 시스템에 의해서 자기가 구속되어 있더라 라는 것이 핵심 논제. 그런데 어떤 사회를 만들어야 하고 어떤 방법을 써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말한 것이 없다. 그 지점에서 이론적인 논의가 취약하다 보니까 전위대론이 나오고 당의 지배, 프롤레타리아 계급 독재라는 것이 나오는 것. 


그래서 벤담에서 나오는 금전과 노동과 이윤의 프로세스 53페이지를 보면


53 노동, 그것은 부유함의 아버지이며, 가장 훌륭한 재산인데도 왜 저주로 묘사하려 하는가?


이게 벤담의 명언이다. 노동가치설. 이런 것을 배워야 한다. 


68페이를 보면 새롭고 간단한 건축 아이디어라고 해서 옆에는 유치한 그림이 하나 있다.


68 파놉티콘의 원리는 감시와 경제성을 연결해야 하는 거의 모든 시설에 성공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


조금 전에 말한 두 가지 전제인 감시와 경제성.


《일본의 군대》 한번 읽어볼 것. 일본이라는 나라가 전국시대를 거쳐서 근대세계에 들어서면서 어떻게 해서 규율화된 신체를 갖게 하는가를 보여주는 책으로 이 규율이 한반도에 그대로 들어왔기 때문에 꼭 읽어봐야 한다. 푸코는 프랑스 현대 철학자중에 제일 강력한 사람이고 학문적으로도 알차고 튼튼한 사람이다. 철학적으로 궁금하다 그러면 《말과 사물》, 그리고 《병원의 탄생》을 읽으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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